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자기만의 방 (양장) - 1929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혜원 옮김 / 더스토리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자기만의 방>은 버지니아 울프가 1928년 케임브리지대학의 여성 교육 기관인 거턴 대학과 뉴넘대학에서 ‘여성과 소설’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던 원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를 수정, 보완하여 1929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전체 구성은 불특정화자인 ‘나’가 등장하여 강연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당시 영국 사회를 살펴보면 1870년대까지도 여성이 소유한 재산은 남편에게 귀속된 것으로 보았고, 1928년에야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이 주어지면서 여성의 재산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사회 정치적으로 여성의 입지가 새롭게 다져지던 시기,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을 통해 여성이 억압받았던 역사를 규명하고, 여성에게 일과 소득의 필요성을 알림과 동시에 그 권리를 주장하면서 페미니스트적 면모를 보였다.




<자기만의 방>에서 화자는 “여성이 소설을 쓸 수 있으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글을 시작한다. 그리고 책 한 권의 분량을 이 생각에 이르게 된 과정과 근거를 펼쳐 보이는데 할애한다. 화자는 우선 학문과 종교적 공간, 그리고 부의 세습에서 배제되었던 여성의 현실을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하고 이를 통해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당하고, 남성(아버지나 남편)의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던 여성의 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삶에는 굉장한 용기와 힘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착각의 동물인 우리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신감이 없다면 우리는 요람에 누운 아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늠하기 어려우면서도 참으로 귀중한 자질을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이 나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요.

(…)

정복해야 하고 지배해야 하는 가장에게 수많은 사람, 사실상 인류의 절반이 자기보다 천성적으로 열등하다는 생각이 그토록 막대한 중요성을 가집니다. 이러한 생각은 실제로 가장이 누리는 권력의 주요한 원천 중 하나입니다.” p.57




사회, 역사적으로 여성은 하찮은 존재로 치부되어 왔다고 화자는 말한다. 그래서 역사적 기록에서조차 여성에 대한 것은 찾을 수가 없다. 그로 인해 과거 재능있는 여성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는게 현실이다. 화자는 그런 상황을 개탄하며 셰익스피어에게 주디스라는 재능있는 여동생이 있었다면, 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당시 여성에겐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교육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선술집에서 저녁을 먹거나 한밤중에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여성에겐 집 밖으로 나서는 것 자체가 위험인 사회였다. 더 큰 도시로 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배우며,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는 일이란 애초에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셰익스피어의 재능과 같은 천재성은 교육받지 못하고 노동하며 비천하게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영국의 색슨족이나 브리튼족 사이에서도 나올 수 없었지요. 그런 천재성은 오늘날 노동 계급 사이에서도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여성들 가운데 그런 천재가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p.79


“예술가의 마음이란, 그 안에 품고 있던 작품을 완전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풀어내는 엄청난 결실을 이루어내려면 눈부신 빛으로 타올라야 하니까요. (…) 예술가의 마음에는 어떠한 장애도 없어야 하고, 불태울 수 없는 그 어떤 이물질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p.92





따라서 글 쓰는 여성은 역사에서 뒤늦게 탄생할 수 밖에 없었다. 글쓰기, 또는 소설 쓰기란 창의적인 생각을 자유롭게 불태울 때 가능하다. 어느 정도의 재산과 자유 시간이 보장된 계층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나마 중산층의 여성이 소설 쓰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의 재산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수시로 글쓰기를 방해하는 집안 일 때문에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 셰익스피어처럼, 어떠한 방해없이 자유롭게 불타오르는 마음으로 창작에 몰두하기 위해서는 '연 500파운드의 수입’ 뿐만 아니라 ‘언제든 문을 걸어 잠글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자유까지 필요하다고 화자는 말한다.




그러한 조건이 충족된 후에라도, 문제는 남아 있다.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과 남성적 언어로 만들어지고 평가되어왔던 문학의 현실 속에 여성의 목소리와 시선이 부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 ‘나’는 ‘메리 카마이클’이라는 여류 소설가를 만들어내고, 그녀가 소설을 어떻게 창작해야하는지, 특히 남성적 태도에서 벗어나 여성의 언어와 시선으로 소설을 쓰는 방식을 상상해 보인다. "창밖을 계속해서 바라보며, 그렇게 기록을 하되 공책에 연필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음절도 구분되지 않는 가장 빠른 속기로 올리비아가(수백만 년 동안 암벽의 그늘 아래 있었던 이 생명체가) 자기 몸 위로 빛이 내리쬐는 것을 느낄 때 자기 앞에 낯선 음식, 그러니까 지식과 모험, 예술이 놓이는 것을 바라보는 순간을 기록해야 한다" (p.138) 메리 카마이클에게 하는 이 조언은 버지니아 울프 자신이 소설 쓰기에서 시도했던 ‘의식의 흐름 기법’을 떠올리게 한다.




