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현대 진화생물학의 전망

학술저널 담론비평에서 진화생물학에 관한 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원래는 '[통섭논쟁] 진화론도 진화한다'는 기획기사의 일부로 연세대 대학원신문(152호)에 게재된 것인데(사회생물학에 관한 내용이 다음호에서 다루어진다고 한다) '헌대 진화생물학의 전망'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다. 상식 차원에서 정리해둘 만하다.

담비(07. 04. 13) 현대 진화생물학의 전망

다윈과 진화생물학 

‘진화(Evolution)’라고 하면 흔히 생물의 진화가 연상된다. 그런데 국어사전의 정의에도 그러하듯 ‘진화’는 세월의 흐름에 따른 ‘진보’ 또는 ‘발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생물진화를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진행되는 생물들의 진보 또는 발전’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일례로, 과거 백인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부릴 때 그 주된 논리는 흑인들이 진화적으로 백인들에 비해서 열등하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이나 나치의 게르만주의의 배후에도 역시 그런 왜곡된 논리가 숨어있다.  

과학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이론의 하나로 간주되는 진화의 개념과 그 메커니즘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최초의 연구자가 바로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다. 다윈은 1831년부터 1836년까지 근 5년 동안 영국의 군함 비이글호를 타고 세계 전역을 일주하면서 생물 진화의 증거들을 풍부히 수집했다. 이런 증거들에 바탕 하여 다윈은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이론을 처음으로 제안하게 된다.

다윈은 맬서스(Thomas Malthus)가 1798년에 발표한 인구론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맬서스에 의하면 모든 생물종은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서 만약 기아나 질병과 같은 재해에 의해서 억제되지 않으면 그 수가 무한정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자연의 생물들이 대부분 안정된 개체수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각 세대에서 소수의 자손을 제외한 대다수 개체들이 강제로 죽기 때문이다.

멜서스의 이론을 따라 다윈은 각 세대에서 도태되는 자손들은 아마도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열등한 개체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가축이나 곡식들이 인간에 의해 선택됨으로 해서 점진적으로 종자가 개량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계에서도 어떤 선택의 메커니즘이 존재함으로 해서 생물종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윈 이후의 진화생물학

다윈은 자연선택의 개념으로 진화를 설명함으로써 현대 생물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연선택의 이론은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는 자연선택과 진화의 관계를 동료 과학자들에게 설명하는 데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19세기의 과학자들은 진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선뜻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그것이 자연선택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다윈조차도 자연선택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을 납득시키는 데에 더욱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다윈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진화론 연구가 현대의 진화생물학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다윈과 거의 동시대 사람인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에서부터 시작된 유전학이 20세기에 들어와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점이 커다란 기여를 했다.

금세기 초엽, 멘델의 업적이 재발견됨으로 해서 과학계는 비로소 유전자와 자연선택 사이의 관련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유전학적 지식이 처음부터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초기의 유전학에서 얻어진 결과들은 돌연변이가 대부분 개체에 해로우며 그 영향도 점진적인 것이 아닌 아주 대규모적으로 나타난다는 것 정도였고, 결과적으로 자연선택에서 요구되는 새롭고 유용한 변이들은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점차 유전학에 수학이 가미되면서 유전학에서 얻어진 결과들이 자연선택설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유전학과 자연선택의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원리가 종합되었는데, 이를 ‘신다윈주의(Neodarwinism)’라고 부른다.

사회생물학의 등장

신다윈주의가 출현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도브잔스키(Dobzhansky), 메이어(Mayr), 심프슨(Simpson) 등은 집단유전학, 계통학, 고생물학 등에서의 연구 결과들이 신다윈주의의 원리들과 모순되지 않음을 천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현대 종합설(The Modern Synthesis)’이 마침내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이는 진화의 주된 메커니즘으로 자연선택설이 타당하다는 점을 전 세계 생물학자들이 인정한 쾌거라 하겠다.

