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지젝과 지저거리며 함께 머물기

막간에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에 대한 리뷰를 하나 옮겨온다. 본격적인 리뷰가 드물던 차에 반가운 글이면서 동시에 책에 대한 독해를 다시금 부추기는 글이다. 5월에는 나도 시간을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컬쳐뉴스(07. 04. 24) 지젝과 지저거리며 함께 머물기

현대사상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이름이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을 뒤이어 정신분석학의 힘을 가장 야심차게 (재)확장해놓은 슬라보예 지젝(1949~  )이 바로 그 이름이다(*지젝을 경유하지 않고 사유하는 일이 가능은 하겠지만 재미는 없을 듯하다). 따라서 그의 이력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젝을 읽기 위해서는 피해야 할 선입견이 있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된다. 그의 글은 이해하기 쉽다는 선입견이 바로 그것이다(*물론 지젝은 쉽다. 헤겔 혹은 라캉과 비교해보라! 다만 그가 혹은 우리가 기대한 만큼 '대중적'이지 않을 따름이다).

아마도 이 선입견은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라는 강단 철학자들의 비아냥거림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지젝이 자신의 논의를 설명하기 위해 대중문화의 예(특히 할리우드 영화, 심지어는 <타이타닉> 같은 블록버스트까지!)를 많이 들기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다른 현대사상가들에 ‘비해’, 즉 ‘상대적으로’ 그러한 뿐이다.

이 점은 “칸트, 헤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부제가 달린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를 읽을 때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이 책에서도 지젝은 <토탈 리콜>, <엔젤 하트>, <블레이드 러너>, <더티 해리> 같은 할리우드 영화 얘기를 곳곳에서 하지만, 그보다 백배는 더 많은 지면을 칸트와 헤겔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한정된 지면에 이 책의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수는 없고, 이 책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6장 「당신의 민족을 당신 자신처럼 즐겨라!」를 중심으로 몇 마디 하고자 한다.

6장의 핵심 테마는 “어떤 주어진 공동체를 묶는 요소는 상징적 동일화의 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하는 끈은 언제나 어떤 사물을 향한, 체화된 향유를 향한 공유된 관계를 함축한다”이다. 이 테마는 이 책의 부제에도 포함된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압축해 놓고 있으며, “기존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모든 비판이론의 궁극적 테마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지젝은 통상적인 이데올로기론, 즉 “이데올로기는 거짓 의식”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론은 철저히 ‘재현적’이라고 비판한다. 즉, 통상적인 이데올로기론은 어떤 사회적 내용(가령 현실의 지배구조)을 왜곡하여 잘못 재현한 것이 곧 이데올로기라고 본다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이데올로기가 정의되면, 우리가 기존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어떤 사회적 내용을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재현하는 것이 된다(한때 우리는 이 과정을 ‘의식화’로, 그 결과물을 ‘대항-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어떤 정치적 견지는 그 객관적 내용과 관련해서 아주 정확한(‘참된’) 것이면서도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역도 참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재현의 문제틀로서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이해할 수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없다. “어떤 주어진 공동체를 묶는 요소는 상징적 동일화(곧 이데올로기)의 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지젝의 말은 이를 뜻한다.

그렇다면 어떤 주어진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지젝은 ‘체화된 향유’로서의 ‘어떤 사물’이 바로 그런 요소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이데올로기의 작동원리를 의식의 차원에서 무의식의 차원으로 끌고 내려가 설명하는데, 이때 그가 기대는 것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다(아니, 오히려 지젝 식으로 해석된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라고 해야 정확할 듯하다).

 

 

 

 

 

 

 

 

 

 

라캉에 따르면 ‘향유’(juissance/enjoyment)란 쾌락(plaisir/pleasure)이 아니다. 향유와 쾌락을 동의어로 쓰곤 했던 프로이트와 달리(가령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라캉은 욕구(besoin/need)와 요구(demande/demand)를 구분하며 각각의 개념에 쾌락과 향유를 대입한다. 가령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기의 경우 배고픔이라는 생체적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식욕의 빨기’(succion)가 아니라 ‘쾌감의 빨기’(suçotement)를 한다. 이렇듯 욕구가 충족된 이후에도 추구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향유는 쾌락의 초과, 위반, 잉여이다. 또한 과도한 쾌락은 불쾌(고통)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쾌락 이상을 추구하는 향유는 도착적이기도 하다.

