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뒤쫓는 소년 창비청소년문고 30
설흔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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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뒤쫓는 소년. 글자 그대로 ‘책’을 뒤쫓는 소년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책을(등장인물 이름)’ 이 곧 뒤쫓는 소년이라는 의미도 있겠다. 실제로 책을 씨는 섭구 씨 뒤는 물론 그 무언가를 계속 쫓고 있으니 말이다. 참! 책을, 섭구. 주인공 이름이다.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한 번 들으면 절대 까먹을 수 없는 진정 듣보잡 이름. 흥미 게이지 급상승!

[ 책을 ] 

자꾸만 ‘책을’ 에 눈길이 멈췄다. 매끄럽게 넘어가지 못하고 주춤주춤. 왜 그럴까.
학습된 나의 뇌는 문장 속 ‘책을’을 바로바로 판단을 못한 듯 하다. 등장인물의 이름인 고유명사 ‘책을’인지, ‘책’이란 명사에 목적격 조사 ‘을’이 붙은 목적어인지.

책 내용을 거칠게 줄여보자면, 주인공 ‘책을’ 씨가 섭구 씨와 함께 저마다 남모를 사연이 담긴 ‘책을’ 찾고, ‘책을’ 구하고, 온몸으로 ‘책을’ 쓰는 여정이 담긴 이야기다. 책 곳곳마다 ‘책을, 책을...’이 나오니 정확한 내용 파악을 위해 필터링 과정을 한 번 더 거쳐야 했을터. 내 머리로선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을 거다. 나같은 독자를 위해 이름 뒤에 ‘씨’를 붙여 혼란을 줄이고자 했던 작가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주춤주춤’을 설명하기엔 충분치 않다. 늦된 머리의 반응은 그렇다 치자. 마음의 반응을 살펴봐야겠다.

책을 _______. 이번엔 ‘책을’을 목적어로 생각하고, 뒤따를 서술어를 떠올려본다. 책을 읽다, 찾다, 쓰다, 사다, 찢다, 태우다... 앗! 모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동반하는 말들이다. 행위의 주체가 되는 주어의 노력과 수고를 요하는. ‘애씀 동사’라 이름 붙여 본다. 애씀 그 자체는 물론 그것으로 변화될 무언가를 순간순간 떠올린 것은 아니었을까. 긴장과 설렘을 반복하며.
‘책을’ 이라 이름 지은 그이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이름 뒤에 어떤 것을 붙일지 혹은 붙여질지는 니 몫이라는 거지.

[ 책을 쓰다 ]
앞에서 말한 ‘책을’ 뒤에 붙는 애씀 동사 중 걸리는 아니 반짝 빛을 발하고 있는 ‘쓰다’ (쓰기에 대한 근거없는 들끓는 욕망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일터.) 그런데, 책을 씨도 쓴단다. 섭구 씨와 함께 길을 떠난다. 책을 쓰기 위해.

그래, 떠나자. 무너지고 부서지고 깨진 서재뿐인 이 집을 떠나자. 어디든 가서 책을 쓰자, 책을. 그런데 고조부의 책조차 읽지 않은, 게으르고 어리석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조금 삐뚤어지기까지 한 내가 과연 책을 쓸 수 있을까? 그것도 보통 책이 아닌 시들어 가는 제국을 구원할 수 있다는, 듣기만 해도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드는 대단한 책을? (30~31쪽)

둘은 냄새를 좇아 여섯 마을에 들르고, 가는 곳마다 책에 얽힌 사람들을 만난다. ‘책을 따르려다 새끼 손가락을 잃은 사람, 평생 쓴 책을 불태우는 사람, 소설책을 섞어 읽는 사람, 책을 게걸스레 모으는 사람’ 등. 그 속에서 책을 찾고, 책을 구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모험의 세계랄까. 책을 씨와 섭구 씨의 콤비 플레이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 그런데 이상하다. 책을 씨는 책을 구했는데 섭구 씨는 책을 썼다고 하니.

