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6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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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일이 가능할 것 같았다. 모든 일이 잘 들어맞는 것 같았다. 바로 지금(하지만 모두들 구두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순간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으며 그녀는 이것이 지속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안정감에 도달한 것이다. 그녀는 공중에 떠 있는 매처럼, 온몸의 신경을 소란스럽지 않고 다소 엄숙하게, 충만하고 달콤하게 채운 기쁨의 대기에 떠 있는 깃발처럼 들떠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과 친구들이 식사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 기쁨은 그들에게서 솟아났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모든 기쁨은 이 깊은 정적 속에서 솟아올라(그녀는 윌리엄 뱅크스에게 아주 작은 고기 조각을 더 떠 주고 그 토기의 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연무처럼, 연기처럼 지금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 곳에 머무르며 그들을 모두 안전하게 묶어 준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거기에 기쁨이 그들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뱅크스 씨에게 특히 연한 조각을 조심스럽게 떠 주면서 그 기쁨이 영원성을 띠고 있다고 느꼈다. 그날 오후에 다른 일로 이미 느꼈던 것처럼 사물에는 응집성과 영속성이 있다. 덧없이 흘러가고 사라지고 유령처럼 형체를 잃어버리는 것에 맞서 변화를 초월한 어떤 것이 루비처럼 빛을 발한다는 뜻이다.(그녀는 반사된 빛이 잔물결을 일으키는 창문을 힐끗 바라다보았다.) 그래서 오늘 밤에 다시 그녀는 이미 낮에 한 번 느꼈던 감정, 평화로움과 평안함을 느꼈다. 앞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이런 순간들로 이루어진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순간이 남을 것이다."

p.167~168 , <등대로>, 버지니아 울프, 이미애 옮김, 민음사




"우리가 지금껏 지나온 모든 삶과 앞으로의 모든 삶은

나무들과 물들어 가는 이파리들로 가득할 거예요.

그녀는 그 단어들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자아 바깥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그 단어들을 음악처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자신이 다른 말을 하는 동안 마음 속에 숨어 있던 것들을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 둘러보지 않아도 그녀는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그 목소리를 듣고 있음을 알았다." p.177




"이제는 모든 것이 한 단계 더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문지방에 발을 올려놓은 채 그녀는 자기가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사라져 가는 그 장면에서 잠시 더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몸을 돌려 민타의 팔을 잡고 방을 나서자, 그 장면은 달라졌고, 다른 형태를 띠었다. 어깨 너머로 한 번 더 마지막으로 돌아보면서 그녀는 그것이 이미 과거가 되었음을 알았다." p.178



"그녀는 그 온갖 소란스러운 대화 이후에 잠시 조용히 서서 어떤 특별한 것, 중요한 것을 찾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을 떼어 내서 분리하고, 거기에 달라붙은 온갖 감정들과 잡다한 점들을 말끔히 씻어 내어 그것을 자기 앞에 놓고, 자신이 임명한 판사들이 둘러 앉아서 은밀히 회의하는 법정으로 가져가서 결정하고 싶었다. 그게 좋은 걸까, 나쁜 걸까? 그게 옳은 걸까, 그른 걸까?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등등. 이렇게 그녀는 돌연히 물러난 이후에 자신을 바로잡았고,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어울리지 않게도 바깥의 느릅나무 가지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녀의 세계는 변화하고 있었고 나무들은 정지되어 있었다. (…) 그래, 그렇다면 그것은 끝났고 완결되었다. 그리고 다 끝난 일들이 모두 그렇듯이 엄숙해졌다. 시끄러운 대화와 감정을 말끔히 비우고 생각해 보니, 그것은 늘 있어 왔고, 다만 지금에야 드러났으며, 그렇게 드러나면서 갑자기 모든 것을 영속적으로 만들어 버린 듯했다. 그들이 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오늘 밤으로 되돌아올 거라고 그녀는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 그녀는 ‘레일리 부부’라는 새 이름을 거듭 불러 보았고, 아이들 방문에 손을 올려놓은 채, 마치 서로를 나눈 감정의 칸막이벽들이 너무 얇아져서 실제로는 (안도감과 행복을 느끼며) 모두 하나의 흐름이 된 듯 다른 사람들과의 교감을 느꼈다. 의자와 탁자, 지도가 그녀 것이고 또한 그들 것이며, 누구 것이든 중요하지 않았고, 그녀가 죽은 다음에 폴과 민타가 그 공동체를 이끌어 갈 것이다." p.180~181




<등대로>를 읽고 절절하면서도 무언가 가슴을 억누르는 듯한 느낌에 먹먹해졌는데요. 유한하고 덧없는 생(生)의 의미가 이 책 속에 담겨 출렁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 인물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전후, 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거나 변하는 것, 그런데도 유지되면서 의미를 새기는 것을,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통해 그려내 보여주는 소설이었어요.



