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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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까락스 감독의 영화 <홀리 모터스>는 오스카(드니 라방)라는 인물이 하루 동안 유능한 사업가, 가정적인 아버지에서 광대, 걸인, 암살자, 광인에 이르기까지, 전혀 다른 아홉 명의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홀리 모터스라는 고급 리무진에서 내릴 때마다 오스카의 모습은 바뀌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장을 거듭하는 그, 그런 그의 삶이 피곤한 걸까, 평생 하나의 얼굴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지루하고 답답한 걸까.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삶에서 여러 개의 배역을 맡을 수 있다면 어떤 걸 해볼 수 있을지 상상했다. 예상되는 범주를 벗어나 색다른 역할을 해보는 삶, 상상일 뿐이었지만 작은 해방감을 느꼈다.



미국 소설가 줌파 라히리는 영어로 쓴 소설로 퓰리처상까지 받았음에도 영어를 버리고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고 있다. 네 명의 자아를 만들어 활동했던 페르난두 페소아처럼두 명의 작가는 될 수 있을 것 같다”(136)고 쓴 그녀, 줌파 라히리는 왜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게 되었을까.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이승수 옮김, 마음산책)는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쓴 첫 산문집이다. 서툰 외국어에서 그녀의 또 다른 표현 수단이 된 이탈리아어로, 어린아이처럼 단어 하나하나를 골라 정성껏 써 내려간 글이다. 문장은 짧고 간결하지만 단단하다. 숨어 있던 언어의 골짜기에서 발견한 조약돌처럼 그녀만의 은유와 사유로 빛난다.



이탈리아어를 좋아하게 된 근원에서부터 언어를 배운 과정, 이탈리아 로마로 거처를 옮기고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기까지, 자신의 삶에서 영어라는 모국어를 추방시킨 그녀의 경험은 흥미롭다. 인도 출신 이민 가정에서 자라 영어를 모국어로 익혔지만 그녀 정체성에는 늘 빈자리가 존재했다고 한다. 완벽한 영어를 구사해도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느낄 수 없었다고. 그 공백을 채우려는 갈망이 이탈리아어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피어났다. 그 사랑은 삶의 터전을 바꾸게 했고 정체성의 일부까지 새롭게 만들어 냈다.  



 내 분열된 정체성 때문에, 아마 성격 때문에 난 불완전한, 다시 말해 결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내가 느꼈던 불안, 간혹 지금도 느끼는 불안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실망스럽다는 느낌에서 온 것이다.”

(93,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는 자신을 쫓아다녔던 불완전함과 불안에 대해 담담하게 고백한다. 이민 가정, 영어에 익숙지 않은 부모님, 다른 피부색 등 타고난 정체성 때문에 자신이불완전하다고 느끼며 성장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불완전함이나 불안이 부정적으로만 작용하지 않았다. 노력과 한계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작가는불완전하다고 느낄수록 난 더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94)라고 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창작을 위해 영어라는 안정된 도구에서 벗어나 불완전한 이탈리아어라는 도구를 자발적으로 선택했으리라



부모님이 쓰는 벵골어, 모국어로 주어진 영어, 스스로 선택한 이탈리아어, 세 개의 언어가 만드는 삼각형의 액자를 품고 있지만 그 속은 비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빈 공간이야말로 자신의원천이요 운명이며창조적 충동’, 창작의 동력임을 강조한다. 



“변신의 메커니즘은 절대 변하지 않는 삶의 유일한 요소일지 모른다. 모든 개인, 나라, 역사의 시대, 우주 만물의 과정은 때로는 약하고, 때로는 격렬한 변화의 과정일 따름이다. 변화가 없다면 우린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가 변화하는 전이의 순간들이 우리의 척추를 만든다. 우리가 기억하고자 한 순간순간들은 살아남거나 사라진다. 변화가 우리의 존재에 뼈대를 만든다. 나머지는 대개 망각된다.” 

