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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정약용의 인생강의 - 다산은 아들을 이렇게 가르쳤다
정약용 지음, 오세진 옮김 / 홍익 / 202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다산은 아들을 이렇게 가르쳤다.
이 문장이 가지는 의미가 책을 읽으면서 마음 깊이 다가왔다.
멋진 아버지며 훌륭한 면모를 두루 갖춘 인물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아버지와 이 책을 읽지 않는 아버지의 마음 가짐은 분명 다를 것이다.
본 받고 싶은 인물 중에 꼭 한 두 사람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이분의 이름을 이제 거론 할 것이다.
역사 속 인물을 오세진 편역자를 통해서 이렇게 세세하게 볼 수 있고 자세한 해설까지 곁들여 주니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매우 편하게 이해하고 다산의 삶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가독성이 너무 좋음)
이 책은 총 4개의 주제로 되어 있는 책이다.
공부하는 법: 1장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은 공부뿐이다.
돈을 벌고 쓰는 법: 2장 자식들에게 경제생활을 이야기하다
사람을 사귀는 방법: 3장 남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바라지도 마라
삶을 살아가는 법: 4장 제사상을 차리기보다 나의 책을 읽어다오
각각의 네 쳅터 속에서 가르쳐 지는 인생 선배의 구체적인 조언은 다산의 아들로서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삶을 아주 참되게 하는 실제적인 조언으로 가득차 있다.
유배지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쓰며 참된 삶을 살게끔 하려는 아버지의 고뇌가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느껴졌다. 참으로 부지런한 아버지며 선비정신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면모가 내 눈앞에서 보일 정도로 다산의 삶은 정갈하고 매우 문인다우며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모습이 계속 눈에 띄인다.
다산의 마음이 표현된 문장 하나에서 다산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며 틀에 박힌 사고를 벗어나 실용적인 실학 사상에 대가임을 보게 된다.
"제사상을 차리기보다 나의 책을 읽어다오!"
다산 정약용 (茶山 丁若鏞, 1762~1836)
그는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이자 지식인이다. 그는 1789년(정조 13) 문과에 급제하여 부승지, 형조참의 등 벼슬을 지냈으며 정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사람으로서 문장과 유교 경학에 뛰어났고 천문, 과학, 지리 등에도 밝아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한 인물이다. 안타깝게도 당시 금지되었던 천주교를 가까이했다는 이유로 1801년(순조 1년)에 강진으로 귀양을 갔으며, 무려 18년에 걸친 귀양살이를 하면서 그곳에서 여생을 유유자적하며 보내지 않고 무려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한 사람이다.
그런데 다산은 학문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자녀 교육에서도 매우 세심하며 다산의 아들로서의 귀품을 잃지 않도록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힘들어 하는 자식들에게 폐족으로서의 위치에 그대로 머물지 말고 공부를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가문을 올곧게 세워가고자 하였다.
“오늘날 너희는 폐족의 자식들이다. 만약 폐족이라는 어려움을 딛고 잘 처신하여 이전보다 더 훌륭한 가문을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놀랄만 하고도 훌륭한 일이다." p 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다산이 자녀들에게 왜 이토록 편지를 통해 끊임없이 소통하고 자녀들이 의기소침하여 지내는 것을 그냥 놔두지 않았는지 이 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페족인데다 교양과 학식마저 없다면 더 미움을 받는다. 사람들이 폐족이라고 천시하고 세상이 얕잡아보면 그 자체로 이미 비참한 일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먼저 자신을 천지하고 얕잡아 보니 스스로를 비참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너희들이 끝내 배움을 거부하면 내가 저술하고 간추려 놓은 그 모든 것을 장차 누가 수습하여 책으로 엮고 교정하고 편집할수 있겠느냐? ....그러면 나의 저술은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 것이고 후세 사람들은 사헌부의 판결문만을 보고 나를 판단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나는 장차 후대에 어떤 인물로 기억되겠느냐? 너희들은 반드시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p 15
다산은 글 짓는 전통이 벼슬보다 중요함을 말해주고 강조하고 있다.