삶의 정수란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완전히 다가갈 수 없는 무엇이지만 순간 순간 다가가려는 시도 속에서 잠시 가 닿거나, 찰나에 머무는 진실을 발견하기도 한다고 알려주는 것도 같고요. 그래서 그러한 시도를 하는 순간 속에 모든 게 있다고, 울프는 말하는 듯 합니다. 어떤 순간은 영원히 박제되기도 한다고요. 하지만 그것마저도 시간의 파도에 휩쓸려 닳아 사라지기도 할테지만,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순리라고요. 하지만 우리가 순간 속에서 그걸 움켜쥐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사라진데도 괜찮다고 끝없이 위로해주는 소설이기도 했어요.



인생이란 덧없고 무상합니다. 소중한 이를 죽음으로 잃고, 기대했던 결합(결혼)도 바람을 저버리고, 피어나길 바랐던 미래는 영영 오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대치 않았던 모습으로 의미를 만들고, 길을 찾아내고, 의외의 미래에 닿기도 합니다. 그렇게 삶은 우연한 순간 속에서 뜻밖의 기쁨을, 더없는 위안을 건네기도 합니다. 그 의외성이야 말로 삶이 건네는 기적이자 희열임을 이 소설은 말하려 했던 게 아닐까요.



삶은 고정된 것도, 계획된 것도 아닙니다. 흐르고 변하고, 닳아서 옅어지고, 희미해지기도 한다는데 삶의 비밀이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삶의 그러한 속성에 감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유동적이고 유한한 삶이 우연하게 빚어내는 기적의 순간들에 말이지요.



하나의 존재는 사람들 속에 어떤 자리를 갖게 되고, 그것은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길 수 있음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람들과, 사물들 속에서, 자신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내밀하고 진정한 소통을 했던 사람이 지녔을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순간들에 더 충실해야함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삶이라는 것이 비록 한계와 오점이 있을지라도, 그런데도, 그걸로 충분할 수 있다는 숙연한 끄덕임도 들고요.



책을 읽고 나니 소설이 그려낸 감정의 덩어리, 삶과 죽음에서 길어 올린 의미심장한 그림자가 저를 뒤덮는 것 같습니다.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죽음이 모든 걸 휩쓸어 가는 건 아니구나, 깨닫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만의 길고 복잡하지만, 지극히 섬세한 언어 속에서, 깊고 아득한 심연에 닿은 것 같습니다. 그 안에 머물 때에만 간신히 경험할 수 있었던 그 세계를 제 언어로 옮기며 축소해버리는 일이 막막하게 느껴지면서, 그런 시도가 무의미한 건 아닐까 싶어집니다.



인생책을 한 권 발견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계속 다시 읽어보고 싶고, 그러면서 더 가까이 혹은 더 깊숙이 의미를 읽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 바라게 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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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자기만의 방 (양장) - 1929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혜원 옮김 / 더스토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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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기만의 방>은 버지니아 울프가 1928년 케임브리지대학의 여성 교육 기관인 거턴 대학과 뉴넘대학에서 ‘여성과 소설’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던 원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를 수정, 보완하여 1929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전체 구성은 불특정화자인 ‘나’가 등장하여 강연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당시 영국 사회를 살펴보면 1870년대까지도 여성이 소유한 재산은 남편에게 귀속된 것으로 보았고, 1928년에야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이 주어지면서 여성의 재산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사회 정치적으로 여성의 입지가 새롭게 다져지던 시기,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을 통해 여성이 억압받았던 역사를 규명하고, 여성에게 일과 소득의 필요성을 알림과 동시에 그 권리를 주장하면서 페미니스트적 면모를 보였다.




<자기만의 방>에서 화자는 “여성이 소설을 쓸 수 있으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글을 시작한다. 그리고 책 한 권의 분량을 이 생각에 이르게 된 과정과 근거를 펼쳐 보이는데 할애한다. 화자는 우선 학문과 종교적 공간, 그리고 부의 세습에서 배제되었던 여성의 현실을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하고 이를 통해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당하고, 남성(아버지나 남편)의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던 여성의 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삶에는 굉장한 용기와 힘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착각의 동물인 우리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신감이 없다면 우리는 요람에 누운 아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늠하기 어려우면서도 참으로 귀중한 자질을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이 나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요.

