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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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학교 학생회관 반지하 동아리 방 안에 몇몇 학생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앉아 있는 의자 뒤로 눈에 잘 띄지 않은 작은 문을 여니 방이 하나 비밀스럽게 나온다. 따뜻한 색이어도 불길한 기분이 드는 주황색 불빛을 가득 담고 있다. 맞은편 벽 천장 가까이에 녹이 슨 배관이 두어 개 가로지른다. 그 아래 바닥 가까이에 직사각형 틈이 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너비와 높이다. 교도소 감방 벽에 뚫린 식구통보다 좀 크다. 30여 년 전 그 식구통에 머리를 넣고 빠져나가는 상상을 하다 절망하고 답답했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다가선다. 바닥에 배를 대고 다리부터 밀어 넣는다. 발가락이 바닥에 닿는 느낌이 들자 몸을 아래로 내렸다. 안으로 젖혀져 있던 문을 닫았다. 까만 어둠을 더듬다가 공중에 매달린 전구 소켓에 달린 스위치를 달칵 돌렸다. 백열등이 희미하게 켜졌다. 숨을 쉬어 본다. 몸이 무거워졌다. 무언가에 눌리는 느낌이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그 건물, 그 방, 그 불빛을 떠올리느라, 그리고 잊느라 내내 눈을 감고 있다가 떴다. 왼쪽 어금니가 찬물 더운물 가리지 않고 시렸다. 치과에 갔더니 자면서 이를 악물고 이갈이를 한다고 나이트 가드를 이에 물고 자라고 한다. 졸업한 지 20년 넘은 대학교에 가봐야겠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부모님의 경제적 도움은 끊긴 지 오래고, 전세 일천만 원으로 자취를 한 지 3년 된 옥탑방도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으로 전환된 지 두 달이 지났다. 조교나 중고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면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을 계획이었다. 학부 시절 3년간 교수 연구실에서 공부한 특혜는 대학에 강한 애착을 갖게 했다. 나의 고교 친구 결혼식 주례를 하시느라 뵈었던 은사님이 친구를 통해 연락하셨다. 교사 정년 단축으로 많은 선생님들이 한꺼번에 퇴직하는 바람에 모교에 자리가 났으니, 당장에 지원하라고. 요즘 같아서는 안 되었겠지만, 운 좋게 합격했다. 교직 2년 차부터 하루 수업을 빼고 대학원 수업을 받았다. 수료 후부터 대학에 발길이 뜸해지자 향수병 비슷한 증상을 앓더니 그리움이 차곡차곡 쌓였다.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망신을 당하고 수치심으로 움츠러들었던 사십 대 말부터, 학생회관 반지하 동아리방에 있는 식구통 같은 입구를 통해 지하에 있는 은밀한 방에 내 몸이 구겨 넣어지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여름, 대학교에 다녀왔다. 가까이에서 그 방을 보았다. 꿈속의 그런 데는 없었다. 학생회관, 문과대학, 운동장 등을 걸었다. 고열에 진땀을 흘렀다. 무더위 탓인 줄 알았는데, 다음 날 코로나19 검사를 하니 양성 반응이 나왔다. 이주혜의 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에서 50대 시옷이 겪고 있는 불안·공황 증상을 접하고, “내가 그랬구나.”라고 중얼거리면서 시옷의 탁한 흑색과 투명한 흑색의 삶에 빨려 들어갔다.

