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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평점 :
1. 소설 속 이야기, 장면과 나
소설 읽기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할수록 독서의 재미는 더욱 커지고 몰입도 깊어진다. 최은영의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이 일으킨 잔잔한 파동이 가시지 않은 이유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희원은 스물일곱 살의 대학교 3학년 편입생이다. 나도 스물일곱 살에 대학교 2학년 복학생이었다. ‘그녀가 공부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순간’을 공유하며 잠깐 설렜다. 언제인가부터 나는 공권력의 폭력에 무참하게 당하는 여러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접하면서 분노만 했지, 내 일이 아니라는 데서 오는 안도감을 느꼈다. 어쩌면 나 같은 이가 아주 희미한 빛마저도 가리는 존재일지 모른다는 부끄러움이 일었다.
「몫」, 연극부 건물 앞에서, 마주 보고 걸어와서 서로 피할 새도 없이 만나 나눈 몇 마디가 정윤과 희영의 마지막 만남이자 대화였다. 내가 그렇게 만나고 헤어질 수도 있을 몇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5월의 정오 이맘때, 흔들리는 정윤의 어깨를 한 손으로 잡고 다가앉는 희영의 친구 ‘당신’ 해진은 무엇이 지나가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걸쳐 있는 나의 사회변혁운동 자취 중에서 지나간 것과 그대로인 것이 무언지 생각하다 마음이 답답해졌다.
「일 년」, 지수가 3년 차 정직원이었던 때 카풀 동료였던 동갑내기 인턴 다희는 지수에게는 ‘우연히라도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 사람’이었는데 병원에서 둘은 ‘우연히’ 만난다. 나를 ‘선배’라 불렀던 대학 1년 남자 후배는 재수했고, 나보다 한 살 많았다. 선배로 ‘대접받고’ 싶었던 나는 그와 곧잘 감정 섞인 말다툼을 벌였고 한 번은 비록 주먹질은 없었지만, 몸싸움이 있었다. 체격이 작은 내가 그에게 헤드록을 당하면서 느꼈던 억센 팔뚝 힘과 그다음에 더는 나를 어찌하지 못해 내뱉었던 그의 ‘어휴!’ 하는 소리가 남아있다. 삼십 년이 더 지난 일이다. 눈을 저절로 찡그리게 할 정도의 수치심과 함께 떠오르는 짙은 농도의 기억이다.
「답신」은 내가 ‘가해자’로서 받은 처벌 과정에서 느꼈던 부끄러움 때문에 읽는 동안과 그 후 내내 불편했다. 화자가 감옥 안에서 글쓰기로 자신을 수습하려고 했던 일은 내 일이었다. 좁은 감방의 불편한 잠자리, 형편없는 음식, 거칠게 대하는 감방 동료, 범죄자로서의 낙인을 받아들이면서도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던 그는 곧 나였다. 최근 내가 사무실 바닥과 계단을 쓸고 닦고,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내 속죄 중 하나이다.
「파종」에서 소리의 엄마와 삼촌은 열다섯 살 차이 나는 남매다. 나의 큰누나가 그렇다. 누나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할머니의 반대로 고교 진학을 안 하기로 결정이 난 즈음, 대보름 전날 나는 태어났다. 누나와 나 사이에 일곱 명의 남매가 있었지만, 누나는 진학하지 못한 분노, 아쉬움, 절망, 체념 들을 갓난아이인 나에 대한 애정으로 삭였을까. 결혼하기 전까지 8년간을 품 안에서 길렀고, 당시 졸업반이었던 매형이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에 같은 군 다른 면에 있던 시댁에서 살았던 누나는 두어 번이나 나를 불러 잠을 재우고 아침밥을 먹여 국민학교에 보냈다. 매형이 은행원이 되어 도시에 정착하자 누나는 나와 셋째 형을 불러 같이 딱 한 달 살았다. 시댁의 반대로 누나집을 나와 우리는 베니어판으로 된 여닫이문이 달린 길가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이모에게」, 내게도 이모가 한 분 계신다. 엄마의 동생이다. 엄마가 여든이 되기도 전에 뇌출혈로 1년간 병상에 누워 계시다 돌아가신 데 비해, 이모는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정정하시다. 우리 엄마처럼 시골에 사셨는데 이모부가 돌아가시자 자식 여섯을 데리고 오빠가 교수로 재직하는 대학교가 있는 도시로 나왔다. 알밤을 물에 담가 까는 일로 생계를 이으셨다. 겨울방학 때, 이모 집에 놀러 가서 그 밤을 한 알 두 알 날름날름 먹었던 철부지 내가 떠오를 때마다 죄스럽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자식들에게 어떤 물질적인 도움도 줄 수 없는 내 형편에 내 자식도 우경처럼 나를 대할지 걱정이다. 우경이 미국과 홍콩에서 거주하는 데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시어머니에게 우경은 친정엄마보다 더 친근하고 예의 바르다. 엄마의 홍콩 방문을 돌보기 위해 우경은 이틀 연차를 낸 일에 생색을 내고 엄마가 가방을 잃어버린 일에 짜증을 낸다. 가까운 사이보다 거리가 더 있는 사람을 더 조심스러워하고 존중하려는 나의 모습과 우경은 닮았다.
2. 그렇다! 사랑이다!
