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의 눈 창비청소년문학 84
주디 블룸 지음, 안신혜 옮김 / 창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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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었다. 이 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던 나는.
아빠의 갑작스런 죽음. 상실의 고통, 두려움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복해나가는 데이비처럼 나도 그랬다고 자신했었다. 아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30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아직도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말았다. 그 누구와도 심지어 엄마도 동생과도 함께 이야기하고 마음을 나누지 못했다. 나는 열 살, 동생은 일곱 살. 죽음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어렸기에 어쩌면 더욱 솔직한 느낌, 생각을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긴, 제이슨을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렇게 견디며 살아온 우리에게 닥친 언니의 죽음. 지독히도 외롭고 쓸쓸했고 추웠을 언니의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또다시 침묵을 선택했다. 그 어떤 말도 함께 나누지 않았다.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필사적으로 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울지도 않았다. 언니의 화장 순서를 기다리며 밥을 먹었던가. 갑자기 식당에 울려퍼진 엄마의 통곡 소리. 그런데 나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어떤 위로와 위안의 말도 무의미한,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도 모자랄 터에 내가 느낀 감정은 분명 분노였다. 그런 내가 또 너무 싫어 부글부글 이글이글 타올랐던 내 안의 그것 때문에 물만 계속해서 마셨떤 나를 떠올린다.

“분노를 느끼는 건 괜찮아. 하지만 화가 났다는 걸 인정하고 왜 화가 났는지 알아내려 노력해야 해.” (250쪽)

우리는 지금도 그들을 입 밖으로 차마 부르지 못한다. 감당할 만큼 수준의 딱 그만큼. 끊임없는 자기 검열을 통해 걸러진 딱 그것 만큼만 말할 뿐이다. 나머지는 안으로 더 깊은 곳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우리 사이에는 결코 넘어서는 안 될,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그래서 겉으로는 서로를 배려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엄청 조심스러워하고 있다. 그 벽을 괜히 건드렸다가는 피곤해질테니까. 감당하지 못할 후폭풍이 두려운 거다.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견디고, 해결하고 있을 거라고 주문을 걸고 있다. 매일매일.

“네가 뭔가를 물어봐도 엄마가 대답할 수 없을까 봐. 네가 아빠에 대해서, 그날 밤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할까 봐... 엄마는 그게 두려웠어. 엄마한테는 너무 힘든 얘기였거든...”
“난 오래전부터 아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 그런데 어마막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해서 속상했어.” (270쪽)

“우리는 모두 각자의 두려움에 맞서야 하고, 두려움에 직면해야 한다. 두려움을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모험을 할 것인가, 두려움에 갇힐 것인가.” (226쪽)

두려움. 책을 읽고 ‘나는 아직 두려움에 갇혀 있구나’ 깨달았다. 하지만 문제는 알게’만’ 되었다는 것. 현상을 파악하는 것으로 문제의 반은 해결된다고 하지만 모르는 소리. 알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간극이 생기기에 한없는 고달픔이 시작되고야 마는 것. 그래서 ‘차라리 모르기를’과 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이겠지.

그래서 두려웠다. 글을 쓰기가. 언제부턴가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하면 내 안의 그것들이 자꾸만 나오기 때문인데, 고백하자면 우연으로 읽게 된 이 책이 자꾸만 필연처럼 느껴진다. 1988년 아빠가 죽고, 지금은 2018년. 올해로 꼭 30년이다. 아빠 기일을 한 달여 앞둔 지금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아빠가 죽고 엄마, 남동생과 남겨진 데이비. 그들이 도망치듯 살던 곳을 떠나 친척집으로 가게 된 것이나 그곳에서는 어쩐지 적응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과 함께 적응을 못해 또한 힘들었던 나. 새롭게 만난 엄마 남자친구로 원망, 분노, 배신감을 느끼는 데이비와 나. 죽어가는 오티즈 아저씨의 모습과 겹쳐졌던 죽어가던 아빠 등등. 작품 구석구석에서 그때의 나를 생생히 소환해내기에 충분한 것들이 차고 넘쳐났다. 다만 그들은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도 집으로 돌아왔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제 저희가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아요. 우리끼리 홀로 설 때가 됐죠. 그래서 집으로 가려고 해요. 애틀랜틱시티 집으로 돌아갈 거에요”
“그래도 여기에 머물 순 없어요.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꼭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278~279쪽)

엄마도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원망보다 연민이 먼저 인다. 엄마도 두려웠겠지. 지금의 나보다 어린 엄마가 홀로 아이 셋을 건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하긴 나도 말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더 이상 여기서 살기 싫다고. 시간이 거꾸로 흐른 듯 도시에서 시골로 간 우리였다. 시골 생활은 며칠 만에 힘에 부쳤다. 멀고 멀었던 길을 걸어서 가야했던 학교가는 길. 무엇보다 한 학년 한 반이 전부였던 시골 학교에서는 그저 평범하고 보통의 존재였던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 가장 힘들었다. 숱한 따돌림과 무성했던 뒷말은 물론 지나친 관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매일매일 ‘우리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에게 ‘아직은’ 말하면 안된다고 매일매일 생각했었다.

다음 달, 아빠 기일에 엄마에게 물어봐야지 생각했다. 왜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는지, 엄마는 한 번도 집으로 돌아가야 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 말이다. 적고 나서 좀 아니 많이 놀랐다. 여태 단 한 번도 생각조차 못했던 말인데 너무 자연스럽게 글로 나와서. 모험을 감행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아빠, 언니 이야기도 함께 나눠볼 작정이다. 그러고보니 엄마는 아빠 제삿상에 언니 밥도 함께 올린다. 그동안 적당히 우리만의 예를 갖춘 후, 별 생각없이 밥을 먹었었다. 그런데 일년에 한 번 우리 가족 모두가 모여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이 있을까 싶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럴 수는 없다. 남은 조각들을 챙겨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289쪽)

서평 마감일이 하루 지났다. 사실 안 쓸거라고 차마 못 쓸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쓸 거리를 챙겨 밖으로 나온 걸 보면 쓸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두려움과 막막함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용기가 턱 하니 자리잡고 앉았다. 웃음이 난다.

라 비다 에스 우나 부에나 아벤투라(La vida es una buena avenyu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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