그러나 진화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작업이 신종합설의 제창으로 완료된 것은 아니었다. 신종합설이 대두되기까지 주로 고생물학, 계통분류학, 유전학 등에 의존해서 발전했던 진화생물학은 1950년대부터는 주로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힘입어 현재까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이런 과정 중에서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를 비롯한 일단의 신다윈주의자들은 생물들 사이의 경쟁이 그다지 치열하게 전개되지 않는다는, 많은 현장 생물학자들의 관찰을 근거로 정말로 중요한 진화의 메커니즘은 생식을 위한 개체들 간의 경쟁이 아니라 유전자들 사이의 경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도킨스, 윌리암스(Williams), 스미스(Smith) 등에 의하면 진화는 다음 세대에 가능한 한 더 많은 유전정보를 남기려는 유전자들의 투쟁으로 정의된다.

1970년대에 출현한 윌슨(Edward O. Wilson)의 사회생물학은 이러한 유전자 중심 진화론의 연장이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생물들 사이의 경쟁과 투쟁을 부추기는,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현상이라는 점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한다. 만약 자연선택이 옳다면 어떻게 생물들 사이에서 다른 개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 현상이 빈번히 관찰될 수 있으며, 또 흰개미나 꿀벌의 집단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서로 협조하는 공생 체제가 구축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다윈 진화론과 사회생물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달에 논의하기로 한다).

현대인과 진화생물학

다윈 이래 진화론에 대한 논쟁은 항상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때로는 그런 관심이 지나친 나머지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례로, 과학으로서의 진화생물학을 반대하는 일부 비전공 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이라는 사이비 과학을 창조(?)해서 진화생물학을 공격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것을  전공으로 하지 않는 과학자들이 단체를 결성해서 한 과학 분야를 공격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진화생물학은 비단 창조과학자들과 같은 비전공 과학자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보다 빈번하게는 일반 대중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그런 한 예가 아래의 풍자만화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진화생물학은 앞에서와 같은 세속적인 차원에서만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시야를 크게 해서 널리 바라본다면, 학문으로서 진화생물학의 중요성은 그것이 바로 인류의 장래 문제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우리 인간도 다른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환경에의 적응을 다윈은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원리로 설명했는데, 우리는 자연계에서 지나치게 적응에 성공했던 나머지 나중에 갑자기 새로 변한 환경 속에서는 살아남지 못하고 멸종에 이르렀던 많은 생물종들의 예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지구라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현재 지나치게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그리고 이런 지나친 적응이 우리 인류의 장래를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인류의 번영은 환경 파괴와 병행하고 있다. 우리는 열대우림, 산호초, 바다와 호수, 늪지, 강과 하구 등 생물상이 가장 풍부한 장소들을 파괴하고 있으며, 오존층을 훼손하고 있고,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를 더해서 온실효과를 부추기고 있다. 또, 매년 그 사용이 늘어나는 유독성 화학물질들은  우리의 식량원인 곡식의 품종을 단순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환경 훼손과 파괴는 필경 새로운 환경 조건을 조성해서 우리 인류로 하여금 바뀌어진 환경 속에서 살 것을 강요할 것이다. 과연 인류는 이러한 적응에 성공해서 영원히 번영할 수 있을까? 진화생물학은 바로 이런 질문들에 대답을 구하는 학문이다.(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 환경학박사)

07. 04. 15.

P.S. 필자인 홍욱희 소장은 생물학과 환경학 전공자로서 여러 권의 저역서를 갖고 있다. <생물학의 시대>(범양사출판부, 1998) 등이 내가 갖고 있는 책이다(물론 박스보관도서인지라 소장의 의미가 없는 책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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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하이데거, 롬바흐 그리고 한국 철학자의 가상대담

[학술기획 DIALOGUES]하이데거, 롬바흐 그리고 한국 철학자의 가상대담
[동국대학원신문 140호] 존재를 향해 던지는 현재진행형 질문

 

양국현 성균관대 철학과 강사 master@dambee.net

 

