종교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 - 죽음, 삶에 답하다
김봉현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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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종교 밖에서 종교를 오해하셔던 분들이 오해를 풀고,

 

종교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종교는 좋은 것이다. 어떤 종교도 악을 추구하지 않는다

 

종교는 유익한 것이다. 종교는 수천 년 동안 진지한 태도로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왔다.

 

이 책은 종교에 관한 한편의 대서사시이다.

 

 

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면 이 책을 통해서 분명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종교에 대한 무지와 선입견으로 종교가 주는 선한 혜택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자에게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종교에 대한 잘못된 사고를 말끔하게 씻겨주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혀 준다고 말한다.

 

그래서 종교가 이제는 삶이 되고 가치가 되어 자신의 삶을 더 이롭게 만드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하고 있다.

 

한국인 작가로서 이정도의 깊이와 종교적 세계관을 짚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어줍잖은 학문적 지식의 나열로 종교와 신을 논한 책을 보며 실망했었는데 이 책은 이런 모든 종교적 갈증과 종교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을 완전히 씻겨주며 길을 보여준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잣대와 논리적 귀결과 깊은 사고와 내적 진리로 즉 직관적인 진리로 종교라는 대서사시를 써내려간다.

 

상식이 바라본 종교

 

 

 

종교를 언급함에 있어 '기우제'를 언급하는 것은 올바르게 보인다. 그 이유는 다른 것과 다르게 가뭄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이 있기 때문이다. 즉 홍수나 전쟁은 인간이 가진 힘으로 대처 가능한 영역이지만 가뭄은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즉 피할 곳도 없고, 싸울 대상도 없다.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음으로 누군가 여기에 대해 외친 '신의 진노 때문'이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가뭄의 이유가 신의 진노라면 그 마음을 풀어주면 된다는 생각이 모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우제를 드린다. 확신은 없다. 하지만 이 말이 맞기를 바라며 드린다. 이렇게 기우제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기우제를 드린다고 바로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런데 왜 기우제를 드렸나? 그건 기우제를 드리면 비가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우제는 '비가 올 때까지' 드려졌다. 사람들의 절박한 기다림 속에 기도한 결과 하늘은 응답한 것이다. 이 경험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선사하였다.

 

 

 

'비를 내리는 신이 있다. 신이 진노하면 가뭄이 찾아온다. 하지만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신이 마음을 돌이켜서 비를 내린다.'

 

 

 

이렇게 종교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도 같은 가뭄의 시간이 찾아온다. 시간이 지나 금방 해결될거 같으면 좋은데 가뭄과 같이 단조로운 삶이 지속된다. 이때 누군가 자신이 대안을 가지고 있다 말하며 우리의 미래가 신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 가운데 귀가 열린자들은 동참하며 신에게 기도한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문제가 해결된 사람도 있다. 이때 제관(제사를 맡은 관원)들은 좋은 결과를 만난 사람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이런 사람들은 기우제를 통해 비를 만난 사람과 같은 종교적 체험이 생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도가 응답된 감격을 가지고 있다. 제관들은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설득한다. 반면 실패한 자들이 있을 것인데 이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무대 아래 어두운 곳으로 모인다. 대부분의 사람은 실패한 사람을 보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기도가 응답이 없는 이유는 제대로 기도하지 않았거나 실패한 원인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심지어 실패한 본인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에 응답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기우제가 종교의 시작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지금도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 앞의 미래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종교는 알지 못하는 부분,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그건 신의 영역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통해 그 부분에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지에 대해 신으로 대답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종교에 대한 정의이다.

 

 

 

코로나로 인해 종교는 사실 사회적으로 욕을 먹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인간 삶의 자리에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가 비단 나쁜 용도로 사용되기 보다는 삶이 버겁고 힘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따뜻한 위로가 되고 안식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를 멀리서 볼 때는 비판의 대상이지만 종교 안에 들어오면 사실상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다.

 

 

 

사실 심리학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사람은 따뜻한 시각으로 종교를 정의한다. 즉 거짓 희망이라도 그 희망이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한다는 것이다. 환자에게서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환자보다 신이 자신을 치료해 줄 거라고 믿는 환자의 완치율이 더 높기에 상담자들은 종교를 권면하고 있다.

 

 

 

사회적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사람은 차가운 시선으로 종교를 대한다. 신을 기다리기 보다는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을 이겨내는 방식을 택한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 해결 될 수 있는 문제를 안일하게 대처함으로 인류는 사실 정체되고 발전하지 않았었다. 그건 자신이 해결해 나가야 하는 문제를 모두 신에게 미뤘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교는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사회를 정체되게 만들므로 종교는 나약한 사람들에게 기생하며 진보를 방해하는 인류의 적으로 생각한다. 더군다나 종교가 지금까지 사회 속에서 전쟁을 벌이고, 테러를 행하고, 탄압하며 서로 종교끼리 싸움으로 종교는 이제 넌더리나는 제품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종교가 꼭 그런것만이 아님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면서 종교가 가진 기본 진리를 전한다.

