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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평점 :
김용철 변호사의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영화 <의형제>의 강동원이 생각났다. 전혀 무관해 보이는 이 두 사람이 죽어가면서 던진 단말마는 우연하게, 또 정확하게 동일했다. 강동원이 생물학적으로 죽어가면서, 김용철이 사회학적으로 죽어가면서 던진 말. "나는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특히나 김용철 변호사는 책의 전반부를 '배신'이라는 규정에 대한 자신의 해명으로 채워나가고 있을 정도다.)
우선, <의형제>의 강동원 경우 : 그는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공작원으로서 자신을 가르치고 키워준 당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그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죽이는 것이든, 자신에게 인간적인 면모로 다가와 주었던 사람을 죽이는 것이든 상관없다. 당의 명령과 조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하며, 괜한 낭만에 도취되어 당을 위한 충성을 잊어버리는 것은 곧 '배신'이다. 그렇지만 강동원은 그 '배신'을 택한다. 자신의 부모가 죽어가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 아이를 감쌌다. 당을 배신한 친구의 삶에 대한 몸부림 앞에서, 그 몸부림에 공감했다. 북한에서 남겨진 가족을 만나기 위해 남한의 '반동분자'나 '예수쟁이'와 손을 잡고 가족의 탈출을 기획한다. 자신과 어느새 의형제가 되버린 사람을 위해 살인 명령에 대해 주저하고 거부한다. 그의 행동은 영화 내내 휴머니즘적이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선택으로 그려지며, 수 백만명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남긴다. 강동원의 행동은 '배신'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의 행동에 배신이라는 딱지를 남기고자 하지 않는다. 또는 배신이라는 말로 강동원의 선택을 비난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이전에 사람을 죽이고, 북한을 위해 간첩활동을 수행한 잘못이 있다. 그렇지만 그의 과거는 그의 휴머니즘적 선택에 의해 모두 사면되었으며, 강동원이 퍼스트 클래스로 대변되는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에는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다음, <삼성을 생각한다>의 김용철의 경우 : 그는 삼성의 구조조정본부 팀장으로서 삼성 그룹 전체의 유지와 이건희 일가의 경영권 방어에 전념해야 했다. 그것이 법조계 인사들에게 뇌물을 건네는 일이건, 언론사에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건 상관없다. 이건희에서 이재용으로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괜한 정의감에 도취되어 그룹 총수에 대한 충성을 잊어버리는 것은 곧 ‘배신’이다. 그렇지만 김용철은 그 ‘배신’을 택한다. 그는 삼성을 그만두고, 변호사를 전전하던 중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 삼성 비자금과 불법 경영권 승계, 그리고 법조계와 언론계에 대한 삼성의 뇌물 공여 사실을 폭로했다. 자신도 검찰의 수사와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언론을 통해 삼성이 한국사회를 어떻게 부패시켰는가에 대해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배신과 매국적 선택으로 그려졌으며, 주류 언론과 사법부, 검찰에 의해 먹칠되었다. 김용철의 행동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은 계속해서 배신이라는 딱지가 붙여졌다. 그리고 우리 사회 발전을 위한 내부고발자로서의 그의 역할은 긍정되지도 못했다. 물론 그는 과거에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핵심인사로서 법조계와 언론계에 뇌물을 제공한 잘못이 있다. 그런데 그의 과거는 양심선언 과정에서 사면되기는커녕, 사건 흐름의 전면에 부각되었으며, 그의 고발 내용을 주류 언론이 왜곡하기 위해 사용한 주된 소재가 되었다. 그리고 대중들이 그의 선택을 냉담하게 받아들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강동원과 김용철의 경우 : 이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생각하는 더 숭고하고 의미 있는 가치를 선택하기 위해 자신이 소속되어 있었던 조직을 배신했다. 그런데 우리는 강동원의 배신에 대해서는 감동하고 심리적으로 지지한 반면, 김용철의 배신에 대해서는 냉담했고 감정적인 비난을 쏟아내었다. 검찰은 법과 정의를 짓밟은 기업을 고발한 사람을 배은망덕하고 믿을 수 없다고 비난했다. 언론은 ‘삼성공화국’의 권력을 비판한 사람을 양보와 인내를 모르는 ‘한국판 탈레반’으로 규정했다. 전라도 사람 중 일부는 그의 선택 때문에 더 이상 삼성이 전라도 사람을 채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일부 시민단체의 지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 김용철 양심선언은, 국가기관과 언론, 대중들의 비난과 무심함 속에서 잊혀져 버렸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강동원의 배신에 대해서는 감동받는 바로 그 사람들이, 김용철의 배신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냉담하고 백안시하는지를. 조직의 이익과 휴머니즘 또는 사회정의 사이의 선택에서, 강동원의 선택은 지지를 받고, 김용철의 선택은 비난 받아야 하는 것인지를. 대체 이 두 사람의 선택 간에는 어떤 차이가 근본적으로 존재하는지, 또는 이 두 사람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대중의 의식구조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한 가지 설명 : 삼성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주류 언론과 국가기관이 내세운 이유는 “삼성의 이익=대한민국의 이익”이라는 등식이다. 불법이건 합법이건 삼성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대한민국 전체의 사람들에게 이익이라는 인식은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따라서 김용철의 양심선언을 하는 순간 대중은 순식간에 스스로를 삼성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으며, 따라서 삼성의 비리를 폭로한 그의 행위는 대중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졌다.(또는 주류 언론에 의해 그렇게 간주되었다.) 삼성의 부정부패에 대한 그의 고발은, 삼성을 배신하고 한국 사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삼성과 동시에 한국 사회를 배반한 것으로 간주된 것이다. 김용철은 우리를 배신한 것이며, 그렇기에 강동원이 그들(북한)을 배신하고, 우리(휴머니즘적인 남한?)에게 돌아온 것과는 명백히 다른 행위로 인식되는 것이다. 또한 강동원의 배신은 그들집단에 대한 우리집단의 우위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는 반면, 김용철의 배신은 우리집단이 가지고 있는 취약함과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의 부패함, 그로부터 이익을 얻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도 동일한 구조를 가진 두 가지 배신을 대중이 다르게 인식하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이 제기하는 다양한 물음 자체를 이해하고, 또 이에 대해 답하기 위해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어야 한다. 법조계나 기업이나 정치권이나 모두 썩었다는 단순한 인식에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입히기 위해서도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어야 한다. 앞으로 나올 제 2, 3의 김용철이 더 이상 냉담함과 비난 속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삼성이 중앙일간지에 광고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