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 요조와 임경선의 교환일기
요조.임경선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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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에세이가 필요한 순간


“타인의 알콩달콩한 우정을 굳이 엿봐서 뭐하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확실히 타인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보며 우리가 모는 배의 키를 조절한다. 저렇게 살아야지, 혹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면서 말이다.”

p.8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임경선, 요조


잘 살고 있나 의문이 들 때, 우리는 다른 이의 삶이 궁금해진다. 앞서거나 뒤서거나, 혹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때로는 후미진 곳에서 자신의 배를 몰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내 배의 키를 조절하고 싶어 진다. 담백하면서도 솔직한, 그러면서도 삶에 밀착된 공감과 울림이 있는 글, 그런 글이 고파질 때 에세이를 펼친다.


한 번 봉투를 뜯으면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감자칩처럼, 바삭하게 구운 칩에 적당한 소금기만으로 감칠맛을 내는 글, 과자처럼 가볍고 재미나게 씹히지만 가슴이 몰랑해지고 이내 흐뭇해지는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그런 내 손에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 요조와 임경선의 교환일기>(요조, 임경선, 문학동네)가 들렸다. 어땠냐고. 첫 장을 넘긴 이후 단번에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손에서 뗄 수 없었다. 내가 딱 원했던 감자칩 같은 책, 담담하고 선명하면서 유쾌한 여자들의 이야기였다.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요조와 임경선이 띄운 편지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요조(본명 신수진)와 임경선이 주고받은 우정 편지를 엮은 책이다. 가수이며 책방을 운영하며 글도 쓰는 요조와 공백 없이 책을 내놓고 있는 16년 차 작가 임경선.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친구라는 사실에 놀랐고,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당당함에 반했다. 그녀들은 솔직함, 죽음, 나이 듦과 몸, 이별 같은 삶을 아우르는 철학적 주제에서부터 일과 연애, 사랑과 관련한 아주 사소한 것까지 시시콜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일에 있어서는 강연을 준비하는 법이나 업무 메일 쓰기, 에세이 쓰기 팁처럼 실용적인 제안까지 놓치지 않고 사랑과 연애에 있어 섹스의 문제를 논하는 거침없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미덕은 솔직하고 단호하게 자신을 이야기하면서도 어디까지 드러내고 어디부터는 감출지 아슬하게 그 수위를 조절하는 균형감에 있다. 임경선이라는 경험 많은 작가의 면모, 요조(신수진)라는 예술가의 여유가 콤비를 이루어 만들어낸 감각이다.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면서도 상대를 아끼는 다정함이 배어 나고 소소한 웃음까지 놓치지 않는다. 나이 드는 일, 연애, 죽음과 이별, 싫은 사람들과 시간을 쓰는 방식에 대한 문제는 누구나 골몰했던 문제일 것이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것을 두 작가가 빚어낸 또렷한 문장 속에서 발견하며, 후련하고 재미났다. 그리고 따스했다.  



단정 짓지 않고 순간에 발을 담그기


그들이 공유한 주제 중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이 있다고 단정 짓고 시도조차 않는 냉소적 태도에 대한 경계이다. 요조는 한 소설에서 읽은자고 나면 다 똑같아지는 거 아니냐는 식의 연애담을 삶에서 가중되는피곤함에 덧대어 이야기한다. 거기에 임경선이 항변하며 이렇게 말한다. “단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이 썩 아름답지 않다는 것만으로, 그것을 실패나 불행의 경험으로 치부하는 것가혹한 처사라고. 그러면서 인간은감정이라는 것이 있어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 무엇보다 끝에 다다르기까지의 시간은 모두에게 다르고 그 사이에 느끼게 되는 기쁨의 결도 다양하다고 조언한다.


“‘잘될 것을 확신하니까’ ‘난 반드시 해낼 거니까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 포함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열심히 하고 거기에 운도 따라주면 어쩌면 원하던 바를 이룰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뿐이지. 하지만 그 이전에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애쓰는 그 자체로 생생하게 살아가는 실감을 느끼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발을 푹 담그는 것이 아닐까.”

p.95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임경선의 말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끝이 예견되어 시도를 망설이는 날이 와도, 결과를 확신할 수 없더라도 마음이 끌리는 기회가 온다면 기꺼이 뛰어들게 되길 바랐다. 나이 들었다고, 다 안다고 고개 돌리지 않고 매 순간 처음처럼 순수하게 시작하길. 그러면서 발을 푹 담그는 순간 느낄 수 있는 기쁨만으로 결과와 상관없이 충분할 수 있다는 걸 놓치지 않고 싶다.




타인의 우정에서 나의 우정으로


자신에게 집중하고 일에 열정적이며을 중시한다는 데서 통하는 두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둘 사이 온도차는 분명하다. 임경선은 따지고 분류하고 정의 내리며 자신의 것을 탄탄하게 쌓아낸 사람 같다. ‘매 순간 공들여 임하는 사람인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를 내고, 선을 그음으로써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존중한다. 반면 요조는 사람에 대한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고 부드럽고 나른 나른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지만 꾸준히 노력하고 시도하는 신수진다움을 가지고 있다. 허튼 선택은 절대 안 하겠다는 임경선과 달리 손해를 봐도 퍼주는 사람이고, 선을 긋기보다 끌어안으려는 사람이다. 하지만 마음을 살피는데 예민해서 그 예민함으로 타인까지 배려할 줄 안다. 거기에 특유의 예술가적 성향이 더해져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느슨하게 원을 그리고 신중하게 넓혀간다.


사적으로도 돈독한 우정을 나누는 두 사람이 자신과 상대방, 서로의 삶을 위해 진중하고 사려 깊게 건네는 이야기를 읽으며우정의 의미를 되새겼다. 진정한 교감은 뿌리 깊은 커다란 나무처럼 삶에 필요한 그늘을 드리우고 우리를 커다랗게 품어준다. 긴 인생에서 진실한우정의 존재는사랑만큼 고귀하다. 허물없이 마음을 터놓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편지가 쓰고 싶어 졌다. ‘깊은 곳에서 통하는나의 친구에게.