   
▲ 하이데거
한국의 철학자가 독일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슈바르츠발트에 왔다. 카톨릭적인 전통과 자연친화적인 도시환경으로 잘 알려져 있는 프라이부르그의 인근이다. “검은 숲”이라는 지명이 말해주듯이 슈바르츠발트는 아주 울창한 숲이다. 프라이부르그까지는 지도와 도로표시판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찾아 왔지만, 하이데거가 머물며 사색하던 숲 속의 오두막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를 않아 조금 애를 먹으며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 토트나우베르그에 왔으니, 거의 다 온 셈이다. 그런데 오두막까지는 차가 못가는 가 보다. 차에서 내려 조금 올라가니 오두막이 보인다.


언젠가 하이데거가 말하기를 철학을 하려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단다. 스키를 탈 줄 알아야 하고, 희랍어를 해야 하고, 오두막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단다. 그런 오두막이다. 주위를 보니, 숲 속에 위치한 것치고는 오두막의 터는 제법 넉넉하다. 건물은 생나무로 지은 아주 소박한 모습이다. 오두막의 옆에는, 우리네 산사에서도 볼 수 있는, 숲의 물을 받아 쓸 수 있게 만든 시설이 있다. 잠시 둘러보는 동안 맑다 못해 싱싱하기까지 한 시원한 공기에 땀도 식었고, 피로도 어느 정도 가셨으니, 이제는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니 대단히 소박하게 보인다. 가공되지 않은 나무로 된 투박한 의자와 작은 책상이 창가에 있고, 의외로 책은 별로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하이데거교수와 롬바흐교수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하이데거교수: 어서 오십시오. 멀리서 오시느라 너무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한국의 철학자: 아닙니다. 즐거운 여정이었고, 이곳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롬바흐교수: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한국의 철학자: 고맙습니다. 서양의 중요한 현대사조 중 하나인 현상학의 특히 프라이부르그현상학파의 거장들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 감격스럽습니다.
프라이부르그현상학파는 후설(E. Husserl 1859-1939) 그리고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와 롬바흐(H, Rombach 1923-2004)교수님이 이루어 낸 전통으로, 각각 “선험적 현상학”, “기초존재론적인 현상학” 그리고 “구조존재론적 현상학”의 과정과 주제로 이루어 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이데거교수: 그렇습니다. 저의 스승이신 후설교수님은 수학자로 학문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랜 고심 끝에 그는 신학자 브렌타노의 영향으로 “사상 그 자체”라는 인식태도를 정하였습니다. “학문의 엄밀성”을 추구하고, 그러한 현상학적 태도가 “선험적 자아”에서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선험적”라는 말은 서양근대철학에서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한 대륙의 합리론과 인식의 확장가능성을 마련한 영국의 경험론의 장점을 모은 칸트적인 의미와 깊은 연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확실하고 확장 가능한 보편적인 인식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저는 원래 신학을 목표로 공부하였으나, 후설교수님의 현상학에 심취되어서 철학으로 바꾸었고, “철학은 오직 현상학으로만 가능하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제시한 “해석학”으로서의 현상학은 새로운 전개입니다. 그것은 인식론으로서의 현상학이 존재론적인 현상학으로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의 철학자: 그래서 1927년에 출간된 “존재와 시간”은 “존재의미에 대한 물음”을 주제로 삼게 된 것이군요. 그러면 롬바흐교수님의 구조존재론적인 현상학은 어떤가요?


롬바흐교수: 저에게는 후설교수님의 선험적 인식, 그리고 하이데거교수님의 기초존재론적인 인간과 존재에 대한 이해를 “구조”로 새로운 “차원”을 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은 일차원적인 “지평”과 이차원적인 “영역”을 넘어서 삼차원적인 “구조”가 세계와 존재 그리고 신을 포함하는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잘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철학자: 구조라는 용어는 어떻게 선택되었나요?


롬바흐교수: 구조는 1960, 70년대의 유행어로 당시에 이미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서 그 선택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체개념으로서의 구조는 존재와 세계 그리고 일어난 일을 고정된 것이 아닌 생동하는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구조존재론”에서 구조를 “근본어”로 삼게 된 것입니다.