쾌감의 빨기는 아기가 어머니와 일체감을 느끼곤 하는 행위이기도 한데 이 행위는 곧 중단된다. 즉 젓 떼기를 하는 것이다. 아기는 잃어버린 일체감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쾌감의 빨기’를 반복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고, 이제 어머니의 젖꼭지는 “기다려 보지만 항상 결핍된 것”, 즉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라캉은 이를 ‘대상 a’(objet petit a/object little-a)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바의 ‘사물’(La Chose/the Thing)이다.

따라서 “어떤 사물을 향한, 체화된 향유를 향한 공유된 관계”가 어떤 주어진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한다는 지젝의 말은 “잃어버린 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반복의 고통 속에서 느끼는 쾌락”(즉 향유)이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시켜 준다는 말인데, 그에 따라 지젝에게서는 이데올로기의 위상 자체도 변한다. 즉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어떤 사회적 내용을 왜곡하여 잘못 재현한” 담론구성체가 아니라 우리가 왜 그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서도 ‘사물’(대상 a)을 얻지 못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상상적 답변이다. 그래서 지젝의 이데올로기는 환상(fantasy)의 구성물에 가깝다.

지젝은 프로이트와 라캉을 경유한 이런 정신분석학의 설명틀을 확장해 정신분석학을 정치학으로 탈바꿈시킨다. 가령 한 사회는 그만의 ‘대상 a’(사물)를 갖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일수도, 민족일수도, 계급일수도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고 자부하는 나라들, 요컨대 영국이나 미국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보통선거권이 인정받은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와서라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족이나 계급의 경계가 생각보다 그리 뚜렷하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고 있다. 즉 민주주의, 민족, 계급은 아직 우리가 결코 완벽하게 소유한 적이 없는 ‘대상 a’(사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난 20세기 동안 결코 완벽히 소유한 적 없는 민주주의, 민족, 계급의 이름으로 대규모 전쟁(내전이든 국제전이든)을 해오지 않았는가? 지젝이 “향유의 도둑질”의 역설, 즉 우리의 사물이 타자에게 접근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간주(왜냐하면 우리의 사물은 타자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와 타자를 구분해 주는 것이므로)되는 동시에, 타자에 의해 위협당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우리도 갖고 있지 않은 사물을 타자가 위협한다)는 역설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염두에 둔다면, 의식화나 대항-이데올로기의 창출을 통해 기존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지젝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대상 a’(사물)라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혹은 절대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거나, 향유가 충족되지 않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상상적인 환상(판타지)을 찢어발기거나. 파시즘의 반유대주의에 맞서 건국의 아버지 모세가 이집트인임을, 즉 유대인의 기원이 잡종이라는 것을 입증하려 했던 프로이트의 시도(「인간 모세와 유일신교」)가 전자의 경우라면, 지젝의 작업이 바로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것은 “예외된 한 사람”(homme moins un)이 되는 것일 게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거세 신화를 설명한 「토템과 터부」를 다시 읽으면서, 거세 위협에 복종한 아들들로 구성된 집단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논리적으로 복종하지 않은 아들이 ‘적어도 한 사람’(au moins un)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라캉은 발음상의 유사성에 착안해 “이 적어도 한 사람”을 “예외된 한 사람”(오모엥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오모엥젱들이 연대할 때 기존의 지배질서는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 오모엥젱들을 묶어줄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지젝은 아직 이 질문에 답을 해주진 않고 있으나 여하튼 계속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지젝의 최근 작업은 혁명가들을 다시 읽는 ‘혁명’ 시리즈, 그리고 “모든 이데올로기가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포스트모던한 오늘날, 동시대의 이론이 저지르고 있는 오류와 대결하며 기발한 해결책을 제안한다”고 예고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이다). 우리가 아직 지젝과 지저거리며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이재원_그린비 편집장)

07. 04. 26.