섭구 씨가 귀여운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간단해. 책을 씨가 쓰면 내가 보관하는 거지. 책을 씨는 집필자, 나는 보관자.”
“어라, 나는 책을 쓴 적이 없는데?”
섭구 씨가 호호 웃으며 말했다. “어제 썼잖아, 그야말로 온몸으로. 초짜치곤 제법 용감해서 감동했는걸.”
섭구 씨의 시원한 웃음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아하, 그렇군. 이게 바로 책을 쓴다는 의미로구나. 손이 아닌 몸으로 쓰는 책이라면 못 쓸 것도 없겠다 싶었다. 난 머리보다 손발로 하는 일에 훨씬 능하니까.(62~63쪽)

아하, 그렇군. 몸을 써야만 책을 쓸 수 있구나. 나는 왜 지금껏 글은 머리에서 쓰는 것이라 생각했을까. 몸을 쓰지 않으면 결코 어떤 것도 쓸 수 없는데. 모니터만 뚫어져라 노려본다해서 글이 나오는 건 아닌데.

몸으로 쓰는 책. 책을 씨처럼  자신이 직접 겪은 날 것 그대로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쓴 책을 일컫는 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떠올린 건 보다 원초적인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뿅! 나타났다 사라졌는데. 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직업란에 작가(그리고 러너)라고 쓰는 하루키. 그는 마라톤 풀코스를 25번이나 완주했다. 그러니까........
책을 쓰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체력과 정신력이 합쳐진 최고의 결정체가 바로 책인 셈이지. 때론 생과 사를 좌지우지할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는.

책을 쓰는 건 역시 대단한 일이었다. 책은 이번에도 제대로 효과를 발휘해 내 목숨, 그리고 귀애 씨의 목숨을 함께 살렸다. (122쪽)

[ 섭구 ]

(설마 이름만으로 영구, 맹구의 계보를 잇는 존재일거라 생각하지 않겠지.) 섭구 씨를 ‘책을 쓰는 사람의 수호신’ 이라 말하면 적절할까.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그 어떤 존재? 책을 씨는 섭구 씨가 한 권의 책이라고 생각하던데. 모르겠다. 심지어 이 책을 쓴 설흔 작가도 ‘섭구 씨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무것도 모른다’고 헸다.

“책을 계속 쓰는 한 섭구 씨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요?”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아마 섭구 씨를 다시 만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시 만나는 섭구 씨는 책을 씨가 만났던 섭구 씨는 아닐 겁니다. 섭구 씨는 섭구 씨이되, 똑같은 섭구 씨는 아니라는 거지요. 어쩌면 책을 씨에겐 똑같은 섭구 씨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249쪽)

섭구 씨는 책을 쓰는 사람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경우는 젊은 시절의 할머니였다. 섭구 씨가 내 나이 또래의 여인으로 나타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섭구 씨를 처음 보자마자 마음이 설렜던 이유 또한 알게 되었다. 섭구 씨의 모습은 바로 내가 꿈꾸는 사람의 모습이었던 것. (262쪽)

알려고 들면 들수록 더욱 더 아리송해지는 존재. 하지만 나 또한 섭구 씨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비로소 보이는 “나야, 책을 믿지.” 라는 섭구 씨 말. 섭구 씨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책을 믿는 존재. 걸리적거렸던 ‘책을’이 빛을 발한 순간이다. ‘책을 믿다’ 이 말을 내게 남기려고 그렇게도 ‘책을’은 날 괴롭혔나보다.

책의, 책에 의한, 책을 위한 <책을 뒤쫓는 소년> 책은 끝났지만, 다시 묻게 된다.
대체 책이 뭐길래?
돌고 돌아 다시 제 자리. 그래서 다시, 시작.
또 다른 책, 첫 장을 열고 만다.