폐족이 된 집안이 사람으로서 제대로 처신하며 학자 집안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오직 공부'가 중요한 것임을 재차 강조하며 채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공부란 사람이 할 수 잇는 일 중에서 가장 고아한 일이지만, 아무나 그 참맛을 아는 것은 아니다." p 20
다산은 공부의 진면목을 자녀들에게 귀에 박히도록 알려 주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중풍에 걸려 몸이 많이 나쁘다고 하였지만 그럼에도 다산은 팔다리와 허리를 가혹하게 혹사시켜 가면서, 밤을 세워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글을 쓰고 피곤하면 잠시 쪽잠을 자다가 다시 일어나 글쓰기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둘째 학유에게 편지를 쓰며 이렇게 말하였다.
"남자가 독서하고 인격을 갈고 닦으며 집안을 경영하고, 어떤 일을 떠맡아 하는 등 일체의 일을 처리할 때 정신력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해낼 수 없다. 정신력은 부지런한, 날래고 똑똑함, 지혜로움, 성취를 뒷받침한다.....나는 몇 해 전부터 독서의 진면목을 대략이나마 알게 되었다. 아무 생각없이 읽기만 해서는 매일같이 수천 번을 읽어도 읽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다. 하나하나의 글자를 볼 때마다 그 뜻을 정확히 모르면 다양하게 찾앚보고 세밀하게 연구해서 근원을 파헤쳐 글의 면목을 파악해야 한다. 날마다 이렇게 하게 되면 한 종의 책을 읽을 때 백종의 책을 참고하게 되고, 해당되는 책의 내용에 대해서도 훤히 알게 된다. 이 점을 잊지 말거라.....초서(책에서 중요 내용을 가려 뽑아서 쓰는 일) 하는 법은 먼저 자신의 생각을 미리 정한 다음 만들 책의 규모와 차례를 정하고 그 후에 책에서 내용을 가려 뽑아야만 절묘한 일관성이 있게 된다." p21-23
참으로 다산은 이렇게 세심하게 어떻게 공부하며 무엇이 중요한 논점인지 어떤 사실을 어떻게 파악하고 기록해 두어야 하는 사항까지 설명해 주고 있다.
이어서 다산은 책을 쓰고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됨됨이가 바탕이 된 사람이길 원했다.
왜냐하면 작품이 훌륭해도 칭송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인생들을 본 것이다.
"예전에 선배들의 저술을 보면 거칠고 품격이 떨어지는데도 세상의 추앙을 받은 것들이 많다. 반면에 상세하고 해박한 저술이 도리어 배척을 받아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예도 있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 여러 번 생각을 해보았는데, 나는 끝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야 나는 깨달았다. 군자는 의복과 갓을 바쁘게 하고, 시선을 위엄 있게 하고, 장중하고 고요하고 단정하게 앉아 마치 흙으로 만든 인형처럼 위엄이 있고, 말과 글은 진실하고 엄격하고 바르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한 후에야 대중들에 권위가 생겨 대중을 납득시킬 수 있고 명성이 오래가고 멀리 퍼지는 것이다." p.60
다산은 자식들에게 경제관념을 심어주는 일에도 매우 실제적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는 근검절약(勤儉節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샘플이다. 음식과 옷에 대한 생각은 지나칠 정도로 자녀들의 삶을 옥죄는 듯이 보이지만 다산은 비싸고 좋은 옷, 음식이 허상이며 헛된 것임을 알고 거기에 마음 쓰지 않도록 하였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의복, 음식, 모두 시간이 지나면 옷은 헤어지고 음식은 목숨을 보존하는 정도에서만 유용한 것이지 목으로 넘어가면 결국 변소에서 큰일 보는 일에 사용될 뿐이라는 것이다. 오마이갓!!
