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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들뢰즈에 대한 헤겔적 비역질

비공개 리뷰로 분류했던 글을 페이퍼로 옮겨놓는다. <문학과사회>(2006년 가을호)에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에 대한 서평으로 게재되었던 것이다. 분량 제한 때문에 '들뢰즈와 헤겔'에 관한 내용만 간추렸는데, 사실 책은 한편으로 에이젠슈테인의 <이반 대제>론으로도 읽을 수 있을 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최근에 에이젠슈테인론을 대학원 수업시간에 읽다가 <신체 없는 기관>을 다시금 떠올리게 됐다). 하지만, 그걸 다 음미하기도 전에 지젝은 서너 권의 책을 더 써낼 것이다!..

우리 영화 <왕의 남자>의 끝장면에서 광대 장생은 줄 위에 앉아 연산군을 희롱하며 재담을 늘어놓는다. “아, 이놈이 기생들 요분질이 시시해지니까 이번에는 사내놈하고 붙어먹는 짓도 서슴지 않는데, 그 비역질이 보통 비역질과 달라서 밥이 나오고 비단옷이 나오고 벼슬까지 나오는 비역질이더라!” 그런데, 이 비역질이 비단 절대권력자만의 것이 아니라 철학자의 것이기도 하다면 어쩔텐가? 철학사가 바로 그러한 비역질의 산물이라면? 그리고, 이 ‘비역질의 철학’이 ‘순진무구의 철학자’ 질 들뢰즈의 주특기였다면?

들뢰즈 자신이 한 대담에서 밝혀놓은 터라 특별한 비밀도 아닌 이 사실을 “들뢰즈를 다루는 라캉주의적 책”(p.10)의 저자가 놓칠 리 없다. 지젝이 인용하는바 들뢰즈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사를 일조의 비역, 혹은 같은 얘기지만, 무염시태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었지. 나는 어떤 작가의 등에 달라붙어서 그의 애를 만들어낸다고 상상했지... 하지만 그 아이가 괴물 같다는 사실 역시 필수적인 것이었지.”(p.98)
 


 

 

 

 

 

 

 

그리고 이러한 ‘비역질의 철학적 실천’을 지젝은 <신체 없는 기관>에서 들뢰즈에게 그대로 되돌려준다. “요컨대 우리가 들뢰즈 자신 뒤에 달라붙는 행위를 감행하고 들뢰즈에 대한 헤겔적 비역질이라는 실천에 관여하는 것이 왜 안되겠는가?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다.”(pp.101-2)


사실 ‘기관 없는 신체’라는 들뢰즈의 상용구를 ‘신체 없는 기관’으로 뒤집은 표제 자체가 들뢰즈의 뒤에 달라붙으려는 지젝의 전략을 암시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화(dialogue)가 아닌 조우(encounter)'라고 서문에서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할 때 그 ‘조우’의 장면으로 우리가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는 것은 ‘뒤에 달라붙는’ 장면이다. 즉, 지젝을 따라읽으며 우리가 이 ‘소책자'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들뢰즈의 ‘얼굴’이 아니라 ‘뒤통수’이다(지젝은 자신의 책을 'booklet'이라고 지칭했는데, 번역본의 분량은 본문 400쪽이지만 원서는 213쪽이다). 들뢰즈 자신은 보지 못하는 ‘또 다른 들뢰즈’ 말이다.

 


그렇다면, 왜 들뢰즈인가? 그건 지젝 자신이 짚어주고 있는 바대로, 최근 10년간 그가 “현대 철학의 중심적 준거점”으로 출현했기 때문이다(참고로, 지젝이 보는 현대철학의 3항 구도는 '들뢰즈-데리다-라캉'이며, 이것은 '스피노자-칸트-헤겔'이라는 근대철학적 구도의 반복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언제부턴가 ‘저항하는 다중’ ‘유목적 주체성’ ‘반-오이디푸스’ 같은 들뢰즈식 개념들이 마치 ‘공통 통화’처럼, 진보와 저항의 이론적 근거처럼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는 이렇듯 ‘유행하는 들뢰즈 이미지’, 곧 반-헤겔적, 반-정신분석적 들뢰즈의 이면에서 훨씬 더 급진적이고 파괴적인 들뢰즈를 읽어낼 수 있다(이때의 들뢰즈는 헤겔적/라캉적 들뢰즈이다!). 다시 말해서, 지젝이 도입하는 것은 ‘들뢰즈 대 들뢰즈’, ‘들뢰즈에 대립하는 들뢰즈’의 구도이고 그 긴장이다.


지젝에 따르면, 들뢰즈의 최고의 책 <의미의 논리>와 최악의 책 <안티-오이디푸스> 사이에는, 곧 “의미-사건의 비물질적 생성의 불모성과 관련된 들뢰즈”와 “존재의 물화된 질서에 맞서 생성의 생산적 다수성을 찬미한 들뢰즈” 사이에는 양립불가능한,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이 놓여 있다(지젝은 들뢰즈가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을 청산하고 쓴 <시네마>를 통해서 <의미의 논리>에서의 들뢰즈, 본래의 들뢰즈로 회귀하는 것으로 본다). 그는 아예 들뢰즈가 자신의 이전의 입장이 처한 곤궁으로부터 쉬운 도피처를 가타리에게서 찾은 것이지 않겠는가라고 제안한다(철학사에서 그러한 도피/회피의 사례는 드물지 않다면서).


‘잠재적인 것’(잠재태)과 ‘현행적인 것’(현실태) 사이의 대립을 ‘생산'과 '재현'의 대립, ‘생성’과 ‘존재’의 대립과 동일시함으로써 들뢰즈는 유물론으로부터 관념론으로 퇴행한다. 그럴 경우 “생산의 고유한 현장은 잠재적 공간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잠재적 공간에서 구성된 현실로의 바로 그 이행”이고 “생산은 근본적으로 잠재성들의 열린 공간에 대한 제한이며, 잠재적 다수성에 대한 규정이자 부정”(p.49)이라는 ‘의미의 논리’의 결과를 간과하게 된다.  . 


