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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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외가

아껴 읽었다. 소설 󰡔밝은 밤󰡕은 옆에 오래 놓아두고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잊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읽은 이야기였다. 여자와 여자의 엄마, 이 엄마의 엄마, 그리고 그의 엄마, 4대에 걸친 가의 이야기를 눈으로 새기면서 나는 우리 엄마와 외할머니를 생각했고 외할머니의 엄마를 상상했다. 더는 자를 붙이지 말아야 하는데도 수십 년 동안 입에 붙어 있는 그 단어가 좀처럼 떼어지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에게만큼은 지명을 앞에 붙이고 어디 할머니, 어디 할아버지라고 부르라한다.

이번 추석에 아내의 할머니를 뵙거든, 내 자식이 있는 자리에서 꼭 여쭤봐야겠다. 당신 손으로 손톱을 깎을 수 없을 정도로 나이를 드신 할머니에게 당신의 엄마는 어떤 분이셨냐고 물으시면, 할머니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시며 말씀하시겠다.

 

2. 무지

고등학교 선후배가 함께하는 모임의 술자리에서 6년 후배가 옆자리에 앉았다.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하러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길에 참석한 자리였다. 요즘도 벌초를 집안 행사로 한다고 하니 대단한 가문의 종손쯤 될까 하는 짐작을 하면서 본관이 어디냐고 물었다. 귀에 익은 지명이었다. 가족관계증명서 뗄 때마다 들여다보는 어머니 본관과 같았다. 후배의 이름을 염두에 두고 항렬자가 뭐냐고 물었더니 외삼촌 항렬과 같다. 어머니 태어난 곳을 대니 거기에도 집성촌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고교 시절 한문 선생님은 자기보다 2대 아래라고 한다. 집안에 교육계 종사자가 많다고 한다. 나와 그 후배, 그리고 한문 선생님이 공유하고 있는 동일한 유전자는 얼마나 될까? 부계를 자연으로 알고 익숙해진 내게 어머니의 계통은 낯설다.

지난 여름 초입에 9남매 중에서 여섯 남매가 모였다. 부모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겨우 삶의 자리를 잡은 남매만 매년 한 차례 모이다가 감염병 탓에 3년 만에 만났다. 󰡔밝은 밤󰡕의 여운이 사그라들기 전이었다. “혹시 외할머니의 엄마가 어떤 분이셨는지 알아?”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할머니의 엄마는?” 이 질문에도 모른다고 한다. 우리는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안다. 어머니도 안다. 매년 설날과 추석이면 산소에 간다. 내게 증조부는 일제 강점기에 쌀 판매업을 하신 분이다. 고향집 창고를 허물려고 그 안에 있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명패를 보았다. 증조모는 두 분이다. 한 분은 추석 전날 땡감을 드시다 얹혀 급사를 하셨단다. 새로 오신 증조모는 기울어가던 집안을 일으켜 세우셨단다. 소설 󰡔혼불󰡕의 청암 부인만큼 그러셨을까. 이쯤은 우리 남매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의 외할머니는 아무도 몰랐다. 들은 바가 없지만, 애초에 우리 엄마에게 우리가 묻지 않았다. 나의 엄마의 엄마를 나는 안다. 나의 외할머니. 잎담배를 연달아 피우셨던 분이셨다. 결혼 전에 횟배앓이를 낫게 하려고 피우셨던 뻐끔 담배를 아흔 살 즈음까지 달고 계셨다. 외할머니의 엄마를 나는 모른다. 우리 엄마는 알고 계셨겠지만, 한 번도 엄마에게 엄마의 외할머니가 누구셨냐고 묻지 않았다. 멀쩡한 Y자 나무에는 한쪽만 있는 줄 알았다. 󰡔밝은 밤󰡕은 우리가 또 다른 한쪽을 보게 한다. 우리가 엄마에게 물려받은 X염색체는 엄마가 외할머니 자궁 속에 있을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샤론 모알렘, 󰡔우리의 더 나은 반쪽󰡕, 229.) 그 외할머니의 X염색체는 외할머니가 외할머니 엄마 자궁 속에 있을 때 만들어진 것이다. 존재를 잊고 살아 왔다. 질문은커녕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3.

