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목적은 우리가 살면서 겪은 수치심을, 
그리고 의도치않게 타인에게 주입하는 수치심을 
동시에 조명하는 것이다. 
이책은 자기계발서보다 
더 큰 집단적인 목표를 갖는다. 
개인이자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기분과 정신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정부와 경제도 마음대로 움직이는 
수치심 머신을 해체하자는 것이다. 
이런 활동이 지금 특히 중요한 이유는, 
어느 때보다 
강력해진 수치심 머신이 
폭발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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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의 일본 도항에 대해서도 이런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내지와 조선에 걸쳐 있는 네트워크를 통해 도항과 귀향이 반복되었고가족이 불러들이기도 했다. 당국의 도항 규제가 이런 경향을 한층 더촉발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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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과정에서 
조선인을 열등한 존재로 깔보면서도, 
한편으로는 3·1운동과 
그 뒤를 이어 독립운동이 펼쳐지자 
일본에 저항하는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무렵 
신문 등에서는 ‘불령선인(不鮮人,
 무뢰한 조선인들이라는 의미로 
쓴 차별하는 용어,옮긴이)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일본(천황)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음에도 반항하는 
괘씸한 놈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신문에는 종종 ‘불령선인‘이
폭탄을 지니고 일본에 잠입했다는 
근거 없는 기사들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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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대장성(大藏省, 지금의 재무부옮긴이)은 도시 5인 가족의 한 달 표준 생계비를 500엔으로 산출해, ‘500엔 생활‘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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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부연락선(関連船, 
혼슈 서쪽 끝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왕래한 여객선
옮긴이) 말고도, 1923년에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는 직항로가 
개설되어 제주도의 여러 항구에서
 배를 타면 갈아타지 않고도 
오사카에 갈수 있게 되었다. 
조선반도 남단의 섬과 일본의
 대도시를 직접 연결하는항로가 
개설됨으로써 오사카에는 
제주도 출신자가 3만 명이나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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