 

특히 종교는 거짓 희망을 파는 곳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며, 깨달음을 찾고, 사랑을 추구하며 바르게 살아가는 삶을 권면하는 곳이라고 말하며 '오해와 비판을 여러가지 설명으로 해소'하고 있다.

 

 

 

그 가운데 '영역오류'의 말이 인상적이다. 두 가지 예를 드는데 한 가지만 언급하면 의료에 대해 경제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의료 현실은 왜곡되었다. 그 이유는 고급 인력과 첨단 장비를 통해 대형병원이 유지되려면 더 높은 가격으로 환자를 맞아야 한다. 즉 평범한 사람들이 대형 로펌의 변호사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대형 병원의 교수는 부유한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경제 논리에서 보면 말이다. 그러나 의료 논리에서는 이 논리는 틀렸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이 될 때 자신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기 때문이다. 의료는 상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돈이 없다는 이유로 생명의 가치가 훼손된다면 이 사회는 비참한 사회이다. 따라서 의료는 의료의 논리로 이해되어야지 경제 논리로 보면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이와같이 종교는 종교의 관점으로 다루어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논리로 종교를 바라보면 그 익숙한 논리가 종교를 오해하는 동시에 심리적, 무의식적, 폭력적으로 종교를 대하게 된다.

 

 

 

"모든 종교는 들어가보면 선하다. 어떤 종교도 인생을 낭비하고, 타인을 공격하며, 자신을 망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 msandersmusic, 출처 Pixabay

 

그러면 왜 지금의 종교는 우리가 볼 때에 다 나쁘게 보이는가?

 

 

 

그건 저자가 말하듯 우유가 상온에 있으면 부패하듯 종교가 상온에 있었기 때문에 부패했다는 것이다.

 

즉 원래 종교는 타 종교와 분쟁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서로 의견과 관점이 다를 뿐이지 모든 종교는 선을 가르친다. 그러나 종교가 부패하면 서로를 악으로 공격한다. 또한 종교가 커지면 종교는 권력을 얻게 되는데 건강한 종교는 그 권력을 사회적 약자와 폭력적 세상을 대항하여 타락한 문화에 반대의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종교가 부패하면 그 권력을 통해 종교의 이익을 구하게 된다. 또한 종교가 세속화되고 교조화되는 것도 결국 종교가 상온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서 제 기능을 잘하면 종교는 오히려 사회에 약이되고 사람들 마음을 충분히 위로하는 동시에 진리의 길잡이가 되어 더 좋은 사람으로 가치있는 존재로 세상을 살게한다. 이것이 사실 종교가 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강력히 말한다. 여기서 어떤 사람의 글귀가 떠올라 적어 본다.

 

 

 

신앙은 인생의 힘이다. -레프 톨스토이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것, 인간의 행복은 이 한마디로 다한다. -레프 톨스토이

 

종교가 없는 도덕률은 방향을 찾지 못하는 항해와 같다. 구름에 별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선박의 위치를 알려고 하는 노력과 같다. <H.W. 롱펠로우/ 카바나>

 

종교는 인격도야의 근본이다. 페스탈로치

 

종교의 영원한 가치는 그것이 소망에 대한 도전을 이끌어 주고, 사람의 마음에 희망을 안겨 주는데 있다 - E.M.홉킨스

 

 

 

이 책은 이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가는 변증서와 같다. 줄칠 곳도 많고, 생각해 볼 것도 많고, 이치적으로 논리적으로 말하기에 거부할 수도 없는 수사법이 이곳에 펼쳐져 있다.

 

 

 

한 친구의 죽음을 통해서 다섯명의 친구가 생에 처음으로 '죽음'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면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 죽음의 의미를 새기는 중에 "종교""죽음과 삶에 실제로 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저자는 종교가 답인 세상을 말해주려고 오래 되었지만 새로운 네 개의 시선으로 종교를 바라보게 한다.

 

새로운 시선이란 "세속주의, 과학주의, 명상종교, 계시종교"에 관한 것이다.

 

죽음에 대해 인류는 이 네가지의 답을 가지고 사실 설명하고 있고, 이해하고 있고, 살아가고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은 네 개의 시선이 전부 포함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을 은연중에 자신이 그런 사고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평소에는 세속주의자이다. 그래서 죽음을 무시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종교에 대해서 논쟁할 때는 과학주의자가 된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장례식장에서는 계시종교를 믿는다. 돌아가신 고인이 지금 좋은 곳에 가셔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말이다. 사회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명상종교를 믿는다.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며 그렇지 않은 사람을 향해 비판한다. 이처럼 우리는 모순된 답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러한 삶은 어떠한 답도 그 안에 깊이 스며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행처럼 적용된 종교는 그 사람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즉 그저 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으로서 네 가지 중 하나라도 제대로 가질 때 삶은 새롭게 나를 형성하여 삶이 주고자 하는 '선물들'을 다 받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네 가지의 시선은 네 가지의 종교성이다. 즉 내가 믿는 가치관이 곧 나의 종교성이기에 내가 어떤 가치관에 속하고 있는지 제대로 살피면서 자신의 삶을 제대로 가꾸어 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저자가 요구하는 종교성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전부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종교는 우리에게 과연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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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마을의 공유경제 소동 - 2020 문학나눔 선정 도서 파랑새 인문동화 3
안선모 지음, 로사(김소은) 그림, 김황식 추천 / 파랑새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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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조용한 마을 에코 캐슬에 오지랖 박사님이 이사를 오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제발 옆집에 제대로 된 사람이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주인공인 '윤기'의 어머니가 비어있는 옆집을 보며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엄마 어떤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이야?"