P.S.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는 올해 나올 예정인 책이며 국역본도 근간 예정인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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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퍼온글] 소쉬르와 언어학 참고문헌

국어학을 공부하시는 어느 분이 소쉬르 관련 문헌들에 대해서 조언을 구해오셨다. 아마도 이번에 <일반언어학 강의>가 재간된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조언은 '서평꾼'이 아닌 언어학을 전공하시는 분들에게 구하여 마땅한 것일 테다. 그럼에도 정중히 마다하지 못한 것은 그간에 이런저런 아는 체를 많이 해온 탓에 무작정 발뺌하는 것도 볼썽사나운 듯하기 때문이다. 해서 궁여지책으로 예전에 써둔 걸 옮겨놓는다. 원래는 다음카페 '비평고원'에서 라캉182님이 소개한 내용에 몇 글자 더 보탠 글이기에 필자는 두 사람으로 해야겠지만('비평고원'은 어제 언론의 '직격탄'을 맞고 신입회원이 600여명 가까이 늘어났다. 나도 즐찾이 16명 늘어나긴 했지만 비할 바는 아니겠다. 한겨레의 힘(?)을 보여주는 일례일 텐데 후유증(?)은 없으려나 걱정된다), 일단은 임의로 올려둔다. 이미지는 이번에 새로 붙인 것이다. 

 

 

 



1. 그의 저서
소쉬르, <일반언어학 강의>, 샤를르 발리, 알베르 세쉬에 편집, 최승언 역(민음사, 1990 초판)(샤를르 발리(Bally)는 (불어식으로) '바이이'라고도 표기됩니다.) 오원교 역의 <일반언어학 강의>(형설출판사)도 번역돼 나왔는데, 역시나 도서관에 의존해야 할 듯싶고(*민음사판은 이번에 다시 나왔다), 최승언 역의 <일반언어학 강의>에 대해 경악한 얘기는 제가 다른 글에서 썼습니다. 최승언 역의 <일반언어학 강의>에는 서두에 마우로 교수의 강의 주석본도 곧 번역돼 나오는 것으로 예고돼 있는데, 12년이 지나도록 아직 안 나오고 있습니다...

 

 

 



2. 입문서
조더선 컬러, <소쉬르>, 이종인 역(시공사, 1998). 조나단 컬러는 영미권에 소쉬르와 구조주의를 처음 소개한 이로서(<구조주의 시학>이 대표작) 신뢰할 만한 비평가입니다(<바르트>와 <문학이론>도 그의 책이다). 우리말 번역서는 이 책의 증보판을 옮긴 것인데, 꼼꼼하게 읽지는 않았지만, 읽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원서는 소쉬르 입문서로서 많이들 추천하는 책입니다...

C. 샌더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 김현권 역(도서출판 만남, 1996)는 말 그대로 일반언어학 강의의 주요 개념들을 정리해주고 있는 책입니다. 김현권 교수의 번역. 저는 이 책으로 <일반언어학 강의> 읽기를 때웠었는데, 요즘 다시 소쉬르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바르트도 그랬지만, 저도 랑그 연구자로서의 소쉬르보다는 랑가주 연구자로서의 소쉬르에 더 흥미를 갖게 됩니다. 랑가주 연구자로서의 소쉬르에 대해서 그래도 가장 자세히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은 마루야마 게이자부로의 <존재와 언어>(민음사, 2002)입니다. 원제는 '생명과 과잉'이고, 저자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소쉬를 연구자의 한 사람입니다. 1장은 그런가보다 했는데, 2장부터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3. 단행본 연구서
요하네스 페르, <소쉬르 언어학과 기호학 사이>, 최용호 역(인간사랑, 2002) 저도 아직 구입하진 않았지만(2만원!) 서점에서 몇 번 들춰보았습니다. 제목 그대로 언어학자이면서 (퍼스와 더불어) 현대 기호학의 창시자인 소쉬르를 다루고 있습니다(*퍼스의 기호학에 대해서는 <퍼스의 기호사상>(민음사, 2006)을 참조할 수 있고요).

김현권 외 편역, <비판과 수용:언어학사적 관점 (페르디낭 드 소쉬르 연구 제1권)>(도서출판 역락, 2002) 마침 오늘 산 책이네요. 제목대로 소쉬르에 대한 그간의 비판(1부)과 각국의 수용(2부)에 대한 글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2부에는 일본과 한국에서의 소쉬르 수용에 관한 장들도 들어 있습니다. 참고로 <페르디낭 드 소쉬르 여구> 총서는 4권으로 기획돼 있는데, 2권은 "비교역사언어학: <논고>를 중심으로"이고, 3권은 "일반언어학: 일반어어학 이론, 문헌비판적 연구"이며 4권은 "기호학: 아나그람, 전설, 기호학, 철학 등"입니다. 제가 제일 기대하는 건 역시나 4권입니다.