“우리가 책을 펼치지 않는다면 책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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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의 눈 창비청소년문학 84
주디 블룸 지음, 안신혜 옮김 / 창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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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었다. 이 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던 나는.
아빠의 갑작스런 죽음. 상실의 고통, 두려움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복해나가는 데이비처럼 나도 그랬다고 자신했었다. 아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30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아직도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말았다. 그 누구와도 심지어 엄마도 동생과도 함께 이야기하고 마음을 나누지 못했다. 나는 열 살, 동생은 일곱 살. 죽음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어렸기에 어쩌면 더욱 솔직한 느낌, 생각을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긴, 제이슨을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렇게 견디며 살아온 우리에게 닥친 언니의 죽음. 지독히도 외롭고 쓸쓸했고 추웠을 언니의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또다시 침묵을 선택했다. 그 어떤 말도 함께 나누지 않았다.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필사적으로 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울지도 않았다. 언니의 화장 순서를 기다리며 밥을 먹었던가. 갑자기 식당에 울려퍼진 엄마의 통곡 소리. 그런데 나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어떤 위로와 위안의 말도 무의미한,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도 모자랄 터에 내가 느낀 감정은 분명 분노였다. 그런 내가 또 너무 싫어 부글부글 이글이글 타올랐던 내 안의 그것 때문에 물만 계속해서 마셨떤 나를 떠올린다.

“분노를 느끼는 건 괜찮아. 하지만 화가 났다는 걸 인정하고 왜 화가 났는지 알아내려 노력해야 해.” (250쪽)

우리는 지금도 그들을 입 밖으로 차마 부르지 못한다. 감당할 만큼 수준의 딱 그만큼. 끊임없는 자기 검열을 통해 걸러진 딱 그것 만큼만 말할 뿐이다. 나머지는 안으로 더 깊은 곳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우리 사이에는 결코 넘어서는 안 될,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그래서 겉으로는 서로를 배려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엄청 조심스러워하고 있다. 그 벽을 괜히 건드렸다가는 피곤해질테니까. 감당하지 못할 후폭풍이 두려운 거다.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견디고, 해결하고 있을 거라고 주문을 걸고 있다. 매일매일.

“네가 뭔가를 물어봐도 엄마가 대답할 수 없을까 봐. 네가 아빠에 대해서, 그날 밤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할까 봐... 엄마는 그게 두려웠어. 엄마한테는 너무 힘든 얘기였거든...”
“난 오래전부터 아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 그런데 어마막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해서 속상했어.” (270쪽)

“우리는 모두 각자의 두려움에 맞서야 하고, 두려움에 직면해야 한다. 두려움을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모험을 할 것인가, 두려움에 갇힐 것인가.” (226쪽)

두려움. 책을 읽고 ‘나는 아직 두려움에 갇혀 있구나’ 깨달았다. 하지만 문제는 알게’만’ 되었다는 것. 현상을 파악하는 것으로 문제의 반은 해결된다고 하지만 모르는 소리. 알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간극이 생기기에 한없는 고달픔이 시작되고야 마는 것. 그래서 ‘차라리 모르기를’과 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이겠지.

그래서 두려웠다. 글을 쓰기가. 언제부턴가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하면 내 안의 그것들이 자꾸만 나오기 때문인데, 고백하자면 우연으로 읽게 된 이 책이 자꾸만 필연처럼 느껴진다. 1988년 아빠가 죽고, 지금은 2018년. 올해로 꼭 30년이다. 아빠 기일을 한 달여 앞둔 지금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아빠가 죽고 엄마, 남동생과 남겨진 데이비. 그들이 도망치듯 살던 곳을 떠나 친척집으로 가게 된 것이나 그곳에서는 어쩐지 적응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과 함께 적응을 못해 또한 힘들었던 나. 새롭게 만난 엄마 남자친구로 원망, 분노, 배신감을 느끼는 데이비와 나. 죽어가는 오티즈 아저씨의 모습과 겹쳐졌던 죽어가던 아빠 등등. 작품 구석구석에서 그때의 나를 생생히 소환해내기에 충분한 것들이 차고 넘쳐났다. 다만 그들은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도 집으로 돌아왔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제 저희가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아요. 우리끼리 홀로 설 때가 됐죠. 그래서 집으로 가려고 해요. 애틀랜틱시티 집으로 돌아갈 거에요”
“그래도 여기에 머물 순 없어요.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꼭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278~279쪽)

