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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데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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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철학자가 독일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슈바르츠발트에 왔다. 카톨릭적인 전통과 자연친화적인 도시환경으로 잘 알려져 있는 프라이부르그의 인근이다. “검은 숲”이라는 지명이 말해주듯이 슈바르츠발트는 아주 울창한 숲이다. 프라이부르그까지는 지도와 도로표시판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찾아 왔지만, 하이데거가 머물며 사색하던 숲 속의 오두막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를 않아 조금 애를 먹으며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 토트나우베르그에 왔으니, 거의 다 온 셈이다. 그런데 오두막까지는 차가 못가는 가 보다. 차에서 내려 조금 올라가니 오두막이 보인다.
언젠가 하이데거가 말하기를 철학을 하려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단다. 스키를 탈 줄 알아야 하고, 희랍어를 해야 하고, 오두막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단다. 그런 오두막이다. 주위를 보니, 숲 속에 위치한 것치고는 오두막의 터는 제법 넉넉하다. 건물은 생나무로 지은 아주 소박한 모습이다. 오두막의 옆에는, 우리네 산사에서도 볼 수 있는, 숲의 물을 받아 쓸 수 있게 만든 시설이 있다. 잠시 둘러보는 동안 맑다 못해 싱싱하기까지 한 시원한 공기에 땀도 식었고, 피로도 어느 정도 가셨으니, 이제는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니 대단히 소박하게 보인다. 가공되지 않은 나무로 된 투박한 의자와 작은 책상이 창가에 있고, 의외로 책은 별로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하이데거교수와 롬바흐교수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하이데거교수: 어서 오십시오. 멀리서 오시느라 너무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한국의 철학자: 아닙니다. 즐거운 여정이었고, 이곳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롬바흐교수: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한국의 철학자: 고맙습니다. 서양의 중요한 현대사조 중 하나인 현상학의 특히 프라이부르그현상학파의 거장들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 감격스럽습니다.
프라이부르그현상학파는 후설(E. Husserl 1859-1939) 그리고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와 롬바흐(H, Rombach 1923-2004)교수님이 이루어 낸 전통으로, 각각 “선험적 현상학”, “기초존재론적인 현상학” 그리고 “구조존재론적 현상학”의 과정과 주제로 이루어 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이데거교수: 그렇습니다. 저의 스승이신 후설교수님은 수학자로 학문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랜 고심 끝에 그는 신학자 브렌타노의 영향으로 “사상 그 자체”라는 인식태도를 정하였습니다. “학문의 엄밀성”을 추구하고, 그러한 현상학적 태도가 “선험적 자아”에서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선험적”라는 말은 서양근대철학에서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한 대륙의 합리론과 인식의 확장가능성을 마련한 영국의 경험론의 장점을 모은 칸트적인 의미와 깊은 연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확실하고 확장 가능한 보편적인 인식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저는 원래 신학을 목표로 공부하였으나, 후설교수님의 현상학에 심취되어서 철학으로 바꾸었고, “철학은 오직 현상학으로만 가능하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제시한 “해석학”으로서의 현상학은 새로운 전개입니다. 그것은 인식론으로서의 현상학이 존재론적인 현상학으로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의 철학자: 그래서 1927년에 출간된 “존재와 시간”은 “존재의미에 대한 물음”을 주제로 삼게 된 것이군요. 그러면 롬바흐교수님의 구조존재론적인 현상학은 어떤가요?
롬바흐교수: 저에게는 후설교수님의 선험적 인식, 그리고 하이데거교수님의 기초존재론적인 인간과 존재에 대한 이해를 “구조”로 새로운 “차원”을 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은 일차원적인 “지평”과 이차원적인 “영역”을 넘어서 삼차원적인 “구조”가 세계와 존재 그리고 신을 포함하는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잘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철학자: 구조라는 용어는 어떻게 선택되었나요?