프랑수와 가데, <소쉬르와 언어과학>, 김용숙 역(동문선, 2001). 라캉 182님이 "소쉬르 연구의 결정판은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큰 연구서..김성도 교수가 자주 인용한 저자. 부담없는 가격과 두께! 내용은 두께에 반비례할 수도 있음!"라고 상찬하셨는데, 저로선 너무 비싸보이는 책이어서(!) 소쉬르 '쇼핑'을 나간 오늘도 사지 않았습니다...

 

 

 

 

김방한, <소쉬르>(민음사, 1998). 작고한 김방한 교수는 우리나라 1세대 언어학자입니다. 제자인 김현권 교수와 방통대의 언어학 강의를 맡기도 하셨고, 그 강의를 TV에서 몇 본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일반언어학 강의>를 평이하게 해설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데, 가장 큰 장점은 '2차 일반언어학 강의'가 발췌지만 부록으로 실려 있다는 것입니다. 김방한 교수에 대해서는 그의 자서전 <한 언어학자의 회상>(민음사, 1996)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김성도, <로고스에서 뮈토스까지>(한길사, 1999). 고대 김성도 교수는 외대 최용호 교수와 함께 본토에서 소쉬르를 전공한 '전문가'입니다(*김현권 교수는 국내에서 소쉬르 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 아직까지는 국내 소쉬르 연구의 최대치라고 할 수 있을 거 같군요. 한길사에 다니던 후배의 부탁으로 이 책을 절반쯤 읽고 서평을 쓴 바 있습니다...

김현권 외, <소쉬르의 현대적 이해를 위하여>(박이정, 1998). 국내 소쉬를 학자들의 논문과 번역모음입니다. 아마도 모여서 스터디를 하는 모양인데, 그 결과를 묶어낸 책입니다. 오래전에 산 책인데, 방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듯하군요...

로이 해리스,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고석주 역(도서출판 보고사, 1999) 라캉182님에 의하면, "저자 Roy Harris는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 1983년 영역과 주석을 출판한 저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부담은 없어서 사두긴 했는데, 아직 읽지는 않은 책입니다.

미셀 아리베, <언어학과 정신분석학:프로이드, 소쉬르, 옐름슬레우, 라깡을 중심으로>, 최용호 역(인간사랑, 1992) 아리베는 최용호 교수의 지도교수입니다. 최교수가 유학중에 번역한 책인데, 한동안 미뤄두고 있었지만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최교수는 <라캉의 재탄생>(창작과비평사, 2002)에 '라캉과 소쉬르'란 논문을 싣고 있기도 합니다.

 

 

 



루이 옐름슬레우, <랑가쥬 이론 서설>, 김용숙/김혜련 역(동문선, 2000) 흔히 '언어이론 서설'로 알려진 책인데, 주의할 것은 이때의 언어가 '랑그'가 아니라 '랑가주'란 것입니다. 불어에서는 이 둘을 구별하는데, 영어나 독어, 그리고 우리말에도 이 둘은 명확히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냥 랑그/랑가주를 언어/언어활동 정도로 옮기고 있습니다. 크리스테바의 <언어, 그 미지의 것>(민음사, 1997)도 원제는 '랑가주, 그 미지의 것'입니다. 어쨌든 엘름슬레우의 이 책은 얇지만, 그레마스가 '이 한권의 책!'으로 꼽은 책입니다(*그레마스의 책과 연구서로는 <의미에 관하여>와 <구조에서 감성으로>가 있다).

 

 

 



에밀 벤베니스트,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1, 2>, 황경자 역(민음사, 1993) 한불문화출판에서도 김현권 교수의 번역으로 1권이 번역돼 나왔었는데, 현재는 절판됐습니다. 적어도 구조주의에 대해서 말하려면, 소쉬르와 야콥슨 그리고 벤베니스트를 읽어야 합니다. 참고로 벤베니스트는 A. 메이예의 제자이고, 메이예는 바로 소쉬르의 제자입니다. 메이예의 책으론 <일반언어학과 역사언어학>, 김현권 역(어문학사, 1997)이 번역돼 있습니다.

벤베니스트, <인도 유럽사회의 제도 문화 어휘연구 1,2>, 김현권 역(아르케, 1999) 작년에 맘먹고(!) 산 책중의 하나입니다(*러시아어본도 구했다). 사실 그렇게 '전문적'이진 않고 고급 교양서 정도로 분류될 수 있는 책인데, 그냥 '사전'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을 거 같군요.