한국의 철학자: “구조”는 “생성”의 계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롬바흐교수: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뒤에 이어가기로 하고, 하이데거교수님의 기초존재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순서일 것 같군요.


한국의 철학자: 그렇게 방향을 잡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하이데거교수님의 기초존재론은 모든 서양존재론의 기초를 새로 놓은 중요한 사유입니다. 하이데거교수님, 서양존재론을 다시 정초한다는 큰 그림에서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요?


하이데거교수: 존재를 묻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실상 서양존재론의 역사를 보면, 말로는 존재를 밝힌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존재에 대하여 직접 묻지를 못해왔습니다. 저에게는 오히려 “존재를 망각한 역사”로 보였습니다. 그 점에서 존재론을 새로이 정초하고자 한 것입니다.


한국의 철학자: 그런데 존재를 ‘직접’ 묻는 것은 용이한 작업이 아니라서 “존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존재자”인 인간존재 즉 “현존재”를 분석하여 존재를 밝히고자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이데거교수: 그렇습니다. “현존재분석”은 인간존재를 현상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상학이 현상을 분석하여 기술하는 것을 그 방법이자 주요 과제로 생각하듯이, 저도 인간존재자를 분석하여 존재를 이해하고자 한 것이지요.


한국의 철학자: 그러면 이제 현존재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지요.


하이데거교수: 기초존재론의 주요과제가 인간현존재분석인데, 이는 인간현존재가 존재자들 중에서 존재를 가장 탁월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존재는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자”로 항상 세계와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을 가장 깊은 근원에서 이해하며 스스로를 세계와 조율해 갑니다.


한국의 철학자: 사실 인간이외의 다른 개별적인 존재자는 보편적인 존재에 대한 물음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인간존재자에게는 현존재라는 이름을 붙이셨습니까?


하이데거교수: 그것은 존재가 “현존재”의 “현(現)”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현”은 존재가 그 때마다 자기를 여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그와 같은 존재의 드러남이라는 의미에서 현존재이기도 하지요.


한국의 철학자: 그러면 존재가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는 의미로 “현”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즉 인간존재자의 구체적인 모습이겠지요. 그런데 현존재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의 연관에서 존재하고, 존재자로서 존재와 관계하는 방식이 “실존”이라고 하셨습니다. 실존이란 다름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인간존재자가 존재를 가장 탁월하게 드러낸다는 의미이겠지요.


하이데거교수: 그렇게 이해와 공감을 표시해 주시니 반갑습니다. 현존재는 자신의 ‘현’에 던져져서 그 때 마다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또한 존재가 인간현존재에서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지요. 기초존재론적인 존재의 이해는 그래서 현존재가 자신의 개방성을 그의 “현”에서 드러낸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국의 철학자: 현존재는 그러면 어떻게 존재하나요?


하이데거교수: 다른 인간들과 서로 배려하며 관계를 맺고, 의식 없이 존재하는 사물과 달리 세계를 형성해 갑니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인간현존재는 죽음에 던져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려움”이라는 현상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의 앞에 직면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철학자: 그런데 왜 존재이해를 인간에서만 찾지요? 인간은 물론 고귀한 존재자이고,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존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존재자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인간만이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질 것이고요. 그래도 인간현존재를 통한 존재이해는 너무 인간중심적이지 않은가요? 이러한 인간중심주적인 입장은 존재에 대해 일방적인 시각이 생길 수 있을 수 있으니까요.


롬바흐교수: 그러한 지적에 공감합니다.


한국의 철학자: 기초존재론적인 인간 실존, 존재 등의 전통이 구조존재론에서는 다른 의미로 전개됩니다. 구조의 의미를 설명해 주시지요.