"너무 사랑하는 언니가, 제가,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당신이 여기 있어요. 있을 때, 잘해야 해요."라는 요조의 말처럼 지금 내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가 '여기' 있다는 것에 감사했고 삶의 모든 순간에 잘하고 싶어 졌다. 우리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 그녀이기에 꺼낼 수 있는 속말, 쓰면서 더 사랑하게 될 우리라는 존재를 떠올렸다. 책장을 덮고 내 삶에 우정의 식탁을 차릴 순서다. 갓 구운 레몬 파운드케이크에 은은한 향이 감도는 홍차면 충분할 것이다. 중요한 건 식탁 위 음식이 아니라 맞은편 의자에 앉을 사람이 누구냐 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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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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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는 존재한다


아니 에르노의 <얼어붙은 여자>에서 화자인 '나'는 결혼하고 석 달이 지나면서 자신과 남편 사이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끼는 경험을 한다. 아이가 없고 둘 다 학생이라 공부를 하던 시절임에도, 둘 사이의 “차이는 시작되었다”(p.181). 남편은 주변 환경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책에 몰두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압력솥의 추가 울리면 엉덩이를 떼는 것은 그녀였고, 닭을 삶고 당근 껍질을 벗기고, 저녁을 먹은 대가로 설거지를 했다. 그보다 결코 요리를 잘하는 것도 아닌 그녀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어떤 우월성의 명목으로’ 가능한 것인가.


<얼어붙은 여자>에는 소녀가 여성이 되고, 여성이 결혼과 출산, 가사와 육아를 거쳐 ‘얼어붙은 여자’가 되는 과정이 놀랄 만큼 적나라하고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니 에르노의 부모는 소상공인 출신으로 여느 집과는 다른 모습으로 집안에서 역할을 분담했다. 식료품점을 맡은 어머니가 사장 역할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고, 카페를 담당하여 요리와 잔일을 해결했던 아버지가 더 여성적이었다. 독서를 즐겼던 어머니는 에르노의 학업을 중시했고, 여성으로서 기대되는 행동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에서 '나'의 어린 시절에는 "남녀 사이에 역할의 차이가 있다는 식의 생각이 드리워지지 않았(p.44)"고 '나'는 "여자애라는 사실에 만족하는 편(p.45)"이었다.


‘나’는 청소년기를 지나 상급 학교에 진학하면서, 성적 욕망에 눈을 뜨고 남성적 시선이 대상화하는 (매력적인) 여성의 모습에 몰두하면서 자신과 힘겨루기를 했다. 자신이 자란 사회, 식료품 겸 카페가 중심이었던 중하위 계층과는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부모와의 분리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로 그녀는 “넌 너만 생각하면 된다(p.53)”는 부모 아래 주체적인 선택을 하며 성장했다. 그랬던 그녀에게도 결혼만은 별개의 문제였다. 결혼이 하나의 ‘완성’을 의미하는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결혼과 출산을 계기로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남녀의 극명한 차이를 목격하게 된다. 부모님과 그녀 자신이 꿈꾸었던 성공의 형태이기도 한, 부르주아 계층의 안주인이 되면서, 세계가 남자의 영역과 여자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남편이 학업을 마치고 자신의 경력을 쌓아 중간 관리자가 되는 사이, 그녀는 아이를 낳는 바람에 학업을 미루어야 했고, 아이를 키우며 간신히 공부를 끝내 선생님이 되었다. 퇴근 후 여유롭게 바흐를 듣고, 주말이면 조용히 신문을 읽는 남편과 달리 그녀는 퇴근 후에도 장을 보느라 넋이 나가 있었고, 빨래와 압력솥 감시, 당근 껍질 벗기기가 너무 많아 잠깐의 몽상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염원하던 꿈(선생님)을 이루었지만, 일과 가사, 육아라는 세 개의 공을 돌리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체념과 포기, 권태가 일상에 배어들었고, 서서히 ‘얼어붙은 여자’가 되었다.


그런데 소설 속 그녀에겐 이름이 없다. (자전적 소설이라 에르노의 경험을 토대로 했으리라 짐작하게 되지만) 그래서인지 그게 꼭 ‘나’ 같고 우리 엄마 같다. 내 친구들 같아서 마음이 얼어붙는다. 국적도 다르고 태어난 시기도 다른데 등장하는 상황과 감정들이 너무도 내 것 같다. “나는 늘 나만 그렇다고 생각해 왔.”(p.79 <부끄러움>, 아니 에르노)는데,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슬펐다. 내게도 그런 소녀 시절이 있었는데, 무엇이든 꿈꾸는 대로 다 가능할 것 같았던 시절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벽들이 놓였지. 반장은 남자만, 여자는 부반장. 과학반에 여자는 너 하나야, 여자가 어떻게? 결혼을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지. 여자는 결혼해서 애나 키우는 게 최고야. 애도 못 낳는 여자.




아니 에르노의 글이 구원하려는 것


아니 에르노는 1940년 릴본에서 태어나, 노르망디의 이브토, 카페 겸 상점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문학을 공부한 후, 정식 교원, 현대문학 교수 자격증을 획득했다. 1974년 <빈 옷장>으로 등단해 <남자의 자리>로 르노도상을 수상했으며, 자전적인 글쓰기와 역사, 사회를 향한 작가만의 시선을 가공이나 은유 없이 정확하게 담아내는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대표작으로는 <단순한 열정>, <사진의 용도>, <한 여자>, <부끄러움>, <또 다른 소녀> 등이 있으며, 2008년 <세월>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수상했다.


자신이 경험한 과거, 그 중에서도 위험하거나 불편하다고 여겨지는 상처를 골라 낱낱이 파헤치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아니 에르노의 문학은 ‘칼 같은 글쓰기’로 일컬어진다. 그녀가 채택한 자전적 소설이라는 장르는 ‘기억에 대한 주관적 시선’은 있을지언정 ‘거짓’과 ‘허구’는 없다. 은유나 꾸밈도 없는 단문의 문장으로 때론 폭력적으로, 대체로 사건의 밖에 서 있는 관찰자의 담담한 시선으로, 과거, 기억, 사건을 쓴다. 거기에는 한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 문화, 계층과 관습, 문화 속에서 자라난 개인의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지극히 사적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그런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늘 나만 그렇다고 생각해 왔다.”(p.79 <부끄러움>)고 중얼거리게 된다. 글쓰기라는 그녀만의 카메라를 통과하는 순간 개인의 서사는 어느새 보편의 서사가 되어있다.