"학벌 좋고, 좋은 직장 다니는 부모에 아이들이 공부 잘 하는 집이면 최고지 뭐."


공유경제에 대한 아이들의 눈 높이에서 이 얘기는 시작됩니다.
'박글쎄요'라는 주인공의 원래 이름은 박윤기입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이상할까요? 그건 무슨 질문을 하든 '글쎄요'라는 말로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마을은 '에코 캐슬'이라는 곳입니다.
캐슬이라는 단어와 함께 이 책을 읽다보면 한동안 인기 프로였던 "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연상됩니다. 드라마에도 한 가정이 이사를 오면서 얘기가 시작되듯이 이 책에서도 '오지랖 박사'라는 분이 이사를 오면서 조용한 마을이 활기찬 마을로, 이웃이 함께 공유하며 나눔을 하는 마을로 바뀌게 됩니다.

아저씨는 특이했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저씨는 자동차도 없으며, 소파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고, 세탁기도 없고, 에어컨도 없고, 더군다나 갑자기 자신의 집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내어주는 '에어비앤비'라는 것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이웃이 된 오지랖 박사님은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에게 다가가 '공유경제'를 언급하며 마을 사람들을 동참시켜 가면서 마을 사람들을 하나되게 만들고 서로가 가진 물건이나, 자동차, 채소와 같은 것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마을은 전에 없던 화기애애함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불편한 이웃은 이제 행복한 이웃이 되었고 마을은 '무엇이든 나눌 수 있는 구조(모습)가 되어'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행복한 이야기랍니다.


집, 자동차, 공구, 명품...‘물류’까지!


‘공유경제’는 2008년 미국에서 처음 대두된 개념이라고 합니다. 금융 위기로 세계 경제가 휘청일 때 하버드대의 로렌스 레식 교수가 불황을 극복할 대안으로 공유경제를 제시하게 됩니다. 그가 정의하는 공유경제는 개인이나 기업이 각자의 자산이나 서비스를 공유하는 활동 전체를 의미하는데 레식 교수는 공유를 통해 자산의 가용성을 높이고, 소유비용 부담을 덜면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지속가능성을 구현할 수 있다고 언급했죠.


그래서 2008년 공유숙박 플랫폼 에어비앤비를 시작으로 다양한 공유경제 서비스가 등장했습니다. 

아참 에어비앤비를 설명하고 지나가야 겠지요. Airbnb는 세계 최대의 숙박 공유 서비스에요.  

즉 손님에게 에어베드(air bed)와 아침(breakfast)을 내줬다는 점에 착안해서 만들어진 게 지금의 에어비앤비라고 합니다. 에에비앤비를 기점으로 교통, 거주, 유통 분야에 진출한 공유경제 기업들은 사람들의 일상에 빠르게 스며들었으며 시장조사기관 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72%가 공유경제 서비스를 사용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실제 공유경제 서비스에 자신이 소유한 공간이나 차량 등을 제공해 본 적 있다고 답한 사용자는 22%에 달하였습니다. 공유경제가 전 세계를 관통하는 흐름이 된 지금도 미국의 공유경제는 세계시장 규모의 60%를 차지하면서 가장 진취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산업통상자원부에서 차용)


미국의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소유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개인의 소유는 줄어들고 공유 영역이 넓어질거라고 예측"했습니다. 그 예측대로 세상은 빠르게 공유경계 플렛폼을 구축해 가고 있으며 이제는 소유하고 늘어 놓는 삶보다는 함께 공유하며 "더불어 살면서 효용성과 환경문제까지도 고려한 삶의 방식"을 택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미 자전거와 전동킥보드는 도시 지역에서 공유를 통해 쓰고 있으며 얼마 전까지 차량 공유 서비스인 "타다"로 인해 한국 사회는 시끌벅적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은 결국 현대인들에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가져 올 수 있는 공유개념임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유경제가 모든 이들에게 장점과 효율로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건 이 책에 나오는'오지랖 박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에겐 좋은 제도가 또 다른 사람에게는 좋지 않는 제도가 되어 큰 피해를 당하는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버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수록 기존의 택시 기사들은 일자리를 빼앗기게 되면서 생계가 곤란해 지게 됩니다.


