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뒤쫓는 소년 창비청소년문고 30
설흔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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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뒤쫓는 소년. 글자 그대로 ‘책’을 뒤쫓는 소년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책을(등장인물 이름)’ 이 곧 뒤쫓는 소년이라는 의미도 있겠다. 실제로 책을 씨는 섭구 씨 뒤는 물론 그 무언가를 계속 쫓고 있으니 말이다. 참! 책을, 섭구. 주인공 이름이다.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한 번 들으면 절대 까먹을 수 없는 진정 듣보잡 이름. 흥미 게이지 급상승!

[ 책을 ] 

자꾸만 ‘책을’ 에 눈길이 멈췄다. 매끄럽게 넘어가지 못하고 주춤주춤. 왜 그럴까.
학습된 나의 뇌는 문장 속 ‘책을’을 바로바로 판단을 못한 듯 하다. 등장인물의 이름인 고유명사 ‘책을’인지, ‘책’이란 명사에 목적격 조사 ‘을’이 붙은 목적어인지.

책 내용을 거칠게 줄여보자면, 주인공 ‘책을’ 씨가 섭구 씨와 함께 저마다 남모를 사연이 담긴 ‘책을’ 찾고, ‘책을’ 구하고, 온몸으로 ‘책을’ 쓰는 여정이 담긴 이야기다. 책 곳곳마다 ‘책을, 책을...’이 나오니 정확한 내용 파악을 위해 필터링 과정을 한 번 더 거쳐야 했을터. 내 머리로선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을 거다. 나같은 독자를 위해 이름 뒤에 ‘씨’를 붙여 혼란을 줄이고자 했던 작가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주춤주춤’을 설명하기엔 충분치 않다. 늦된 머리의 반응은 그렇다 치자. 마음의 반응을 살펴봐야겠다.

책을 _______. 이번엔 ‘책을’을 목적어로 생각하고, 뒤따를 서술어를 떠올려본다. 책을 읽다, 찾다, 쓰다, 사다, 찢다, 태우다... 앗! 모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동반하는 말들이다. 행위의 주체가 되는 주어의 노력과 수고를 요하는. ‘애씀 동사’라 이름 붙여 본다. 애씀 그 자체는 물론 그것으로 변화될 무언가를 순간순간 떠올린 것은 아니었을까. 긴장과 설렘을 반복하며.
‘책을’ 이라 이름 지은 그이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이름 뒤에 어떤 것을 붙일지 혹은 붙여질지는 니 몫이라는 거지.

[ 책을 쓰다 ]
앞에서 말한 ‘책을’ 뒤에 붙는 애씀 동사 중 걸리는 아니 반짝 빛을 발하고 있는 ‘쓰다’ (쓰기에 대한 근거없는 들끓는 욕망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일터.) 그런데, 책을 씨도 쓴단다. 섭구 씨와 함께 길을 떠난다. 책을 쓰기 위해.

그래, 떠나자. 무너지고 부서지고 깨진 서재뿐인 이 집을 떠나자. 어디든 가서 책을 쓰자, 책을. 그런데 고조부의 책조차 읽지 않은, 게으르고 어리석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조금 삐뚤어지기까지 한 내가 과연 책을 쓸 수 있을까? 그것도 보통 책이 아닌 시들어 가는 제국을 구원할 수 있다는, 듣기만 해도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드는 대단한 책을? (30~31쪽)

둘은 냄새를 좇아 여섯 마을에 들르고, 가는 곳마다 책에 얽힌 사람들을 만난다. ‘책을 따르려다 새끼 손가락을 잃은 사람, 평생 쓴 책을 불태우는 사람, 소설책을 섞어 읽는 사람, 책을 게걸스레 모으는 사람’ 등. 그 속에서 책을 찾고, 책을 구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모험의 세계랄까. 책을 씨와 섭구 씨의 콤비 플레이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 그런데 이상하다. 책을 씨는 책을 구했는데 섭구 씨는 책을 썼다고 하니.