사실 “들뢰즈의 위대한 반헤겔적 모티브는 절대적 긍정성, 즉 부정성에 대한 그의 철저한 배격”(p.108)에 놓여 있다. 그때 스피노자주의자로서 들뢰즈가 상정하는 헤겔은 ‘순진무구한’ 헤겔이다. 즉 “헤겔은 존재의 순수 긍정성에 부정성을 도입하며 또한 헤겔은 분화를 긍정적 일자의 종속적/지양가능한 계기로 환원하기 위해 부정성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지젝의 반격은 “헤겔이 궁극적으로 부정성에 대해 행하는 것은 전례 없는 부정성 그 자체에 대한 ‘긍정화’가 아닌가?”(p.108)란 반문이다


헤겔에 대한 들뢰즈의 단순화는 “칸트에 맞선 혹은 칸트를 넘어선 헤겔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간과하게 만든다. 들뢰즈는 자신이 증오해 마지 않는 헤겔을 그답지 않게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읽는다(마치 헤겔의 뒤에 달라붙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듯이). 그래서, “헤겔은 칸트로부터, 자기투명하고 완전히 현행화된 존재의 논리적 구조를 표명하는 절대적 형이상학으로 회귀한 자”(p.118)란 이미지만을 반복한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 헤겔의 통찰이야말로 들뢰즈적인 것이다.“하지만 헤겔이 칸트에게 여하한 긍정적인 내용도 덧붙이지 않는다면, [칸트적 체계의] 간극을 채우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헤겔의 ‘절대지’는 ‘모든 것을 아는’ 터무니 없는 입장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경로가 어떻게 이미 진리 그 자체인지에 대한 통찰, 절대자가 어떻게 정확히 - 들뢰즈의 용어로 말하자면 - 자기 현행화의 영원한 과정의 잠재성인지에 대한 통찰이라면 어찌할 것인가?”(pp.118-9)


들뢰즈에 대한 지젝의 이러한 독해, 혹은 달라붙기가 산출해내는 것은 헤겔=들뢰즈=라캉의 ‘기이한 등가계열’이다(지젝은 들뢰즈=라캉의 테마에 대해서도 ‘오이디푸스-되기’ ‘환상’ ‘남근’ 등의 모티브를 통해서 입증한다). 이것이 어쩌면 “참을 수 없는 괴물”(p.103)이어서 들뢰즈는 헤겔을 자기 특유의 비역질, 혹은 ‘자유간접화법’에 의해 전유될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로 고양시켜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지젝이 하고 있는 일은 들뢰즈가 꺼려 했던 바로 그 일이다.   


“들뢰즈는 헤겔이다”라는 일종의 무한판단, 바로 그것이 ‘들뢰즈에 대한 헤겔적 비역질’, 보통의 비역질과는 다른 ‘비상한 비역질’을 통해서 우리시대의 광대-철학자 지젝이 얻어내는 결과이다. 그리고 책의 2부에서는 그 결과의 ‘결과들’을 과학, 예술(영화), 정치라는 세 가지 주요 영역들에서 차출해낸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흔히 말해지는 ‘들뢰즈적 정치’의 곤궁과 불능을 드러내는 대목들인데, 지젝이 단언적으로 미리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혁명적 전복에 관한 그 어떤 가능한 관념이라도 ‘반-오이디푸스적 반란’이라는 문제틀과 총제적으로 단절해야 한다.”(p.199)


지젝이 이 책을 헌정하고 있는 조운 콥젝은 “이제부터 들뢰즈에 대한 모든 독해는 이 중요한(필수적이기까지 한) 책을 통해 우회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예언한다. 스피노자에 대한 들뢰즈의 무조건적 존경을 빗대어 지젝은 “스피노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p.72)라고 반문하는데, 그 반문을 조금 비틀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지젝을 읽지 않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06. 08. 05./ 07 06.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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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헤르메스의 빛으로](20)라틴어, 가난함을 넘어

 


* 경향신문(2007. 6. 1)   / [헤르메스의 빛으로](20)라틴어, 가난함을 넘어
입력: 2007년 06월 01일 15:36:11
그리스어에 압도당한 초창기

라틴어는 로마의 동남쪽에 위치한 라티움(Latium) 지역의 말이었다. 계통상으로는 산스크리트어, 희랍어, 게르만어와 함께 인도-유럽어군에 속한다. 라틴어는 현대 서구의 주요 언어의 모태가 되는 말이면서 동시에 학문, 종교, 문화의 배경에서 아직도 맹주 노릇을 단단히 하고 있는 고전어(古典語)이다. 서구의 근대어인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로마니아어, 불어 등이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물론 직계는 아니지만, 독일어, 영어의 발전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또한 예컨대 법학, 의학, 신학, 문학, 사학, 철학은 물론 자연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주요 개념과 술어의 대부분이 라틴어라는 점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비록 지금은 사어(死語)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부잣말인 라틴어도 처음부터 부자는 아니었다.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의 말을 들어보자.

라틴어로 학문하기의 모범을 보여준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1483년에 지롤라모 디 마테오가 필사한 수고본)
“로마에서 글을 다루는 학문(ars grammatica)이 처음부터 제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다. 이 학문이 제대로 대접을 받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 때는 나라(의 문화)가 척박했고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기에, 자유교양 학문에 큰 힘을 쏟아부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 학문의 초창기 모습은 따라서 특기할 만한 사항이 없다. (중략) 그들이(아마도 로마에서 활약했던 학자들) 공적 자리든 사적 모임이든 그리스어와 라틴어, 두 언어로 강의했다는 사실은 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일들은 고작 그리스 작가의 작품을 번역(해석)하는 정도였다. 설령 라틴어로 뭔가를 저술했다 할지라도 청중 앞에서 큰 소리로 낭독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문(법)학자와 수사학자에 대해서’ 제1장)

라틴어가 가난했던 시절에 대한 보고이다. 이 시절에 로마 학자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그리스 작가를 모방하고 번역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훈민정음이 처음 창제된 시절, 한글 텍스트 대부분이 ‘월인석보’ ‘두시언해’ 등의 언해본이라는 점에서 우리 한글의 초기 상황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라틴어가 가난함은 또한 다음의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당시 로마의 교육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라틴어를 구사하는 로마인들이 아니었다. 로마의 학교를 장악했던 교사들 대부분이 그리스 출신 노예들이었다. 그리스 노예들이 로마의 학교를 장악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라틴어로 된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단적으로 라틴어 최초의 문학 작품이 노예 출신인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가 라틴어로 번역한 ‘오딧세이아’(기원전 272년 작품)라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로마인들이 그토록 사기와 기만의 대명사로 여겼고, 그토록 혐오했던 영웅 오디세우스의 귀향이야기가 라틴어로 된 첫번째 문학 작품이었고, 이 작품이 로마의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라틴어가 초기 시절에 얼마나 가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닌 게 아니라, 라틴어의 가난함은 그리스어와 비교해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로마인들은 라틴어로 접할 수 없었던 세계를 그리스어를 통해서 알게 된다. 이 앎은 무엇보다도 학문적 경이로움으로 로마인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 앎은 앎의 차원에서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로마인들이 그리스어를 통해서 알게 된 새로운 앎은 로마라는 국제도시에서 벌어지는 온갖 종류의 사건·사고를 해결하고자 할 때 요청되는 인문학적 사유 방식도 제공하였다. 제국과 대도시의 경험이 없었던 로마인들은 이러한 사태를 이미 경험한 그리스인에게서 인간과 삶에 대해서 사유하는 방식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그리스어는 학문적 관점에서뿐만이 아니라 생활의 유용함에 있어서도, 콘텐츠의 양과 질에 있어서도, 모든 면에서 라틴어를 압도해 버렸다.