(…)

정복해야 하고 지배해야 하는 가장에게 수많은 사람, 사실상 인류의 절반이 자기보다 천성적으로 열등하다는 생각이 그토록 막대한 중요성을 가집니다. 이러한 생각은 실제로 가장이 누리는 권력의 주요한 원천 중 하나입니다.” p.57




사회, 역사적으로 여성은 하찮은 존재로 치부되어 왔다고 화자는 말한다. 그래서 역사적 기록에서조차 여성에 대한 것은 찾을 수가 없다. 그로 인해 과거 재능있는 여성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는게 현실이다. 화자는 그런 상황을 개탄하며 셰익스피어에게 주디스라는 재능있는 여동생이 있었다면, 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당시 여성에겐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교육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선술집에서 저녁을 먹거나 한밤중에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여성에겐 집 밖으로 나서는 것 자체가 위험인 사회였다. 더 큰 도시로 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배우며,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는 일이란 애초에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셰익스피어의 재능과 같은 천재성은 교육받지 못하고 노동하며 비천하게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영국의 색슨족이나 브리튼족 사이에서도 나올 수 없었지요. 그런 천재성은 오늘날 노동 계급 사이에서도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여성들 가운데 그런 천재가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p.79


“예술가의 마음이란, 그 안에 품고 있던 작품을 완전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풀어내는 엄청난 결실을 이루어내려면 눈부신 빛으로 타올라야 하니까요. (…) 예술가의 마음에는 어떠한 장애도 없어야 하고, 불태울 수 없는 그 어떤 이물질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p.92





따라서 글 쓰는 여성은 역사에서 뒤늦게 탄생할 수 밖에 없었다. 글쓰기, 또는 소설 쓰기란 창의적인 생각을 자유롭게 불태울 때 가능하다. 어느 정도의 재산과 자유 시간이 보장된 계층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나마 중산층의 여성이 소설 쓰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의 재산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수시로 글쓰기를 방해하는 집안 일 때문에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 셰익스피어처럼, 어떠한 방해없이 자유롭게 불타오르는 마음으로 창작에 몰두하기 위해서는 '연 500파운드의 수입’ 뿐만 아니라 ‘언제든 문을 걸어 잠글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자유까지 필요하다고 화자는 말한다.




그러한 조건이 충족된 후에라도, 문제는 남아 있다.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과 남성적 언어로 만들어지고 평가되어왔던 문학의 현실 속에 여성의 목소리와 시선이 부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 ‘나’는 ‘메리 카마이클’이라는 여류 소설가를 만들어내고, 그녀가 소설을 어떻게 창작해야하는지, 특히 남성적 태도에서 벗어나 여성의 언어와 시선으로 소설을 쓰는 방식을 상상해 보인다. "창밖을 계속해서 바라보며, 그렇게 기록을 하되 공책에 연필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음절도 구분되지 않는 가장 빠른 속기로 올리비아가(수백만 년 동안 암벽의 그늘 아래 있었던 이 생명체가) 자기 몸 위로 빛이 내리쬐는 것을 느낄 때 자기 앞에 낯선 음식, 그러니까 지식과 모험, 예술이 놓이는 것을 바라보는 순간을 기록해야 한다" (p.138) 메리 카마이클에게 하는 이 조언은 버지니아 울프 자신이 소설 쓰기에서 시도했던 ‘의식의 흐름 기법’을 떠올리게 한다.




“한 사람의 내면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힘이 관장하도록 말이지요. 또 남성의 뇌에서는 남성의 힘이 여성보다 우세하고, 여성의 뇌에서는 여성의 힘이 남성보다 우세합니다. 정상적이고 편안한 상태는 이 두 심이 화합을 일며 공존하고 정신적으로 협력할 때입니다. 남성은 뇌의 여성 영역이 기능해야 하고, 여성 역시 자기 안의 남성과 소통해야 하지요. 콜리지도 아마 이런 뜻에서 위대한 마음은 양성적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이런 융합이 일어날 때 마음은 더없이 풍요로워지고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순전히 남성적이기만 한 마음은 창조적일 수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순전히 여성적이기만 한 마음처럼 말이지요.” p.159




화자는 메리 카마이클이 작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자신의 성(여성)에 대한 의식 또한 지울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양성적 마음을 지닐 것을 제안한다. 창조적인 정신은 ‘남성적이기만 한 마음’도 ‘여성적이기만 한 마음’도 아닌, 한 인간 내부에 있는 남성적인 부분과 여성적인 부분이 소통하여 ‘공명하며 스며드는 마음’이라고. 이러한 주장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랜도>에 등장했던 남성이었지만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고, 고정된 성 역할을 뛰어넘어 진정한 자아 정체성과 소통을 이루는 주인공 ‘올랜도’를 상기시킨다. 이를 통해 버지니아 울프가 ‘올랜도’라는 인물을 창조하면서 ‘양성적인 마음’, 즉 “거슬림 없이 감정을 전달하고, 있는 그대로 창조적이며, 눈부신 빛을 발하고, 조각나지 않은 온전한 마음”을 지닌 인물을 그려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여성과 소설’을 주제로 한 강연에는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소득’이 전제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넘어, 창의적인 작가가 지녀야할 정체성에 대한 고민까지 담겨있다. 기존의 남성적 글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여성적'이라는 이분법에서도 벗어나 '양성적'인 시선으로 확장되기를 제안한다. 화자는 마지막까지,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다며 여성의 글쓰기에 있어 경제력의 토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강조한다. 실재하는 세상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사유의 시간이 필요하고 이는 경제력을 통해 획득 가능하다. 그러므로 삶의 본질을 찾아 활기로 가득한 삶, 자기 자신으로서 온전한 삶을 영위하는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경제력이다.




