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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6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평점 :
"온갖 일이 가능할 것 같았다. 모든 일이 잘 들어맞는 것 같았다. 바로 지금(하지만 모두들 구두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순간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으며 그녀는 이것이 지속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안정감에 도달한 것이다. 그녀는 공중에 떠 있는 매처럼, 온몸의 신경을 소란스럽지 않고 다소 엄숙하게, 충만하고 달콤하게 채운 기쁨의 대기에 떠 있는 깃발처럼 들떠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과 친구들이 식사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 기쁨은 그들에게서 솟아났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모든 기쁨은 이 깊은 정적 속에서 솟아올라(그녀는 윌리엄 뱅크스에게 아주 작은 고기 조각을 더 떠 주고 그 토기의 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연무처럼, 연기처럼 지금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 곳에 머무르며 그들을 모두 안전하게 묶어 준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거기에 기쁨이 그들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뱅크스 씨에게 특히 연한 조각을 조심스럽게 떠 주면서 그 기쁨이 영원성을 띠고 있다고 느꼈다. 그날 오후에 다른 일로 이미 느꼈던 것처럼 사물에는 응집성과 영속성이 있다. 덧없이 흘러가고 사라지고 유령처럼 형체를 잃어버리는 것에 맞서 변화를 초월한 어떤 것이 루비처럼 빛을 발한다는 뜻이다.(그녀는 반사된 빛이 잔물결을 일으키는 창문을 힐끗 바라다보았다.) 그래서 오늘 밤에 다시 그녀는 이미 낮에 한 번 느꼈던 감정, 평화로움과 평안함을 느꼈다. 앞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이런 순간들로 이루어진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순간이 남을 것이다."
p.167~168 , <등대로>, 버지니아 울프, 이미애 옮김, 민음사
"우리가 지금껏 지나온 모든 삶과 앞으로의 모든 삶은
나무들과 물들어 가는 이파리들로 가득할 거예요.
그녀는 그 단어들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자아 바깥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그 단어들을 음악처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자신이 다른 말을 하는 동안 마음 속에 숨어 있던 것들을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 둘러보지 않아도 그녀는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그 목소리를 듣고 있음을 알았다." p.177
"이제는 모든 것이 한 단계 더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문지방에 발을 올려놓은 채 그녀는 자기가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사라져 가는 그 장면에서 잠시 더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몸을 돌려 민타의 팔을 잡고 방을 나서자, 그 장면은 달라졌고, 다른 형태를 띠었다. 어깨 너머로 한 번 더 마지막으로 돌아보면서 그녀는 그것이 이미 과거가 되었음을 알았다." p.178
"그녀는 그 온갖 소란스러운 대화 이후에 잠시 조용히 서서 어떤 특별한 것, 중요한 것을 찾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을 떼어 내서 분리하고, 거기에 달라붙은 온갖 감정들과 잡다한 점들을 말끔히 씻어 내어 그것을 자기 앞에 놓고, 자신이 임명한 판사들이 둘러 앉아서 은밀히 회의하는 법정으로 가져가서 결정하고 싶었다. 그게 좋은 걸까, 나쁜 걸까? 그게 옳은 걸까, 그른 걸까?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등등. 이렇게 그녀는 돌연히 물러난 이후에 자신을 바로잡았고,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어울리지 않게도 바깥의 느릅나무 가지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녀의 세계는 변화하고 있었고 나무들은 정지되어 있었다. (…) 그래, 그렇다면 그것은 끝났고 완결되었다. 그리고 다 끝난 일들이 모두 그렇듯이 엄숙해졌다. 시끄러운 대화와 감정을 말끔히 비우고 생각해 보니, 그것은 늘 있어 왔고, 다만 지금에야 드러났으며, 그렇게 드러나면서 갑자기 모든 것을 영속적으로 만들어 버린 듯했다. 그들이 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오늘 밤으로 되돌아올 거라고 그녀는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 그녀는 ‘레일리 부부’라는 새 이름을 거듭 불러 보았고, 아이들 방문에 손을 올려놓은 채, 마치 서로를 나눈 감정의 칸막이벽들이 너무 얇아져서 실제로는 (안도감과 행복을 느끼며) 모두 하나의 흐름이 된 듯 다른 사람들과의 교감을 느꼈다. 의자와 탁자, 지도가 그녀 것이고 또한 그들 것이며, 누구 것이든 중요하지 않았고, 그녀가 죽은 다음에 폴과 민타가 그 공동체를 이끌어 갈 것이다." p.180~181
<등대로>를 읽고 절절하면서도 무언가 가슴을 억누르는 듯한 느낌에 먹먹해졌는데요. 유한하고 덧없는 생(生)의 의미가 이 책 속에 담겨 출렁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 인물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전후, 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거나 변하는 것, 그런데도 유지되면서 의미를 새기는 것을,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통해 그려내 보여주는 소설이었어요.
삶의 정수란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완전히 다가갈 수 없는 무엇이지만 순간 순간 다가가려는 시도 속에서 잠시 가 닿거나, 찰나에 머무는 진실을 발견하기도 한다고 알려주는 것도 같고요. 그래서 그러한 시도를 하는 순간 속에 모든 게 있다고, 울프는 말하는 듯 합니다. 어떤 순간은 영원히 박제되기도 한다고요. 하지만 그것마저도 시간의 파도에 휩쓸려 닳아 사라지기도 할테지만,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순리라고요. 하지만 우리가 순간 속에서 그걸 움켜쥐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사라진데도 괜찮다고 끝없이 위로해주는 소설이기도 했어요.
인생이란 덧없고 무상합니다. 소중한 이를 죽음으로 잃고, 기대했던 결합(결혼)도 바람을 저버리고, 피어나길 바랐던 미래는 영영 오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대치 않았던 모습으로 의미를 만들고, 길을 찾아내고, 의외의 미래에 닿기도 합니다. 그렇게 삶은 우연한 순간 속에서 뜻밖의 기쁨을, 더없는 위안을 건네기도 합니다. 그 의외성이야 말로 삶이 건네는 기적이자 희열임을 이 소설은 말하려 했던 게 아닐까요.
삶은 고정된 것도, 계획된 것도 아닙니다. 흐르고 변하고, 닳아서 옅어지고, 희미해지기도 한다는데 삶의 비밀이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삶의 그러한 속성에 감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유동적이고 유한한 삶이 우연하게 빚어내는 기적의 순간들에 말이지요.
하나의 존재는 사람들 속에 어떤 자리를 갖게 되고, 그것은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길 수 있음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람들과, 사물들 속에서, 자신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내밀하고 진정한 소통을 했던 사람이 지녔을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순간들에 더 충실해야함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삶이라는 것이 비록 한계와 오점이 있을지라도, 그런데도, 그걸로 충분할 수 있다는 숙연한 끄덕임도 들고요.
책을 읽고 나니 소설이 그려낸 감정의 덩어리, 삶과 죽음에서 길어 올린 의미심장한 그림자가 저를 뒤덮는 것 같습니다.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죽음이 모든 걸 휩쓸어 가는 건 아니구나, 깨닫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만의 길고 복잡하지만, 지극히 섬세한 언어 속에서, 깊고 아득한 심연에 닿은 것 같습니다. 그 안에 머물 때에만 간신히 경험할 수 있었던 그 세계를 제 언어로 옮기며 축소해버리는 일이 막막하게 느껴지면서, 그런 시도가 무의미한 건 아닐까 싶어집니다.
인생책을 한 권 발견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계속 다시 읽어보고 싶고, 그러면서 더 가까이 혹은 더 깊숙이 의미를 읽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 바라게 되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