의복은 패션을 뽑내고 자기 개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몸을 가리기에만 충분하면 되고, 고운 비단의 옷은 입다가 헤어지면 볼품이 없지만 투박하고 값싼 옷은 헤어지더라도 크게 나빠지지 않기에 거친 원단의 싼옷이 더 실용적이라는 것이다. 자녀들이 다산의 이런 생각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살았는지 모르지만 다산의 삶은 검소했고 부지런 했으며 재치있는 음식법을 먹는 법도 소개하면서 불필요한 곳에 마음을 뺏기지 않도록 하였다. p72
*TV를 틀면 온통 먹거리와 패션의 아이템이 넘쳐나는 시대에 다산의 충고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어필될지..??
다산은 재물을 사용하는 법에 대해서도 매우 좋은 가르침을 준다. 재물은 자손에게 물려주면 결국 탕진되어 흩어지기에 재물 보다 재물을 쓰는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한미한 집안이나 가난한 친구에게 베풀어주는 것만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재화를 비밀스럽게 저장해두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은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그러면 도둑에게 빼앗길 염려도 없고, 화재로 인해 소실될 걱정도 없으며, 소나 말이 운반하는 고생을 치를 것도 없다. 게다가 자기가 죽은 후에도 꽃다운 명성을 가져갈 수 있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이익이 어디 있겠느냐. 재물은 꽉 쥐려고 할수록 손에서 더 미끄럽게 빠져나간다. 재물이란 점어(鮎魚)와 같은 것이다." p.78
목민심서에서 다산은 이런 내용도 언급했었다.
"내가 오랜 세월 귀양살이를 하면서 수령들을 살폈는데 나를 동정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의 의복을 보면 반드시 검소한 것을 입었고, 화려한 옷을 입고 얼굴에 기름기가 돌며 음탕한 것을 즐기는 수령은 나를 돌보지 않았다. 못에 물이 괴어 있는 것은 장차 흘러내려서 만물을 적셔주기 위함이다. 절약할 수 있는 사람은 베풀 수 있기 마련이요, 절약할 수 없는 사람은 베풀지 못하기 마련이다."
다산은 또한 남편의 역할, 아들로서의 역할, 며느리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가정을 화목되게 하는 일에도 조언을 준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는데 다산은 지금 '여자는 남자하기 나름이다'는 말을 하고 있다. 효성을 다하여 지극히 어머니를 섬기며 두 며느리를 잘 인도하여 아침 저녁으로 어머니를 살피라는 당부와 함께 며느리의 표정까지도 다산은 당부하며 부모를 섬기는 자세에 있어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도록 하였다.
특히 가화만사성에 대한 예를 들어 가정이 화목하면 하는 모든 일들이 잘 되고 가정의 동식물까지도 잘 자라게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며느리들은 반드시 단정하고 밝은 얼굴로 시어머니를 섬기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즐겁게 해드리도록 노력해라...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잘지내고,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없게 되면 반드시 서로를 깊이 믿고 의지하게 된다. 집안의 부녀자들이 아무 갈등 없이 화목하게 지내게 되면 하늘과 땅도 그에 맞춰 조화를 이루고 닭이나 개, 채소나 과일도 쭉쭉 자라서 일찍 죽는 일이 없다. 또한 하는 일마다 막히는게 없게 되고, 나 역시 임금의 특별 사면을 받아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p83-84
다산의 글 안에는 삶의 구석구석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면서 참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임을 통찰한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자녀들에게 조언하며 자신이 지닌 가치관을 습득하고 깨닫고 실행하기를 원하였다. 심지어 둘째 학유에게 닭을 키우더라도 고상하고 상스러움이 있고, 깨끗하고 탁함의 구분이 있음으로 양계쟁이가 되지 말고 양계를 하면서도 닭의 습성을 이해하고 이익을 위한 번식이 아닌 닭을 살찌우고 잘 키울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시도를 통해 '양계가 무엇임을 학문적 관점에서도 시적 관점에서도' 볼줄 아는 식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다산은 술마시는 법에 대해, 친구를 가려서 사귀는 방법에 대해, 참된 우정에 관해서, 일가친척간의 화목을 유지하는 법에 대해, 위대한 사람이 되는 방법에 대해, 넓은 도량을 가지고 사는 마음에 관해, 재해를 당한 자의 마음 가짐에 대해, 심지어 편지 하나를 쓸 때 명심해야 될 사실을 적어서 가르쳤다.