특히 공유경제 시스템에 큰 문제는 이 시스템을 이용하는 소비자가 피해를 보는 경우 어디서 보상을 받을지 애매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즉 사용자를 위한 앱은 제공해 주지만 개인 간의 서비스 교환은 책임을 지지 않으니 사고가 날 때 법적인 보호장치가 미비하다는 거지요.


물론 이 모든 것은 보완하고 수정해 나가야 하지만 주인공인 '윤기'가 말하듯 "그러고 보면 세상 모든 만물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언제나 좋을 수도 없고 언제나 나쁠 수도 없다."는 말이 맞아보입니다.


주인공 박윤기를 통해서 본 '조용한 마을의 공유경제 소동'은 아이들의 눈 높이에서 얘기를 재미있게 이어나갑니다. 동화라면 동심을 불러 일으키며 재미있고 신비한 이야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현실의 문제도 다루고 앞으로의 미래도 생각하게끔 하는 동화가 나와서 세계와 주변을 보는 안목을 길러 주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공유경제라는 어려운 얘기가 동화라는 형태를 통해 새로운 옷을 입고 독자인 어린이들에게 매우 유용하게 읽히는 서적이 되리라 봅니다. 아이들 독서 토론으로도 좋고, 지정도서로도 정하여도 충분한 교육적 가치가 있는 도서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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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가 들려주는 일상 속 행복
마르크 오제 지음, 서희정 옮김 / 황소걸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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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가 들려주는 일상 속 행복은 거창하지도 대단하지도 않는 삶의 소박함 속에서 나타나 저자의 마음에 행복함을 가져다 주고 있다. 첫번째 쳅터부터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행복들'에 대해 언급한다.


이 행복은 일상을 버티도록 도와주는 행복이며, 또 거리에서 친구를 우연히 만나듯, 모르지만 왠지 친근한 인상이 드는 사람을 마주치듯 만나는 행복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 행복은 '소박한 행복들'임을 말해주면서 이것은 '뻬앗겨봐야'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실감할 수 있는 것들임을 말해준다. 이런 행복들을 빼앗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인데 질병이나 입원, 전쟁처럼 심각한 것일 수도, 가벼운 것일 수도, 개인적인 것일 수도, 사회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결국 이런 '방해물들'은 그 방해물 때문에 금지되거나 불가능해진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것들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주 쉬운 예로 입원함으로 침대에서 꼼짝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일상에서 누렸던 그 행복이 엄청난 행복임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공간에서 커피 한 잔 마실 때마다 유독 큰 만족감이 큰 것도 아니고 최신 뉴스를 보는 일은 그나마 더 즐거울 데 없지만, 이런 작은 자유를 한동안 박탈당해보면 일상의 진가가 무엇인지 깨닫고, 일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바람은 좀 더 소박해지고 꼭 필요한 것만 남게 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소박한 행복은 사실 인류학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이 살면서 느끼는 것이다.

삶은 어쩌면 소소한 행복이 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소중한 것인데 이것은 무언가를 '빼앗길 때', '일상의 삶이 방해받는 순간'이 올 때 우리는 그때서야 소박한 행복이 가장 큰 행복임을 깨닫게 되지 않나 생각된다.


저자는 사실 인류학자이다 보니 조금 문장을  인류학적인 표현으로 어렵게 글을 썼지만 인간이 만나는 행복은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같아 어쩌면 인간적이다는 생각이 든다. 즉 배움이 많고 프랑스 인류학자라도 삶의 행복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에게도 충분하게 누릴 수 없는 '각자의 가치적 행복'이지 않나 생각된다.  


여기서 나는 생각나는 글이 있어 서평을 쓰다가도 적고 싶어 적어본다. 서평은 책의 내용과 특징을 소개하거나 가치를 평가하는 글이기도 하지만 책은 읽는 이에게 연결 고리를 주는 메시지를 주기에 나만의 방식으로 나누면 좋겠다 생각하여 적어 본다. 


나는 간소하면서 아무 허세도 없는

생활이야 말로 최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


사람은 명예와 지위가 주는 즐거움은 잘 알지만,

이름 없고 평범하게 지내는 즐거움은 알지 못한다. -채근담


답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답이다.

소박하게 먹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마라. -호피(Hopi)족 명언


소박한 마음에게도 행복은 찾아 온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적어 본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


이 제목은 햄릿에서 나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서두에 나오는 문구를 읽으면서 인간은 누구나 이런 생각 속에 깊이 잠기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가 깊이 생각한 것이 나의 이성적 고뇌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태어났고, 나는 왜 나인가? 이런 철학적 물음은 어린 시절에 자연스럽게 떠올라 질문을 던진다. 삶에서 우연은 우리를 어찌할 수 업는 결과로 이끌어간다. 행복인지 불행인지 나는 언제나 나를 규정하는, 따라서 내 의지를 벗어난, 애초에 있덨던 우연의 산물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나로 존재한다는 명백한 사실은 그 이유를 모든다 해도 반박할 여지가 없는 필연이고, 본질적 모순과 불가능하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부인()을 전제로 해야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존재의 출발점이다."