앙투안 아르노/클로드 랑슬로, <일반이성문법>, 한문희 역(민음사, 2000) 얇은 책이지만, 저도 아직 사지는 않은 책입니다. 참고로 언어학 관련서 중에서 욕심이 나는 책은 훔볼트 관련서들입니다. 그의 책들과 그에 관한 책들이 나오고 있으니까 한번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혹시 읽으신 분이 있다면, 정보를 주시길...)

4. 영어
<초보자를 위한 소쉬르('Saussure for Beginners)>, W.Terrence Gordon, Abbe Lubell, Writers & Readers, 1996. 도서관에서 빌려봤는데, 데리다가 한 얘기들은 실제로 소쉬르도 다 한 얘기다라는 지적이 들어 있습니다. 평이하기 때문에 번역 소개되면 좋을 거 같군요. 단, '정치적인' 소쉬르 얘기는 없습니다.

Saussure and Contemporary Culture

'Saussure and Contemporary Culture', Francoise Gadet, trans. Gregory Elliott. 라캉182님 덕분에 알게 된 책이군요. 나중에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책은 정말 많고도 많습니다(하지만, 없는 책들은 더 많습니다!).

 

 

 



덧붙임: 서정철 교수의 <기호에서 텍스트로>(민음사, 1998)는 평이한 구조주의/기호학 입문서이다. 소쉬르에서부터 옐름슬레우, 바르트, 그레마스 등에 이르는 언어학/기호학 사상을 해설하고 하고 있는 책이다. 서교수의 후속작으로는 <인문학과 소설텍스트의 해석>(민음사, 2002)가 있다. 여타 구조주의/기호학 참고문헌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03. 01. 30./ 07. 0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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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글샘 > 하버드 대학의 멋진 강의 노트...
오늘의 세계적 가치 - 세계의 지식인 16인과 하버드생의 대화
브라이언 파머 지음, 신기섭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수능 점수는 학생의 실력이 아닌 부모가 몰고 다니는 자동차를 더 정확히 예측한다.!"

그럴 법한 이야기다.

하버드 대학에서 16명의 인사들을 모시고 진지한 인터뷰 형식의 강의 결과를 책으로 내 놓았다.
그 강의 명은 <개인의 선택과 전 지구적 변화>이며 이 책을 여는 순간 진정 '변화'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이야기들은 전혀 각도가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지만, 정말 진지한 멘토링을 펼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일 서울대에서 이런 강의를 연다면 거기 어떤 인물들이 등장할까?

신지식인의 대명사 용가리 심형래? 영화를 100편 찍었다는 임권택? 박지성같은 스타? 부자 삼성맨 이건희나 아니면 시골의사 박경철의 경제학 강의?

기호 2번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 10년 가까이 지났다. 과연 기호 2번 대통령들이 보여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국 사회의 '변화'를 추구한 사람들은 결국 가진 자들의 편에 선 사람들이었음을, 그 한계가 너무도 잘 드러나는 것임을, 그리고 한국 사회의 '변화'는 정말 이제 시작에 불과하며 그 갈길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명백하게 보여주었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미국 내에서 '세계에서 가장 악한 나라'라고 스스로 비판하며, 미국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꼬집어 내며, 어렵긴 하지만 미국이 나아가야 할 모습을 제시하는 데 훌륭한 교과서가 되었을 것이다.

대학생 시절에 이런 책 몇 권은 밑줄 치면서 심사숙고하며 밤을 새워 읽을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민주주의는 인민이 행동하는 것이지 정부가 행동하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군산복합체 미국의 실체 구명에 주력하는 하워드 진 선생님의 글도 인상적이지만,

나눌 줄 아는 기업 지도자 에런 퓨어스턴과,
뛰어다니는 언론인 에이미 굿맨의 전화 통화도 정말 인상 깊다.

한겨레에서 매년 진행하는 "21세기의 교양, 상상력, 거짓말~~" 시리즈 같은 대담과 유사한 경향을 띠는 이런 강연이 <주류> 강단에서 울려퍼지지 않는 한, 아무리 수재들을 스카이 대학에 보내 봤댔자, 이 나라의 앞날은 '꽝'임을 생각한다.