밝은 밤’, 언뜻 형용모순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어둔 밤이 있고 밝은 밤이 있다. 어둔 낮이 있고 밝은 낮이 있듯이. 대기가 깨끗하고 찬 밤, 별빛이 가득한 밤은 밝은 밤이다. 큰 보름달이 주변의 별빛을 모두 머금고 태양빛을 반사하는 밤은 어둔 낮만큼 환하다. 낮이 주기 어려운 포근함과 따뜻함을 밝은 밤은 우리에게 준다. 밤은 어두워야 한다면, 밝은 밤은 밤이 아니다. 밤은 어두워야 밤답다. 밤이 어둡지 않고 밝다면 밤이 아니다. 물론 밝은 밤이 있다. 공기가 차갑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이면 별빛만으로도 밝다. 보름달은 태양빛을 반사하면서 무수한 별빛을 머금고 삼킨 채 어둔 밤을 밝게 비춘다.

영옥이 그믐밤에 보았던 밝은 밤이 있다. 새비 아줌마와 희자가 있는 대구로 피란을 가던 중에 만난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영옥은 데려가려고 한다, 영옥의 엄마 삼천은 그 아이에게 영옥의 겉옷을 꺼내 입히고 목도리로 머리를 싸매주고 삶은 감자와 고구마 몇 개를 보자기로 싸서 건넨다. 그 아이가 삼천의 치맛자락을 잡자 삼천은 억지로 떼어낸다. 영옥이 같이 가자고 하자 그 아이가 영옥을 안았다. 삼천은 다시 떼어냈다. 그리고 영옥을 때렸다. 그 아이를 두고 길을 걷다 해가 지고, “그믐밤이었다. 별 무리가 아주 낮게까지 내려와 밝게 빛났다. 그걸 보면서 할머니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 천한 존재,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영옥은 그 별을 보고 숨을 쉬었을까. 별을 보는 일은 숨구멍으로 숨을 쉬는 것과 같다. 지연이 천문학을 선택한 이유다. 영옥이 대구로 가는 피란길에서 본 별도 영옥에게는 숨구멍이었을 것 같다. 내게 숨구멍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이 시를 적었다.

 

숨구멍

 

내 하루의 지금 숨구멍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활자다

수업, 업무, 가사가 잠시 멈춘 틈에

모니터 앞 책받침대에 펴 놓은 글자에 눈이 가면

나는 숨 쉬기 시작한다 비로소

호흡은 공기를 먹는다

숨은 고래마냥 수면 위로 뿜어 나온다

숨은 내 몸에 스며드는 생명이다

구멍을 달리하며 숨은 쉰다

 

4. 상처, 잔인함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지연의 엄마인 미선이 자신의 엄마인 영옥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모녀 사이에서 엄마가 딸에게 아픈 상처를 주었지만, 자신의 딸인 지연에게는 엄마 영옥은 좋은 사람이다.

나는 미선이가 엄마인 영옥과 왕래를 끊은 이유를 알지 못한다. 지연의 언니인 정연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 이유와 원인을 찾기 위해 책을 여러 번 뒤적였지만 찾지 못했다. 내가 건성으로 소설을 읽은 것인지, 그것들이 책에는 기술되지 않은 채, 독자인 내가 추측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지연이 음주운전 차에 들이받혀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 언니의 등을 꼭 껴안고 자전거를 타며 언덕을 내려가던 꿈을 꾼다. 자전거 타다가 죽었나? 정연의 죽음을 두고 딸 미선을 위로한다며 엄마 영옥이 건넨 사람 명이 하늘에 달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냐.”라는 이 말이 딸과 엄마 간의 거리를 멀게 할 정도로 잔인한 말인가. 그 후 5년 만에 지연을 10일간 맡기고 돌아와서는 지연이 결혼식에 영옥을 초대하지 않은 미선의 마음은 영옥과 얼마나 거리를 둔 것이었을까.

영옥은 손녀 지연에게 엄마가 딸을 용서하는 건 쉬운 일이라 말한다. 딸이 엄마를 용서하는 일은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엄마를 용서하지 못하는 딸도 엄마에게 상처를 준다. 엄마 미선은 결혼 전에 우체국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인 명희 아줌마에게 명희 아줌마의 엄마 수술비로 큰돈을 선뜻 주었다. 명희 아줌마에게 엄마 미선은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미선의 엄마 영옥에게 아픈 상처를 준다. 지연은 엄마 미선에게 죽은 언니 정연을 잊으라며 날선 말로 상처를 준다.