"자아는 타자라는 시련을 통해 확립된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임의성은 창조의 결과물이자 예상치 못하게 충만하고 행복한 시간을 제공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저자는 계속해서 일상 속의 행복을 누리는 얘기를 언급하며 작가의 얘기를 해주고 있는데 작가는 독자를 통해 자기 행복감을 확인하며 글쓰기를 이어 간다는 것이다. 즉 '쓰는 자의 의식에는 언제나 타자가 있다' 

이 말은 사람이 가진 행복은 타인에게 향하려는 지속적인 노력 속에서 발견됨을 말해주고 있다.

독자적 개인은 타인과 맺는 관계로 자아를 실현하고 '독자성은 오직 관계 속에서 발생'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가진 행복은 나 홀로만의 행복보다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렇게 생각의 줄기를 잡아서 살피는 중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인간이 가진 행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일상 속에 가진 행복의 줄기를 끄집어 내어 행복을 즐기려 하고 있다.

그는 인류학자로서 첫 발을 내 딛었던 그때의 현지 조사 과정에서의 기억을 통해 행복을 기억한다.

그는 샹송을 통해서 과거의 노래를 귀환시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자신이 함께 스스럼없이 불렀던 그 기억을 되살리면서 그때 그 시절 할아버지 댁 부엌을 소환하는 상상을 하며 감성에 젖어든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뉴트로'식의 행복 찾기를 현실 안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트로트'가 한국인의 남녀노소를 깨워서 과거 그때의 시절과 경험, 눈과 기억에 넣어둔 행복을 살포시 끄집어 내듯이 저자는 여행 속에서, 풍경 속에서, 음식 속에서, 또한 나이 듦 속에서 행복 찾기를 소박하게 찾아가고 있는 모습을 이 책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나이 듦의 행복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 행복을 충만하게 누리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 나이의 속박에서 벗어나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어서 "나이 들어서 좋은 점은 누구나 자기가 간직한 기억과 상상, 추억과 꿈을 마음껏 탐색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는 것이다."고 말한다. 따라서 은퇴는 도전이라고 강력하게 말한다.


따라서 나이는 우리에게 지금을 살라고, 순간에 충실하며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을 누리라고 가르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저자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돌아볼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행복들"이 많이 있음을 발견하면서 일상은 그저 '하나의 지나감'이 아닌 행복으로 울타리쳐진 삶의 낙원임을 깨닫고 있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행복을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지금 순간을 개인을 넘어 공동체, 더 나아가 인류의 존재로서 간직하는 세대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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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끝에 서 보았는가?
윤정 지음 / 북보자기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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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삶의 언어는 의미에 매달리지 않는다. 


이 말이 강인하게 다가와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작가가 선정한 27개의 기표 속에서 마지막 기표인 '죽음'을 통해, 생의 끝자락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바라보면서 두려움 없이 다가서는 힘을 이 책은 주고자 한다. 


작가는 자기 독백적인 글을 통해 자신이 가진 생각을 말로 표현하려고 한다. 


'빠짐'이라는 기표 안에서 '독백'이라는 글로 자신의 감정을 언어가 가진 모든 표현을 통해 유려하게 표현한다.


내 몸짓, 내 말, 내 의식적인 행동이 어떤 유기체의 말초적인 본능으로 움직이는 반사작용으로 그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그 모든 것을 계산해보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내 생애에서 헛되이 흘러갔을까? 분병히 어딘가에 빠져 있다. 


어쩌면 나는 더 진실한 삶의 부재를 숨기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감각으로 만들어진 지각과 감정을 자아라는 이름으로 데리고 와서, 결국은 미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정체 상태가 되는 것을 빠짐이라고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사실이 무엇이든 나는 그것이 일어나더라도 놓아두고 있다.

가끔 뵌 적도 없는 신에게 떠넘기고, 나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를 삭제하고 만다. 분명히 빠진 것이다.

자아는 있지만 스스로 주체를 가진 의식의 자아는 없는 것 같다. 


난해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저자는 '무엇'에 빠지고 싶어 하는 자신을 본다.

절망과 충족감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충동을 보면서 만족으로 행복하기도 하고, 절망하면서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어떤 날은 분리되어 차분하지만 어떤 날은 붕붕거리면서 떠다닌다.


이런 감정은 우리의 모습이지 않나 생각한다.


저자는 또 말하기를 '수렁에 빠지고 싶은 충동은 상처에 의해 올 수도 있지만, 너무 만족하여 유혹 속에 빠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즉 빠짐은 모든 행위에 대해 내 책무가 아니라, '나'라는 자신을 내맡기고 양도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처럼 수렁에 빠진다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스스로 설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죽음에서 조차도 자신이 사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끝없이 사라지는 존재에 대해 아름다운 고민을 하는 유일한 종種?이 '사람이다'고 말한다.