롬바흐교수: 구조는 “계기”들에 의해서 형성된 전체입니다. 즉 구조는 계기들이 서로 연결되어 전체를 형성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태양계는 각각의 계기들인 별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인력으로 서로 관계를 맺으며 위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만일 천체계에서 하나의 별이 없어지면, 다른 별들은 거기에 상응하게 새롭게 자리를 잡게 되는데, 그렇게 새로운 구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계기들이 역동적으로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지요.


한국의 철학자: 구조는 고정되어 있는 모습이 아닌, 생동하는 전체라고 이해 할 수 있겠군요. 그 전체는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때 마다 새로운 구조가 생기는군요.


롬바흐교수: 이는 그 각각의 “계기”가 갖고 있는 운동성 때문이고, 당연히 그 때 마다 새로운 구조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철학자: 그래서 구조존재론을 “생성의 존재론”으로 시도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생겨남의 계기 그리고 그것이 구성되어 자기로 다시 돌아간다는 구조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롬바흐교수: 구조의 생성은 이전과의 철저한 단절을 거쳐 생겨납니다. 예컨대 새로움은 부분의 개선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체가 새롭게 짜여져야 합니다. 이것은 이전의 세계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재창조됨을 의미한다. 모든 생명은 이전의 도움과 필요한 것을 받아서 형성되지만, 결국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구조화를 요구 받는 것입니다.


한국의 철학자: 구조는 이전과의 단절 즉 “무” 혹은 “영”에서부터 새롭게 생겨난다는 것이군요.


   
▲ 하인리히 롬바흐
롬바흐교수: 그 무는 “전제 없음”을 의미하는 무이고, 그런 의미에서 구조는 “자기로부터의 나타남”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조는 “스스로 생겨나는 것(자가생성)”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세계의 창조적인 등장입니다. 이렇게 생겨난 세계는 자기를 고양시켜 스스로 구축해 갑니다(“상승”). 이어서 정점에 이르게 되고(“절정”), 그 이후 자기에게로 되돌아가 갑니다. (“회귀” 혹은 “감아 들임”)합니다. 구조는 이렇게 필연적인 계기들의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해 나갑니다. 이에 대한 모델로 여러 고도문명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메안더”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장식의 의미를 넘어 존재의 연속성, 운동성을 보여줍니다.


한국의 철학자: 마무리로 철학의 근본적인 태도를 말씀으로 해주시지요.


롬바흐교수: 이전에는 글로 쓰여진 텍스트에서 철학을 찾았습니다. 예를 들면 하이데거 교수님도 철학사상의 주요개념에서 철학을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문자에 의한 철학이 아니라 삶에서 근본이 새롭게 밝혀지는 “근본철학”이어야 합니다. 근본철학은 철학의 본래적인 모습으로, 인간공동체가 함께 공유하는 철학이지요.


한국의 철학자: 두 교수님이 나누어 주신 소중한 철학적 체험에 감사드립니다.

하이데거교수와 작별을 고하며 그의 오두막을 나온다. 함께 나온 롬바흐교수는 같은 슈바르쯔발트에 있는 자신의 오두막으로 돌아간다. 언젠가 그가 들려준 바에 의하면 그의 오두막은 아마도 하이데거교수의 오두막과 비슷할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방문도 거의 사절하고 우편물도 직접 받지를 않는단다. “거기서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물음에, 하루 종일 쭉 작업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높은 하늘에 있는 매의 급강하를 즐겨 바라보기도 하고, 또 아주 작은 풀에서 온 우주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철학은 “무엇”의 완료형이 아니라 “어떻게”의 진행형이다. 끊임없이 근본철학의 “현재”를 체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철학은 새로운 시대와 인간을 위하여 새로운 의식을 준비하고자 한다. 그것이 존재의 이해를 그리고 구조의 생성을 밝히고자 시도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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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대량멸종의 역사 - Ecocide
프란츠 브로스위머 지음, 김승욱 옮김 / 에코리브르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리뷰를 그다지 많이 쓰지는 않지만, 별 다섯 개를 주기에 아깝지 않은 책이다.  아이들에게 환경 문제에 대해 가르쳐야 해서, 급하게 공부를 하는 와중에 읽게 되었는데(물론 책의 내용을 아이들에게 설명해주지는 못했지만) 그 동안 환경 문제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었는지 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환경문제란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단, 구체적인 환경문제의 사례를 하나하나 설명하는 책은 아니니 참고하시길)