대학은 <공교육>이어야 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국립대학들을 무상 교육으로 시켜 줄 필요도 있다. 교육의 질도 높이고... 그렇지만 한국의 대학들은 <사교육> 기관이다. 중고등 학교도 마찬가지... 개인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노력만 하는 곳이 바로 한국의 학교들이다.

교육부는 제대로 된 고민은 하지 않고, 북한 돕기 성금 모금하지 말라는 둥, FTA 흉보는 수업 하지 말라는 둥, 이딴 소리나 지껄이는 동안, 아이들은 멍청해 진다. 오로지 외우는 기술만 통달할 뿐.

오랜만에 대학 강의실에서 받아쓰기하며 강의 듣는 기분이었다.
이런 재미있는 책 또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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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물리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이번주 한겨레의 북리뷰에서 눈에 띄는 건 문학관련서들이고, 리뷰 밖에서 내가 주목한 건 영화관련서이지만(이 책들에 대해선 조만간 다룰 예정이다), 리뷰로서 처음 읽어본 건 물리학책에 관한 것이다. '거울 속의 물리학'이란 책제목도 평균점 이상이지만 '물리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란 리뷰 타이틀은 (따로 참조한 게 없다면) 이 주의 카피로 꼽을 만하다. 이래저래 심란하고 착잡한 일들이 많은 차에 제목만으로도 잠시 위안을 얻게 된다. '거울 속' 세상이 그립다...

한겨레(07. 04. 20) 물리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그리스의 마그네시아 지방에서 쇳조각을 끌어당기는 이상한 광석이 발견됐고, 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거기에 마그넷(자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인들은 또 모피에 문지른 호박이 목재나 천 조각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힘은 2000년 동안이나 이름이 없었는데, 1600년 영국 과학자 길버트가 호박을 뜻하는 그리스어 엘렉트럼이라 명명했고 그게 오늘날 전기를 뜻하는 일렉트릭이 됐다. 이 보이지 않는 두 힘이 근대 과학혁명과 함께 세상을 바꾸고 인류의 인식 차원을 흔들었고 인간 자체를 바꿨다. 현대문명은 거기서 시작됐다. 물리학 혁명은 곧 철학의 혁명이다.

1786년 이탈리아 과학자 갈바니는 죽은 개구리 다리에 두 개의 금속판을 접촉시키면 다리가 경련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금속판이 개구리 다리에 있던 전기를 방전시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볼타는 전기는 개구리 다리에 있는 게 아니라 두 금속판 접촉으로 생긴 것이고 그것이 개구리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는 걸 증명했다. 이것은 전지의 발명으로도 이어졌다. 덴마크 물리학자 외르스테드는 1820년께 전류가 흐르는 도선 가까이에 있는 나침반은 바늘방향이 바뀐다고 밝혔다. 전류가 흐르면 자기가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의 논문은 유럽을 흥분시켰다. 25년 뒤 이 논문이 “굳게 닫혀 어두웠던 과학의 문을 활짝 열어 빛으로 가득차게 했다”고 회상한 영국인 페러데이는 지금까지 상업적 전기생산의 원리가 된 전자기 유도현상을 정립했다. 이런 전자기역학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공식화한 사람은 맥스웰이었다.

맥스웰은 전자기파의 속도가 빛의 속도와 같다는 계산을 해냄으로써 전자기파가 빛 자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전자기의 수학적 형식은 강력과 약력의 신비를 해결할 수 있게 했으며,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4차원 외의 다른 차원이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최초의 중대한 과학적 제안으로 이어졌다. 1910년대에 이뤄진 이런 발견은 아인슈타인과 민코프스키가 제안한 시공간 4차원 연속체 개념의 원동력이 됐다.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중력이라 부르는 힘을 시공간의 곡률로 이해할 수 있다는 놀라운 발견을 해냈으며, 이를 설명하는 일반상대성이론의 등장은 중력과 전자기력의 통합 움직임을 낳았다.

중력이 4차원 공간 곡률에 의한 것이라면 전자기력은 어떤 차원의 곡률이 만들어낸 것일까? 이 두 힘의 통합시도가 중력장에 시간차원이 합쳐진 5차원이론으로 나아갔다. 1960년대에 양성자, 쿼크 등 미립자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한 끈이론이 등장했다. 미립자 세계에선 입자들이 끈으로 존재한다는 끈이론은 끈이 진동하는 방법에 따라 각기 다른 무수한 물리적 성질을 지닌 입자로 나타난다고 보는데, 우리가 사는 4차원 공간에서의 진동만으로는 입자들의 물리적 성질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고차원 공간을 상정하게 된다. 끈이론엔 수십차원까지 등장한다.

