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가 되었다. 사회주의자로서의 아버지는 
제법 근사할때도 있었으나
 농부로서의 아버지는 젬병이었다. 
사회주의자답게 의식만 앞선 농부였다.
 아버지는 일삼아 새농민을 탐독했고
 새농민의 정보에 따라
 파종을 하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농사를
‘문자농사‘라 일축했다.

"새농민이 원제 김을 매라고 하면 
풀이 암만, 허고 그때꺼정 잘도 지둘레주겄소. 
새농민이 뭐라거나 말거나 
풀이 나먼 난 대로 뽑아야제, 
워디 농사가 문자로 지어진답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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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무렵의 내 결론이었다.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아버지는 잘못 참는 사람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가 득세하는것도 참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라는
봉건잔재도 참지 못했으며, 
가진 자들의 횡포도 참지 못했다. 
물론 두시간의 노동도 참지 못했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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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나 잘났다고 뻗대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자부했는데 나이 들수록 잘 산 것 같지가 않다. 나는 오만했고 이기적이었으며 그래서 당연히 실수투성이였다. 신이 나를 젊은 날로 돌려보내준다 해도 나는 거부하겠다.
오만했던 청춘의 부끄러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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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상우에게 그려준 <시우란>
완당은 제주도 유배시절에는 난초를 
열심히 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훗날 그가 <불이선란(不二禪蘭)〉을 그리면서 "난초를 그리지 않은지 
하마20년(不作蘭花二十年"이라고 한 구절에서도 감지된다. 옛사람들의 말에는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낭패를 보기 일쑤이니
그것은 아마도 40대 후반에 <난맹첩>을 
그리고 나서 60대 후반에 와서나 
본격적으로 그렸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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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은 그렇게 하고도 불안하였는지 제단을 내려와서 또다시 남해신께 드리는 제문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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