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
그녀는 에밀리 브론테처럼 문을 열기만 하면 그녀를 느낄 수 있도록 하지는 못했다. 겸손한 자세로 흥겹게 잔가지와 짚을 모아 둥지를 만들고 서로 제자리에 놓아 예쁘게 꾸몄다. 잔가지와 짚은 약간 건조하고 먼지도 쌓여 있었다. 거기에는 큰 집과 작은 집이 있었으며 티 파티, 디너파티, 때로는 소풍도 있었다. 인생은 가치 있는 관계와 적정한 수입에 따라 한정되었다. 흙탕길 곁에서는 발이 젖기도 했고, 젊은 아가씨들은 쉽게 피로해지기도 했다. 자그마한 원칙, 자그마한 결과, 그리고 시골에 살고 있는 상류층 가정에서 공통적으로 향유된 교육이 그것을 지탱했다. 부도덕, 모험, 정열 등은 외부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단조로움이나 이 모든 사소함을 피하지 않았고, 간과하지 않았다. (…) 그녀는 입으로만 관습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들을 믿고 있다. p/30~31
제인 오스틴이 파티, 소풍, 시골의 춤 등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들을 쓰기로 한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 있을까? (…) 그녀는 자신의 힘이 무엇이며, 사람들의 기대 수준이 높은 작가로서 무엇을 소재로 삼아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영역 밖에 놓여 있는 인상들, 아무리 노력을 하거나 기교를 부리더라도 그녀 자신의 자원으로 제대로 감싸거나 덮어 버릴 수 없는 감정들도 있었다. 예컨대 그녀는 어느 소녀가 깃발이나 예배에 대해 열띤 이야기를 하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낭만적인 순간에 몰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
그녀의 균형 잡힌 재능은 완벽할 정도이다. 완성된 소설들에는 실패작이 전혀 없으며, 여러 장들 사이에서 현저하게 수준이 뒤떨어지는 장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녀는 마흔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p/34~35
*서평/평론에서도 버지니아 울프만의 섬세한 표현은 빛을 발한다. 제인 오스틴에 대한 평가에서 그녀의 소설이 구현한 세계에 대한 울프의 요약은 얼마나 절묘한가. 관습적인 것들은 수용하고 그것이 받치고 있는 세계의 힘을 소설을 통해 보여준 제인 오스틴의 가치를 울프의 해석을 통해 재확인 할 수 있다.
<『제인에어』와 『폭풍의 언덕』>
(샬럿 브론테)그녀의 페이지를 밝게 비추는 것은 심장의 불꽃에서 나오는 붉은색의 깜박이는 빛이다. 달리 말해 우리가 그녀의 작품을 읽는 것은 등장인물의 훌륭한 견해 때문도 아니고( 그녀의 등장인물들은 활발하고 단순하다), 희극이기 때문도 아니며(그녀의 작품은 엄격하고 미숙하다), 인생에 대한 철학적 견해 때문도 아닌(그녀의 견해는 시골 목사의 딸이 지니고 있을 법한 견해이다), 바로 그녀의 시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개성을 지닌,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그들의 문을 열기만 하면 그들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작가들 모두가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는 수용된 사물의 질서와 끊임없이 싸우는 어떤 길들여지지 않는 사나움이 있다. 그들은 인내심을 갖고 관찰하기보다 즉각적으로 창조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p/48~49
* 샬럿 브론테에 대해서는 <제인에어>속 제인에어라는 인물의 한계(멀리 떠나지 않는다, 언제나 가정교사이며 언제나 사랑에 빠져 있다)를 지적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이고 스스로 한계를 정하는 작가들에게는 훨씬 보편적이고 마음이 넓은 사람들이 지닐 수 없는 힘이 있”으며, “그들이 간직하는 인상은 그들의 좁은 벽 사이에 가득 채워지고 뚜렷하게 표시된다”고 지지한다. 덧붙여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힘, 속도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그 속에는 “심장의 불꽃에서 나오는 붉은색의 깜박이는 빛”, ‘시적인 힘’이 있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수용된 사물의 질서’이며 ‘끊임없이 싸우는 어떤 길들여지지 않는 사나움’이라고 칭해진다.