이 글의 진정한 의미는 경제적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노골적으로 거듭 강조한 대범함이 아닐까 싶다. 돈이 명백한 힘이 되는 사회지만, 돈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기시 되거나 천박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 시선은 여성에게 더 강압적이었다. 여성이 돈이나 권력에 대해 욕망을 갖는 것을 억압하던 사회에서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소득'을 획득하라고, 그게 자유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거듭 말하는 화자는 현재의 시선에서도 급진적으로 보여진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지요.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은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고작 200년 동안이 아니라 태초부터 그랬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자식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지요. 그러므로 여성은 시를 쓸 수 있는 바늘구멍만큼의 기회도 없었습니다.” p.175


“내가 여러분에게 돈을 벌고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고 당부하는 뜻은 실재를 마주하는 활기찬 삶을, 활기차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든 없든 말이지요.” p.179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집필한지 100년이 흘렀다. 그녀가 책 속에서 예견했던 것처럼 많은 가치들이 바뀌었고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된 위치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사회에 진출해 경제력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의문은 남는다. “방해받지 않고 눈부시게 불타오르는 마음”을 지닌 여성이 얼마나 될까. 여성은 ‘보호받는 존재’에서 완전히 벗어났을까.




경제력을 갖추었다고 해도 가사와 양육의 부담은 상당 부분 여성의 몫으로 남아있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가사와 아이의 끝없는 요구는 자유롭게 불타오르고픈 여성의 마음을 수시로 방해한다.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사회 활동을 누리고 싶지만, 여성 혐오와 극단적 성범죄가 범람하는 탓에 오히려 보호가 필수적인 여건에 처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지요.”라는 화자의 말은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당위성을 가진다.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이 권력이며, 그 권력은 물질적인 것(경제력)에서 비롯된다. 가사와 양육의 부담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의 현실은 여전히 경제력 담보에 한계로 작용한다. 또한 100년전 연간 500파운드의 소득에 해당하는 금액의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여성이 지금의 현실에서는 과연 얼마나 될 것이며, 육아라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할 지 미지수다.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스트로 실천적 활동을 하지 않았던 버지니아 울프에게페미니스트 작가로 명명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다. 가부장적 시선이 팽배하던 시대에 여성에게 경제력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작가로서 여성과 남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양성적 시선의 정체성을 제안한 점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선도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당시에도 급진적으로 평가되었을 견해이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주장은 유효성을 지닌다.

 

 

 

이 책을 통해 울프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한 것은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 (p.180)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실재의 본질을 사유하며 매 순간 생의 활기를 감지하는 삶이 울프 식의 자기 자신이 되어 누리는 삶일 것이다. 그녀의 다른 작품인 <올랜도>올랜도’, <댈러웨이 부인>클라리사’, <등대로>릴리 브리스코가 붙잡으려 했던 삶과 존재의 의미 또한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소득’은 단지 글을 쓰는 여성에게 해당하는 조건이 아니다.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삶을 영위하고픈 여성과 남성, 즉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은 물질적인 것 이상의,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들이는 모든 노력에 대한 은유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으로, 혹은 남성으로, 규정되는 역할에 가두어진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은유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화두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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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종소리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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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외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언어는 생각의 토대이다. 하나의 언어로 모든 생활이 가능한 환경은 편안함을 주지만, 익숙함이 생각의 한계가 될 수도 있다. 모어 밖에 놓이는 경험은 자신과 세계가 낯설어지는 생생한 감각을 제공한다. 그런 이질감을 맞닥뜨리며 나를 여는 과정에서 내 안에 새로운 골짜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외국어가 모어와 충돌하며 생기는 틈새에서 새싹처럼 무언가 자라나는 걸 꿈꾼다. 그런 내게 최근 읽은 스가 아쓰코의 『베네치아의 종소리』는 여러모로 신선한 자극과 울림을 남겼다.  


 

스가 아쓰코는 예순이 넘어 비로소 첫 작품을 발표했고 8년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단 다섯 권의 에세이를 출간했음에도 세월이 지날수록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작가다. 1960년대 패전의 흔적이 가시지 않은 일본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올라 13년간 이탈리아 밀라노에 거주했고, 귀국 후에는 연구자이자 번역가, 에세이스트로 왕성히 활동했다.