지연의 증조모 정선은 자신의 병든 엄마를 새비 아저씨 손에 맡기고 남편 희수와 함께 개성에 간다. 고조모는 삼천(정선)의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자신을 데리고 가라 한다. 정선이 그 손을 떼어내자 포기한다. 다음 생에 자신의 딸로 다시 태어나 못다 해준 걸 해주겠다며 다시 만나자 한다. 자식에게 버림받은 것을 알게 된 마음, 그 상처를 감추고 자식을 떠나보내는 고조모의 마음이 남는다.

박희수, 그는 아내 정선이 백정의 신분인데도 그와 결혼한다. 천주교 신자인 자신이 아내에게 큰 사랑을 실천했다고 자부하며 살았던 것 같다. 자신의 딸 영옥이 사기 결혼을 한 데 일조한 데 대해 자책을 하기보다는 남자 마음 하나 잡지를 못해서 빼앗겼으니 아쉬울 것도 없다.”라며 모진 말을 영옥에게 한다. 그 말에 정선은 자기 손으로 희수를 죽이겠다는 폭언을 하면서 영옥의 상처를 감싼다. 영옥도 아버지에게 죽으라고 한다. 희수는 몇 달 뒤에 대로변에서 버스에 치여 죽는다. 아내와 딸의 말에 큰 상처를 받고 죽음을 선택했을까.

희자의 고모할머니 명숙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은 영옥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자신이 사는 세상과는 다른 곳으로 나아가고 있는 희자를 생각하는 영옥이.‘질투, 시기라는 단어를 굳이 쓰지 않아도 느껴지는 영옥이의 그런 마음이 느껴진다. 공자는 을 설명하면서 잔인함을 그것의 반대로 여겼다고 한다. 잔인한 말과 삶의 모습이 상처로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5. 기억

할머니 영옥은 수제비를 먹을 때마다 아버지 박희수가 느닷없이 국군에 자원입대한다면서 주말에 훈련소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하던 날이 떠오른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낮잠이나 초저녁잠을 잤거나 커피를 많이 마신 날 밤에 쉬이 잠이 오지 않아 괴로운 이유는 불면 자체보다는 떠올리기 싫은 옛 기억에 있다. 여기에다 이루지 못한 것들, 이에 따르는 후회, 자괴감 등은 불면을 더욱 끔찍하게 한다. 더는 어쩌지 못하는 나이가 되어 느끼는 무력감에다 생생해지는 기억을 그대로 떠안으며 살기는 무척 힘든 일이다.

소설 󰡔밝은 밤󰡕밝은 밤 같은 기억의 강물이다. 백정을 천대하던 신분제, 위안부와 징용, 히로시마 원폭 피해를 겪었던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과 피난민 등의 참상이 여러 모양과 색깔로 흐르고 있다. 지연의 전남편은 시간은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얼어붙은 강물이라고 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는 뜻이란다. 기억도 그런 점에서 얼어붙은 강물과 같다. 기억은 낮 시간대에 있지 않다. 기억은 늘 밤을 배경으로 한다. 지연은 감기약을 먹고 총천연색 꿈을 꾼다지만, 꿈과 달리 기억은 밤이고 흑백이다. 할머니 영옥은 지연에게 옛 이야기를 처음 했다. 영옥에게 기억하기는 나이가 들수록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그의 삶은 잊을 수 없는 일로 가득하다. 밝은 밤이 어둔 밤이 되어야 평온해질 수 있다.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지연이 희자 할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 자료를 보러 도서관에 가는 길 지하철에서 머리를 기대고 자는 어떤 여자에게 자기의 어깨를 맡기면서 든 생각이다. ‘거기란 인정하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고 느끼고 싶지 않아서 지연 자신과 지연의 인생에게 거짓말을 한 지연 자신이다. 그런 가 어둠이라면 밝음은 인정하고 싶고 알고 싶고 느끼고 싶은 이겠다. 밝은 밤 같은 기억에 덜 괴로워하려면 그 어둠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다. 기억의 강물을 건너거나 벗어나는 일은 부질없어 보인다. 그냥 흘러가다 어디에서 흐른 강물인지 모르게 되는 바다로 가고 싶다. 어둔 밤의 바다에서 삼천이, 새비, 영옥이, 희자 등 소설 󰡔밝은 밤󰡕의 모두가 평안하기를 바란다. 나도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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