  환경 문제는 물이 더러워지고, 지구가 더워지고 하는 등등의 단편적인 지식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만들어 온 문명 그 자체, 그 문명이 환경과 맺는 관계(환경에 대한 과잉 착취를 비롯하여), 그리고 그 관계의 파국적 결말인 멸종. 이것이 환경문제를 "정의"할 수 있는 키워드이다.(우리는 정의를 내려야할 때, 예시를 드는 '버릇'이 있다.)  [문명과 대량멸종의 역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인류의 문명사 전체를 관통하는 환경문제를 서술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의 환경문제에 비중을 두면서 서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신석기 혁명,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성쇠, 인클로저운동 등이 환경문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은 매우 흥미롭다.(역사에 대한 해석에서 가장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은 사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자연과 맺는 관계에서 찾아야할 것이 아닌가!)   [문명과 대량멸종의 역사]는 환경(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환경과 민족국가의 문제, 환경과 전쟁, 환경과 세계화 등 여러 논점들과 환경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아주 자세하지는 않으나)설명하고 있다.  특히, 저자가 책의 뒷부분에 제시하고 있는 표는 환경문제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오늘날 지구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몇 몇 자료는 우리가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상상력'을 주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번역도 아주 깔끔하게 되어 있어서 가독성도 높고, 책의 내용도 무난하다.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책들 중에서 이만큼의 수확을 얻을 수 있는 책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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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책 소개

쇼팽님의 질문에 답변하다가 생각이 나서 책 한 권을 소개하렵니다.

책의  제목은 {생각하는 나의 발견-방법서설}이고 저자는 김은주 씨입니다.

이 책은 아이세움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내고 있는 "나의 고전읽기"에서 6번째로 출간된,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대한 입문서입니다.

 

최근 불어닥친 논술의 열풍 덕에 여러 출판사에서 앞다퉈 논술 교재 시리즈를 많이 출간하고 있던데,

"나의 고전읽기"도 그 중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제가 시리즈의 다른 책들은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방법서설}에 관한 이 책만큼은 데카르트만이 아니라  철학 일반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국내에는 이 책 이외에도 데카르트에 관한 해설서나 입문서들이 제법 소개되어 있습니다. 에드윈 커리

(원래는 에드윈 컬리(Edwin Curley)라고 읽는 게 좀더 정확하겠지만, 번역자가 "커리" 번역했기 때문에

이렇게 적겠습니다)의 {데카르트와 회의주의}(고려원, 1993)나  안쏘니 케니의 {데카르트의 철학}

(서광사, 1991)  같이  제법 전문적인 연구서에서부터 케빈 오도넬의 {30분에 읽는 데카르트}나 톰 소렐의

{데카르트}처럼 쉬운 입문서들에 이르기까지 참고할 만한 해설서들이 꽤 있습니다. 이 책들은 나름대로의

장점들을 갖고 있고, 특히 커리나 케니의 책들은 영미권에서는 꽤 유명한 연구서들입니다.

 

하지만 이 책들은 모두 외국의 독자들을 상대로 씌어진 책들인 데다가, 대개 데카르트 철학의 기본

개념들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 가운데 논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의 독자들, 특히 고등학생이나 대학 학부생들을 비롯하여, 전공자는  아니지만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읽어내기에는 어려운 점이 적지 않습니다. 반대로 너무 쉽게 이야기하려다가 보면

데카르트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내용들을 빠뜨리거나 과도하게 단순화하는 경우도

있죠.  