또한 사라지는 것에 대해 생명을 물을 수 있는 존재인 '사람'은 작은 독백과 성찰 사이 끝에 서서 언어의 의미를 삶으로 잘게 쪼개어서, 사랑의 가슴을 품고 새날을 맞이하는 아침을 마주하고자 하였다.


"자살"이라는 쳅터에서 저자는 삶의 진실함을 마주대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삶에서 무엇인가를 바라며 살고 싶지 않다. 그냥 좋아하며 잘 살면 된다. 꽃은 꽃대로 피고, 눈은 눈대로 내린다. 그냥 그대로 내던져놓고 살아가는 것, 이미 나의 생명이 선택한 자살의 삶이다."


이 글을 통해 저자의 가치관, 세계관을 본다. 


"끝(종국, 죽음)"을 찾아서 연구하고 살펴보니 삶은 '사라짐'과 '비움', '소멸', '공허함', '죽음'이라는 것으로 결국 종식되는 것을 보고 저자는 아마도 많이 놀랐고, 불안했던 것이다. 또는 '끝'이 인생의 의미를 물을 때 뭐라고 답해야 될 지를 나름 고민과 철학적 사색으로 언어의 유희를 거쳐서 자신의 얘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처음 이 책을 접하고는 난해할 수 있어 이어지는 글 잇기(이어짐이)가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으나 어쩌겠나?

결국 "끝"이 다가온 순간 "무"로 돌아갈 세상에서 잠시 세상이 이해되지 않아 복잡한 얘기를 마음대로 써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죽음"이라는 27번째 쳅터에서 말한다.


'죽음의 실체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독백 속에서 죽음의 비밀을 말하고 싶지만,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다. 삶이 떠난다는 것은 육체적 감각의 소멸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영혼을 집착하기도 한다. 도저히 들여다 보고 확인할 수 없지만 무의 심연을 공허함을 인정해 버리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여러가지로 고민한다.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은 '소멸' 아니면 동사로 '사라짐'이다. 그 사라짐이 왜 공허했을까?


아마도 형이상학의 극단적 예단의 의미로 본다. 공허? 더 채워야 하는 빈 마음이 아닐까?

빈 마음의 끝점에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머물고 있다.

그 점은 공간을 채우는 생며의 주체로 나아감을 철학으로 암시하고자 했다."

(아르키메데스 점이란 관찰자가 탐구 주제를 총체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유리한 가설적 지점을 가리킨다. 연구 대상을 그밖의 모든 것들과 관계에서 볼 수 있도록 하며, 그것들을 독립적인 것들로 유지하도록 하는, 그 연구 대상에서 "자신(관찰자) 제거하기"라는 이상(Ideal)은 바로 아르키메데스 점의 관점으로 묘사된다. / 위키백과)


그 점이 있는 자리에 창조주가 계셨다.

그 점을 가지고 문명을 세웠고, 그 점의 의미가 중세철학을 진두지휘하면서, 선은 악을 제거하는 점의 존재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공허는 절대적 선을 가지고 해결하는 본질처럼 비추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하다.

그 점은 시간을 제거하고, 이원성의 갑옷을 입고, 공허를 끝내려는 전체주의적 시도를 보여주면서 세상을 애매하게 제거하려고 한다.


죽음은 그렇게 심판받고 있었다. 

철학과 죽음의 부재는 풀 수 없는 현실 상황이다. 죽음과 사라짐은 시작과 끝이 아니다. 순간순간 이어지는 생명의 현상이다. 그 생명은 사라지는 죽음에 대해 생명을 묻는다...지금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만큼 신뢰하고 싶다. 끝은 끝이 아니라 끝없는 것이다. 그 사이에 나는 끝없는 끝을 붙잡고 편집된 의미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입춘이다. 봄은 뿌려놓은 죽음을 끝내 살아내려는 날이다. 그 죽음의 춤으로 봄은 찬란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맨 끝에 있는 끝이라는 '시?'를 적어보며 저자의 글 안에서 '끝'을 의미해 본다.


끝이 있었다면, 널 만나지 못했으거야.

우리는 없을 거야. 끝없는 길이 끝없었기에, 너랑 손잡고 걸어갈 수 있었던 거야.

끝없기에 다시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

힘들어도, 병들어도, 죽어서도, 끝이 없어서 희망을 갖는 거지.

영원하다는 것은 끝없는 고백인 거야.

하늘도, 별도, 달도, 해도, 바다도, 꽃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너도, 나도 끝없는 고백의 모습인 거지.


책을 보게 되면 '들뢰즈'라는 인물이 나온다. 들뢰즈가 죽음을 말한 것이 있어 함께 실어 본다.

"권력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혹은 비릴리오가 말하듯이, 권력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내밀한 작은 두려움들을 관리하고 조직하는 것이죠. …(중략)… 아무리 춤추자고 말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으니까요. 또 아무리 “죽음이란 얼마나 불행한가”라고 말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무엇인가를 잃으려면 먼저 살아야만 할 테니까요."