엄마도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원망보다 연민이 먼저 인다. 엄마도 두려웠겠지. 지금의 나보다 어린 엄마가 홀로 아이 셋을 건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하긴 나도 말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더 이상 여기서 살기 싫다고. 시간이 거꾸로 흐른 듯 도시에서 시골로 간 우리였다. 시골 생활은 며칠 만에 힘에 부쳤다. 멀고 멀었던 길을 걸어서 가야했던 학교가는 길. 무엇보다 한 학년 한 반이 전부였던 시골 학교에서는 그저 평범하고 보통의 존재였던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 가장 힘들었다. 숱한 따돌림과 무성했던 뒷말은 물론 지나친 관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매일매일 ‘우리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에게 ‘아직은’ 말하면 안된다고 매일매일 생각했었다.

다음 달, 아빠 기일에 엄마에게 물어봐야지 생각했다. 왜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는지, 엄마는 한 번도 집으로 돌아가야 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 말이다. 적고 나서 좀 아니 많이 놀랐다. 여태 단 한 번도 생각조차 못했던 말인데 너무 자연스럽게 글로 나와서. 모험을 감행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아빠, 언니 이야기도 함께 나눠볼 작정이다. 그러고보니 엄마는 아빠 제삿상에 언니 밥도 함께 올린다. 그동안 적당히 우리만의 예를 갖춘 후, 별 생각없이 밥을 먹었었다. 그런데 일년에 한 번 우리 가족 모두가 모여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이 있을까 싶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럴 수는 없다. 남은 조각들을 챙겨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289쪽)

서평 마감일이 하루 지났다. 사실 안 쓸거라고 차마 못 쓸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쓸 거리를 챙겨 밖으로 나온 걸 보면 쓸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두려움과 막막함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용기가 턱 하니 자리잡고 앉았다. 웃음이 난다.

라 비다 에스 우나 부에나 아벤투라(La vida es una buena avenyu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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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업 우리의 미래 나의 대학 사용법
이범 지음 / 창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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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나의 직업 우리의 미래

이 책을 읽기 전, 이렇게 적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순간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 꽤 놀랐다. 학창시절 문제집을 사서 첫 문제를 풀기 전 꼭 그랬다. 날짜와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문제도 언제가는 풀 수 있기를” 하는 글을 끄적거렸다. 그 때는 뭔가 ‘척’해 보이려고 그러지 않았을까 싶은데, 마흔이 된 지금은 백퍼 진심 절박한 심정으로 꾹꾹 눌러썼음을 고백한다.

“어떻게 살 것 인가?” 이 질문은 삶의 태도 등을 포함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법론적인 그 무엇 또한 담겨 있다. 이 책은 후자에 대한 안내서쯤 되지 않을까 짐작했다. 애초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음을 이제는 알기에, 다만 이 책을 통해 약간의 팁을 얻을 수 있다면야. 이런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의 대학 사용법’이란 부제가 붙었다. 부제에서 짐작하듯이 현재 대학생들, 청년층을 주 독자로 겨냥하고 있지만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는 학부모, 교사뿐만 아니라 나같은 삶의 실질적 ‘하우투’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 읽어볼 만하겠다 여겼다.지극히 개인적인 해법을 도모한 것. 그런데 아니었다. 책은 집단적인 해법을 또한 담고 있다. 말그대로 실용과 정치를 모두 담은 셈이다.

개인적으로 4차 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4차 산업 혁명으로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겁을 주는 사람들이 워낙 많은 요즘이다. 저자는 에르네스트 만델이라는 경제학자의 말을 빌려 일침을 가한다. “너 내일 살아 봤냐?” 그리고 말한다. 4차 혁명을 지나치게 ‘기술’ 수준에서 이해하려 하지 말라고. 기술 진화를 예측하려 하지 말고, 알파고가 개인의 인생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느냐를 생각해보자고. 그 메시지는 바로 ‘네가 일생 동안 직업을 여러 번 바꿀 확률이 높아졌다’(62쪽)는 것인데, 그렇다면 4차 혁명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사회적’으로는 고용 보험(실업급여)과 재교육기회가 중요하다. 다른 일자리를 찾거나 새로운 직업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그동안 국가가 생계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특히 새로운 직업을 위해 뭔가를 배울 기회를 갖는 것은 산업의 수준을 높이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등록금이 매우 싸거나 무료다. 등록금이 싸면, 교육 기회 균등이라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뿐 아니라 재교육 비용이 낮기에 직업을 바꾸기가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대학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이를 통해 직업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64~67쪽)