이러한 이유에서, 대부분의 로마 지식인들의 그리스어 숭배는 대단했다. 대표적으로,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칼을 맞아 죽는 순간에도 그리스어로 “아들아, 너도야”(kai su, teknon!,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아우구스투스편 제82장)라고 했다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리스 정신 세계의 담지자이며 매개자인 그리스어가 구축한 의미 세계가 라틴어 의미 세계를 압도했기 때문에, 곧 라틴어의 가난함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현상이었다. 이런 사정을 자연학자이자 시인인 루크레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도 결코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리스인들이 발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라틴어 시문(詩文)으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선명하게 새겨내는 일이 어려운 일임을 말이다. 특히 처음 접하게 되는 사태와 말의 가난함 때문에, 자주 나는 단어들을 새롭게 만들어서 시작(詩作)을 수행해야만 하기에 말이다.”(‘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제1권 136~139행)



자족적 학문체계 갖추며 자립

라틴어의 가난함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자연학자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었다. 말을 주 도구로 삼고 있고, 말로 먹고 산다 할 수 있으며, 말에 삶을 싣고자 하는 집단인 시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시인 호라티우스의 입장을 살펴보자.

“만약 어쩔 수 없이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것들을 새롭게 말을 만들어 표시해야 하는 경우라면, (중략) 중용의 적도를 지킨다는 조건에서 신조어를 자유롭게 제조할 수 있는 허가권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새로이 생겨 난 말과 새롭게 만든 말들도 곧 신뢰를 얻을 것이오. 그리스어 원천에서 절도를 지키면서 새로운 단어들을 길어온다면 말이오. 로마인들이 카일킬리우스와 플라우투스에게 허용한 ‘신조어’ 제조권을 베르길리우스와 바리우스에게선 박탈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미 카토와 엔니우스의 혀(lingua)가 조상들의 말을 부자(ditaverit)로 만들었고 사물들의 이름을 처음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내가 약간의 새로운 단어를 만들 수 있다 해서, 질투와 시기 받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의미를 살려낼 수 있도록 말을 새롭게 만드는 일은 시인들의 특권이고, 이는 ‘항상’ 허용되었고 언제나 허용될 것이오. 마치 곤두박질치며 기울어 가는 한 해를 따라 숲을 채웠던 잎들이 떨어지듯이, 그렇게 처음에 있던 단어들도 그렇게 시들어 사라지고, 젊음의 힘이 그러하듯이, 새로운 단어들이 태어나서 자라 번성하고 만발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오.”(‘시학’ 제46~59행)

라틴어로 학문과 지혜를 증명하고 가르치고 있는 미네르바 여신 상
시인답게 호라티우스는, 자고 나면 새롭게 다가오는 세계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사실 늘상 새롭게, 항상 다르게 나타나는 감정의 양상, 즉 서정(敍情)의 세계를 라틴어로 규정해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 결국 호라티우스는 자기만의 고유 느낌을 표현하는 데에도 그리스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역시 라틴어의 가난함 때문에 생겨난 문제이다.

결국 ‘라틴어 가난함’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인이 취한 방법은 그리스 고전 텍스트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언어와 언어 사이에 있는 경쟁력이 문제가 아니라, 사유와 사유 사이에 있는 경쟁력에서 라틴어는 그리스어를 감당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치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한 치를 더 깊게 따질 수 있는 사유와 한 길을 더 내다볼 수 있는 관조의 힘 때문에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의 사유와 반성의 결과를 직접 수용키로 한다. 호메로스 이후, 수많은 시인과 철학자, 역사가들이 세워놓은 그리스어에 축적된 삶에 대한 반성과 세계에 대한 시각과 인간에 대한 이해는 어느 한 순간, 어느 하루 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로마인들은 번역을 통해서 그리스 고전을 직접 수용한다. 곧 고전의 번역이란 점에서는 아마도 로마가 최초의 르네상스 시대일 것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키케로다. 그는 라틴어로 학문(學問)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는 라틴어로 된 개념이 학문을 구성하는 개별 문장들의 술어로 사용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라틴어의 가난함이 극복될 수 있음을 정확히 간파한 인문학자(?)였기 때문이었다.



고전어로 영구히 살아남을 생명력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라틴어의 가난함은 극복되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non uno die!). 라틴어의 가난함은, 라틴어가 독자적인 문명 혹은 문화의 담지자이자 주체로 그리고 자족적인 체제의 언어로 성장했을 때, 비로소 극복되었기 때문이다. 라틴어로 세계를 분석할 수 있고, 이렇게 분석된 세계를 라틴어로 재현시킬 수 있으며, 이렇게 재현된 세계가 보편적인 접근을 허용하는 동시에 독자적이면서 고유한 역사를 담아낼 수 있을 때, 라틴어는 생존 능력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지식과 앎을 다른 외부 언어 세계가 아닌 라틴어 자체 세계 안에서 생산-조달할 수 있는 자족(自足)적 학문 체계를 갖추었을 때, 라틴어는 자립할 수 있었다. 라틴어로 자연과학이든, 철학이든 자유로이 학문 활동을 할 수 있을 때, 라틴어는 독자적인 생명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한 루크레티우스의 노력을 보라! 또한 라틴어로 삶의 아픔과 기쁨을 정밀하고 세밀하게 그대로 그려낼 수 있고, 이러한 묘사의 배경을 반성하고 따질 수 있는 개념 체계를 확보할 때, 라틴어는 자족적인 체제의 언어가 되었다. 호라티우스와 키케로의 고민을 보라!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라틴어는 고전어(lingua classica)로 영구히 살아 남을 수 있는 생명력(vis vitae)을 확보하였다. 비록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말만은 텍스트를 통해서 살아 남았다. 구어로서의 기능은 비록 소멸했지만, 세상을 보는 거울이면서 저울 역할을 담당하는 고전어로서 라틴어는 아직 살아있다. 아니 라틴어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라틴어로 그려낸 로마인들과 그들의 삶이 살아있는 셈이다. 이렇게 한 언어가 살아 남는다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했던 공동체가 살아 남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결론을 대신해서 잠깐!, 자고 일어나면 급변하는 한국의 일상과 세계화의 경쟁 체제 아래에서 한국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한국어의 가난함에 대해서 심각하게 그리고 본격적으로 고민을 해야 하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 아닐까? 그러니까 한국어가 부자 되는 법에 대해서 말이다.