"제가 글을 쓰며 하는 모든 것들이 구원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이렇게 분명하게 알지는 못했어요. <바깥의 일기>에서는 현재를 구했어요. <세월>에서는 남성들, 여성들, 우리들, 분명 모두 같은 방식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겪어온 것들을 구원했죠. 저는 제가 겪었던 일들을 다른 사람들 역시 겪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p.82~83 <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미셸 포르트, 신유진 옮김, 1984books



그녀의 인터뷰집인 <진정한 장소>에서는 <얼어붙은 여자>를 쓰고 나서 이혼을 하게 된 이야기가 나온다. <얼어붙은 여자>를 쓸 당시 에르노는 이 글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글을 쓸 때는 누군가를 사랑하듯 확신을 갖고, 자기 안에 구멍을 뚫듯이 글을 써나갔다고 한다. “여성으로서 저 자신의 길과 여성으로 저의 현실을 탐구”하기 위해서 썼던 <얼어붙은 여자>는 무엇을 구원했을까. 소녀였던 누군가를, 혹은 결혼과 출산 이후 얼어가던 누군가를. 그도 아니라면 한 여성이 지나온 시간과 기억 자체, 글을 쓴 그녀 자신을 구원한 게 아닐까.


그녀의 또 다른 소설 <세월>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그녀는 자신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항할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유일한 도구, 오직 자신의 언어 안에서만, 모두의 언어 안에서만 쓸 것이다. 그러므로 써야할 그 책이 투쟁의 수단인 것이다. 그녀는 이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p.301) 그녀는 <얼어붙은 여자>를 쓰는 것으로 얼어버리는 대신 분노하며 대항했던 게 아닐까. 글이라는 수단으로 투쟁했던 것이다. 그녀가 버리지 않은 야망이 결혼 안에서는 성립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모든 것이 가능했던 소녀 시절을 떠올려보고, 지금 얼어가고 있지 않냐고 우리에게 질문한다. 그 질문은 소녀가 여성이 되는 사이, 사라지거나 잃어버린 것, 빼앗기거나 훼손된 것을 구원하겠다는 시도가 될 수 있다. 장막을 찢어 핵심으로 들어가는 글쓰기, 상처에 칼을 들이대는 글쓰기, 그 힘겨운 작업은 투쟁이면서 희생이었다. 얼어가던 자신을 드러내 누군가를 녹이겠다는 구원의 몸짓이 되었다.




욕망하고 꿈꾸는 한 얼지 않는다


“냉소적이고 논리적인 결론, 이게 결혼이다, 둘 중 어느 한 명의 우울을 택하는 것, 둘이 함께하는 것은 낭비다.” (p.231, <얼어붙은 여자>) 그러니 둘이 함께하지 않는 대신 둘 다 우울해지지 않는 것, 그게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결혼이라는 현실에서 냉소적이 되지 않기 위해. 남편이 주중엔 퇴근 후 대학원 수업을 듣기때문에 육아와 가사는 전적으로 내 몫이다. 그러니 육아의 부담을 덜 수 있는 주말의 시간을 잘 배분하는게 나의 관건이다. 함께 하기보단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누어 쓰기. 그런데도 남편은 주로 정해진 약속을 나에게 알리고 나는 받아들인다. 그러니 차이는 존재한다. 남편의 저녁 약속과 운동 시간을 제하고, 가족 모임을 빼면, 남는 시간은 얼마되지 않지만 그 속에서도 나만의 시간을 계산했다. 치졸해 보일지라도 이 작은 투쟁이 내겐 의미있다.


그런 노력이 나를 ‘그런 얼굴’에서 구원해줄 것이다. “내가 끔찍이 싫어했던, 주름지고 비장한 얼굴들”, “미용실 샴푸대에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히고 있던 얼굴들”, “더는 숨길 수 없는 주름, 쇠락이 바로 앞에 와”(p.250) 있는 얼굴로부터. 얼어붙지 않기 위해 욕망하고 꿈꾸길 멈추지 않을 것이다. 책을 읽고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 글쓰기라는 일을 갖겠다는 꿈, 내 심장을 두드리는 것을 품고 있는 한 나는 얼지 않는다. 그렇게 믿으면서 나의 역사 속에서 조금씩 멀리 나아가려 한다. 기억하려 시도하면서, 알고자 침잠하면서, 모두가 조금씩 나아가면 좋겠다.



"저는 우리가 읽었던 모든 글, 그리고 봤던 영화, 그림들까지도 예술적 가치와 상관없이 그것을 기억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자신의 역사 속에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해요."

p.58 <진정한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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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입장들 3
정지돈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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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미래가 우리에게서 무단 이탈했다면, 급진적 본능이 있는 이는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공식 서사 내부에 숨은 대안적 과거를 발굴하고, 팝의 공식 서사 후미에서 기이하되 비옥한 줄기와 걷지 않은 길을 찾아내 역사의 지도를 다시 그림으로써, 과거를 낯선 외국으로 바꿔놓는다."

<일기/기록/스크립트>에 인용된 '사이먼 레이놀즈 <<레트로 마니아>>'의 일부, <<내가 싸우듯이>>, 정지돈, 문학과지성사

 

 

 