<폭풍의 언덕>은 <제인에어>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다. 에밀리가 샬럿보다 더 훌륭한 시인이기 떄문이다. (…) 그녀에게 창조의 욕구를 불러일으킨 충동은 그녀 자신의 괴로움이나 그녀 자신의 상처가 아니었다. 세상의 거대한 무질서를 내다보고 그것을 책 속에서 통합시킬 힘을 자신에게서 느꼈다. p/50
“다른 것이 사라지더라도 그가 남아 있다면, 나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이 남아 있고 그가 사라져 버린다면, 우주는 낯선 존재가 될 것이며 나는 그것의 일부처럼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은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다시 터져 나온다. “내게는 대지도 지옥도 깨뜨리지 못할 휴식이 보인다. 그리고 끝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내세-그들이 찾아 들어간 영원-의 다짐이 느껴진다. 바로 삶이 끝없이 계속되고 사랑이 공감을 이루며 기쁨이 충만해지는 곳이다.” 그 책이 다른 소설들보다 대단한 수준으로 올라서는 것은 바로 인간성의 불가사의함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위대한 것으로 승화시키려 하는 힘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p/51
에밀리 브론테는 마치 우리가 인간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갈가리 찢어 버리고, 이들 알아차릴 수 없는 슬라이드에 현실을 초월하는 격정적인 인생을 채워 놓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녀의 힘이야말로 가장 보기 드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사실에 대한 의존에서 인생을 해방시키고, 몇가지 작은 동작만으로 얼굴의 영혼을 가리키며, 황무지를 언급함으로써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p/52
*고등학생 때 읽은 <폭풍의 언덕>은 황량한 언덕, 바람에 휘날리던 머리카락 등 몇몇의 이미지만으로 남아있다. 두 주인공의 사랑이 ‘광적’으로 보였던 것은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일 테다. 울프의 에밀리 브론테 작가론을 읽고 나이들어 다시 읽는 <폭풍의 언덕>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몽테뉴>
우리는 잠시도 그의 책이 바로 그 자신임을 의심할 수 없다. 그는 가르치기를 거부하고 설교하기도 거부했으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같을 뿐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의 모든 노력은 그 자신에 대해 쓰고 소통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바로 ‘겉보기보다 훨씬 울퉁불퉁한 길’이다.
왜냐하면 자신과의 고통이 지니는 어려움 너머에는 자신으로 존재하는 최상의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p/74
그는 아주 미묘한 것들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관찰함으로써 인간의 영혼을 이루는 온갖 불안정한 것들 것 기적적으로 조정하는 일에 마침내 성공했다. (…) 하지만 우리의 두 눈 아래 살아가는 어느 영혼의 매혹적인 광경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동안 과연 쾌락이 그 모든 것의 목적이냐는 물음이 저절로 나온다. 영혼의 본성에 대한 이 압도적인 관심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이 커다란 욕구는 왜 생기는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충분한다? 아니면 수수께끼에 대한 어떤 설명이 어딘가에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어떤 대답이 있을 수 있는가? 없다. 오로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또 하나의 물음이 있을 뿐이다. p/86
<뉴캐슬 공작 부인>
그녀의 철학이 하찮은 것이고 그녀의 희곡이 읽을 수 없는 것이며 그녀의 시구가 따분하다 하더라도, 그녀의 모든 글은 독창적인 불길에 감싸여 있다. 우리는 페이지마다 굽이쳐 흐르면서 반짝거리는, 변덕스럽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개성이 자아내는 매력을 뒤쫓지 않을 수 없다. 그녀에게는 바보 같고 경솔한 면과 더불어 고상하고 돈키호테적이며 활기찬 면이 있다. 그녀의 단순성은 아주 공공연하고, 그녀의 지성은 아주 활동적이며, 요정과 동물에 대한 그녀의 동정심은 아주 참되고 부드럽다. 그녀는 꼬마 요정의 변덕스러움, 어떤 비인간적 존재의 무책임성, 그것의 비정함, 그것의 매력 등을 지니고 있다. p/102
** 버지니아 울프 자신 만의 시선으로 뉴캐슬 공작 부인의 매력을 찾아내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두서없고 숨김없는 에벌린*>
*1620~1706, 특히 일기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먼저 일기는 항상 일기, 즉 우리가 요양할 때, 말을 타고 있을 때, 죽음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읽는 책이라는 것, 둘째로 수많은 찬사를 받아 온 이 독서가 대부분 단지 꿈을 꾸거나 빈둥거리는 것, 책을 들고 의자에 편안하게 드러눕는 것, 달리아에 앉은 나비를 지켜보는 것, 어느 비평가도 다루려고 하지 않았으며 오직 모럴리스트만이 좋은 말을 할 수 있는 아무 이득 없는 일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럴리스트는 그것이 하나의 순진무구한 활동이라고 인정할 것이며, 비록 사소한 것들에서 비롯되는 행복이라도 그것이야 말로 철학이나 설교보다 사람들이 종교를 바꾸거나 왕을 시해하려는 행동을 막는 데 더 많은 기여를 하리라고 덧붙일 것이기 때문이다. p/108~109
그의 일기를 통해 선량한 사람, 나쁜 사람, 유명 인사, 실재하지 않는 존재 등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다. 더 많은 수의 사람을 우리는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며, 그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면 그들은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때로는 사라지는 옷자락 끝이, 잠자코 앉아 조명을 받고 있는 사람의 전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암시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그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포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119
* 에벌린의 일기를 읽은 인상을 “선량한 사람, 나쁜 사람, 유명 인사 실재하지 않는 존재 등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다.”라고 표현한 문장에서는 역시 버니지아 울프답다 싶어진다. 이어 “때로는 사라지는 옷자락 끝이, 잠자코 앉아 조명을 받고 있는 사람의 전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암시하는 경우도 있다.”라고 그 의미를 풀이한다. 비유명인이 들고 나는 개인의 기록을 통해, 특히 사후의 기록이라 이미 사라진 사람들이 대부분인 글을 통해서도, ‘조명을 받고 있는 사람의 전신보다 더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는 것 또한 울프의 능력일 수 있다.