〈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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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진화론의 진화

* 담론비평(2007. 5. 27)  / 이기적 유전자, 사회생물학, 그리고 통섭

 

[연대대학원신문 153호]진화론도 진화한다 ... II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장 wukheehong@yahoo.co.kr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지 150년 가까이 되는 지금, 진화론은 새로운 변혁을 맞고 있다. 20세기 초 미국의 생물학자들에 의해 학문의 주류로 자리 잡은 진화론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생물학 뿐만 아니라 사회학, 심리학, 윤리학 등과 빠르게 교류하면서 이른바 학문이라는 서말의 구슬을 꿸 수 있는 요긴한 실과 바늘로 자리매김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의 광범위한 적용은 예상 가능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이 비판에 맞서 신선한 대답을 던져주어야할 당사자들은 어째 150년 전과 동일한 대답을 반복하는 듯 하다. 이번 호 대학원신문은 지난 호에 이어 다위니즘의 현재성을 사회생물학을 중심으로 짚어본다. 그리고 다위니즘의 논쟁적인 대답들이 어떻게 비판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는 다위니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편집자>

생물학의 결정론과 환경론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다. 제 아무리 양육 환경이 좋더라도 출신의 근본은 속일 수 없다는 의미라 하겠다. 그런가 하면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근본은 보잘것없지만 당사자가 자수성가했을 때 흔히 일컫는 말이다.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두 속담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생물학계에서 치열하게 논의되었던 두 관점, 즉 결정론(determinism)과 환경론(environmentalism)을 각각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결정론이란 생물체의 모양, 습성, 행동 등을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는 주장이다. 환경론이란, 물론 그런 천성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태어난 이후 성장할 때의 주변 환경에 의해서 더 많이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결정론과 환경론의 대립은 사실상 인류 역사의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흑백 인종차별과 히틀러의 순혈주의가 결정론적 주의(主義)에 근거한 것이라면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강조되고 있는 교육평등 주장은 환경론에 뿌리를 두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결정론은 20세기 들어서 다시 유전자결정론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부모로부터 전해지는 모든 비밀이 유전자(게놈)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주장이다. 다윈 진화론이 “생물의 대부분 형질이 유전된다”고 주장했고 이후 유전의 매개물질이 DNA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비로소 유전자결정론이 확립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

   
 
▲ 리처드 도킨스
 
유전자 결정론이 생물학의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등극할 수 있게 된 데에 제일 큰 영향을 미친 과학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를 최우선으로 들 수 있겠다.


도킨스는 1976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40억년 전 스스로 복제본을 만드는 분자가 처음으로 원시 대양에 나타났다. 이 고대 복제자의 운명은 어떠했는가? 그 복제자는 절멸하지 않고 생존기술의 명수가 됐다. 그러나 그 복제자는 자유로이 뽐내고 다니는 것을 오래 전에 포기했다. 이제 복제자들은 거대한 군체 속에 떼지어서 로봇 안에 안전하게 들어있다. 그것들은 원격 조종으로 외계를 교묘하게 다룬다. 그것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으며, 그것을 보존하는 것만이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것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의 생존기계이다.”


도킨스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DNA 또는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며, 그 기계의 목적은 자신을 창조한 주인인 유전자를 보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모든 생명체의 모든 생존 행위는 자신과 동일한 종류의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후세에 남기고자 하는 유전자 자체의 이기적(利己的)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돕는 이타적(利他的) 행동 역시 자신과 공통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유전자의 세계는 비정한 경쟁, 끊임없는 이기적 이용, 그리고 속임 수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현상은 경쟁자 사이의 공격에서뿐만 아니라 세대간, 그리고 암수간의 미묘한 싸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유전자는 유전자 자체를 유지하려는 목적 때문에 원래 이기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이기적 유전자들은 자기복제를 위해서 생물의 몸을 빌려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도킨스는 설명한다.

사회생물학의 대두

   
 
▲ 윌슨의 '사회생물학'
 
1970년대 도킨스가 영국에서 ‘이기적 유전자’론을 들고 나왔을 때 미국에서는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이 사회생물학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타고난 종합가라고 할 수 있는 윌슨은 당시의 동물행동학 연구에 커다란 회의를 품었다. 자연에서는 침팬지들이 사냥에서 획득한 먹이를 집단 내의 다른 침팬지들에게 나누어준다든지, 또는 같은 집단 내의 다른 새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다든지 하는 이타적인 행동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동물행동학은 기껏해야 그런 행동이 전체 집단을 위한 개별 개체들의 희생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윌슨은 그런 이타적인 행위조차도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생물들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본능적인 행동으로 해석하였다. 


윌슨이나 도킨스는 모두 동물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진화와 유전자의 영향력에 주목했다. 그런데 도킨스가 유전자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주로 관심을 두었다면 윌슨은 그런 유전자의 진화로 나타나게 된 사회 현실, 즉 동물과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회학적 현상을 해석하는 데에 연구의 중점을 두었다. 윌슨은 이런 자신의 시도에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회생물학에서는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의 사회적 행동이 진화의 과정에서 자연선택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확립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행동의 대부분은 각 개체들에 내장된 유전자들에 의해서 통제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개미들이 여왕개미를 중심으로 엄격한 위계질서를 구축하고 고도의 분업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나 대부분의 동물들이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행위나 최고의 배우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수컷끼리 생명을 걸고 혈투를 하는 행동 등이 모두 그 내면에는 자신이 소유하는 유전자를 보다 많이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전략전술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이 등장한 이래 1970년대를 거치면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던 이유는 분명하다(1975년 이후 30년 동안 사회생물학을 주제로 해서 발간된 책만 해도 수백 권을 간단히 뛰어넘는다). 우리 인간도 동물계의 일원이 분명한 바, 인간이라고 해서 사회생물학이 제시하는 이론에서 자유로울 수는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통섭, 지식의 대통합은 가능한가?

윌슨의 사회생물학 이론은 남녀간의 분업, 부모자식간의 유대, 가까운 친척들에게 행하는 고도의 이타성, 근친상간 기피, 이방인에 대한 의심, 부족주의, 집단 내 순위제, 남성 지배 등 많은 사회적 관습들이 사실은 인간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모두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결정에 관계하는 심리적 본성의 근본은 우리 몸속에 깃들어있는 유전자라는 것이 윌슨의 주장이다.