내 삶을 자꾸 들여다보게 만드는 소설은 좋은 소설인가. 어떤 소설이든 성찰과 반성의 도구가 되면 불편해진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의 화자는 현재의 나와 한 살 차이다. 교동, 경운전, 한옥마을, 군경묘지, 방송국, 중앙동, 철둑 너머 등의 장소와 지명, 80년 광주와 87년 시위, 91년 분신 정국, 대통령 선거에서 비판적 지지 대신에 당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진보 진영 후보에게 매번 투표했던 ’, 그리고 남편 현석구의 성폭력 사건 등은 내 삶의 이전 것들을 툭툭 건드리면서 시옷과 내가 같은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책가방 속에, 책상 한쪽에 체크무늬 북 커버로 감싸여 있는 소설책은 나인 양 나를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 공황 장애 증상을 보이는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는 일기 쓰기 모임에서 시옷이란 별명으로 일기를 쓴다.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 ‘어떤 수치심도 글로 옮기면 견딜 만해진다는 강사 림자의 지도에 따라, ‘기억 자아의 폭압에 이끌린다. 3분의 2가량이 1980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있던 시기에 초등학교 4학년 10살짜리 시옷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십 대 초반인 현재의 는 남편과 학원을 운영했다. 정당 활동을 했던 남편이 성폭력 비위 행위로 같은 당 동료에게 고발당하고 학원을 에게 넘기고 고향으로 떠났지만, 학부모들의 항의로 학원을 닫는다. ‘는 불안장애로 공황 증상을 보여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남편은를 사랑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고발한 상대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죽어버린 광주 시민 학살자에 분노한다.

술을 마시고 싶었다. 끊은 지 600여 일이 지났다. 저녁 식사 반주로 몇 잔 마셨던 술은 횟수와 양이 늘면서 몸과 정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단 한 번도 끊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술을 입에 대지 않기 시작했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의 에필로그에서 일기 쓰기 수업 종강 파티 겸 송년회 자리에 마웨가 와인 다섯 병을 가져왔다는 문장을 읽고 참기가 어려워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옷의 자서전 ‘2의 중심인물인, 맑은 눈을 지닌 윤수의 소식을 시옷이 알게 된 순간 음주 욕구는 강렬하게 일기 시작했다.

두 장면이 오래 남는다. 시옷은 고향의 봄2절을 합창단에서 솔로로 부르게 되어 있는 방송 녹화 리허설 자리에 애니가 빌려준 치마 단복을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간다. 남자인 줄 알았던 지휘자 선생님은 시옷이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른 학생으로 교체한다. 자신이 솔로를 부르겠다고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는 선생님 손을 시옷이 잡자, 선생님은이거 놔라. 더럽구나.”라고 말한다. 시옷의 아빠가 진 빚을 받으려고 시옷의 집 응접실에 눌러 앉아버린 제비다방 마담의 아들이 어느 날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시옷의 엄마가 더러워.”라고 말하면서 집에서 나가라고 말한다. 이 둘은 시옷에게 탁한 흑색을 안겨준 하나의 장면이다.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둘러싼 혐오와 경멸은 기분 나쁘고 무겁게 어둡다. 또 다른 장면에는 시옷에게 투명한 흑색을 보여준 윤수가 있다. ‘송아지 눈망울같은 눈을 지닌 윤수가 용접공으로 잘살고 있지 않고 사십 대 어느 언저리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한 사실을 시옷이 오십 대가 된 지금에야 알게 되는 장면이다. ‘는 엄마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지만, 나는 글자를 읽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 먹먹한 순간이란 그런 것이었다.

투명한 흑색은 시옷이 응달집에서 윤수와 함께 산 시기를 상징하는 색이다. 온양집에서 살면서 이웃에 사는 애니와 교류하며 방송국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던 시기는 탁한 흑색이다. 망신과 모욕을 최초로 인식하고 경악이 혐오로, 다시 경멸로 이어지는 감정의 고리를 알아버리게 되는 10살 시옷이 겪은 은 맑지 않았다.

소설의 1~4부의 제목을 한 문장으로 적어 보았다. “봄이 봄을 만나고 봄을 탐하고 다쳐서 오래 울었지만, 봄을 옮겨 붙여 놓으니 봄은 (단수가 아니고) 복수가 되었다.” 언젠가 어떤 시선집에서 읽었던 봄에 관한 시를 찾아보았다. 이성부 님이 쓴 시 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 ,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이 독후감의 제목은 이 시의 끝 구절에서 가져왔다. ‘나이트 가드를 착용하고 잔 덕분인지, 대학교에 다녀온 덕분인지 더 이상 어금니가 시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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