“한 사람의 내면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힘이 관장하도록 말이지요. 또 남성의 뇌에서는 남성의 힘이 여성보다 우세하고, 여성의 뇌에서는 여성의 힘이 남성보다 우세합니다. 정상적이고 편안한 상태는 이 두 심이 화합을 일며 공존하고 정신적으로 협력할 때입니다. 남성은 뇌의 여성 영역이 기능해야 하고, 여성 역시 자기 안의 남성과 소통해야 하지요. 콜리지도 아마 이런 뜻에서 위대한 마음은 양성적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이런 융합이 일어날 때 마음은 더없이 풍요로워지고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순전히 남성적이기만 한 마음은 창조적일 수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순전히 여성적이기만 한 마음처럼 말이지요.” p.159




화자는 메리 카마이클이 작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자신의 성(여성)에 대한 의식 또한 지울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양성적 마음을 지닐 것을 제안한다. 창조적인 정신은 ‘남성적이기만 한 마음’도 ‘여성적이기만 한 마음’도 아닌, 한 인간 내부에 있는 남성적인 부분과 여성적인 부분이 소통하여 ‘공명하며 스며드는 마음’이라고. 이러한 주장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랜도>에 등장했던 남성이었지만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고, 고정된 성 역할을 뛰어넘어 진정한 자아 정체성과 소통을 이루는 주인공 ‘올랜도’를 상기시킨다. 이를 통해 버지니아 울프가 ‘올랜도’라는 인물을 창조하면서 ‘양성적인 마음’, 즉 “거슬림 없이 감정을 전달하고, 있는 그대로 창조적이며, 눈부신 빛을 발하고, 조각나지 않은 온전한 마음”을 지닌 인물을 그려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여성과 소설’을 주제로 한 강연에는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소득’이 전제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넘어, 창의적인 작가가 지녀야할 정체성에 대한 고민까지 담겨있다. 기존의 남성적 글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여성적'이라는 이분법에서도 벗어나 '양성적'인 시선으로 확장되기를 제안한다. 화자는 마지막까지,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다며 여성의 글쓰기에 있어 경제력의 토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강조한다. 실재하는 세상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사유의 시간이 필요하고 이는 경제력을 통해 획득 가능하다. 그러므로 삶의 본질을 찾아 활기로 가득한 삶, 자기 자신으로서 온전한 삶을 영위하는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경제력이다.




이 글의 진정한 의미는 경제적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노골적으로 거듭 강조한 대범함이 아닐까 싶다. 돈이 명백한 힘이 되는 사회지만, 돈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기시 되거나 천박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 시선은 여성에게 더 강압적이었다. 여성이 돈이나 권력에 대해 욕망을 갖는 것을 억압하던 사회에서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소득'을 획득하라고, 그게 자유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거듭 말하는 화자는 현재의 시선에서도 급진적으로 보여진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지요.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은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고작 200년 동안이 아니라 태초부터 그랬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자식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지요. 그러므로 여성은 시를 쓸 수 있는 바늘구멍만큼의 기회도 없었습니다.” p.175


“내가 여러분에게 돈을 벌고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고 당부하는 뜻은 실재를 마주하는 활기찬 삶을, 활기차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든 없든 말이지요.” p.179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집필한지 100년이 흘렀다. 그녀가 책 속에서 예견했던 것처럼 많은 가치들이 바뀌었고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된 위치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사회에 진출해 경제력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의문은 남는다. “방해받지 않고 눈부시게 불타오르는 마음”을 지닌 여성이 얼마나 될까. 여성은 ‘보호받는 존재’에서 완전히 벗어났을까.




경제력을 갖추었다고 해도 가사와 양육의 부담은 상당 부분 여성의 몫으로 남아있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가사와 아이의 끝없는 요구는 자유롭게 불타오르고픈 여성의 마음을 수시로 방해한다.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사회 활동을 누리고 싶지만, 여성 혐오와 극단적 성범죄가 범람하는 탓에 오히려 보호가 필수적인 여건에 처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지요.”라는 화자의 말은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당위성을 가진다.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이 권력이며, 그 권력은 물질적인 것(경제력)에서 비롯된다. 가사와 양육의 부담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의 현실은 여전히 경제력 담보에 한계로 작용한다. 또한 100년전 연간 500파운드의 소득에 해당하는 금액의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여성이 지금의 현실에서는 과연 얼마나 될 것이며, 육아라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할 지 미지수다.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스트로 실천적 활동을 하지 않았던 버지니아 울프에게페미니스트 작가로 명명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다. 가부장적 시선이 팽배하던 시대에 여성에게 경제력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작가로서 여성과 남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양성적 시선의 정체성을 제안한 점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선도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당시에도 급진적으로 평가되었을 견해이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주장은 유효성을 지닌다.

 

 

 

이 책을 통해 울프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한 것은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 (p.180)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실재의 본질을 사유하며 매 순간 생의 활기를 감지하는 삶이 울프 식의 자기 자신이 되어 누리는 삶일 것이다. 그녀의 다른 작품인 <올랜도>올랜도’, <댈러웨이 부인>클라리사’, <등대로>릴리 브리스코가 붙잡으려 했던 삶과 존재의 의미 또한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소득’은 단지 글을 쓰는 여성에게 해당하는 조건이 아니다.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삶을 영위하고픈 여성과 남성, 즉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은 물질적인 것 이상의,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들이는 모든 노력에 대한 은유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으로, 혹은 남성으로, 규정되는 역할에 가두어진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은유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화두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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