이런 윌슨의 관점은 1998년 <컨실리언스: 지식의 통합>이라는 저작의 발간으로 다시 한 번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통섭으로 번역되었던 컨실리언스(consilience)라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더욱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이 책에서 윌슨은 인류 역사를  “이제까지 별개의 영역에서 독자적으로 추구되었던 미지에 대한 탐구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서로 통합되어 새로운 세계 탐구를 도모하게 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지난 200년 동안 인류가 획득한 지식은 대부분 전문화 과정을 통해서 얻어졌다. 그 결과 제반 지식이 사회과학과 인문과학, 순수과학, 예술 등으로 구분되고 다시 무수히 많은 전문 분야들로 가지치기했던 나머지 이제 지식의 통합은 꿈도 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답답한 현실 속에서 윌슨은 제반 지식의 통합 가능성을 엿보는데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통합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고 설파한다. 생물학은 물리학과 화학의 지원 없이는 더 이상 수행될 수 없으며 물리학 또한 생물학의 영역을 넘보고 있는 것이 현실의 추세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과학의 통합이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어째서 자연과학과 인문학과 예술 통합 역시 가능하지 않겠는가? 윌슨은 이미 자연과학이 심리학과 인류학, 사회학 등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또 예술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과학의 예술에 대한 기여는 단적으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윌슨은 진화생물학이 지식의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문화와 종교가 제아무리 우월하고 우리의 심령이 제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결국 우리 자신이 생물학적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진화의 과정을 거쳐 왔으며 우리 몸 역시 생물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바로 이 점에서 진화생물학은 사회과학에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몸에서 두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두뇌과학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감각적으로 인식하고 어떻게 언어를 구사하는지 등에 대한 탐구는 곧 생물학의 영역이자 심리학과 인류학의 영역이기도 하다. 윌슨의 통섭론 입장에서 본다면 앞으로 과학은 점점 더 인간 본성의 이해에 더 많이 기여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인간 본성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화생물학이 21세기 과학 발전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을 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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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울리히 벡과 이민문제

프레시안에서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프레시안에서 인터뷰한 건 아니고 독일신문 '디 차이트'(독일의 '더 타임스'쯤 되나?)와의 인터뷰 기사를 우리말로 옮겨놓은 것이다. 주제는 이민 문제이다. 최근에 나온 하종오 시인의 시집 두 권도 우리 주변의 이민 노동자들 문제를 다룬 것이어서 리뷰 기사를 같이 옮겨놓았다. 유럽에서만큼 '직접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도 다민족, 다국적 사회로 진입해가고 있는 상황이므로 참고할 만하겠다(최근 '국경'이란 주제가 한국문학의 주된 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점도 덧붙여 챙겨둘 만하고).   

프레시안(07. 05. 23) "왜 사람은 자본처럼 '超國'하면 안 되는가?"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점점 더 세계를 불평등하게 구획한다. 못 사는 나라의 국민들은 생존을 향하여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꿈꾸며 위험을 감내하고 국경을 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복잡하고 비싼 비자 발급의 절차를 완수하지 못하고 국경을 넘는 순간 그들은 곧장 범죄자가 된다. 현대사회에서 누군가 범죄자라는 것은 시민사회로부터 합법적인 격리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그들은 법의 이름으로 기본권의 상당 부분을 제약당한다.


  
다시 한 번 끔찍한 여수의 출입국 관리소 화재 사건을 떠올려 보자. 한번쯤 왜 그들이 한반도 남단의 어느 항구 도시에 범죄자로 낙인 찍혀 상당한 날들 동안 감금되어 지내야 했는지, 과연 그것이 정당한 조치였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게다가 그들은 정말로 화재 경보 시설도, 화재 진화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어느 인권 후진국의 감옥에 갇혀 원인 모를 화마를 당해 자신의 생을 마감해도 마땅할 악행을 저질렀던 사람들이었던가?


  
한참 전부터 이민으로 들끓고 있는 유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내놓고 있는가? 이미 1980년대에 현대 사회학의 명저로 손꼽히는 <위험사회>를 저술해 우리의 지성계에도 잘 알려져 있으며, 노무현 대통령도 탐독했다는 <적이 없는 민주주의>의 저자인 세계적인 석학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학 교수(사회학) 역시 자신의 지역이 앓고 있는 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진지한 처방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벡 교수는 독일의 <디 차이트(Die Zeit)>와의 인터뷰에서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혔다. 이 신문 5월 12일자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이민은 범죄가 아니며 인권이다"라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인식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그는 "이민문제는 이민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며 우리 스스로 구축한 경계체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나아가 그는 이민에게 씌워진 범죄라는 굴레를 벗기기 위해 그것을 합법화하되 '이민세'의 도입과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대안적인 관리체계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유럽과 우리의 맥락은 다소 상이하지만, 이주 노동자의 사회통합 과제의 심각성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한국 사회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에 분명 그의 주장에는 진지하게 경청할 부분이 있다. 이에 <프레시안> 독자에게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는 벡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필자가 전문 번역한 것이다(☞원문 보기)(박명준/기획위원ㆍ전 막스플랑크 사회연구소 연구원)

- 당신은 국경을 열자는 말을 하려는가?
  
"우선 이민 문제의 상당부분이 이민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 협소하게 구축한 '경계체제(Grenzregime)'를 통해 이민문제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 하지만 이민 문제라는 게 오랜 역사를 지니는 것인데….
  
"그렇다. 이민문제는 오랜 국민국가체제에 뿌리 박고 있다. 국민국가라고 하는 틀 안에 있으면서 우리는 사람을 움직이도록 만들려 한다. 오늘날 유연성과 이동성–스스로를 변화시킬 태세를 갖추는 것–은 높게 평가된다. 그렇지만 누군가 보다 잘 지낼 수 있고, 보다 좋은 삶의 기회를 예상할 수 있는 그 어디로 이동해 가려는 태세를 지니는 것은 그가 국경을 넘어서는 바로 그 지점에 이르러 우리에 의해 범죄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이동성(Mobilität)이 아니라 이민(Migration)이라고 명명되며, 이는 우리가 구축해 놓은 '경계체제'를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국경을 아예 없애야 한다는 말인가?
  
"문제의 핵심을 짚자면, 이동성이 극대화되고 있는 세계에서 이민은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민은 인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경계 안에 갇혀 국민국가적인 컨테이너 안에서 하는 영토적인 사고가 만들어 내는 범죄와 같은 것으로 취급될 행동이 결코 아니다. 우리(독일)의 교회는 정당이나 노조에 비해 이러한 관점에서 이민을 보다 잘 정의내리고 있다. 이민자들은 잠재적인 범죄자가 아니다. 그들은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며 그것을 위해 위험을 감내할 준비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 이민을 인권으로 간주하는 것은 엄청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는데….
  