(135)



한계를 가능성으로 끌어와 자기를 변신시키는 작가의 이야기는 경이롭다. 만물은 모두 변신의 과정을 겪으며 변화와 전이가 우리를 도약하게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변화란 피해야 할 두려운 일이 아니라 기꺼이 끌어안고 즐겨야 할 선물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이 작은 책을 덮고 나면 삶에서 무언가를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불만스럽게 여겼던 내 안의 불완전함과 불안을 삶의 추동력으로 삼아봐야겠다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 삶을 바꾸는 일을 줌파 라히리는 바다를 건너는 일에 비유했다. 자기만의 바다를 탐색하고 그 안에 숨어 있는 다른 얼굴을 찾아가는 그녀의 이야기가 우리를 자극한다. 우리는 모두 존재의 심연을 지니고 있다. 평생을 살아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자기 자신이 포함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 깊고 깊은 심연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우리 자신뿐이다. 내 안에는 어떤 내가 숨어 있을까. 그걸 발견하기 위해 우리 안의 바다를 건너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익숙한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하느라 굳어진 내연에 틈새를 만들려면 외국어를 배우는 시도부터 해야 할까.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시도하다(provare a)=노력하다(cercare di)’로 설명했다. 사랑한다면 시도하고 노력하게 되고 이를 통해 배우고 발견하며 우리는 나아갈 수 있다. 자기 자신이든, 학문이든, 외국어든, 또 다른 세계나 타인이든, 우리가 무언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한 변신은 거듭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라는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만들어지면서 확장되는 것이기도 하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변화를 가능성으로 껴안을 수 있다면 삶은 다채로운 나를 발견하는 탐험이 되지 않을까. 우리가 시도해볼 수 있는 새로운 배역에는 어떤 게 있을까.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새해에는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길 기대해보는 시간이다. 새롭게 사랑에 빠져볼 대상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무모하지만 시도하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미처 몰랐던 나를 발견할 수도 있을 테니. 존재의 바닷속에서 작은 조개라도 하나씩 발견하는 시간이길 바란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돌멩이가 진주가 될 수도 있음을, 내 안의 불완전함이야말로 삶을 나아가게 하는 동력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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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희망 - 진짜 이름을 찾기 위한 찬란한 생존의 기록
스테퍼니 랜드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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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장소가 곧 하나의 이야기이며, 이야기는 지형을 이루고, 감정이입은 그 안에서 상상하는 행위이다. 감정이입은 이야기꾼의 재능이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는 방법이다.”

13쪽, <멀고도 가까이>, 리베카 솔닛



넥플릭스에서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조용한 희망>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드라마의 원작 <조용한 희망>(원제 ‘Maid:Hard work’)(스테퍼니 랜드, 구계원 옮김, 문학동네)에는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싱글맘 스테퍼니 랜드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담겨있다. 스테퍼니 랜드는 레베카 솔닛의 말에 따르면 이야기꾼의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자신이 청소했던 집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타인에게 감정 이입했으며, 마침내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 작가가 되었으니.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놓치지 않고 글로 썼고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았다.



스테퍼니 랜드가 가난과 싱글맘이라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4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에 빼곡하게 담겨 있다. 뛰어난 묘사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여러 주제를 오가며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녀는 ‘싱글맘의 분투기’로 그칠 수 있는 서사를 빈곤과 계층이라는 사회 문제로,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삶과 사람, 관계를 성찰하는 글로 확장시켰다. 자신의 부모와 딸과의 관계를 통해 가족과 사랑의 의미까지 되새겨 보게 해주는 이 글은 다양한 층위에서 읽히는 르포르타주 같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엄마가 된 스테퍼니는 남자 친구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노숙인 쉼터에 자리를 잡고 딸아이를 돌보았다. 먹고살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일은 가사 도우미.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마땅한 이력이 없는 처지였기에 그녀에게 청소부는 ‘세상에 남은 마지막 일자리’였다. 가사 도우미로 받는 최저 시급은 생계를 꾸리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스테파니는 정부의 온갖 지원금을 수급해 간신히 생활을 꾸려 나갔다.