 

『베네치아의 종소리』는 유럽이라는 낯선 땅에서 새로운 언어와 사상, 문화를 받아들이고 자신과 세계를 탐구하며 정체성을 쌓아간 청춘의 기록이다. 비행기를 이용한 해외여행조차 일반적이지 않고, 여학교를 졸업하고 신부수업 후 가정을 꾸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 스가 아쓰코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의 유복한 사업가 집안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가치관, 생활방식에 의문을 지녔던 그녀는 가톨릭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일찍이 외국어를 익혔고,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도 삶과 진로에 대한 고민을 지속하다 과감하게 유학길에 올랐다


 

젊은 시절 다른 문화를 경험하는 일은 개인의 내면에 얼마나 강렬한 흔적을 남길까. 저자는두 나라, 두 언어의 골짜기에 끼여 발버둥치던 그 시절이라고 썼지만, 전혀 다른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고자 했던 뜨거운 노력은 한 사람의 세계를 확장하고 독특한 무늬를 새기게 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사람으로 보는 유연하고 너른 시선을 품게 해주었다. 인종과 성별, 나이와 사상 등 다름을 구분하고 경계하는 태도가 그녀에겐 보이지 않는다.


 

"여자가 여자다움이나 인간의 존엄을 희생하지 않고 학문을 계속하려면, 혹은 결혼만을 목표로 두지 않고 사회에서 살아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시집이나 가. 싫으면 수도원에 들어가든가. 한 선배가 그런 말을 했을 때도 반발심이 들었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시 읽었던 생텍쥐페리의 문장이 나를 동요시켰다.

"스스로 대성당을 짓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완성된 대성당에서 편하게 자신의 자리를 얻으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대성당까지> 『베네치아의 종소리』, 스가 아쓰코, 송태욱 옮김, 문학동네


 

청년기에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며 배움과 자유를 열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 갈망을 깊이 탐구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지는 않는다. 1960, 비행기를 타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시절, 동양의 젊은 여성이 자신에게 맞는 삶을 찾기 위해 낯선 땅을 향해 도전하는 이야기는 지금의 독자에게도 호기심을 자극하고, 동경어린 시선을 자아내게 한다. 온갖 장벽 앞에서 자신을 부수고 다시 세우길 반복하며, 타국의 문화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썼을 긴 시간을 헤아리다 보면, 그 사이 쌓아 올려진 그녀만의대성장이 인애로운 모습으로 눈 앞에 드러날 것 같다.


 

『베네치아의 종소리』에는 학회 참석으로 갔던 베네치아의 호텔에서 오페라의 선율과 아련한 종소리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베네치아의 종소리>, 첫 유학지인 파리의 기숙사에서 만났던 독일인 친구와 삼십 년 만에 재회해 벚꽃길을 걷는 <카티아가 걷던 길>, 젊은 시절 유럽 여행의 기억을 평생의 자산으로 품었던 아버지가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전해온 청을 들어주기 위해 밀라노 중앙역으로 향하는 <오리엔트 특급열차> , 열두 편의 에세이가 담겨 있다.


 

과거 기억의 편린을 주워 현재와 연결하는 그녀의 글은 아껴 둔 천을 엮어 지은 펠트 이불같다. 과거는 추억으로 박제되지 않고 현재에 무늬를 잇고, 빛깔을 드리운다. 지난 시절의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상실의 아픔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상실은 사라짐의 슬픔만 지니고 있지 않다. 기억과 이야기로 되살아나 현재 속에서 다시 생명을 얻고, 다른 이의 삶으로 옮겨가 또 다른 흔적이 될 수 있다.


 

젊은 시절의 스가 아쓰코가 유학을 떠나 낯선 세상에서 삶을 시작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이야기에 두려움으로 망설이는 부분은 거의 없다. 그건 아마 저자가 외국어에 능숙했기 때문이 아닐까. 관계 맺고 소통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언어 능력이다. 이에 대한 걱정이 없다면 떠남을 결정하는 것이 쉬워질 수 있다. 스가 아쓰코에게 외국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이 삶의 배경을 바꾸고, 경험의 폭을 확장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코로나 19 감염병의 유행이라는 팬데믹 상황에서 낯선 나라로의 여행은 불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에서지금의 자리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 같아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젊은이들의 욕망은 어떻게 채워지고 있을까.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목마름을 축일 정도의 해외 여행을 경험할 수 있었던 나의 지난 시절이 다행스러우면서, 낯선 세계를 맞닥뜨리며 새로운 자신을 만날 기회를 상실한 요즘 청년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생각의 틀을 허물고 조금 다른 방향으로 물꼬를 트고 싶다면, 닫힌 내면에 작은 틈새라도 만들어보고싶다면 외국어를 한 번 배워보는 건 어떨까. 스가 아쓰코의 <베네치아의 종소리>를 읽다보면 외국의 낯선 도시에서 누군가를 만나 대화에 빠져드는 상상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때 나는 어떤 언어로 말할 수 있을까. 당장 떠날 수 없는 여행을 언어라는 창으로 간접 경험해보자. 언젠가의 여행을 위해 유용한 도구를 준비한다는 명목으로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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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삭제 완역본) -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현대지성 클래식 37
메리 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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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p.31) <사람, 장소, 환대>에서 저자 김현경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사람'으로 인정받음으로 존재 가능하다. 타인의 인정을 통해 '사람'이 된 우리는 '사회' 안에서 자리를 갖는다. 사회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절대적 환대'를 전제로 한다. 어떤 이유도 묻지않는 환대, 태어나는 순간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자리를 빼앗지 않는 절대적 환대는 '사람의 신성함'을 바탕으로 한다. 현대 사회는 이를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모든 존재를 절대적으로 환대하고 있을까.