"지금껏 우리는 높은 이동성을 지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자본이 세계적으로 이동하는 것을 경험해 왔다. 자본가들은 자본의 이동성에 맞추어 명백히 국경을 넘어서는 행동을 하고 있다. 정보라는 것도 이미 오래전부터 경계를 초월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유독 사람이 국경을 넘어서려 하면 바로 그 순간 엄청난 긴장과 갈등이 나타난다. 한편으로 우리 특히 서구는 인권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수용하는 것에 경주해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삶의 조건을-내지는 생존의 조건을–향하여 국경을 넘어서 움직이려 할 때에 우리는 정지 신호를 보내고 있다. 우리가 보내는 정지 신호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순간, 그들은 불법을 저지르는 범죄자로 취급된다. 왜 국경을 넘는 이민도 한 국가 내에서의 이동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어떤 것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논쟁을 하려 하지 않는가?"
  
- 이민을 규제 없이 진행되도록 하자는 말인가?
  
"우리는 이민을 즉각 위험한 것으로 매도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으며, 그러한 방식으로 이민을 저지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저지는 성공할 수 없다. 유럽에서는 이민에 대항하여 더 견고한 법률과 외부를 향해 점점 더 높은 장벽을 세워 우리들을 보호하려고 해 왔다. 하지만 불법 이민은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불법 이민자들이 없다면 우리의 많은 사회적인 서비스들이 결코 정상적으로 영위되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문제는 기업가적인 에너지에 충만하여 보다 나은 자신의 삶을 살아보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어떻게 합법적인 길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 그렇다면 하나의 길이 존재할 것 같다. 바로 유럽연합(EU)의 확대 같은 것 말이다.
  
"옳다. EU의 확대로 인하여 과거의 경계체제는 이제 모든 회원국들을 위하여 제거되었다. 그것은 '국가들의 이민(Lädermigration)'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은 EU의 확대를 통해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능하지 않다고 여겨 온 새로운 통행질서(Durchlässigkeit)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반면 이제 우리는 이민을–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법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관리(steuern)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민세(Migrationssteuer)의 도입과 같은 것은 그것을 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다.
  
- 이민자들에 입국금(Eintrittsgeld)을 부과하자는 말인가?
  
"그렇다. 이리로 와서 일하려는 사람으로 하여금 적절한 기여금을 내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민세다."
  
- 그것이 어떻게 제정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민세의 부과방식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이 시점에서 이민세 관련 법안의 제정 방식이나 그 이민세의 부과 수준은 아직 쟁점이 아니다. 이민세의 도입과 같은 방식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사고 실험이 우선 중요하다. 이민의 합법화는 새로운 긍정적인 영향력을 지닐 수 있다. 이미 합법적인 산업화 단계에 이른 범죄 도주 행각의 기반을 없애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출입국 통제업무를 담당하는 관료체계를 철폐하도록 할 것이다. 이민을 하나의 부정적인 현상으로 간주해 온 유럽식의 사고의 고착도 이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이민자들이 우리가 그들을 수용토록 하기 위하여 분담금을 지불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부가가치의 창출을 위해 기여하는 가운데 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민세는 이민에 대한 우리의 관념 자체를 변화시킬 것이다."
  
- 만일 이민세가 이민자들의 '관리'를 위해 쓰인다면, 그것이 이민을 더 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금 또 다른 불법적인 방식의 이민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새로운 장애물로 기능할 가능성이 있지 않나?
  
"현실적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험을 해야 한다. 이민세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관찰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세금을 상이한 방식으로 부과해 볼 수 있다. 이민을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탈범죄하기 위해서는 이런 실험이 필요하다. 이민을 범죄화하여 생산해 내는 경계체제를 완화시켜야 하며, 불법화는 종식되어야 하고, 그것으로부터 현재 이득을 취하고 있는 (진짜) 범죄자들의 기반을 뿌리 뽑아야 한다.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알콜 금지의 사례와 비교해 보고 싶다. 알콜을 금지하는 곳에서 국가는 알콜의 남용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범죄를 만들어 내 왔다. 스웨덴이나 1930년대 미국에서의 알콜 금지가 높은 범죄율을 만들어냈던 것을 생각해 보라."
  
- 하지만 만일 이민세가 사고실험을 넘어서 현실화 되려면, 전 유럽 차원에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당신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단순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국가로 하여금 이민자들의 통합을 위한 재정 지출 부담을 덜고 이를 통해 사회 적응 프로그램 같은 것들을 만들어 그들이 사회의 새로운 하층민이 되거나 새로운 문맹집단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도록 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하는 세금의 부과에 의견일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예컨대 프랑스에서 이제 막 시작되고 있듯이 그러한 논의는 현재 출발단계에 있다. 아직 어떤 모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구조는 기초임금의 보장을 완전고용에 대한 대안으로 삼아 보려고 사고했던 과거 프랑스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본다. 그것에 대해서는 그 사이에 많은 논의가 더 진전되었고 구체적인 모델들도 논의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민세에 대한 사고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유효한 경계체제에 대한 사고가 고정화되는 것을 해체시키는 작업이다. 우리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시각'을 발전시켜야 하고, 국경을 넘어서서 사고해야 한다."
  
- 합리화와 포퓰리즘의 수단을 통한 코스모폴리탄적 제안이라고 보면 될까? 과연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까?
  
"기꺼이 그 작업을 나의 과제로 삼도록 하겠다."

한국일보(07. 05. 23) 詩, 한국의 아시아인들을 말하다

이제 물러설 데가 없다. “낯선 남자 둘이 문 열고 들어 오자 / 젊은 네팔리는 창문을 뒤어 넘었다“(<단속>) 적어도 골절이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 보자. “동남아인 노동자들이 돈 모아서 돌아가면 / 자기네 나라에서는 부자가 된다고 / 한국인 노동자들은 모을 돈이 없다고 / 동남아로 기계를 옮겨가는 게 더 남은 장사라고”(<체불>) 어설픈 동정은 금물이다. “비수기에 봉급 제때 챙겨 받고도 / 성수기 오면 봉급 더 올려 받으려고 / 동남아인 여종업원 둘 직장을 옮겼다.”(<몸값>)

공장주들이 철저히 ‘생계형’일 때, 문제는 달라진다. 자본 대 임노동, 착취와 피지배의 도식을 선뜻 들이댈 수 없다. “공장주는 늙은 장모를 모시고 와서 / 전기 재봉틀 앞에 앉혔다 / 밤새워 옷을 박지 않으면 / 젊은 네팔리의 진료비를 댈 수 없었다”(<단속>). 모두 한국 사회의 없는 자들이다. 중견 시인 하종오(53)씨가 뿌리 뽑힌 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큰 공장은 아예 불법 체류자들을 고용할 수조차 없게 돼 있으니까요.” 21세기 한국판 프롤레타리아는 시적으로 어떻게 존재하는가.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다룬 <국경 없는 공장>, 동남아 국제 결혼 문제를 시로 옮긴 <아시아계 한국인들>(이상 삶이보이는창 발행)을 나란히 냈다. 별세계의 사람들처럼 여겨졌던 그들이 그의 삶 속으로 들어 온 것은 3, 4년 전. 사업 하는 지인의 주변에서 풍경처럼 눈에 띄던 그들이 정서와 내면을 가진 인간들로 비치기 시작했다.