섭구 씨가 귀여운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간단해. 책을 씨가 쓰면 내가 보관하는 거지. 책을 씨는 집필자, 나는 보관자.”
“어라, 나는 책을 쓴 적이 없는데?”
섭구 씨가 호호 웃으며 말했다. “어제 썼잖아, 그야말로 온몸으로. 초짜치곤 제법 용감해서 감동했는걸.”
섭구 씨의 시원한 웃음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아하, 그렇군. 이게 바로 책을 쓴다는 의미로구나. 손이 아닌 몸으로 쓰는 책이라면 못 쓸 것도 없겠다 싶었다. 난 머리보다 손발로 하는 일에 훨씬 능하니까.(62~63쪽)

아하, 그렇군. 몸을 써야만 책을 쓸 수 있구나. 나는 왜 지금껏 글은 머리에서 쓰는 것이라 생각했을까. 몸을 쓰지 않으면 결코 어떤 것도 쓸 수 없는데. 모니터만 뚫어져라 노려본다해서 글이 나오는 건 아닌데.

몸으로 쓰는 책. 책을 씨처럼  자신이 직접 겪은 날 것 그대로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쓴 책을 일컫는 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떠올린 건 보다 원초적인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뿅! 나타났다 사라졌는데. 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직업란에 작가(그리고 러너)라고 쓰는 하루키. 그는 마라톤 풀코스를 25번이나 완주했다. 그러니까........
책을 쓰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체력과 정신력이 합쳐진 최고의 결정체가 바로 책인 셈이지. 때론 생과 사를 좌지우지할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는.

책을 쓰는 건 역시 대단한 일이었다. 책은 이번에도 제대로 효과를 발휘해 내 목숨, 그리고 귀애 씨의 목숨을 함께 살렸다. (122쪽)

[ 섭구 ]

(설마 이름만으로 영구, 맹구의 계보를 잇는 존재일거라 생각하지 않겠지.) 섭구 씨를 ‘책을 쓰는 사람의 수호신’ 이라 말하면 적절할까.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그 어떤 존재? 책을 씨는 섭구 씨가 한 권의 책이라고 생각하던데. 모르겠다. 심지어 이 책을 쓴 설흔 작가도 ‘섭구 씨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무것도 모른다’고 헸다.

“책을 계속 쓰는 한 섭구 씨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요?”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아마 섭구 씨를 다시 만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시 만나는 섭구 씨는 책을 씨가 만났던 섭구 씨는 아닐 겁니다. 섭구 씨는 섭구 씨이되, 똑같은 섭구 씨는 아니라는 거지요. 어쩌면 책을 씨에겐 똑같은 섭구 씨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249쪽)

섭구 씨는 책을 쓰는 사람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경우는 젊은 시절의 할머니였다. 섭구 씨가 내 나이 또래의 여인으로 나타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섭구 씨를 처음 보자마자 마음이 설렜던 이유 또한 알게 되었다. 섭구 씨의 모습은 바로 내가 꿈꾸는 사람의 모습이었던 것. (262쪽)

알려고 들면 들수록 더욱 더 아리송해지는 존재. 하지만 나 또한 섭구 씨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비로소 보이는 “나야, 책을 믿지.” 라는 섭구 씨 말. 섭구 씨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책을 믿는 존재. 걸리적거렸던 ‘책을’이 빛을 발한 순간이다. ‘책을 믿다’ 이 말을 내게 남기려고 그렇게도 ‘책을’은 날 괴롭혔나보다.

책의, 책에 의한, 책을 위한 <책을 뒤쫓는 소년> 책은 끝났지만, 다시 묻게 된다.
대체 책이 뭐길래?
돌고 돌아 다시 제 자리. 그래서 다시, 시작.
또 다른 책, 첫 장을 열고 만다.

“우리가 책을 펼치지 않는다면 책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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