"매번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세번 읽어보면서 '이 편지가 예기치 않게 사람들이 많은 사거리 한복판 바닥에 떨어져서 마침 원수가 열어 본다고 하더라도 나를 비난할 여지가 없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 써야 한다. 또한 이 편지가 수백 년 뒤에 전해져서 식견 있는 사람이 보더라도 비판할 것이 없겠는가라는 생각으로 편지지를 봉해야 한다. 이런 것이 군자가 가진 신중함이다."
그리고 다산은 마지막 4장 부분에서 끝부분에 안타까우면서 중요한 얘기를 하고 글을 맺는다.
제사상을 차리기보다 나의 책을 읽어다오
절대로 서울을 벗어나 살지 마라
내가 죽거든
다산은 자신의 학문이 땅에 그대로 묻어져 드러나지 못하게 될까봐 못내 아쉬움을 금치 못한다.
끝부분에서는 조금 마음이 아팠다. 다산의 자식이라고 해서 다산처럼 뛰어날 수 없건만 마치 서울대(하버드대학) 나온 아버지가 자식들을 못내 못 마땅하게 바라보는 마음이 보였다.
"나는 나라의 은혜를 입어 실날같은 목숨을 보존하며 빈궁하게 여러 해를 살면서 저술한 책이 제법 많다. 하지만 한탄스러운 것은 너희들이 곁에 없어서 미묘한 언어의 뜻을 전할 기회가 적고, 너희들이 문리가 트이지 못하고 학문에 흥미를 붙이지 못하는 점이 너무 아쉽다."
'문리가 트이지 못하였다'라는 글을 자식들이 읽었을 때 그 자식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지 않았을까?
거기다가 한 가지 예를 들며 다시금 다산은 자식들을 자극하는 말을 한다.
"억지로 한두 가지를 들려주어도 마치 진나라 효공이 상앙으로부터 제왕의 도리를 듣는 것처럼 흥미를 갖지 못하니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내 아들이 이러하니 천 년 뒤에 나의 저서가 읽히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나의 저서가 담긴 상자가 후세에 알아줄 만한 사람을 어찌 만날수 있겠느냐?" p236
"너희들은 외롭고 함께할 사람이 없는데다 성품이 경전을 좋아하지 않고 요즘 사람들이 지은 시나 조금 알아보는 정도이니 <주역사전>과 <상례사전> 이 두 책이 끝내 빛을 못 보고 사라져버릴까봐 걱정이구나" p238
이 말을 요즘 쓰는 일상적인 용어로 말해 본다면 '머리가 왜 그 모양이니? 너희들은 하나같이 누구를 닮아서 책에 관심도 없고 그저 노는 것에만 관심있니? 한심하구나' 라는 말일 것이다.
제사상을 차리기보다 나의 책을 읽어다오
그래서 다산은 이렇게 말하며 제사상 보다는 내 책을 읽고 문장을 옮겨 적는 일에 시간을 쓰라고 한다.
"내가 죽은 후에는 아무리 훌륭하고 정갈한 제사상을 차려준다고 해도, 그보다 내가 더 즐거워 할 일은 너희들이 나의 책 한 편을 읽고 나의 문장을 옮겨 적는 일이다. 너희들은 늘 이 점을 명심하여라." p.237
훌륭한 조언이며 귀담아 들어야 할 가르침이다. 전통의 명목하에 정해진 날짜만 되면 제사상에 열을 올리고 제사가 마치 가문의 위세를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수단처럼 무게감을 주었는데 자신들이 훌륭한 가문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산의 말을 새겨 들어야 할 것이다.