“25년째 살고 있는 면목동의 오래 된 지하 가내 공장에서 외국인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통역은 엄두도 못 낼 상황, 다만 고통의 무게만이 가슴에 와 닿았을 뿐이다. 그래서 이번 시들은 서정적 접근보다 서사적 접근이 강하다. 설익은 다민족 사회, 한국의 적나라한 모습은 <아시아계…>에 그려져 있다. 열차 객석에 앉아 동남아 말로 잠꼬대하던 그들은 칭얼대는 아이를 한국말로 달랜다.

다르게 생겼다 해서 학교에서 따돌림 받는 아들을 보며 냉가슴 앓는 필리핀인 어머니, 한국 남자와 외국 여자가 결혼은 했지만 서로 속내가 달랐음을 확인하고 돌아 서는 한 쌍의 이야기 등 수록 시들은 날만 새면 부르짖는 세계화 타령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고발한다. “이제 3세대까지 확산될 그들에게 가난의 재생산 구조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시는 차갑기까지 하다. “시인은 감정이입해서도, 동정이나 연민해서도 안 되죠.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는 겁니다.” 냉정한 시선, 소설과 같은 시란 올 초, 도달한 결론이다. “이제 소설 같은 시를 써 보고싶어요. 감정 개입 없이 서사가 진행되는, 소설 같은 시죠 .” 감정의 진정성이 사라진 이 시대에 대한, 하종오식 대응책이다. “진실은 시인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곳에 있어요.”

강화도에 칩거하면서 김포의 공장, 외국인 노동자 등 급변한 우리 현실을 똑똑히 봐 온 시인에게는 현재 600여 편의 미발표작들이 햇빛 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집착을 끊어 버리니 3개월째 담배에 손 안 대고 살아요. 단, 시에 대한 집착만 못 끊고 이러는 거죠.”

07. 05.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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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퍼온글] 라캉 읽기에 관하여

2002년 가을에 라캉 읽기에 대해서 몇 자 적어둔 글을 옮겨놓는다. '라캉 읽기의 몇 가지 방식'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말투로 보아 라캉 입문서를 묻는 질의에 대한 응답이었던 듯하다. 그 사이에 변화된 사정에 대해서 얼마간 보충하도록 하겠다.

 

 

 

 

현재 라캉 읽기에 있어서 대표적인 선두 주자들이라면, 슬라보예 지젝과 브루스 핑크를 들 수 있을 겁니다. 국내 출판계에서도 프로이트 전집 발간 이후 차츰 라캉 읽기쪽으로 독서층의 관심을 이동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물론 그 독서층이라는 것이 몇 줌이나 되랴 싶지만, 푸코나 들뢰즈의 대한 열광적인 반응을 재연할 수만 있다면(그래봐야 1만부 미만일 거라는 제 짐작이지만) 그리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그것이 출판계의 요구/관심일 테고, 다른 한쪽에는 서구의 첨단 이론이나 철학을 수입/소개하는 데에 어떤 소명의식을 느끼는 일련의 지식인(지식분자)들이 있습니다.

이미 플라톤이나 프로이트 등과 같은 '거장'의 반열에 들어가 있는 라캉은 20세기가 산출한 가장 난해한 저작(들 중의 하나)의 생산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치 문학에서 제임스 조이스가 대학이란 제도 안에서 박사/교수들이 생활해 나갈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주었듯이 라캉 또한 알 듯 모를 듯한 이론과 도식(수학소)들을 통해서 (라캉을 아는)지식인들과 (라캉을 모르는) 일반인들을 가르는 준거 역할을 충실히 해나갈 것입니다.

물론 현재로선 라캉에 대한 앎이 우리 사회에서 대단한 상징적 권력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의 이론이 대중화될수록, 그래서 대중에게 라캉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중요한 사상가로 각인될수록, 즉 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수록 라캉에 대한 지식은 곧 권력화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겠지요. 아시다시피 이미 프랑스 정신분석학과 라캉에 대해서는 셰리 터클의 <정신분석적 정치>(<라캉과 정신분석혁명>(민음사, 1995)으로 번역됨) 같은 책이 나와 있습니다.

 

 

 



다시 지젝과 핑크로 돌아옵시다. 혹자는 지젝에게서 임상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는데, 사실 그것이 지젝의 라캉 읽기/해석에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자면, 한국에서의 모든 라캉 읽기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임상입니다. 임상은 임상에 관한 책을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또 프랑스에서 라캉식 정신분석의 자격증을 따온다는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국내에서 법적으로 그러한 정신분석이 공인되어 있지 않는 한 말입니다. 국내의 일부 정신분석의들이 라캉식 치료법을 어깨너머로 응용/적용한다고 해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 해야 '흉내'이고 대개는 '사이비'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지젝은 라캉을 임상과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갔고, 그의 생산성이 보여주듯이 그러한 접근은 꽤나 성공적으로 보입니다.

 

 


 


<향락의 전이>에서 지젝 자신이 고백하듯이 그가 대중문화 텍스트를 읽는 데 라캉을 이용한 것은 일차적으론 그 자신이 라캉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론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사례를 찾듯이, 아니 사례를 통해서 더 잘 이해하게 되듯이, 지젝은 (자신이 읽기에도) 난해한 라캉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나 대중소설들을 동원한 것인데, 뜻밖에도 성공을 거둔 것이고, 그것은 라캉 이론을 더 풍부하게 확장시켜 나가는 데 기여합니다.



보다 정통적인 의미에서 라캉의 '주석가' 역할을 하는 핑크는 이러한 지젝의 작업을 상당 부분 보완해 주는 듯합니다(이들은 알렝 밀레르가 모는 라캉 정신분석학이란 쌍두마차의 두 마리 말과는 같아 보입니다). 핑크는 이미 국내에 번역된 <라캉과 정신의학>(원제는 <라캉식 정신분석에 대한 임상적 입문>)과 <라캉의 주체>를 통해서(*국역본이 근간예정이다), 그리고 세미나에 대한 주석서들의 편찬을 통해서 새로운 라캉 읽기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곧 그가 새로 번역한 영역판 <에크리>도 다시 나온다고 하지요(*핑크의 완역본 <에크리>는 올해 출간됐다).