날마다 진통제로 버티며 열심히 일해도 삶은 늘 위태로웠다. 더구나 복지 카드로 식료품을 결제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 모멸감을 느껴야 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임시 거처의 열악한 환경은 딸아이를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게 했다. 빈곤한 삶에 대한 그녀의 생생한 증언은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사회’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녀에게 닥친 현실이 단순히 개인의 노력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그런데도 사회와 다수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냉대와 무례한 시선을 보내며 본질을 보려 하지 않음을 생각하게 한다.



스테퍼니는 오랜 시간 작가의 꿈을 품어왔다. 몬태나 주의 대학에서 문예 창작을 공부하겠다는 구체적 목표가 있었고 그래서 딸과의 생활을 블로그에 썼다. 어떤 비극과 혼란에도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글쓰기를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을 계획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도움받을 이가 없는 처지에도 스스로가 자신을 믿고 위로할 수 있었던 것도 글쓰기 덕분이었다. 아이와 보내는 평범한 일상을 글로 쓰면서 그 속에 깃든 기쁨을 발견했고 거기서 엄마로서의 무한한 사랑도 끌어낼 수 있었다.



“경제적 여유, 대리석 세면대가 달린 욕실, 창문으로 바다가 내다보이는 서재를 갖춘 이층집에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그 사람들에게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나는 어두운 구석에 가려진 부분, 희망을 이야기하는 자기계발서의 이면에 매료되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숨길 수 있는 보다 긴 복도와 더 큰 벽장을 가지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271~272쪽)



가사도우미로 일하면서도 타인의 집과 부에 압도되지 않고 이면의 의미를 찾았던 스테파니. 그래서 보잘것없는 자신의 원룸 아파트조차 “미아와 내가 그곳에서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더없이 따뜻한 가정”(321쪽)이라고 긍정할 수 있었다. 글쓰기를 통해 집과 고향에 대한 자기만의 정의를 찾게 되면서 그녀는 진짜 자신의 이름을 찾기 위해 새로운 도전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진정한 고향을 찾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내가 사는 곳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집이란 언덕 위에 서 있는 근사한 저택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했다. 집은 우리를 감싸 안아줄 수 있는 곳, 소속감 그리고 익숙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402쪽)



*

접시닦이에서부터 떠돌이까지, 밑바닥 인생을 직접 체험하여 수기(<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를 남긴 조지 오웰은 빈곤한 삶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고 그로 인해 판에 박힌 생활에 사로잡히게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가난은 미래를 말살해버린다고. 그런데 스테퍼니는 어떻게 가난이라는 단단한 틀을 깰 수 있었을까.



친구들은 스테퍼니에게 “네가 도대체 어떻게 그걸 다 해내는지 모르겠어”(302쪽)라며 혀를 둘렀다. 가사 도우미에 어린 딸을 보살피고 장을 보고 집을 손보고……. 그녀의 삶에 해결해야 할 일의 목록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커다란 집을 청소하기 위해 당장 앞에 놓인 방부터 차근차근 청소해 나가듯 현실의 문제도 단계적으로 해결해갔다. 그러면서도 “10년 뒤의 내가 더 나은 모습일 거라는 믿음”(274쪽)을 놓지 않았다. 성실하게 오늘을 지키며 자신에 대한 믿음을 키우고, 그 믿음으로 내일을 꿈꿨다. 당장 생계에 대한 불안을 떨칠 수 없으면서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대학 진학이라는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시간에 맞서 무언가를 방어하고, 그 과정에서 아주 천천히 여기 이곳으로부터 멀어지는 작업”(125쪽, <멀고도 가까운>)이라고 리베카 솔닛은 말했다. 스테퍼니는 글쓰기를 통해 가난의 시간에 맞서 자신에 대한 믿음과 딸에 대한 사랑을 지켰고 가사 도우미에서 작가의 자리로 옮겨 갔다. 이 책은 글쓰기를 통해 희망이 삶을 옮겨 놓은 궤적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