환대받지 못하는 존재



소설 <프랑켄슈타인>(메리 셸리, 오수원 옮김, 현대지성)에는 과학 기술에 도취된 주인공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인간의 유골을 모아 회생시킨 인간 괴물이 등장한다. '광기 어린 열망'에 사로잡혀 '창조라는 목적' 하나만 바라보았던 프랑켄슈타인은 그 일의 결과나 의미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피조물이 완성되자 흉측한 외모에 두려움과 혐오감이 앞서 그를 외면한다.




버림받은 괴물은 정처없이 떠돌다 사람들에게 모습을 들켜 폭력을 당하고, 간신히 한 가족의 헛간에 숨어 지내게 된다. 거기서 가족의 모습을 훔쳐보며 인간의 고귀한 성품을 발견하고 언어와 지식을 배우며 자기 존재에 대해 질문하기도 한다. 추한 외모 때문에 외따로 숨어 지내야 하는 처지에 괴로워하며 관계에 대한 열망을 품기도 한다. 그는 선한 마음으로 가족들을 돕고 자신을 드러내지만 고귀한 그들조차 적대와 냉대로 그를 거부한다.




자신을 만든 이에게 버림받고, 선의로 다가갔던 사람들에게도 거부당하면서 괴물은 인간에 대한 증오심에 사로잡힌다. 지독한 절망과 고독으로 인한 불행이 자신을 악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고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 자신과 같은 동반자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의 가족과 친구, 연인을 살해해 복수하고 프랑켄슈타인 또한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올라 괴물을 뒤쫓다 죽음을 맞는다.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나면 '괴물'의 이야기에 새롭게 주목하게 된다. 소설에서 '괴물'에 대한 내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을 버리자 '그'는 집을 빠져나와 몸을 숨기고 인간 사회를 관찰한다. 눈을 떠 빛과 세상의 존재를 감지하고, 서서히 곁에 있는 존재의 특성을 알아가며 자아를 형성해간다. 이는 출생 후 아기가 자라 어린이가 되고 성인이 되는 과정을 축약해 놓은 듯하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무엇일까? 나는 어디서 왔을까? 내 목적지는 어디일까?"(p.164)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도구 사용법을 배우며 언어를 익히는 '그'는 인간에 가깝다. 고독이라는 실존의 문제로 고통스러워하고 불행을 느끼는 그는 누구보다 인간답다.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고 유대와 사랑을 갈망하며 사회 안에 속하고자 하는 욕구는 사람의 본성을 닮았다.





하지만 추하다는 이유로 버림받고, 무자비한 냉대와 폭력을 경험하면서 어린 아이처럼 순수했던 이가 증오와 복수심에 찬 무시무시한 존재로 뒤바뀐다. 그는 처음부터 '괴물'이었을까. '사람'이 되길 갈망한 그에게 단 한 명의 환대도, 하나의 자리조차 내어주지 않은 사회가 그를 '괴물'로 만든 게 아닐까.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배경



복제 인간이나 인공 지능 등 과학 발전의 명암을 다룰 때 종종 거론되는 <프랑켄슈타인>은 놀랍게도 200년 전 메리 셸리라는 열 아홉살 소녀에 의해 쓰여졌다(집필 시작은 19세, 완성은 20세). 당시는 고전주의가 낭만주의로 대체되던 격동의 시기이면서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기술과 이론이 탄생하던 변혁기였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억압으로 여성들은 극심한 편견과 통제 속에 생활했다.