이 두 마리 말, 지젝과 핑크는 꽤 절친한 사이로 보이는데, 그것은 아마도 똑같이 밀레르의 세미나를 통해서, 즉 후기 라캉을 통해서 라캉에 접근해 나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라캉에 대해 다시 흥미를 갖게 된 것도 순전히 이들의 작업 때문이고, 이들에 의해서 소개받은 후기(70년대의) 라캉 이론이 갖는 파워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라캉 이론은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수십년간 몇 차례의 탈바꿈, 혹은 이론적 방점의 이동에 따라 진화해 온 것입니다. 단순화시키면, 상상계-상징계-실재(계) 순으로 그 방점이 이동해 왔고, 밀레르 사단은 실재에 대한 라캉의 이론을 중심에 놓고 그 이전의 작업들은 재해석 혹은 '번역'(핑크 자신이 쓴 용어입니다)합니다. 그리고 이 후기의 라캉은 사실 <에크리>(1966) 이후의 라캉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 <에크리>가 국역된다고 해서 라캉에 대한 우리의 기존의 이해(구조주의자 라캉!)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고, 후기의 세미나들이 마저 번역돼야 할 듯합니다. 물론 그 세미나들에 대한 주석서들과 참고서들도 함께 소개돼야 하겠지요.

 

 

 


지젝과 핑크, 그리고 다리언 리더의 만화책(<라캉>)을 제외하면, 국내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라캉 연구서들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중심으로 라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근거해서 라캉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진행합니다(<철학의 외부>에서 이진경도 그렇게 한정된 라캉의 상을 소개하고 그의 '구조주의'를 비판하더군요). 조금 과장되게 얘기하면, 우리가 접하고 있는 것은 어떤 동일한 라캉이 아니라 라캉'들'입니다(*지젝은 '라캉 대(對) 라캉' 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라캉 이해에 가장 시급한 것은 그 라캉'들'을 윤곽지어줄 수 있는 교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왜냐하면 라캉 자신은 그러한 차이들에 대해서 친절하게 해명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부분적인 라캉에 대한 소개로 이해를 대신하려는 시도들은 그간의 것으로 충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젝과 핑크의 책들이 보다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번역되기를 기대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작업에서 비춰지는 라캉이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유용할 거 같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그러한 유용성에 비추어 볼 때, 몇몇 라캉 연구자들의 젠체하는 태도도 충분히 용인해줄 수 있을 겁니다. 그마저 없다면, 무슨 보람으로 그 머리아픈(!) 일들을 해나간단 말입니까?...

02. 09. 30/ 06. 08. 22.

P.S. 다리언 리더의 <라캉>(김영사, 2002)에 기대어 국내에서 라캉 읽기의 지름길(?)에 대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 다리언 리더는 라캉의 법적 상속자인 자크 알랭 밀레르(밀러) 사단의 일원으로 보이는데, 런던에서 개업하고 있는 정신분석가라고 한다. 책의 말미에 더 읽기(Further Reading)로 라캉의 1차 문헌과 그에 관한 2차 문헌 해제를 싣고 있다.

라캉의 <에크리>(1966)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인데, 영어권에는 셰리단의 발췌 번역(1977)으로 소개돼 있고, 이 책은 국내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리더에 의하면 그 번역이 썩 좋지는 않은 편이고 또 내용도 난삽하다(*지금은 핑크의 완역본이 나왔으니 셰리단의 영역에 의존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래서 권하는 것이 세미나인데, 밀레르에 의해 20권 가량(?)으로 편집되고 있는 불어본 세미나는 대학 도서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나처럼 불어를 못 읽는 독자는(그의 책은 웬만큼 불어를 하는 사람들도 읽어내지 못한다) 영어본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는데, 1,2,3,7,11,20권까지 5-6권 정도가 영역돼 있고, 브루스 핑크가 주석서가 2-3권 나와 있다(1,2권, 11권). 참고로 러시아어로는 <에크리>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상태이며 세미나만 5권 정도가 번역/소개돼 있다.

 

한국어본에만 의존하려고 할 경우 사정은 더 안 좋은데, <욕망이론>(문예출판사, 1994)이라고 발췌 번역된 라캉의 책은 셰리단의 책을 중심으로 번역한 것으로(그러니가 중역이다), 50년대 라캉의 중요한 글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읽기가 쉽지 않다(부분적으로 지나치게 의역하고 있다). 아니카 르메르의 <자크 라캉>(문예출판사, 1994)은 구조주의 시절의 라캉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이 책엔 라캉의 서문이 실려 있다), 이 역시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소쉬르 이후의 구조주의 언어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리더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라캉의 초기 논문에 대한 자세한 분석으로 라쿠-라바르트와 낭시의 'The Title of the letter: a reading of Lacan'이 있다. 국내 도서관들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다(라캉이 칭찬했다는 책이다). 하지만 전문적이다. 일반 독자들로선 핑크의 'Lacan to the Letter'가 가장 요긴하겠다.  

다리언 리더가 적극 추천하고 있는 책은 벤베뉴토의 <자크 라캉의 저작>인데(하나의학사에서 김종주에 의해 <라깡의 정신분석 입문>으로 번역돼 나왔다), 이 역시 우리말 번역본을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거의 절판된 책이다. 그리고 필수적인 참고서라 할 사전. 딜런 에반스의 <라캉 정신분석 사전>(인간사랑)이 번역돼 있는데, 국내 라캉학자들이나 호사가들이 번역진으로 망라돼 있지만, 편차가 심하고 용어도 아직 통일되어 있지 않아서 가급적이면 원서와 같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요컨대 라캉에 대한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거의 없는 셈이다. 리스크가 필수적인 것.

 

 

 



그래도 라캉을 읽으려고 한다면, 그래도 번역이 괜찮은 지젝이나 핑크의 책을 권할 수밖에 없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부분적인 오역과 불성실한 교정에도 불구하고(인간사랑에서 나온 모든 책에 공통적이다) 읽을 만하다. 하지만, 역시나 쉬운 책은 아니며, <삐딱하게 보기>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같은 책으로 시작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은 <향락의 전이>인데, 아쉽게도 이 책은 지젝의 번역본 가운데 최악이다. <라캉과 정신의학>이라 번역된 브루스 핑크의 책은 다 읽지 못했지만, 좋은 평을 얻고 있는 책이고, 다이언 리더도 적극 추천하고 있다. 그 책과 짝이 되는 것이 <라캉의 주체The Lacanian Subject>인데, 도서관 등에서 구해볼 수 있으며 두껍지 않은 분량이기 때문에 도전해 볼 만하다.

라캉의 전기서로는 루디네스코의 <자크 라캉>(새물결)이 가장 자세하다. 하지만, 다소 근거없는 사실들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그나마 라캉 읽기에서 다행인 것은 적극 추천할 만한 2차 문헌이 많지 않다는 것. 때문에 한줌의(?) 책만 열심히 읽으면 된다.

02. 10.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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