역동적인 변화, 또는 진보가 이끌어낼 미래는 더 이상 나에게 해당하는 시간이 아닌 것 같다. 내가 바라는 미래는 신기술로 급변한 미래가 아닌 과거나 현재의 긍정적인 가치가 유지되는 미래이고 어떤 면에서는 변화가 더딘 과거의 모습을 지향한다. 한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시간의 축, 그 위에서 가능한 빨리 도달해야하는 점으로서의 미래, 불가능을 가능의 세계로 끌어 놓는 진보와 개발, 혁신의 미래는 단순히 매혹의 대상만은 아니다. 진보라고 부르짖었던 미래가 당도했을 때 더 큰 좌절을 겪었던 경험은 미래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미래는 여전히 꿈꿀 만한 것일까. 미래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정지돈의 단편 소설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중)는 정치적 격변과 경제개발의 물결에 휩쓸렸던 1970년대 한국 사회의 단면을 오사카 만국박람회(엑스포70)를 중심으로 재조명하고 미래의 의미를 묻는다. 소설은 시대 변화에 주축이 되었던 남성이 아닌 그 안에 속해 있었지만 소외되었던 여성, 태순의 목소리로 진행된다. 건축가인 조영무(1932년~)와 김원(1943년~), 그의 스승인 김수근(1931년~1986년)등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은 역사적 사료 같은 인상을 풍긴다. 하지만 정태순이라는 가공의 인물이 등장하면서 주류의 시선을 소수의 것으로 확장시킨 것이 이 소설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작가는 이 작품이 실린 소설집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에서 소외된 인물을 통해 역사적 경험을 재해석하는 시도를 반복하고 있다. 소설집의 첫번째 작품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에 등장하는 ‘재닛 프리드’ 역시 기억 속에서 잊혀진 인물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엑스포 70 한국관 안내원으로 선발된 정태순이 작품의 화자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다. 엑스포 70 자료에서 한국관 멤버들의 단체 사진을 보았는데 이후 한국의 대표 건축가가 된 남자들 사이에 홀로 있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고 한다. 그녀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개발도상국의 예술가와 건축가,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현재의 시각에는 늘 동조와 비판이라는 이분법이 존재한다.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미래에 대한 매혹과 그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할 순 없을까. 작가의 고민은 여기서 비롯되었고 이야기는 정태순의 목소리를 빌어 흘러나오게 된다. 정태순은 당시 한국 사회의 미래를 상정하는데 활발하게 활동했던 단체에 속해있었지만 동조와 비판의 시스템에서조차 소외된 관찰자이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소수자였다.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들어본다면 어떨까. 모두가 예정된 길을 가는 듯 했지만 그 길 밖에 서 있던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참고 https://m.blog.naver.com/jump_arko/221497194850

 

 

식민 지배와 이념 갈등의 여파로 반 토막 난 동아시아 국가에서 태어나 10대에 혁명과 독재를 경험하고 대학에 입학한 여성, 정태순에게 서울은 어떤 곳이었을까. 1968년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해 서울에 올라온 대구 출생의 태순은 서울에서는 ‘수업을 듣고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풍경만 보고 살았다’. 명동과 종로를 걸어다니며 새로 지어진 빌딩과 아케이드를 걸어다녔고 사람들의 차림을 구경하고 고가도로가 올라가며 하루 하루 눈에 띄게 변해가는 서울의 풍경을 관찰했다. 그런 분위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들뜨거나 풀이 죽는’ 기분을 느끼거나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불쑥 솟아오르게 했다. 시각적으로는 모든 게 변하고 있었던 시대, 하지만 정말 변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던 격변기였다.

 

 

 

"태순아, 여자가 웃긴 건 미덕이 아니야 하는 큰오빠의 말이 떠올랐다. 웃기고 있네, 웃기지도 않은 주제에. 태순은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생각난 걸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말하다 보니 어느 순간 말하지 않는 게 편해졌고 받아칠 타이밍도 잊어버렸고 난 더 이상 웃기지 않나봐 하는 생각이 들어 우울하기도 했지만 내가 나를 웃기니 그걸로 됐어, 웃기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거나 생각하고 집에 들어가 오늘 있었던 일을 쓰고 내일 있을 것 같은 일을 쓰고 더 기분이 좋을 때는 10년 후의, 30년 후의 일에 대해 일기를 쓰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30년 후에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때는 나도 오십이 넘고 손녀 손자에 볼 장 다 봤을 나이고 텔레커뮤니케이션으로 외국인들과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세기말이니까 여자가 웃긴다고 지랄할 사람은 없겠지, 안 그래, 양코씨? 하고 태순은 생각했다."

64-65쪽,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 것이다>>, 정지돈, 워크룸프레스

 

 

 

태순과 일본인 양코씨의 대화가 주를 이루는 소설에서 태순의 말은 대부분 독백으로 이루어진다. 태순의 독백은 생각하는 것을 말로 할 수 없었던 그 시대 여성의 지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발화되지 못한 말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태순에게는 발언권이 없다. 떠오르는 생각을 검열하느라 말하는 법을 잊었고,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자 몸이 있어야할 공간조차 사라진다. 그에게 꿈꿀 수 있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가능성은 지금 ‘이 곳(공간)’이 아니라 언젠가의 ‘미래’라는 시간에만 있었다.

 

 

 

"이후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지는데 그때의 지루함을 생각하면 왜 이것이 이어지게 내버려두었는지, 양코 씨는 왜 어두운 낯을 하고도 바로크빌딩으로 기어들어 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우리는 모두 왠지 모를 힘에 이끌려 낯선 공간과 관계 맺어지는데 그 힘을 일컬어 시간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그때는 미래라는 말이 너무 좋고 일기에 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쓰며 아이를 낳게 되면 아들딸 구분 없이 미래라고 하자, 미래에는 남녀 구분이 사라질지도 모르고, 미래에는 아이를 낳지 않아도 아이가 있을지 모르고, 미래에는 미로로 만들어진 방과 건물, 도시의 길을 끊임없이 걸어도 지치지 않고 두렵지 않고 예기치 않은 조우와 나무가 우거진 광장을 가로지르는 자전거, 테라스를 맴도는 새 떼의 울음소리, 쇼윈도에 비친 초록색 베레모와 다리 아래를 오가는 작은 자동차 무리의 웅성거림에 귀 기울일지도 모르니 미래를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

69쪽,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떠들썩한 만국박람회의 현장, 누군가에게는 성과이자 업적, 곧 도래할 미래의 현현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요란한 잔치, 혹은 거대한 이벤트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미래지 우리 미래가 아니요, 그들의 진보지 우리 진보가 아닙니다’라는 일본인 양코의 말처럼 아수라장 속에 사고를 당하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외침과 진보에 대한 찬양은 공염불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태순은 회의장에서 논의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한국관을 목격했다. 가까운 미래조차 현재에서 꿈꾸었던 것과 달랐다. 그가 일기에 적었던 미래, 유일하게 꿈꿀 수 있었던 미래라는 시간은 도래할 수 있는 것일까.