메리 셸리의 부모님은 급진적 정치 사상가 윌리엄 고드윈과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책을 많이 읽었던 메리 셸리는 성장하면서 급진적 사회 의식을 지니게 되었고 전기, 화학, 해부학, 생리학 등 과학 지식에도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의 성장기는 불행했다. 어머니 울스턴크래프트의 죽음이 메리의 출산에 기인하면서 '어머니를 죽인 아이'라는 낙인이 따라다녔고 의붓 어머니에게 냉대와 홀대를 받았다. 아버지 고드윈은 유부남 퍼시 셸리와의 연애를 반대했고, 메리가 그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떠나자 그녀와 절연했다. 메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택했지만 자유 연애를 옹호하는 연인 퍼시 셸리는 불성실과 무책임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소설 속 버림받은 '괴물'의 고통과 절망에는 저자 메리 셸리의 감정이 숨어 있다. 프랑켄슈타인에게 버림받은 괴물은, 부모에게, 사랑하는 이에게 버려지는 처절한 고통을 경험한 저자의 분신같다. 거기에는 가부장제 속에 억압당하고 버림받는 여성들,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강요당하는 사회 속 약자의 모습이 겹쳐진다. 이 소설에는 그러한 고통에 맞서기 위한 메리 자신의 노력과 또 다른 선택이 담겨 있다.






희생과 연대, 절대적 환대라는 다른 선택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의 이야기 밖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북극에 대한 호기심으로 항해를 떠나는 월턴 선장의 이야기다. 월턴 선장과 선원들이 탄 배가 얼음산에 둘러싸여 꼼짝도 못하게 된 상황에서 월턴은 프랑켄슈타인을 만난다. 광기어린 열망으로 인간의 회생에 몰두했던 프랑켄슈타인처럼 월턴 또한 북극에 대한 맹목적 열망으로 항해를 고집했고 선원들을 위험에 처하게 했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의 회한에 잠긴 고백을 들은 월턴은 배를 돌리기로 한다. 개인의 욕망을 버리고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희생과 연대를 선택한다. 이는 '괴물'처럼 버려졌지만 증오와 복수가 아닌, 다른 선택을 하겠다는 저자 메리 셸리의 다짐처럼 다가온다.




현대 사회에 만연한 '혐오'의 감정은 나와 다른 사람, 특히 보호받아야할 약자를 구분짓고 적대시한다. 단지 다름과 추함을 이유로 누군가를 혐오하고 사회 밖으로 내몰기도 한다. 장애인, 성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어린 아이들, 환대받지 못하고 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학대로 죽음에 이르는 일을 우리는 수시로 목격하고 있다.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처럼, 사회에서 내쫓기고 버려진 어떤 이들은 저항의 몸짓조차 그려내지 못하고 사그라들기도 한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붙이는 이 사회가 거대한 괴물이 되어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인간은 누구나 사고나 질병에 의해, 나이듦으로,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나거나 약자가 되는 경험을 한다. 누구도 혐오와 차별, 정상과 비정상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우리 모두를 끌어안아주는 것은 희생과 연대, 그것을 넘어서는 '절대적 환대'를 원칙으로 하는 사회일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괴물'을 환대해 주었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책장은 덮였지만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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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딸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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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연필깎이가 고장 난 적이 있다. 그날 밤 우리는 필통 속 연필을 들고 아빠 앞에 모여 앉았다. 아빠는 소복이 쌓인 연필을 하나씩 칼로 다듬어 주었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연필을 필통에 담을 때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풍선 하나가 들어간 듯 마음이 뻐근했다. 아빠를 생각할 때면 그날이 자주 떠올랐지만 나는 늘 어린아이가 되어 연필 깎는 아빠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가 생기고 부모의 자리에 서면서 그 기억을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가 바뀌었다. 어린 나에게서 빠져나와 내 등 뒤에서 그걸 지켜보다 조금씩 아빠를 향해 자리를 옮겼던 것 같다. 어느새 나는 아빠의 등 뒤에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본다. 아빠의 몸속으로 들어가 연필을 깎던 그의 손이 되고, 그의 눈이 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상상만 한다. 가지런히 연필을 다듬어 아이들의 손에 쥐어 주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린아이들은 어떤 것들을 쉽게 믿어버린다.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며 긴 시간을 산다. 우리가 사춘기를 지나면서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건 순전히 우리 자신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었으니까, 보이고 들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으니까. 너무 순수했던 우리 자신이, 그랬으니까.




 

<다른 딸>은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죽은 언니에게 쓴 편지글이다. 에르노는  열 살이 되던 해에, 우연히 그의 어머니가 어느 젊은 여자에게 죽은 이 있음을 밝히는 이야기를 엿듣는다. 대화는 그 아이는 쟤보다 훨씬 착했어요라는 말로 끝나고, 그 일은 에르노의 내면에 어떤 믿음을 새긴다. “착하지 않은 아이.”(p.17)


 

당신’(죽은 언니)의 죽음은 부모에겐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어린 에르노는 부모의 고통은 모른 채 그들의 희망과 꿈을 실현하는 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자신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젊은 여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던 건 자신에게 어떤 암시를 주려는 행위였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되돌아간 기억의 자리에서 그녀는 그동안 믿어왔던 것과 조금 다른 조각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머니는 죽은 딸이 다시 살아서 돌아온 듯한 느낌과 위로를 경험했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죽음의 순간으로 돌아감으로써 애도했을 것이다. 메멘토 모리. 그 순간 다른 딸(아이 에르노)의 존재는 잊히는 게 자연스러웠다.