롬바흐교수: 구조는 1960, 70년대의 유행어로 당시에 이미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서 그 선택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체개념으로서의 구조는 존재와 세계 그리고 일어난 일을 고정된 것이 아닌 생동하는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구조존재론”에서 구조를 “근본어”로 삼게 된 것입니다.
한국의 철학자: “구조”는 “생성”의 계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롬바흐교수: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뒤에 이어가기로 하고, 하이데거교수님의 기초존재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순서일 것 같군요.
한국의 철학자: 그렇게 방향을 잡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하이데거교수님의 기초존재론은 모든 서양존재론의 기초를 새로 놓은 중요한 사유입니다. 하이데거교수님, 서양존재론을 다시 정초한다는 큰 그림에서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요?
하이데거교수: 존재를 묻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실상 서양존재론의 역사를 보면, 말로는 존재를 밝힌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존재에 대하여 직접 묻지를 못해왔습니다. 저에게는 오히려 “존재를 망각한 역사”로 보였습니다. 그 점에서 존재론을 새로이 정초하고자 한 것입니다.
한국의 철학자: 그런데 존재를 ‘직접’ 묻는 것은 용이한 작업이 아니라서 “존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존재자”인 인간존재 즉 “현존재”를 분석하여 존재를 밝히고자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이데거교수: 그렇습니다. “현존재분석”은 인간존재를 현상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상학이 현상을 분석하여 기술하는 것을 그 방법이자 주요 과제로 생각하듯이, 저도 인간존재자를 분석하여 존재를 이해하고자 한 것이지요.
한국의 철학자: 그러면 이제 현존재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지요.
하이데거교수: 기초존재론의 주요과제가 인간현존재분석인데, 이는 인간현존재가 존재자들 중에서 존재를 가장 탁월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존재는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자”로 항상 세계와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을 가장 깊은 근원에서 이해하며 스스로를 세계와 조율해 갑니다.
한국의 철학자: 사실 인간이외의 다른 개별적인 존재자는 보편적인 존재에 대한 물음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인간존재자에게는 현존재라는 이름을 붙이셨습니까?
하이데거교수: 그것은 존재가 “현존재”의 “현(現)”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현”은 존재가 그 때마다 자기를 여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그와 같은 존재의 드러남이라는 의미에서 현존재이기도 하지요.
한국의 철학자: 그러면 존재가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는 의미로 “현”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즉 인간존재자의 구체적인 모습이겠지요. 그런데 현존재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의 연관에서 존재하고, 존재자로서 존재와 관계하는 방식이 “실존”이라고 하셨습니다. 실존이란 다름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인간존재자가 존재를 가장 탁월하게 드러낸다는 의미이겠지요.
하이데거교수: 그렇게 이해와 공감을 표시해 주시니 반갑습니다. 현존재는 자신의 ‘현’에 던져져서 그 때 마다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또한 존재가 인간현존재에서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지요. 기초존재론적인 존재의 이해는 그래서 현존재가 자신의 개방성을 그의 “현”에서 드러낸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국의 철학자: 현존재는 그러면 어떻게 존재하나요?
하이데거교수: 다른 인간들과 서로 배려하며 관계를 맺고, 의식 없이 존재하는 사물과 달리 세계를 형성해 갑니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인간현존재는 죽음에 던져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려움”이라는 현상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의 앞에 직면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철학자: 그런데 왜 존재이해를 인간에서만 찾지요? 인간은 물론 고귀한 존재자이고,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존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존재자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인간만이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질 것이고요. 그래도 인간현존재를 통한 존재이해는 너무 인간중심적이지 않은가요? 이러한 인간중심주적인 입장은 존재에 대해 일방적인 시각이 생길 수 있을 수 있으니까요.
롬바흐교수: 그러한 지적에 공감합니다.
한국의 철학자: 기초존재론적인 인간 실존, 존재 등의 전통이 구조존재론에서는 다른 의미로 전개됩니다. 구조의 의미를 설명해 주시지요.