 

 

 

 

"저는 늘 이해할 수 없는 격차를 느끼곤 합니다, 왜 미래학 세미나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한국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이토록 다르고 판국관과 한국관을 만든 사람들이 이토록 다르며 만박과 만박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다른 것이지요, 저는 어디에도 피트하게 들어맞지 않는데 이것은 제게 장소보다 시간을 꿈꾸게 합니다, 기술을 찬양하는 것과 기술을 비판하는 것, 박람회에 참가하는 것과 박람회를 분쇄하는 것, 국가에 동조하는 것과 저항하는 것 모두 몸에 맞는 옷을 선택해 입는 것이며 그런 옷을 입을 수 있는 몸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였지요, 라고 태순은 말하며 그녀가 보기에 양코 씨와 김원, 조영무는 모두 그러한 몸을 가진 사내들로 몸이 없으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저는 누구보다 오래 한국관에 머물렀고 신문 기사에도 나왔지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라고 말했다."

79쪽,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태순은 현실의 괴리 속에서 자신에게 들어맞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과 상관없이 이분법으로 나뉜 현실의 공간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선택해 입을 몸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는 태순. ‘누구보다 오래 한국관에 머물렀고 신문 기사에도 나왔지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변화의 중심, 휩쓸리는 물결 속에 있었지만 목소리를 낼 수도, 선택할 권리조차 없던 그의 말은 방백이 되어버린다. 태순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사이 진보나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시간은 어떤 허상을 그리고 지우며 흘러왔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국가와 정치, 이념과 주의는 거대한 흐름을 장악하고 하나의 방향을 제시했고 그것이 전부이거나, 당연한 귀결이라는 듯 거들먹거렸던 것은 아닐까. 소외된 사람들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권력의 제스춰는 요란한 서커스에 불과했다.

 

 

 

 

"자신은 인천공항에서 내려 미니밴을 타고 자유로로 진입했는데 도로를 달리는 내내 흐렸던 겨울 하늘에서는 비가 퍼붓기 시작했고 냉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강변북로에 갇혀 몇 시간이고 한강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국회의사당의 둥근 지붕은 희미한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었는데 만약 김수근 선생에게 다이너마이트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여의도를 영원히 물에 잠기게 했을까요, 반복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저는 미래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평생을 다 쓴 것 같은데 지금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래가 반복된다면 그것을 미래라고 할 수 있나요, 라고 말했다."

81쪽,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소설의 끝, 2012년 서울로 돌아온 태순은 40여년 전 만국박람회에서 그리던 미래(혹은 미래 이후의 미래)에 당도했다. 하지만 태순이 좋아했던 것들은 사라졌고 꿈꾸었던 미래는 없는 것 같다. ‘미래를 이해하는 데 평생을 다 쓴’ 태순은 여전히 묻는다. ‘미래가 반복된다면 그것을 미래라고 할 수 있나요.’ 진보의 개념을 포괄하는 미래는 여전히 긍정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가요, 우리는 진정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라고. 이 질문 앞에서 어떠한 답도 할 수 없는 막막한 심정이 되어 서성거렸다. 미래에 대한 매혹조차 사라진 요즘, 미래의 가능성이라니.

 

 

코로나 19라는 감염병의 등장과 함께 기후 위기가 거론되는 요즘, 미래는 거대한 재난 영화와 같은 이미지로 우리 앞에 떠오른다. 통제불가능한 전염병의 창궐로 언컨택트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했다. 환경과 교육, 빈부격차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 앞에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전대미문의 미래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미래를 긍정할 수 있을까. 다가올 미래는 과거의 반복도 아닌 무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동일한 소설집에 실린 <해변을 가로지르며/바다를 바라보며>에는 브라질의 건축가 리나 보 바르디의 새로운 시간 관념이 인용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과거나 미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순이 묻는 미래의 의미는 직선형의 시간 개념 하에서 더 이상 답을 찾을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한 답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시간에 대한 관념을 무너뜨리는 것이 우선일지도.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우리는 시작과 끝이 없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 리나 보 바르디는 말했다. 직선적 시간관은 서구의 발명품으로 시간은 즉흥적이고 엉켜 있으며 어떤 순간에도 임의 접속할 수 있다. 과거나 미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95쪽, <해변을 가로지르며 /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정지돈, 워크룸프레스

 

 

 

리나 보 바르디의 말에 따라 시간을 상상해본다. 언뜻 엉켜있는 실타래처럼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선형으로 회전하고 있는 조형물이 떠오른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우리. 원한다면 어떤 순간으로든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접속해야할 시간은 어디일까. 세계에 대한 경이감을 회복하고 지속적으로 꿈을 꾸며,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존재하긴 할까. 지금의 우리가 그곳에 접속할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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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독자 보통의 독자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인용 옮김 / 함께읽는책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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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서구 현대 문학의 틀을 마련한 대표적 모더니스트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여러 글을 썼던 작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일생 동안 소설 창작과 병행하여 에세이를 썼는데 1904년과 1922년 사이 쓴 수필, 서평, 논문 등이 500편에 달했다. <댈러웨이 부인>을 출간한 1925년 울프는 그때까지 발표했던 여러 글을 묶어 <보통의 독자>라는 비평서를 내놓았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라 해리스는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소설을 통해 동시대 작가들의 도전에 맞설 필요를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통의 독자>라는 비평서를 통해 비평가(단순한 저널 서평자가 아닌,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진 에세이스트)로서의 평판을 굳힐 필요를 느꼈다” p/111

 

 

"<보통의 독자>는 초서가 사는 황량하고 냉랭하고 질척한 중세 잉글랜드의 세계와 애디슨이 사는 매끄러운 표면의 세계를 넘나들기도 하고, 위인들의 전기와 ‘무명 여성들의 일대기’를 넘나들기도 한다. (…) 울프의 모든 소설이 등장인물의 성격에 대한 이야기라면 <보통의 독자>에 실린 모든 에세이는 문학작품의 성격에 대한 이야기다.” p/112

 

 

기존에 발표했던 글을 묶어 ‘문학의 효용을 이야기하는 하나의 일관된 작품’으로 만들고자 생각했기에 애초의 제목은 <독서>였다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수필집이면서 비평서인 이 책은 <보통의 독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말그대로 보통의 독자가 읽기에는 장벽이 꽤 높다.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몽테뉴, 조지 엘리엇, 조지프 콘래드, 후하게 애디슨 정도까지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고 어렴풋이 작품(몇 몇 작가의 경우)을 읽은 기억도 남아 있어 더듬 더듬 울프의 글을 따라가볼 수 있겠으나, 초서, 디포, 에벌린 등 영국 문학이라는 거대한 강물의 기원으로, 엘리자베스 1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그리스와 러시아 문학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이슈에 열정적인 독자라 해도 맥을 잃고 말 수 있다.