삶의 중심을 잃고 싶지 않아 매일 아침 글을 쓴다. 가난과 힘겨운 육아, 혼자라는 외로움에 맞서기 위해 스테퍼니가 글쓰기에 기대었던 것처럼. 끝없는 집안일과 육아로 나를 잃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글쓰기에 기댄다.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쌓아가고 있다. 모르는 사이 내 삶에도 희망의 궤적이 그려지고 있을까. 오늘의 삶과 다가가고 싶은 삶 사이를 글로 바느질한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이 모여 이야기가 되고 삶이 되는 날을 꿈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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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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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딸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숨바꼭질이다. 매번 하는 놀이인데 매번 배꼽 잡고 웃는 일이 생기는, 이상하고 신기하고 재미난 숨바꼭질을 나도 좋아한다. 어른 눈엔 훤히 보이는데도 진중하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이고 있는 아이를 볼 때면 왈칵 눈물이 날 것 같다. 술래가 못 찾게 꽁꽁 숨으면서도 기어코 기척을 내어 술래에게 들키고 마는 빤한 눈속임은 어떻고. 아이는 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시키고도 여기 있다고 알려주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한다. 술래가 지나갈 때면 괜히 부스럭 소리를 내고큭큭웃음소리를 흘리니까. 아무도 찾지 못하게 숨어버리고 싶으면서도 빨리 찾아주었으면 하는 이상한 마음이 아이를 사로잡는 것 같다.




우리는 왜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될까.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 공존할 수 없는 마음을 어떻게 하나의 가슴에 담고 있는 걸까. 그러니 어른이 되어도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순의 마음에는 여지없이 흔들리고 마는가 보다.




내 안에 있는 가장 모순적인 마음은 이런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가도 누군가 알아주는 근사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 어느 날엔 한 사람도 아는 이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다가도 어느 날엔 누가 날 좀 알아봐 주고 말을 걸어줬으면 싶어지는 것. 가족을 챙기고 집안일을 하는 게 전부인 삶을 살다 보면 보잘것없는 존재 같아 기운이 빠지 다가도 홀로 버스를 타고 나가 시내를 걷다 보면 아무도 알아채는 이 없는 작은 사람이라는 게 위안이 된다.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지길 바라다가도 하찮은 존재라는 걸 확인하면 그렇게 속이 편할 수 없다. 그런 순간에 삶의 무게와 고민도 한없이 작아지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가슴이 턱턱 막히다가도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 뭐, 싶다. 다들 묵묵히 주어진 책임을 사는 것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고만고만한 삶을 견디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러워진다. 대단한 걸 성취하겠다고 버둥거리지 말고 작은 생()을 소박하게 일궈 가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무언가가 되고 싶다가도 그저 하찮은 존재이길 바라는 모순적인 마음이 살아가는 데엔 필요한 것 같다.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홍길표 옮김, 문학동네)에는 모순 속에서 성장기를 보내는 인물이 등장한다. ‘야콥 폰 쿤텐은 귀족 가문 태생이지만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에 들어가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삶을 선택한다. 발저는 개인에게 주어진 고난을 극복하고 성취해가는 영웅적 인물을 내세웠던 근대 소설의 서사에서 벗어나 자발적으로 아웃사이더가 되는 인물을 그려낸다.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가 20여 년을 살다 눈 쌓인 길에서 아무도 모르게 생을 마감한 작가 자신의 삶이 오버랩된다. ‘반영웅주의를 내세워 근대 사회의 가치를 해체했다는 평을 받는 이 소설을 두고 인간의 모순적 마음에 골몰하게 된다. 아웃사이더를 지향하면서도 그걸 통해 자기만의 의미를 강화시킨 야콥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벤야멘타 하인 학교는 아무것도 되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운다. 제대로 된 수업도, 선생님도 없는 곳에서 학생들은 무위(無爲)의 시간을 견디는 법을 터득한다. 지식의 추구나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태도, 자신을 알고자 하는 생각은 비난 거리가 될 뿐. 현실에 만족하며 인내와 복종을 체화한 충직한 인물, 크라우스가 우수한 학생으로 추앙받는 곳이다.