그러면 ‘개인적’으로는 어떤 능력이 필요할까? 바로 ‘자기 주도 학습’ 능력이다. 자기 주도 학습은 네 단계로 되어 있다. 학습의 목표 설정, 수단 선택, 실행, 평가. 이 네 가지를 모두 자기 주도적으로 하는 게 바로 자기 주도 학습이다. (70쪽)
이걸 공교육에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다시 ‘사회적’ 해법으로 돌아간다.) 공교육에서 학생들에게 학습 목표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게 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수강 신청 제도, 프로젝트 수업(과제 연구 수업)이 그것이다. 앞으로 교육의 초점은 자기 주도 학습 능력, 특히 본인이 스스로 학습 목표를 설정하는 능력에 맞춰야 할 것이다. (71~75쪽)

이와 같이 책에서는 개인으로서 갖출 것과 집단으로서 목표로 삼아야 할 것들이 상충되는 것은 물론 종종 모순되는 지점이 발생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써 보려고 애썼다고 저자는 말한다. 학원가 스타 강사, 서울시 정책 보좌관, 경기도 교육감 선거 캠프 활동, 민주연구원 부원장, 문재인 후보 대선 캠프 활동,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진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화려한 이력을 통한 경험의 집합체이자 결정체가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뭔가 실질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실용서로 시작했는데, 막상 책을 덮으니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요하는 제안서를 한가득 받은 기분이다. 다만 활발한 논의를 위해서는 비교 분석이 가능한 다양한 제안들이 다양한 계층에서 나와야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내용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면 더욱 발전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보 혁명’이라 일컫는 저자의 제안들이 정책이 되어 실질적으로 집행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이론적으로 옳고 그른지, 정치적으로 일관성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는 없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느냐’에 대한 일차적 물음에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다.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이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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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촛불이다 - 광장에서 함께한 1700만의 목소리
장윤선 지음 / 창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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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으로 선정되어 받은 가제본 도서를 읽었다. 사진과 일부 내용은 빠져있다. 하지만 촛불로 타올랐던 그때의 너나우리모두의 모습과 목소리를 생생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바로 그 부분이 묶였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일인 2017년 3월 10일, 그날부터 책은 시작한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에 심장이 오그라들며 한숨이 터졌지만, 결국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말에 환호성을 터뜨렸던 2017년 3월, 그 해 봄은 그렇게 왔다.

2016년 10월 29일, ‘이게 나라냐’는 탄식으로 시작되어 2017년 4월까지 무려 총 23차에 걸쳐 열린 촛불집회. 책은 그 집회가 열린 광장의 풍경을 보여주고, 광장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 광장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내가 오늘 들고 서 있는 이 촛불로 대한민국을 바꿔낼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으로 뭉친 장엄한 국민행렬이 존재했던 곳’이었다.

이 책의 백미는 광장 속 ‘시민의 목소리’에 주목했다는 점이라 했다. 나 또한 그 목소리에 방점을 찍는다. 수많은 목소리들 중 나는 유독 ‘청소년’들의 목소리에 귀가 더 쫑긋 섰다. 내 안의 염치를 건드려 깨닫게 한 나의 ‘위대한’ 영웅들이라 칭송하련다. (고백컨대, ‘교복입은 시민’이란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꼭 학교에 다니고 교복을 입어야만 시민이 되는 건 아니란 생각이 용케 들어 ‘청소년’으로 바꿨다. 이들이 ‘대견하다, 기특하다’ 고 썼다가 이 말에 어떤 위계가 담겼음을 또한 느끼게 된 것. 마땅한 말을 고민하다가 딱 떠올린, ‘위대하다’ 진정 그들은 위대했으니!)