 

 

그런데도, 지나치게 학문적이거나 격식을 갖추어 쓴 글이 아니라 울프 본연의 스타일과 섬세한 표현이 빚어내는 독창적이고 통찰력 가득한 문장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대략 알고 있다고 짐작했던 제인 오스틴이나,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를 다룬 초반의 글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작가들의 특성을 울프만의 시선으로 손에 잡힐듯 그려낸 대목은 작품을 다시 읽고 싶다는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몽테뉴와 에벌리, 애디슨을 다룬 장에서는 에세이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요소가 무엇인지(작가의 고유한 시선, 매일 쓰는 글!) 확인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 공부하듯 읽었다.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현대소설>과 <현대수필>에서는 울프의 시선이 제시하는 개념들이 여전히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음 또한 확인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이 책을 쓰면서 전제로한 독자는 특별한 문학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 독자라고 한다. 그들은 영국 문학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사람들(영국의 일반 독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면 독자의 정의가 조금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의 일반 독자에게 '영국 문학을 일상적으로 접한다'는건 꽤나 특별한 조건이 될 수 있다. 영국 문학에 남다른 관심이 있고 어느 정도의 독서 경험(고전을 포함한)을 지닌 독자라야, 이 책의 ‘보통의 독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문학 전공자 정도는 되어야 소파에 기대어 앉아 느긋하게 이 책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책의 중반부부터 머리를 싸매고 읽은 이에겐 '보통의 독자'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하게 해준 책이라고 고백해야겠다.

 

 

그렇다고, 지레 겁먹고 이 책을 포기하지는 마시길. 옮겨 적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아 간신히 추려냈다. 서평 또는 비평서라는 개념에 가두기엔 울프만의 스타일이 빛나는 문장이 가득하다. 하나의 책을 읽고 평할 때, 혹은 어떤 작가에 대해 말할 때, 학문적이거나 딱딱한 논리로 풀어내는 게 아니라 풍부한 비유로도 명료하고 정확한 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버지니아 울프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제인 오스틴>

그녀는 에밀리 브론테처럼 문을 열기만 하면 그녀를 느낄 수 있도록 하지는 못했다. 겸손한 자세로 흥겹게 잔가지와 짚을 모아 둥지를 만들고 서로 제자리에 놓아 예쁘게 꾸몄다. 잔가지와 짚은 약간 건조하고 먼지도 쌓여 있었다. 거기에는 큰 집과 작은 집이 있었으며 티 파티, 디너파티, 때로는 소풍도 있었다. 인생은 가치 있는 관계와 적정한 수입에 따라 한정되었다. 흙탕길 곁에서는 발이 젖기도 했고, 젊은 아가씨들은 쉽게 피로해지기도 했다. 자그마한 원칙, 자그마한 결과, 그리고 시골에 살고 있는 상류층 가정에서 공통적으로 향유된 교육이 그것을 지탱했다. 부도덕, 모험, 정열 등은 외부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단조로움이나 이 모든 사소함을 피하지 않았고, 간과하지 않았다. (…) 그녀는 입으로만 관습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들을 믿고 있다. p/30~31

 

 

제인 오스틴이 파티, 소풍, 시골의 춤 등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들을 쓰기로 한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 있을까? (…) 그녀는 자신의 힘이 무엇이며, 사람들의 기대 수준이 높은 작가로서 무엇을 소재로 삼아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영역 밖에 놓여 있는 인상들, 아무리 노력을 하거나 기교를 부리더라도 그녀 자신의 자원으로 제대로 감싸거나 덮어 버릴 수 없는 감정들도 있었다. 예컨대 그녀는 어느 소녀가 깃발이나 예배에 대해 열띤 이야기를 하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낭만적인 순간에 몰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

그녀의 균형 잡힌 재능은 완벽할 정도이다. 완성된 소설들에는 실패작이 전혀 없으며, 여러 장들 사이에서 현저하게 수준이 뒤떨어지는 장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녀는 마흔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p/34~35

 

 

*서평/평론에서도 버지니아 울프만의 섬세한 표현은 빛을 발한다. 제인 오스틴에 대한 평가에서 그녀의 소설이 구현한 세계에 대한 울프의 요약은 얼마나 절묘한가. 관습적인 것들은 수용하고 그것이 받치고 있는 세계의 힘을 소설을 통해 보여준 제인 오스틴의 가치를 울프의 해석을 통해 재확인 할 수 있다.

 

 

<『제인에어』와 『폭풍의 언덕』>

(샬럿 브론테)그녀의 페이지를 밝게 비추는 것은 심장의 불꽃에서 나오는 붉은색의 깜박이는 빛이다. 달리 말해 우리가 그녀의 작품을 읽는 것은 등장인물의 훌륭한 견해 때문도 아니고( 그녀의 등장인물들은 활발하고 단순하다), 희극이기 때문도 아니며(그녀의 작품은 엄격하고 미숙하다), 인생에 대한 철학적 견해 때문도 아닌(그녀의 견해는 시골 목사의 딸이 지니고 있을 법한 견해이다), 바로 그녀의 시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개성을 지닌,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그들의 문을 열기만 하면 그들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작가들 모두가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는 수용된 사물의 질서와 끊임없이 싸우는 어떤 길들여지지 않는 사나움이 있다. 그들은 인내심을 갖고 관찰하기보다 즉각적으로 창조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p/48~49

 

 

* 샬럿 브론테에 대해서는 <제인에어>속 제인에어라는 인물의 한계(멀리 떠나지 않는다, 언제나 가정교사이며 언제나 사랑에 빠져 있다)를 지적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이고 스스로 한계를 정하는 작가들에게는 훨씬 보편적이고 마음이 넓은 사람들이 지닐 수 없는 힘이 있”으며, “그들이 간직하는 인상은 그들의 좁은 벽 사이에 가득 채워지고 뚜렷하게 표시된다”고 지지한다. 덧붙여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힘, 속도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그 속에는 “심장의 불꽃에서 나오는 붉은색의 깜박이는 빛”, ‘시적인 힘’이 있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수용된 사물의 질서’이며 ‘끊임없이 싸우는 어떤 길들여지지 않는 사나움’이라고 칭해진다.