- 질 들뢰즈·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동문선, 2005, p.117~118.


이 글(사진의 내용, 저자의 내용)이 난해한가? 결국 글은 읽는 이의 해석이다. 

글 저자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것을 읽고 소화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당신은 끝에 서 보았는가?


구약성경 전도서 7:1-4절 말씀을 추가해 본다. 

전도서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솔로몬이 쓴 책이다. 

이 메세지가 결국 저자가 의도한 책의 결론이지 않나 생각된다.

(맨 아래는 저자의 또 다른 책이다)


  1. 명예가 값비싼 향유보다 더 낫고, 죽는 이 태어나는 보다 더 중요하다.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얼굴을 어둡게 하는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4.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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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은 처음이지? 과학이 꼭 어려운 건 아니야 2
곽영직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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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이라는 책을 접하면서 이 책 안에 눈에 익은 사람이 보여서 반가웠다. 그건 퀴리 부인으로 알려진 물리학자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 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여성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여성이다. 
양자역학이라는 어쩌면 난해하고 어려운 책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니 괜시리 행복하다. 


마리 퀴리는 프랑스의 물리학자·화학자이다. 남편(피에르 퀴리 Pierre Curie, 1859~1906)과 함께 방사능 연구를 하여 최초의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였다. 1898년 7월과 12월 26일에 그 내용을 각각 발표했다. 이 발견은 방사성 물질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원자 내부 구조에 대한 연구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원자 세계에 대한 연구는 전자가 발견되고, 방사선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질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이 책은 여러 인물들을 등장 시켜가면서 충분한 그림(사진, 도표) 자료를 활용하는 가운데 1800년대 초에 등장한 원자론에서 시작해서 원자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는 과정과 원자와 관련된 새로운 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에피소드도 담겨 있어 한결 보기에 편하며 이해하기 쉽다.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물질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원자'라는 작은 알갱이로 이루어졌음을 '돌턴'이라는 화학자는 알게 된다.(그는 기상학자였고 물리학자이기도 하다) 그 시기가 1808년도이다. 물론 그가 처음 발견한 시기는 1803년도이다. 최초의 논문에 그 내용을 실려 있다.
1808년 <화학의 새로운 세계>라는 책을 내면서 그는 원자론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으로 이렇게 정의 내린다.

1. 물질은 원자라는 작은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
2. 같은 종류의 원자는 크기와 무게, 그리고 성질이 동일하다.
3. 원자는 창조하거나 파괴할 수 없으며 더 쪼갤 수 없다.
4. 화학반응은 원자들이 결합되거나 분리되어 새롭게 배열되는 것이다.
 
그러나 1900년대 초에 과학자들은 원자가 양성장, 중성자, 전자 같은 더 작은 알갱이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과학자들은 원자의 내부 구조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연구하면서 원자의 내부도 일반적인 물리법칙인 뉴턴역학과 전자기학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을것으로 예상했는데 그러나 원자내부는 일반적인 물리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뉴턴역학과 전자기학의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원자보다 작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기존 물리 법칙과는 다른 새로운 물리법칙을 찾아낼 필요가 있었고, 그리하여 20세기 초에는 원자보다 작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새로운 역학이 바로 양자역학인 것이다.

양자역학은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원자보다 훨씬 작은 미립자의 세계를 다루는 역학이다. 현미경을 사용해도 직접 볼 수 없는 작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기란 무척 어렵다. 그러나 저자는 양자역학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양자역학이 성립되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즉 원자의 구조를 밝혀내려는 수많은 시행착오의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양자역학 법칙이 도입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의 의미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본 책은 처음에 원자론이 등장할 때부터 양자역학이 나오게 된 배경, 양자역학의 과학적 문제제기와 이후 전개되는 과학 개념과 실험적 증명으로 양자역학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을 하면서 끝부분에 가서는 양자역학이 생활 속에서 어떻게 우리 삶을 더 윤택하고 현대문명을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양자역학은 원자에 대한 내부 구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 그 지식을 바탕으로 전자를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전자공학 시대의 기초가 되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누르면 컴퓨터가 기계를 작동시키기도 하고, 멀리 있는 정보를 날라다 주기도 하며, 음악이나 영화를 감상하도록 하여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컴퓨터 안에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은 전자들인데 자판을 눌러 전자들에게 어떤 일을 명령하면 전자들은 불평 한 마디 없이 그 명령을 수행한다. 이처럼 전다가 이렇게 인간의 지시를 잘 따르도록 할 수 있는 비결은 양자역학을 통해 전자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많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건축이나 토목 공사에 사용되는 거대한 기계, 도로를 달리는 각종 자동차. 하늘을 나는 비행기. 로봇을 움직이게 하는 모든 복잡한 기능,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자기기에도 IC 칩이 들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양자역학을 바탕으로 작동하는 반도체 소자와 반도체 소자를 이용해 제작된 IC칩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고 하니 양자역학은 대단한 요물인 것이다.