그들의 목소리를 쫓는다. 분명 눈으로 활자를 읽는데, 귀로 그 쟁쟁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 어떤 정치가의 말보다 울림이 크다. 무심했고 무감각했던 내 안의 감정들이 깨어난다. 기쁨(喜)ㆍ노여움(怒)ㆍ슬픔(哀)ㆍ즐거움(樂)ㆍ사랑(愛)ㆍ미움(惡)ㆍ욕심(欲). 칠정을 오롯이 느끼는 환상의 경험을 선사한다.

[ 청소년도 시민이다! ]

“저희는 오늘 대자보를 썼음에도 박근혜 선배님께 대답을 듣지 못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박근혜 선배님, 성심의 교휸을 기억하십니까? 진실, 정의, 사랑입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중고생이 많이 참여했는데요. 이번에 박근헤 하야도 중고생이 보고만 있을 게 아니라 먼저 앞장서서 시위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왔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잖아요, 우리나라가.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뽑았으니까 국민의 의견을 들어주셨으면 하고요. 꼭두각시 나라 말고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나라, 역사가 부끄럽지 않은 나라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대통령의 연설문을 맘대로 고쳤다는 것, 국가기밀들이 그런 일반인에게 공개됐다는 게 너무 안타깝고요. 세월호 침몰되기 전 7시간 동안 박근혜 대통령이 무엇을 했는지 의혹이 있습니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사람들이 죽어갈 때, 대통령이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게 제일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싶어요.”

“양심이 있다면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발 나가기 전에 우리가 궁금한 사항, 세월호 7시간에 뭐 했는지, 국정교과서를 왜 그렇게 만들려고 했는지 좀 밝히고 나갔으면, 또 책임을 좀 지고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왜 그렇게 국정교과서를 밀어붙이려고 하는지 너무나 궁금해요.”

“미래에 저도 어른이 되는데요. 제 아이가 ‘아빠는 촛불집회 그 때 당시 무엇을 했냐’ 물으면 부끄러울 것 같아서 나왔습니다. 한국사 선생님께서 박근혜 게이트에는 최순실이 엮이고 엮여 있어서 다 풀려면 정말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하셨습니다. 또 이렇게 여러 시민과 함께 행진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한 목소리를 내니까 너무 감동입니다. 기뻐요. 국민 여러분께 제가 이런 말을 좀 해도 되나요? 박근혜 하야 외치러 이렇게 광장에 나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야가 되면 축제를 벌이고 마음 놓고 행복하게 삽시다!”

“국민 여러분이 함께 모여서 함께 모여서 시위한 덕분에 이렇게 추운 겨울에도 광화문이 따뜻한 느낌입니다. 행복하고 보람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고등학생들 많아요. 다만 박근혜가 왜 퇴진해야 하는제 재대로 좀 알고 시위에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국민들을 무려 한달씩이나 추운 데서 덜덜 떨게 하는 대통령은 없을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수갑 차는 모습을 이불 속에서 좀 보게 해주세요.”

“이제 대한민국은 저희 같은 학생들이 성장해서 이끌어갈 나라입니다. 굳이 어른들만 이런 시위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편견이겠고요. 우리 학생들로 이런 시위에 참여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해야 하는 책임이 학생들에게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 옮기지 못한다. 귓전을 땅땅치는 다부진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어른의 비겁함을 통렬히 비판한다. 나또한 뻔히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나서면 너만 손해야! 그러니까 참아’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던, 용기 내지 못했던 비겁한 어른이기에 이들에게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행동이 따라야 할 것이다.

[ 청소년도 주권자다! ]

청소년, 그들은 기성미디어에 의존하지 않고 SNS를 활용하여 스스로 움직이는, 궁금하면 검색하고 확인되면 행동했다. 자율적으로 집회를 열고 민주집중제로 지도부를 뽑고 쓰레기까지 깔끔히 치웠다. 다양하고 자유로운 청소년들의 움직임은 민주주의 그 자체임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촛불집회에 참가했지만 정권을 바꾸는 대선 때 투표하지 못했다. 투표 연령 하향에 주저하는 국회 모습은 ‘지체된 한국 민주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아이러니다. 자연스레 ‘청소년 투표권’으로 생각이 이어진다.