 

 

<폭풍의 언덕>은 <제인에어>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다. 에밀리가 샬럿보다 더 훌륭한 시인이기 떄문이다. (…) 그녀에게 창조의 욕구를 불러일으킨 충동은 그녀 자신의 괴로움이나 그녀 자신의 상처가 아니었다. 세상의 거대한 무질서를 내다보고 그것을 책 속에서 통합시킬 힘을 자신에게서 느꼈다. p/50

 

 

“다른 것이 사라지더라도 그가 남아 있다면, 나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이 남아 있고 그가 사라져 버린다면, 우주는 낯선 존재가 될 것이며 나는 그것의 일부처럼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은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다시 터져 나온다. “내게는 대지도 지옥도 깨뜨리지 못할 휴식이 보인다. 그리고 끝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내세-그들이 찾아 들어간 영원-의 다짐이 느껴진다. 바로 삶이 끝없이 계속되고 사랑이 공감을 이루며 기쁨이 충만해지는 곳이다.” 그 책이 다른 소설들보다 대단한 수준으로 올라서는 것은 바로 인간성의 불가사의함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위대한 것으로 승화시키려 하는 힘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p/51

 

 

에밀리 브론테는 마치 우리가 인간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갈가리 찢어 버리고, 이들 알아차릴 수 없는 슬라이드에 현실을 초월하는 격정적인 인생을 채워 놓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녀의 힘이야말로 가장 보기 드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사실에 대한 의존에서 인생을 해방시키고, 몇가지 작은 동작만으로 얼굴의 영혼을 가리키며, 황무지를 언급함으로써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p/52

 

 

*고등학생 때 읽은 <폭풍의 언덕>은 황량한 언덕, 바람에 휘날리던 머리카락 등 몇몇의 이미지만으로 남아있다. 두 주인공의 사랑이 ‘광적’으로 보였던 것은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일 테다. 울프의 에밀리 브론테 작가론을 읽고 나이들어 다시 읽는 <폭풍의 언덕>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몽테뉴>

우리는 잠시도 그의 책이 바로 그 자신임을 의심할 수 없다. 그는 가르치기를 거부하고 설교하기도 거부했으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같을 뿐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의 모든 노력은 그 자신에 대해 쓰고 소통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바로 ‘겉보기보다 훨씬 울퉁불퉁한 길’이다.

왜냐하면 자신과의 고통이 지니는 어려움 너머에는 자신으로 존재하는 최상의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p/74

 

 

그는 아주 미묘한 것들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관찰함으로써 인간의 영혼을 이루는 온갖 불안정한 것들 것 기적적으로 조정하는 일에 마침내 성공했다. (…) 하지만 우리의 두 눈 아래 살아가는 어느 영혼의 매혹적인 광경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동안 과연 쾌락이 그 모든 것의 목적이냐는 물음이 저절로 나온다. 영혼의 본성에 대한 이 압도적인 관심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이 커다란 욕구는 왜 생기는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충분한다? 아니면 수수께끼에 대한 어떤 설명이 어딘가에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어떤 대답이 있을 수 있는가? 없다. 오로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또 하나의 물음이 있을 뿐이다. p/86

 

 

<뉴캐슬 공작 부인>

그녀의 철학이 하찮은 것이고 그녀의 희곡이 읽을 수 없는 것이며 그녀의 시구가 따분하다 하더라도, 그녀의 모든 글은 독창적인 불길에 감싸여 있다. 우리는 페이지마다 굽이쳐 흐르면서 반짝거리는, 변덕스럽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개성이 자아내는 매력을 뒤쫓지 않을 수 없다. 그녀에게는 바보 같고 경솔한 면과 더불어 고상하고 돈키호테적이며 활기찬 면이 있다. 그녀의 단순성은 아주 공공연하고, 그녀의 지성은 아주 활동적이며, 요정과 동물에 대한 그녀의 동정심은 아주 참되고 부드럽다. 그녀는 꼬마 요정의 변덕스러움, 어떤 비인간적 존재의 무책임성, 그것의 비정함, 그것의 매력 등을 지니고 있다. p/102

** 버지니아 울프 자신 만의 시선으로 뉴캐슬 공작 부인의 매력을 찾아내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두서없고 숨김없는 에벌린*>

*1620~1706, 특히 일기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먼저 일기는 항상 일기, 즉 우리가 요양할 때, 말을 타고 있을 때, 죽음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읽는 책이라는 것, 둘째로 수많은 찬사를 받아 온 이 독서가 대부분 단지 꿈을 꾸거나 빈둥거리는 것, 책을 들고 의자에 편안하게 드러눕는 것, 달리아에 앉은 나비를 지켜보는 것, 어느 비평가도 다루려고 하지 않았으며 오직 모럴리스트만이 좋은 말을 할 수 있는 아무 이득 없는 일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럴리스트는 그것이 하나의 순진무구한 활동이라고 인정할 것이며, 비록 사소한 것들에서 비롯되는 행복이라도 그것이야 말로 철학이나 설교보다 사람들이 종교를 바꾸거나 왕을 시해하려는 행동을 막는 데 더 많은 기여를 하리라고 덧붙일 것이기 때문이다. p/108~109

 

 

그의 일기를 통해 선량한 사람, 나쁜 사람, 유명 인사, 실재하지 않는 존재 등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다. 더 많은 수의 사람을 우리는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며, 그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면 그들은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때로는 사라지는 옷자락 끝이, 잠자코 앉아 조명을 받고 있는 사람의 전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암시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그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포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119

 

 

* 에벌린의 일기를 읽은 인상을 “선량한 사람, 나쁜 사람, 유명 인사 실재하지 않는 존재 등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다.”라고 표현한 문장에서는 역시 버니지아 울프답다 싶어진다. 이어 “때로는 사라지는 옷자락 끝이, 잠자코 앉아 조명을 받고 있는 사람의 전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암시하는 경우도 있다.”라고 그 의미를 풀이한다. 비유명인이 들고 나는 개인의 기록을 통해, 특히 사후의 기록이라 이미 사라진 사람들이 대부분인 글을 통해서도, ‘조명을 받고 있는 사람의 전신보다 더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는 것 또한 울프의 능력일 수 있다.