<애디슨>
수필의 형식은 그 자체로 특별한 완벽함을 인정한다. 그리고 어느 하나가 완벽할 경우 그 완벽성의 정확한 규모는 하찮아진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이 템스 강과 빗방울 중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다. 우리가 애디슨의 수필에 대해 나쁘게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대부분의 경우 지루하고 피상적이며 우화는 빛이 바래고 신앙심은 형식적이며 윤리 의식이 진부하다는 것-을 말한 뒤에도 여전히 애디슨의 수필이 완벽한 수필이라는 사실은 남아 있다. 어느 예술이든 최정상에 이르면 모든 것이 그 예술가를 도우려 드는 것 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으며, 그가 거둔 성과는 후년에 이르면 반쯤 무의식적인 것처럼 보이면서 저절로 적절한 표현이 된다. 그래서 애디슨은 매일같이 수필을 썼고 그것을 쓰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고상한 내용이든 저속한 내용이든, 서사가 심오하든 서정적이든 정열적이든, 산문-보통의 지성을 지닌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을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해 주는 매체-이 지금의 산문처럼 된 것이 애디슨 직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p/138
***조지 엘리엇에 대해서는 “ ‘그녀의 가장 먼 과거’에 해당하는 농촌 세계에 가둔다면, 그녀의 위대성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그녀의 참된 묘미를 잃게 된다”며 그녀의 소설에서 눈길을 던져야 하는 것은 여주인공들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그들의 이야기는 조지 엘리엇 자신의 불완전한 이야기이다. 그녀에게도 역시 여성으로서의 부담이나 복잡성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성역 너머로 결의를 다지면서 예술이나 지식이라는 이상하고 광채가 나는 열매까지 찾아야 했다. 극소수의 여자들처럼 이것을 움켜쥔 그녀는 자신이 상속한 것-견해 차이, 기준의 차이-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고 부적절한 보상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또한 인생이 정신에 제공하는 모든 것에 ‘까다로우면서도 굶주린 듯한 야심’은 가지고 다가가고, 자신의 여성적인 열망을 남성 세계와 대비시키려 했던 것에 조지 엘리엇의 성취가 있다고 울프는 말한다. (p/158~159)
***울프는 조지프 콘래드에 대해 “후기 세계는 당황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고 피로하게 만드는 본의 아닌 모호성, 애매함, 환멸에 가까운 느낌 등을 지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매우 오래되고 완벽하게 참된 것, 과거에는 감추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드러난 것을 이야기하는 듯”한 초기의 책들은 정독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p/173~174)
<현대소설>
내부를 들여다보면 인생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일상적인 하루의 일상적인 마음에 대해 잠시 살펴보라. 마음은 사소하거나 환상적이거나 희미하거나 강철처럼 예리한 온갖 인상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헤아릴 수 없는 원자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모든 방면에서 쏟아지는 가운데, 월요일 또는 화요일의 인생으로 서서히 형성되면서 이전과 다른 악센트로 떨어진다. 중요한 순간은 이곳이 아니라 그곳에 왔다. 그러므로 만약 작가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었다면,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것을 쓸 수 있었다면, 인습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기반으로 작품을 쓸 수 있었다면, 구성도 없고 희극이나 비극이나 사랑 이야기나 수용된 스타일의 파국 어쩌면 본드 가의 재단사들이 하는 식으로 기워지는 단추도 하나 없었을 것이다. 인생은 대칭적으로 배열되는 일련의 등불이 아니라 빛이 발산되는 하나의 후광, 의식이 생기기 시작해서부터 사라질 때까지 우리를 감싸는 반투명의 봉투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이처럼 경계가 정해지지 않은 미지의 정신을-가능하면 이질적이거나 외부적인 것을 줄인 채-전달하는 것이(비록 탈선하거나 복잡성을 드러내더라도) 바로 소설가의 임무가 아닐까? 우리는 단지 용기와 성실성만을 호소하고 있지 않다. 올바른 소설이란 우리가 관습에 따라 믿어 온 것과 조금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p/377
<현대수필>
수필을 지배하는 원칙은 간단히 말해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수필은 첫 단어로 우리에게 주문을 걸어야 하며, 마지막 단어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가 주문에서 깨어날 때 상쾌한 느낌을 갖도록 해야 한다. (…) 수필은 우리를 감싸 주고, 세상을 가로질러 그 장막을 쳐야 한다. p/388
작가는 맥주를 마시면서 대화하기에 좋은 상대이다. 하지만 문학은 엄격하다. 아무리 매력적이거나 후덕하거나 심지어 학식이 많거나 총명하다고 해도, 글을 쓰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문학의 첫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문학은 말하는 것 같다. p/398
그들이 글을 쓰는 것은 지쳐 있는 냉담한 세상을 위한 친절이며, 놀라운 것은 그들은 적어도 글을 잘 쓰기 위한 시도를 결코 중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p/402
훌륭한 수필은 그 영속적인 성질을 간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장막을 쳐야 하지만, 그 장막은 우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p/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