 

이런 점에 비춰보면, 이 책은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매우 좋은 입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장점은, 우선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해 매우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방법서설}을

소개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있지만, 데카르트의 생애에 대한 소개에서 시작해서

{성찰}이나 {철학원리] 같은 데카르트의 만년의 저작들에 이르기까지 데카르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충실하고 균형있게 잘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데카르트 저작의 원문을 여러 번 인용하면서

알기 쉽게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방법서설}을 읽어보려는 분들에게는 더 많은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내용들을 전혀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논의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이 지닌 또다른

장점입니다. 가령 데카르트 시대의 학문적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인용하는 구절이나 {방법서설}이 지닌 "자서전"으로서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황순원의 {소나기}나

플라톤의 {파이드로스} 같은 텍스트를 비교하고 있는 대목, 또 데카르트의 학문의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사무소 직원을 비유하고 있는 대목 등에서 이를 잘 엿볼 수 있습니다. 필자가

이 책의 잠재적인 독자들인 고등학생들이나 대학 학부생 또는 일반 교양 독자를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좀처럼 쉽게 양립하기 어려운 이 두 가지 장점들이 성공적으로 어울린 덕분에, 이 책은 청소년 독자들이나

교양대중에게 {방법서설}만이 아니라 데카르트의 철학 전반, 아니 더 나아가 근대 철학 전반을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한 몇 편의 독자서평들이 이 점을 실제로 입증해줍니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근대철학에 관심은 있었는데, 철학자들의 책을 직접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분들에게 이 책을 적극 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논술을 지도하는 선생님들이나 청소년 독자들에게도

 한번 읽어보기를 추천합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책은 고등학생보다는 대학

학부생이나 일반 교양 독자들에게 더 어울리는 책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책의 내용을 고려해봤을 때

고등학생을 위한 논술교재 보다는 대학 학부생을 위한 교양철학 강의교재로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 책을 본격적인 데카르트 연구서로 보기는 여러 가지 점에서 어렵겠지만, 그런 류의 책들이 하기

 힘든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적지 않다고 봅니다.

한 권씩 구입해서 읽어보시죠. :-)    

 

덧붙임:

이 책은 사실 저와 절친한 후배가 쓴 책입니다. 지금 프랑스 리용에서 스피노자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지요. 작년 11월 리용에 도착했더니, 이 책의 원고를 거의 다 마무리했다면서 저에게 한번 읽어달라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책이 나오면 소개를 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이렇게 페이퍼를 씁니다.

잘 아는 후배의 책에 대해 추천을 글을 쓴다는 게 다소 꺼림칙하긴 하지만, 이 책이 잘 나간다고 해서

저에게 동전 한닢 돌아오지 않을 텐데 (후배가 야박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ㅎㅎ) 주저할 이유가 뭐

있겠느냐는 생각에서 페이퍼를 써봤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후배 부부가 공동으로  번역한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유명한 스피노자 연구서인

{스피노자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될 것이라는 기쁜 소식도 덧붙여둡니다.

아마도 이 책이 외국어로 번역되기는 이번이 처음일 텐데, 이 책이 번역된다면 국내의 스피노자

연구에 하나의 전기가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대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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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푸코와 주체의 해석학

구내서점에 들렀다가 뜻밖에 발견한 책은 미셸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동문선, 2007)이다.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란 제목의 리뷰를 어제 옮겨왔었는데, 마침 바로 그 주제에 관한 책이 출간된 것(알라딘에는 아직 입고되지 않은 듯하다).

책 이미지

1981-1982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를 펴낸 것인데, 불어본은 지난 2001년에, 그리고 영역본은 지난 2005년에 출간되었다. 푸코의 강의록으로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비정상인들>에 이어서 세번째로 소개되는 책이다. 이 강의록 시리즈의 책임 편집자는 프랑수아 에왈드와 알레상드로 폰타나이며, 이 책의 편집자는 <푸코와 광기>(동문선, 2005)의 저자이자 <미셀 푸코, 진실의 용기>(길, 2006)의 공저자인 프레데렉 그로이다. 책에는 이 강의의 특징과 출판과정에 대한 편집자의 자세한 해설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다.  