 

 

<애디슨>

수필의 형식은 그 자체로 특별한 완벽함을 인정한다. 그리고 어느 하나가 완벽할 경우 그 완벽성의 정확한 규모는 하찮아진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이 템스 강과 빗방울 중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다. 우리가 애디슨의 수필에 대해 나쁘게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대부분의 경우 지루하고 피상적이며 우화는 빛이 바래고 신앙심은 형식적이며 윤리 의식이 진부하다는 것-을 말한 뒤에도 여전히 애디슨의 수필이 완벽한 수필이라는 사실은 남아 있다. 어느 예술이든 최정상에 이르면 모든 것이 그 예술가를 도우려 드는 것 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으며, 그가 거둔 성과는 후년에 이르면 반쯤 무의식적인 것처럼 보이면서 저절로 적절한 표현이 된다. 그래서 애디슨은 매일같이 수필을 썼고 그것을 쓰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고상한 내용이든 저속한 내용이든, 서사가 심오하든 서정적이든 정열적이든, 산문-보통의 지성을 지닌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을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해 주는 매체-이 지금의 산문처럼 된 것이 애디슨 직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p/138

 

 

***조지 엘리엇에 대해서는 “ ‘그녀의 가장 먼 과거’에 해당하는 농촌 세계에 가둔다면, 그녀의 위대성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그녀의 참된 묘미를 잃게 된다”며 그녀의 소설에서 눈길을 던져야 하는 것은 여주인공들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그들의 이야기는 조지 엘리엇 자신의 불완전한 이야기이다. 그녀에게도 역시 여성으로서의 부담이나 복잡성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성역 너머로 결의를 다지면서 예술이나 지식이라는 이상하고 광채가 나는 열매까지 찾아야 했다. 극소수의 여자들처럼 이것을 움켜쥔 그녀는 자신이 상속한 것-견해 차이, 기준의 차이-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고 부적절한 보상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또한 인생이 정신에 제공하는 모든 것에 ‘까다로우면서도 굶주린 듯한 야심’은 가지고 다가가고, 자신의 여성적인 열망을 남성 세계와 대비시키려 했던 것에 조지 엘리엇의 성취가 있다고 울프는 말한다. (p/158~159)

 

 

***울프는 조지프 콘래드에 대해 “후기 세계는 당황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고 피로하게 만드는 본의 아닌 모호성, 애매함, 환멸에 가까운 느낌 등을 지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매우 오래되고 완벽하게 참된 것, 과거에는 감추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드러난 것을 이야기하는 듯”한 초기의 책들은 정독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p/173~174)

 

 

<현대소설>

내부를 들여다보면 인생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일상적인 하루의 일상적인 마음에 대해 잠시 살펴보라. 마음은 사소하거나 환상적이거나 희미하거나 강철처럼 예리한 온갖 인상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헤아릴 수 없는 원자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모든 방면에서 쏟아지는 가운데, 월요일 또는 화요일의 인생으로 서서히 형성되면서 이전과 다른 악센트로 떨어진다. 중요한 순간은 이곳이 아니라 그곳에 왔다. 그러므로 만약 작가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었다면,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것을 쓸 수 있었다면, 인습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기반으로 작품을 쓸 수 있었다면, 구성도 없고 희극이나 비극이나 사랑 이야기나 수용된 스타일의 파국 어쩌면 본드 가의 재단사들이 하는 식으로 기워지는 단추도 하나 없었을 것이다. 인생은 대칭적으로 배열되는 일련의 등불이 아니라 빛이 발산되는 하나의 후광, 의식이 생기기 시작해서부터 사라질 때까지 우리를 감싸는 반투명의 봉투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이처럼 경계가 정해지지 않은 미지의 정신을-가능하면 이질적이거나 외부적인 것을 줄인 채-전달하는 것이(비록 탈선하거나 복잡성을 드러내더라도) 바로 소설가의 임무가 아닐까? 우리는 단지 용기와 성실성만을 호소하고 있지 않다. 올바른 소설이란 우리가 관습에 따라 믿어 온 것과 조금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p/377

 

 

<현대수필>

수필을 지배하는 원칙은 간단히 말해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수필은 첫 단어로 우리에게 주문을 걸어야 하며, 마지막 단어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가 주문에서 깨어날 때 상쾌한 느낌을 갖도록 해야 한다. (…) 수필은 우리를 감싸 주고, 세상을 가로질러 그 장막을 쳐야 한다. p/388

 

 

작가는 맥주를 마시면서 대화하기에 좋은 상대이다. 하지만 문학은 엄격하다. 아무리 매력적이거나 후덕하거나 심지어 학식이 많거나 총명하다고 해도, 글을 쓰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문학의 첫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문학은 말하는 것 같다. p/398

 

 

그들이 글을 쓰는 것은 지쳐 있는 냉담한 세상을 위한 친절이며, 놀라운 것은 그들은 적어도 글을 잘 쓰기 위한 시도를 결코 중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p/402

 

 

훌륭한 수필은 그 영속적인 성질을 간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장막을 쳐야 하지만, 그 장막은 우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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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 카페 - 파리에서 마주친 우연의 기록 카페 소사이어티 3
신유진 지음 / 시간의흐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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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좋은 책은 글을 쓰고 싶게 하는 책.
커피와 글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몽카페‘에 가서 글을 쓰고 싶게 하는 이 책은
그러니까 내게, 최고의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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