롬바흐교수: 구조는 “계기”들에 의해서 형성된 전체입니다. 즉 구조는 계기들이 서로 연결되어 전체를 형성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태양계는 각각의 계기들인 별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인력으로 서로 관계를 맺으며 위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만일 천체계에서 하나의 별이 없어지면, 다른 별들은 거기에 상응하게 새롭게 자리를 잡게 되는데, 그렇게 새로운 구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계기들이 역동적으로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지요.
한국의 철학자: 구조는 고정되어 있는 모습이 아닌, 생동하는 전체라고 이해 할 수 있겠군요. 그 전체는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때 마다 새로운 구조가 생기는군요.
롬바흐교수: 이는 그 각각의 “계기”가 갖고 있는 운동성 때문이고, 당연히 그 때 마다 새로운 구조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철학자: 그래서 구조존재론을 “생성의 존재론”으로 시도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생겨남의 계기 그리고 그것이 구성되어 자기로 다시 돌아간다는 구조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롬바흐교수: 구조의 생성은 이전과의 철저한 단절을 거쳐 생겨납니다. 예컨대 새로움은 부분의 개선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체가 새롭게 짜여져야 합니다. 이것은 이전의 세계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재창조됨을 의미한다. 모든 생명은 이전의 도움과 필요한 것을 받아서 형성되지만, 결국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구조화를 요구 받는 것입니다.
한국의 철학자: 구조는 이전과의 단절 즉 “무” 혹은 “영”에서부터 새롭게 생겨난다는 것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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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인리히 롬바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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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바흐교수: 그 무는 “전제 없음”을 의미하는 무이고, 그런 의미에서 구조는 “자기로부터의 나타남”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조는 “스스로 생겨나는 것(자가생성)”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세계의 창조적인 등장입니다. 이렇게 생겨난 세계는 자기를 고양시켜 스스로 구축해 갑니다(“상승”). 이어서 정점에 이르게 되고(“절정”), 그 이후 자기에게로 되돌아가 갑니다. (“회귀” 혹은 “감아 들임”)합니다. 구조는 이렇게 필연적인 계기들의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해 나갑니다. 이에 대한 모델로 여러 고도문명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메안더”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장식의 의미를 넘어 존재의 연속성, 운동성을 보여줍니다.
한국의 철학자: 마무리로 철학의 근본적인 태도를 말씀으로 해주시지요.
롬바흐교수: 이전에는 글로 쓰여진 텍스트에서 철학을 찾았습니다. 예를 들면 하이데거 교수님도 철학사상의 주요개념에서 철학을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문자에 의한 철학이 아니라 삶에서 근본이 새롭게 밝혀지는 “근본철학”이어야 합니다. 근본철학은 철학의 본래적인 모습으로, 인간공동체가 함께 공유하는 철학이지요.
한국의 철학자: 두 교수님이 나누어 주신 소중한 철학적 체험에 감사드립니다.
하이데거교수와 작별을 고하며 그의 오두막을 나온다. 함께 나온 롬바흐교수는 같은 슈바르쯔발트에 있는 자신의 오두막으로 돌아간다. 언젠가 그가 들려준 바에 의하면 그의 오두막은 아마도 하이데거교수의 오두막과 비슷할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방문도 거의 사절하고 우편물도 직접 받지를 않는단다. “거기서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물음에, 하루 종일 쭉 작업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높은 하늘에 있는 매의 급강하를 즐겨 바라보기도 하고, 또 아주 작은 풀에서 온 우주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철학은 “무엇”의 완료형이 아니라 “어떻게”의 진행형이다. 끊임없이 근본철학의 “현재”를 체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철학은 새로운 시대와 인간을 위하여 새로운 의식을 준비하고자 한다. 그것이 존재의 이해를 그리고 구조의 생성을 밝히고자 시도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