 

 

 

 

역자는 오래전에 저명한 푸코 연구서인 존 라이크만의 <미셸 푸꼬, 철학의 자유>(인간사랑, 1990)을 소개한 바 있고 미셸 푸코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 취득 후에 귀국하여 프랑수아 샤틀레의 <이성의 역사>(동문선, 2004)를 역간하기도 한 심세광 박사이다. 모처럼 무게 있는 저작이 최적의 역자를 만나 출간되었기에 안도감이 든다. 20쪽에 이르는 해제성 역자서문도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하고.

1982년 1월 6일부터 3월 24일까지 행해진 강의에서 푸코가 주로 다루고 있는 텍스트는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등이다. 역자가 잘 정리해놓은 바에 따르면,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고대의 자기 기술둘, 특히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의 자기 기술들을 연구하면서 고대인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결코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해낸다."

"고대인들이 자기 자신에게 가해야 할 노력이 있었다면 그것은 발견해야 할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해야 할 행동의 문제였다. 고대에 자기와 자기를 분리시키는 것은 '인식'의 거리가 아니라 '현재의 자기'와 '생이라는 작품'의 거리였다는 점을 푸코는 강조한다. 고대 주체의 문제는 자기를 인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작품의 재료로 간주하는 데 있었다.'"(25쪽) 푸코는 이를 일컬어 '실존의 미학'이라 명명한다.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자기의 테크닉>(동문선, 1997)도 참고해야 하는 필독서이다.

책에는 시리즈의 공동편집자가 작성한 일러두기가 서두에 실려 있는데, 푸코의 독자라면 다들 알 만한 내용이지만 생소한 독자들도 있을 것 같아 옮겨보면, "미셸 푸코는 안식년이었던 1977년만 제외하고는 1971년 1월부터 1984년 6월 그가 사망하던 때까지 줄곧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했다. 그의 강좌명은 '사유체계의 역사'였다. 이 강좌는 쥘르 뵈유맹의 제안에 따라 콜르주 드 프랑스 교수협의회에 의해 1969년 11월 30일에 개설되었는데, 장 이폴리트가 죽을 때까지 맡고 있던 '철학적 사유의 역사'를 대체한 것이다."(31쪽)

그러니까 스승이었던 이폴리트의 후임으로 새로운 강좌를 맡게 된 것인데, "교수협의회는 1970년 4월 12일 미셸 푸코를 새 강좌의 교수로 선출했다. 그때 그는 43세였다. 미셸 푸코는 1970년 12월 2일 교수 취임 기념강의를 했다." 푸코와 교수직에 나란히 지원했다가 고배를 마신 이가 바로 폴 리쾨르였다. 그리고 푸코의 첫 취임강의는 이듬해 5월 <담론의 질서>로 출간되었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 강의를 듣는 데에는 어떠한 자격요건도 필요하지 않았고 교수들은 지도학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청강생들만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어반 청강생'들을 위한 교본으로 생각하면 책값이 그렇게 부담스럽지만은 않을 듯하다.

국역본이 나온 김에 나는 도서관에서 이전에 너무 두꺼운 탓에 엄두가 나질 않아 대출하지 못했던 영역본을 대출했다(영역본은 556족으로 588쪽의 국역본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건 국역본의 페이지당 행수가 30행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역본은 35행이다). 그리고는 아예 영역본은 아마존에 주문했다. 배송료를 포함해도 국역본보다 훨씬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고, 그 정도면 책을 복사하는 것보다 경제적이어서이다. 영역본으로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의가 네댓 권 정도 번역돼 있는 듯하다.

Интеллектуалы и власть. Избранные политические статьи, выступления и интервью. Часть 2

한편, 러시아어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비정상인들>이 번역돼 있다(이 중 <비정상인들>은 모스크바 체류시에 구입한 책이다). <주체의 해석학>의 경우에는 한국어본이 먼저 나온 셈이다. 러시아어본으로 최근간은 대담집인 <지식인과 권력> 2부(2005)이다. 1부는 지난 2002년에 출간됐었다... 

07. 03. 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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