이어서 다산은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적극 권면한 사람일 것이다.
그 이유는 서울에 가까이 할수록 문화적 소양을 유지하게 되며 천한 백성으로 전락하지 않고 다시금 가문을 일으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문명이 온 나라에 고루 퍼져 궁벽한 시골이나 먼 산속 마을에서 살더라도 성인이나 현인이 되는 데 큰 장애가 없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서울 문밖 몇 십리만 떨어져도 태고의 원시시대가 된다. 그러니 멀고 외딴 곳이야 오죽하겠느냐? 사대부 집안의 법도는 벼슬길에 올랐을 때는 빨리 산언덕에 샛집을 내어 살면서 처사의 본색을 잃지 않아야 하고, 만약 벼슬길이 막히게 되면 빨리 서울에 가까이 살면서 앞서가는 문화의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했다. 나는 지금 죄인의 명부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너희들을 우선 시골집에 숨어 살게 했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오직 서울의 십 리 안에서 거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p243
왜왜왜???
다산은 상당히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상당하다.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한 부분을 보면 정조 임금이 자신의 저술에 대해 칭찬하는 대목을 말하면서 정조 임금의 평을 서문으로 책에 올려지기를 바라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다산은 비록 현재의 아들은 빛을 발하지 못하지만 그 아들의 아들이, 손자가 과거시험에도 뜻을 두고 집안 경제에도 신경을 쓰면서 천한 백성으로서 가문이 전락해 버리지 않을까 매우 걱정하며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p239, 245
다산의 마음은 모든 아버지들의 마음일 것이다. 나 또한 내 자녀들이 나 보다 더 나은 자가 되기를 원하고 삶을 대하는 자세가 부지런하며 검소하며 학문과 세상 이치에 밝아 사회적 중요 위치에서 자신의 일을 능력있게 감당하면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지혜로운 자녀로 살아가길 바라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산은 죽음을 앞두고 자녀들에게 자신의 '삶'을 영광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요청한다. 그것은 다산이 현재 정치적인 탄압으로 억울하게 죄인이 되어 있는데 언젠가는 자신에게 씌어진 누명이 벗겨지고 면죄부를 받을 날이 온다는 것이다. 즉 몰락한 집안이 다시 복귀되어 사람들의 기억과 역사 속에 자신이 펼친 학문과 연구들이 사람들 입에 오르 내리기를 간곡히 원했다.
다산의 바램대로 모든 누명을 벗고 고향 마현으로 돌아와 18년간의 삶을 더 살다가 그는 조선 후기 역사 가운데 최고의 유학자 중 한 명으로, 원효, 이황과 함께 한국 철학 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 존재로 우뚝 서있게 되었다.
다산의 마지막 공부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의 글이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지만 시대가 나를 휘감고 내가 시대에 살고 있는 한 삶에서 비겁해 질 수 밖에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의 비겁함을 인정하고 그것과 화해하는 것이다."
다산은 마지막 남은 삶까지도 방대한 저술에 몰두하며 자신의 꿈을 펴쳐보려고 했다. 그러나 조정에는 여전히 자신을 반대하는 대신들이 있어 쉽게 그 뜻을 펼치지 못한거 같다. 그러나 자기 생을 충실하게 살다가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과도 화해하며 받아들이는 모습에 역시 대인다운 군자의 모습이 보인다.
다소 다산의 가르침이 아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하고 극성맞은 아버지로서 비칠수 있을 것이다.
어떤 분의 한줄 평가를 보면 "시대를 뛰어넘어 많은 가르침을 준 학자는 맞지만, 아들들에게는 잔소리꾼이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좋은 아버지며 훌륭한 아버지임은 분명하지만 자식들의 인생에 보면 아버지의 편지가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두어서 행복했지만 그 역량을 쫓아서 따라가지 못한 아들들은 아비의 부끄러움이 되지 않으려고 자신들의 삶을 많이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았을지도 생각해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주어야 훌륭한 잠언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