‘입자물리학과 우주론을 연결하는 대표적 이론물리학자’라는 로렌스 크라우스의 <거울 속의 물리학(HIDING IN THE MIRROR)>(영림카디널)은 ‘여분의 차원들(extra dimensions)이 내뿜는 신비로운 매력- 플라톤에서 끈이론, 그리고 그 너머까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을 왜 썼나. “나는 우리가 어디어 왔으며 밤의 장막 저쪽에는 무엇이 있는지와 같이, 물리학이 밝혀낸 신비에 대한 인류의 통찰력을 담은 책을 쓰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은 영혼을 통해 위안을 얻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식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요컨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존재를 가능케 한, 극미세계에서 초거대 우주세계까지 관통하는 원리를 알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를 불안과 미망에서 해방시키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겁내지 말고 상상력을 총동원하라.(한승동 기자)

07. 04. 20.

P.S. 저자 크라우스 교수의 책은 <스타트렉의 물리학>(영림카디널, 1996)을 필두로 하여 <스타트렉을 넘어서>(영림카디널, 1998), <외로운 산소 원자의 여행>(이지북, 2005) 등이 번역/소개돼 있다. 지난 2005년에 출간된 <거울 속의 물리학>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스타트렉의 물리학>, <물리학의 공포>, <제5의 원소>등의 책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이자 물리학자인 크라우스는 이 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고차원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인류사에 등장했던 고차원 탐구의 연대기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고차원 세계의 찬란한 유혹'이란 부제답게 고차원 세계와 그에 대한 탐구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한번쯤 또다른 세계로의 '점핑'을 꿈꾸어본 독자들이라면 입맛을 다시며 읽을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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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인식의 생물학적 뿌리

밤참을 먹으면서 잠시 여유를 부린다고 새로 나온 책들을 검색해보다가 대번에 '필을 받은 책'은 마투라나/바렐라의 <앎의 나무>(갈무리, 2007). 작년 바로 이맘때 <있음에서 함으로>(갈무리, 2006)가 출간된 바 있어서 벚꽃소식과 함께 '최근에 나온 책들'로 소개한 바 있는데(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857338) 다시 1년만에 그들의 주저라고 할 <앎의 나무>가 마저 출간된 것.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 예전에 <인식의 나무>(자작아카데미, 1995)로 출간된 바 있어서 '오래된 새책'에 해당한다. 역자도 같은 것으로 보아 약간 손질해서 다시 낸 듯하다. 물론 제목은 '앎의 나무'로 바뀌었고.

 

 

 

 

소개에 따르면, "칠레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구성주의적 관점의 생물학 책"으로 "지은이들은 이 책에서 삶과 앎의 근본과정에 관한 자신들의 체계관을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선보이고 있다. 다윈주의의 영향아래 생물을 객관적인 바깥세계에 얽매여 있는 일종의 '노예'로 보는 종래의 관점과는 달리 이들은 생물의 '자유함'을 다양한 생물학적 지식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거기서 핵심적인 개념이 '오토포이에시스'이다. 나는 작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칠레 출신의 인지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움베르또 마뚜라나; 1928- )의 대담집 <있음에서 함으로>(갈무리, 2006)이다. 책은 독일어 원저가 2002년에 나오고, 대본이 된 영역본이 2004년에 나왔다고 하니까, 따끈한 책이다. 마투라나는 흔히 동료인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찍지어서 불리는 이름인데, autopoiesis, 즉 '자기생산' 혹은 '자가생산'의 개념을 창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국내에는 이미 <인식의 나무>(자작아카데미, 1995)란 책이 오래전에 소개됐었는데(나도 그 책을 통해서 이름을 처음 접했다), 마투라나는 자기조직 체계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함께 최근에 인문학에서는 부쩍 자주 눈에 띄는 이름이 되었다."

독어판은 영어판과 마찬가지로 1987년에 출간됐고, 영역본의 경우엔 지난 1992년에 개정 3판이 출간됐다. 이번에 나온 국역본 갈무리판은 자작아카데미판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인식의 나무>는 내가 따로 원서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 전작인 <오토포이에시스와 인지>(1980)는 오래전에 복사해둔 책이다. 추세로 보아 이 책은 내년 이맘때 번역본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07.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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