 

내가 <남자의 자리>를 쓸 때, 현실에 보다 가깝게 쓰려는 마음을 갖지 않았더라면, 지난 세월 동안 당신을 가둬두었던 내 어두운 내면으로부터 당신이 다시 올라올 수 있었을까요?” (p.70)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의 삶을 돌아보면서  <남자의 자리>라는 소설을 쓴다. 그 과정에서서로 상관없는 개별적인 사건이라고 여겨졌던두 가지 현실당신의 죽음과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필요한 경제력이 연결되는 경험을 한다. "당신이 죽었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 왔고, 나는 당신을 대치했다는 사실"(p.70), ‘당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삶이 가능했다는 깨달음은 에르노에게 어떤 그늘을 드리웠을까. 부재하기에 증오할 수도 애정 할 수도 없는 존재, ‘당신을 향한 감정은백지 같은 감정이었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글을 쓰면 쓸수록 마치 꿈을 꾸듯 이끼만 잔뜩 돋은 인적 없는 습지에서 걸음을 내딛는 듯하고, 단어들의 틈새를 헤치고 나아가 불분명한 것들로 가득 찬 공간을 넘어가야 할 것만 같아요. 내겐 당신을 위한 언어도, 당신에게 말해야 할 언어도 없으며, 부정적인 방식을 통해 지속적인 비존재 상태로 있는 당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감정과 정서의 언어 바깥에 있는 당신은 비언어입니다.” (p.61)

 


그렇기에 당신은 비언어 상태다. 그녀의 삶에서는 존재한 적이 없기에, 감정으로조차 표현할 수 없는 대상. 하지만 부모의 비밀스러운 고통 속에서, 그들의 삶을 통해 그녀에게로, 겹겹이 드리워진 천처럼 의미의 층을 쌓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 의미를 글로 풀어낸 것이 <다른 딸>이다. 사진 한 장으로 비롯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이쪽저쪽에서 뜯어보다가 잊혔던 것 또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씩 주워 들고 퍼즐처럼 끼워 맞추는 글. 기억하려고 애쓰고, 그 속에 침잠해야지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음을, 이 작은 책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당신을 부르며, 그와 얽힌 과거의 시간으로, 그 기억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녀는 쓰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기억의 편린을 찾아낸다. 글쓰기는 기억의 유실물을 발굴하는 일이다. ‘다른 딸을 향해 쓰기 시작했던 편지는 내가 죽을 뻔 했던 기억에 닿고, ‘어머니에 대해 계속 말해주려는 행위가 되어, ‘부모님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이 된다. 그 일은 당신을 부름으로 되살려내고, ‘당신의 죽음 위에 놓인 삶의 부채감을 덜어내 주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글쓰기가 존재의 부재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되었음을, ‘다른 딸당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부재하는 당신의 주변을 맴돌며, 드리워진 천을 하나씩 들춰가며, 아니 에르노는 텅 빈 형체를 언어로 바꾸어낸다.



기억으로 들어가는 문은 여러 개일 수 있다. 어떤 문을 여느냐에 따라 기억으로 향하는 풍경이 달라진다. 에르노는 수차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글을 썼지만, 매번 다른 문을 통해 들어갔다. 아버지, 어머니, 자기 자신, 그리고 죽은 언니. ‘당신이라는 문을 열었기에 볼 수 있었던 장면, 그 회로로만 통하는 의미가 <다른 딸>에 쓰였다. 기억이라는 지도 없는 목적지를 향해갈 때, 위치를 가늠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를 향해 불을 밝히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명암은 바뀔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내 곁에 없다. 기억의 빈 구멍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다. 몇 장 안 되는 기억의 사진을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바짝 움켜쥐고 부재하는 그의 주변을 맴돈다. ‘당신을 부름으로 온전한 가 되었던 에르노처럼, 그 일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일 테다.



 




아니 에르노는 1940년 릴본에서 태어나노르망디의 이브토카페 겸 상점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문학을 공부한 후정식 교원현대문학 교수 자격증을 획득했다. 1974 <빈 옷장>으로 등단해 <남자의 자리>로 르노도상을 수상했으며자전적인 글쓰기와 역사사회를 향한 작가만의 시선을 가공이나 은유 없이 정확하게 담아내는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다대표작으로는 <단순한 열정>, <사진의 용도>, <한 여자>, <부끄러움>, <세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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