최은영의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차례를 보고 맨 먼저 읽은 소설은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이었다. ‘무엇’이 그런지 궁금했다. 엄마 기남과 둘째 딸 우경 간 만남을 시작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안에서 기남의 성장 과정, 우경의 언니인 진경이 남편과 전처 사이에 태어난 아이지만 우경보다 더 큰 친밀감을 느낀다는 사실, 손자 마이클의 낯가림하지 않는 모습을 접해도 나는 그 ‘무엇’을 알 수 없었다. ‘살아진다’를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면 ‘사라진다’임을 “살아진다. 그러다보면 사라진다.”(「일 년」 108쪽)를 읽고 깨우쳤다. 나머지 소설 여섯 편을 읽으면서 알았다. 사라지는 것은 ‘사랑’과 관련이 없는 것들이고 사라지지 않는 것은 ‘사랑’이라고. 사람 간 원근, 친밀의 정도와 관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것은 진하거나 옅거나 부족하거나 흘러넘치거나 진실이거나 거짓으로 우리 사이를 흐른다. 김사인 시인이 쓴 “삶의 이 진저리나는 격렬함”이란 제목의 시 첫 구절, ‘멀리서 보면 고요한데/ 가까이 다가가 속을 들여다보면/ 흐른다.’가 눈에 들어온다.
최은영 소설의 중심은 ‘사랑’이다. 그의 장편소설 밝은 밤이란 제목은 ‘고단하고 혹독한 삶’을 ‘밤’, 이 밤을 밝게 비추는 것은 ‘사랑’을 담고 있다는 생각을 이제야 했다. 사랑은 존중이다. 환대다. 호의와 친절함이고 돌봄과 도움, 관심(「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 마이클이 처음 만나는 기남의 팔짱을 끼고 팔에 머리를 기대는 모습)이다. ‘서로 기대는 삶’의 바탕이다. ‘상호 의존적’ 삶은 본질적인 모습임에도,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자기 주도적’, ‘자기 독립적’ 삶에 치여, 그것은 비주체적이고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삶으로 평가된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착취’하는 이념이라는 철학자 한병철의 주장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 그 빛은 사랑이다. 「이모에게」에서 희진이 밤 비행 중에 느꼈던 이모의 시선은 ‘어두운 밤에만 지상에 닿는 저 너머의 눈빛’으로서, 비록 아주 희미할지라도 사람을 살리는 힘, 곧 사랑이다. 희진은 이모에게 “세상 사람들이 너를 우습게 보고 함부로 대하는 걸 원하느냐.”, “징징대면서 네 기분 받아달라고 하는 거 좋아할 사람 세상에 하나도 없다.”,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넌 여자애니까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널 두려워하게 하는 편이 훨씬 좋은 거야.”라는 말을 틈틈이 들으며 자랐다. 희진은 이모처럼 ‘내가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자기 존중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의 기남은 아홉 살 때부터 식모 일을 했다. 식모살이를 한 집만큼 부유한 집안에서 여섯 번째 딸로 태어난 기남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기남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 자신이 완전히 혼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쉽다고 여기며 살았다. 그러다 김 여사를 만나 기만의 뿌리를 뽑는다. 권사장에게 분노를 느꼈고, 그 분노는 기남에게 약이 된다. 분노의 또 다른 원천은 사랑이다. 결국 최은영이 끝끝내 붙들고 싶었던, 사라지지 않은 것은 ‘사랑’이다.
3. 남은 감상들
요즘 틈틈이 읽고 있는 책(로버트 라이트 저, 도덕적 동물)을 보니, 찰스 다윈이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인간은 자신들과 아무런 친분관계가 없는, 심지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울타리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착한 사마리아 인들이 있는 것일까?” 이런 연민으로서의 사랑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산물이라면, 그런 사랑을 느끼는 유전자가 어떤 이유로 선택되었는지 다윈은 자문했다.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있는 희영, 지수, 민혁, 기남 들의 유전자가 선택되어 이어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최은영은 독자가 궁금해할 법한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여백일까? 일곱 편의 소설 중에 여섯 편에 나오는 이름에 성씨(姓氏)가 없다. 젠더를 의식한 것일까? 딱 한 번 나온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 우경이 진경을 부르면서 ‘이진경’. 「몫」에서 희영이 쓴 글의 마지막 문장이 무엇인지 적지 않았다, 다만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 “편집실은 고요했고 편집실을 채운 팽팽한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희영의 병명도 말하지 않았다. 희영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죽었다는데, 그 사람이 동성인지 이성인지도 모른다. 「일 년」에서 화자인 ‘그녀’의 병, 「답신」에서 수신자인 조카의 이름·성별과 화자가 산 징역이 몇 년인지, 「파종」에서 민주가 이혼한 이유, 민주의 오빠 민혁을 죽게 한 병, 이 둘의 엄마가 무슨 병을 앓았는지, 민혁이 혼자 사는 이유, 민주가 한 ‘그런 결혼’의 ‘그런’ 등에 대해 말하지도 설명하지도 않는다. 「이모에게」의 이모가 혼자 된 이유가 사별인지 이혼인지, 이모가 자궁을 잃은 이유 등을 쓰지 않았다. 이야기와 상황에 몰입을 방해하는 것들이라 일부러 제거한 것 같다.
누가 그랬던가. 형용사, 부사는 인간만이 사용하는 언어라고, 인간 언어의 특징이 그 형용사, 부사에 있다고. 최은영은 ‘서운함’을 다음처럼 인상 깊게 적었다.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원망, 미움 등의 감정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다.(115쪽)” 최근 꼭 읽고 싶은 책을 신문에서 보았다. 영상 편집자, 성우,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사진작가 등 여러 이력을 지닌 존 케닉이라는 사람이 쓴 슬픔에 이름 붙이기란 책이다. 부제가 ‘마음의 혼란을 언어의 질서로 꿰매는 감정 사전’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내 마음을 적절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일곱 편의 소설을 합해서 느낀 나의 마음을 최은영이 쓰는 말로 적자면, ‘옅고 희미한 슬픔 또는 연민’이다. 이것은 어떤 유전자의 표현일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