단발머리를 싹둑 자르고 삭발에 나선 청소년이 있었다. 정권이 바뀐 뒤 첫 선거인 6.13 지방선거부터 청소년이 투표할 수 있도록 지난 4월 임시국회에서 선거법을 개정해달라 국회 앞 천막에서 43일간 호소를 해왔던.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국회 파행, 특검, 남북정상회담 등에 묻히고 말았다.

“중앙선관위는 청소년의 정치적 미성숙 근거가 타당하지 않다며, 이미 2016년 8월 투표 나이를 낮추는 선거법 개정 의견을 국회에 냈다. “18살 청소년은 독자적 신념과 정치적 판단에 기초해 선거권을 행사할 능력이 있다.”는 의견이었다. 이미 여러 국내법이 18살이면 결혼도 하고(민법), 운전면허를 따고(도로교통법), 군에 입대하고(병역법), 8.9급 공무원이 될 수 있도록 보장한다. 하지만 투표만 할 수 없는 ‘이상한 법적 충돌’이 바뀌지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가운데 한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16~18살에 투표할 수 있다.
한국이 ‘19살 투표’에 묶인 이유는, 자유한국당의 ‘나홀로 반대’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은 줄곧 투표 나이 인하를 반대한다. 자유한국당은 18살 투표가 허용되면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의 정치적 혼돈과 함께, 학생들이 정치적으로 선동당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자한당의 우려, 어이가 없다. 다시 ‘18살 투표’에 힘을 모으자. 만 19살부터 가능한 현행 선거권(투표할 권리) 나이를 한 살 낮춰 ‘18살 이상’으로 바꾸는 공직선거법이 개정될 수 있도록. 참정권이 없다는 것은 정치뿐 아니라 일터, 학교, 가정 모든 사회 구성에서 청소년 목소리가 배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정권의 대표격인 선거권은 헌법에서 보장한 시민의 기본권이라 할 수 있다. 청소년도 시민이다. 따라서 청소년도 기본권인 선거권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의제는 단지 청소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때 그 광장에서 촛불이었던 우리가 만들어낸 새로운 정치, 회복된 민주주의를 어떻게 보듬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연결돼 있으니 말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잊지 말자.
[ 우리가 촛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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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시요일
강성은 외 지음, 시요일 엮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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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후에 오는 것들

‘사랑 후에 오는’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시들이 한데 모여있다. 이별한 이들이 한데 모여 자신의 사랑을 그리고 이별을 이야기한다. 그 슬픔을 안으로 삼키며 가만가만 읊조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차마 억누를 수 없기에 그 울분과 아픔을 격하게 쏟아내는 이도 있다. 나는 그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이들의 연가를 듣는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나직이 소리내어 읽어보기도 한다. 찌질하기도 처절하기도 처연하기까지 한 시들의 향연이다. 알흠답다. 이토록 영롱하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이별이라니! 찬란한 슬픔이라니! 감탄한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책을 덮는다. 우습게도 그 사랑에, 그 이별에 스멀스멀 질투가 인다.
책의 뒷면. 시집에 실린 모든 시에서 한줄씩 옮겨놓은 시구들. ‘가만, 가만, 가만히’ 읽어본다. 그리고 몇 개를 골라 지금의 나를 적어본다.

언젠가 나도 그랬습니다. 언제나 ‘당신의 생각을 켜놓은 채’ ,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 나 잊고 나도 당신 잊고’ 이렇게 살아갑니다.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알기에.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기에.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 이라는 시구에 많이 아프다. 나, 아직도 사랑을 꿈꾸는가. 살짝 민망해질 찰나 윤종신이 떠올랐다. 그때의 내가 애정했던. 그는 말했다. 나이 50이 되기 전 ‘찐한’ 이별 노래를 한 번 더 불러보고 싶었다고. 그래서 탄생한 노래 <좋니>. 노래도 노래지만, 열창하는 그의 모습 자체가 한 편의 시라 생각한다.
고백컨대, 나는 아직도 사랑을 꿈꾼다. 사랑 후에 오는 이별 또한. 어쩌면 그것은 한낱 꿈에 불과할테니까.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일테니까.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 황인찬 ‘무화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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