또 한 가지 새롭게 발견된 양자역학을 통해 본 "터널링 효과"

양자역학을 통해 새롭게 발견된 현상 중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현상이 '터널링 현상'이라고 한다.
터널링에 대해서 책을 보고 이해해도 되겠지만 "생각하는 공대생"이라는 홈피를 보면 아주 쉽게 자세하게 나와있어 내가 이해하기 쉬운 내용을 실어 본다.

터널링 효과(Tunneling effect)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go go~


터널링 효과란 미시세계의 입자가 갖는 파동의 성질인데요!!


우리가 사는 거시세계에서는 물질의 운동량이 매우 크므로 파동의 성질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벽을 통과해서 반대편으로 가는것이 불가능하죠

즉, 고전역학의 세계에서는 자신이 갖는 에너지보다 높은 에너지 장벽을 넘는게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역시 눈치 채셨겠지만~


전자와 같이 양자역학의 지배를 받는 미시세계에서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입자가 벽을 넘어 마치 공간이동을 하는것처럼 말입니다.


매우 작은 입자는 파동의 성질을 갖기 때문에 위의 그림처럼 에너지 벽을 통과 할 수 있습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에서 배웠듯이 그림에 나타나 있는 파란선은 입자의 파동함수입니다.

저 값이 0이 아니기만하면 입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자 어떤가요?? 

파동함수가 회색의 에너지 장벽을 통과하면서 뭔가 줄어들긴 하지만 0이 되지 않고 벽을 통과하고 나서도 파동함수가 약하게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입자의 '존재 확률'은 줄어들었지만 0이 아니기 때문에 벽 밖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것이죠!!! (당연히 실제로도 관측이 됩니다)



다만 에너지 장벽이 너무 두껍지 않아야 하고 입자 또한 어느정도 질량이 작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바로 터널링 효과(Tunneling effect)라고 합니다.



출처: http://allgo77.tistory.com/45 [생각하는 공대생]


한 마디러 터널링 효과란 "양자약학의 입자나 파동이, 고전적으로 통과할 수 없는 물체를 통과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현상을 통해 톡톡히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 효과를 잘 누리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보를 저장하는 장치이다. 컴퓨터가 아무리 복잡한 계산을 빠르게 수행하고 성능 좋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어도 정보를 효과적으로 저장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예전에는 정보를 저장하는데 강자성체 물질로 만든 저장장치가 널리 사용되었다. 카세트 테이프, 비디오테이프, 하드디스크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usb 메모리라는 저장장치가 널리 사용된다. usb 메모리는 양자역학의 터널링 현상을 이용하여 저장하거나 제거한다. 현재 스마트폰이나 카메라에서 사용하는 저장장치나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SSD는 모두 이런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고 할 때 터널링 효과는 매우 행복한 양자역학이다. 


또한 터널링 현상은 현미경에도 사용되고 있는데 기존 광학현미경 말고(최고 배율 100배/분자와 같이 작은 구조 볼 수 없음) 주사투과현미경인 STM을 사용하면 원자의 내부 구조는 아니더라도 원자의 배열 정도는 볼 수 있다고 한다.  STM은 바로 전자의 터널링 효과를 이용하는 현미경이다.


이렇게 양자역학은 우리의 삶에 밀접하게 연관된다. 


스마트폰을 하면서 컴퓨터를 하면서 제일 애로점은 '느림' 때문에 늘 불평을 가진다. 좋지 않는 감정이다.

얼마나 빨라야 과연 흡족하게 이용할까 생각하기도 하는데 아무튼 기존의 컴퓨터는 한계가 있어 더 이상 빠른 속도를 경험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양자컴퓨터를 사용하게 된다면 현재 컴퓨터 보다 100만 배에서 1억 배 빠르게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고 하니 과히 양자역학의 발견은 인간에게 희망과 삶의 질을 선물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빠른 것이 좋은 것인지, 과학의 발전이 인류문명에 과연 정답인지는 지금 입장에서는 불투명하다 하겠다. 그 이유는 현재 N번방 박사 사건을 보면서 양자역학의 폐해를 보기 때문이다. 인류는 신 기술을 통해 선물을 받았지만 그 선물을 매우 악하게 사용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는거 같다.


책을 읽으면서 사실 쉽게 써졌지만 어려운 내용과 복잡하고 전문적인 내용에서는 막힌다.

그러나 저자의 세심한 배려와 중간 중간의 읽을 거리를 통해서 양자역학이 발전해 나온 과정을 보면서 어렴풋 양자역학이라는 대단한 지식에 동참한 기분이 들어 매우 즐거웠다. 


마지막으로 보어의 "상보성 이론"에 대해 이 책에서 나오는데 꼭! 읽어보면 재미있는 시간이 되리라 본다.


더불어 상보성 이론에 대한 한 글이 있어 소개하는 것도 좋겠다 생각하며 링크를 남겨본다.  


https://blog.naver.com/hermoonbg/221669464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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