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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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단한 삶

고단하다의 고자는 한자로 고통스럽다 고()자일 것 같았는데, 단자는 어떤 한자일까 궁금했다. 사전을 찾아보니 지쳐서 피곤하다.”는 뜻으로 고유어다. 단출하고 외롭다는 뜻의 고단은 한자로 孤單이다. 소설 󰡔밝은 밤󰡕은 여자 쪽으로 4대에 걸친 고단한(지쳐서 피곤한) 삶을 전한다.

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고 6년 동안 살았던 집을 정리하고 희령으로 떠난다. 감기약을 먹고 총천연색으로 꿈을 꾼 후에 겨우 몸을 추스르고 출근했는데 선배에게 업무 과실로 질책을 받으며 이혼한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다. 지연의 엄마 미선은 혼외자다. 일찍 어른이 되어 엄마 영옥과 거리를 둔 미선의 삶, 딸인 지연과 갈등, 고단해 보인다.

지연의 증조모(정선, 삼천이)가 증조부(박희수)와 함께 개성으로 가려하자 병석에 누운 고조모가 치맛자락을 잡고 당신도 데려가 달라 애원한다. 정선이 그 손을 떼어내자 다음 생에는 네 딸로 태어나 현생에서 못 다한 사랑을 베풀어주겠다고 증조모에게 말한다. ‘똥지게꾼도 오물을 퍼내지 않을 정도로 천대받는 백정의 딸로 자란 삼천의 어린 시절도, 시숙에게 줄 쌀밥이 복구네 아이 장난으로 뒤엎어지고 그걸 주워 담고, 깨진 사발 조각에 발을 베고도 머리가 깨질 듯이 추운 날에 보리쌀을 씻는 삼천의 결혼 생활도 고단하기 그지없다. 삼천에게 그 밤은 무척 고단한 밝은 밤이었다.

 

혹독한 삶

혹독하다, ()자는 독하다, 심하다, 잔인하다는 뜻인데, ‘술이 독하다, 향기가 짙다는 뜻도 있다. 숙취의 고통이 떠오른다. 지난밤 과음으로 다음 날 내내 내장에서 알코올을 소화하고 독기를 거르느라 괴롭고, 뇌에서는 조증과 우울증이 번갈아 일어나 마음은 표류한다. 샤론 모알렘이라는 의학자는 󰡔우리의 더 나은 반쪽󰡕이란 책에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을 단 한 단어로 혹독하다고 적었다. 우리 유전자가 온갖 감염병에 맞서 면역 반응을 일으켜 생명을 유지하려는 일이 무척 혹독하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어낸 소설 󰡔밝은 밤󰡕의 등장인물에게 그런 숙취나 바이러스 면역 과정의 혹독함은 사치에 가깝다. 새비의 남편이 히로시마에 가 일을 하다 원폭 피해를 입고 돌아와 죽어가는 모습, 정선이 가족을 데리고 새비가 있는 대구로 피란 가던 중에 만난 여자 아이에게 옷을 입히고 먹을거리를 쥐어 준 후에 떼어내는 모습은 혹독하다는 단어 말고는 표현할 수 없다. 그 피란길에서 해가 저물자 별빛 가득한 그믐의 밝은 밤을 올려다 본 영옥은 그런 밤을 즐길 자격도 없는 천한 존재라는 자각을 한다. 영옥에게 그 밝은 밤은 혹독한 밤이었다.

 

따뜻한 삶

따뜻하다는 물리적으로 쾌적한 느낌이 들 정도로 온도가 알맞게 높다는 뜻이라고 사전에 나온다. 도타운(깊고 많은) 사랑을 느낄 정도로 인정이 있다는 의미도 있단다. 소설 󰡔밝은 밤󰡕이 고단하고 혹독한 삶만을 담고 있었다면 또다시 여러 번 마음이 아플까 더 펼칠 마음이 일지 않았을 테다.

영옥이 지연에게 사과 하나를 건네며 대화를 나누다 손녀랑 닮았다면서 서울 사는 애가 여기에 내려올 일이 없잖우.”라고 말하자, “그런데 내려왔네요, 여기.”라고 지연이 대답하는 장면에서 영옥의 지연을 향한 도타운 사랑을 느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받고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는 지연을 보면서 내가 4학년, 5학년 다닐 무렵에 단칸 자취방에서 밥을 해주셨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새비가 정선과 영옥에게 주기 위해 장만한 온갖 선물을 풀어놓는 장면이나 영옥이 손녀인 지연에게 베푸는 손길 하나하나 따뜻하다. 희자의 고모할머니 명숙이 영옥에게 보인 선의와 유품도 그렇다. 밝은 밤은 따뜻한 밤이기도 하다.

밝은 밤의 온기

아껴가며 조금씩 읽은 지 4개월이 지나고 있다. 내내 뭉근하게(세지 않으면서 꾸준하고 끊임없이) 내 생활과 함께하고 있다.

누군가와 대화할 기회가 있으면 당신 엄마의 외할머니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어본다. 대개는 자신의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외할머니의 엄마라고 다시 말하면 돌아오는 답은 거의 몰라였다. 나도 모른다. 친할머니의 엄마를.

우리가 모르는 조상은 호칭에 자가 들어가거나 여자. 족보는 남자조상만의 계통만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나를 비롯한 거의 모든 생명체는 남과 여의 결합이다. 이를 정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현실 사회는 남자만 있다. ‘비정상을 이만큼이나 정상으로 인식하는 대상이 또 있을까. 여자 조상에 대해 나는 모르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궁금해 한 적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밝은 밤󰡕은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일깨웠다.

고단하고 혹독하다가도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모든 이의 삶을 보았다. 백로 절기에 창문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보드라운 이불로 막아내자 느껴지는 그 따스함을 소설 󰡔밝은 밤󰡕과 함께 오래 간직하고 싶다. 자꾸 꺼내 읽고 싶은 소설, 어떤 쪽이든 펼쳐진 대로 읽다보면 다시 덮기가 쉽지 않은 이야기다. 우리 삶의 본 모습을 모두 담고 있어서, 우리 삶을 닮고 있어서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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