학교에 새로 들어간 야콥은 여러 경험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단련시킨다. 출세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대상에 부여된 의미를 거부하면서 새롭게 경험하길 바란다. 금기시되는 반항을 일삼고 도시를 탐색하거나 산책을 즐기며 아름다움과 기쁨을 발견하기도 하는 그는 벤야멘타 학교라는 성벽을 넘어서려 시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는 일 없는 원장을 탐색하고 학교 어딘가내실이 존재할 거라고 믿으며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찾으려 한다. 




벤야멘타 학교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친구들을 존중하면서도 자기 내부의 질문과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 못하는 야콥. 그가 겪는 의문과 혼돈은 책을 읽는 내게도 혼란을 일으켰다. ()이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일자리를 찾아 하인이 되는 친구들과 달리 사막으로 여행을 떠나는 야콥이 모순적으로 보였다. ()과 주체를 알고자 하는 열망을 버리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그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방식으로 무언가가 되려 하고 있었다. ()이면서 무한대 같은 존재라 해야할까.




“너는 지금, 말하자면 영()인 거야. 소중한 동생아. 젊었을 땐 누구나 영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일찍, 너무 일찍 어떤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기 때문이지. 확실한 것은 너란 존재가 너 자신에게는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거다.”

73 <벤야멘타 하인학교> 로베르트 발저




야콥은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와 정체성(백인 남성 귀족 계급 출신)을 타고났기에, 자발적으로 밑바닥으로 내려가고 영()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모든 것을 내려 놓았다고 하는 주장 자체가 하나의 권력일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영()인 사람, 그래서 끝없이 자신을 증명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에겐 주어질 수 없는 선택권. 그러니 지속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 외적 힘에 의해 정체성을 빼앗긴 이에게 아무것도 되려 하지 말라는 말이 단순히 자유에 대한 옹호가 될 수 있을까. 오히려 박탈감을 키우는 폭력의 말이 되는 건 아닐까. 증명하지 않고 주장하지 않으면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 환대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이 사회에서 모두가, 나란 존재가 자신에게는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걸 충분히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 질문해야할 것 같다.




티 나지 않는 집안일에 지치고, 삶이 텅 빈 것 같아 답답해지는 날이 오면 또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갈 것이다. 8차선 도로를 메우고 바삐 흘러가는 자동차의 대열을 보며, 정장 차림으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 빨려 들며, 나의 하찮음에 안도할 것이다. 그러면 돌아갈 집이 있음에, 따뜻한 저녁 밥상에 유난한 행복을 느끼게 되겠지. 하지만 나만의 목소리로 삶의 의미를 엮어보고 싶다는 바람은 끝내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모순적인 마음에서 하나를 애써 지우려기보다는 흔들리면서 나만의 균형점을 찾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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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마음 델핀 드 비강의 마음시리즈 1
델핀 드 비강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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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친구 문제로 많이 힘들었다. 단짝이 된 친구와 마음이 맞지 않았는데 주도적인 성향의 친구에게 끌려 다니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 생활이 버거워 학교 가기가 끔찍하게 싫었던 때도 있다. 그런데도 또래 관계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척하느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그러고 집에 돌아오면 피곤했고 내가 무능한 것 같아 화가 났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집에서는 잔뜩 화가 난 사람처럼 얼굴에 힘을 주고 표정을 굳히고 있었지만 실은 누군가 괜찮냐고 물어주길 바랐던 것 같다.



델핀 드 비강의 소설 <충실한 마음>(윤석헌 옮김, 레모)에는 부모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숨기는 열세 살의 테오가 등장한다. 이혼한 부모의 집에서 일주일씩 번갈아 지내는 테오는 우울증으로 망가져가는 아빠를 홀로 지켜본다. 아빠 집에서 돌아온 테오를 안아주지도 않고 적대감을 드러내는 엄마. 증오심으로 전남편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엄마는 테오가 아빠와 보낸 시간을 없는 것처럼 치부한다. 그런 엄마 앞에서 테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훈련해왔다. 아빠 때문에 두렵고 무섭지만 도움을 청할 어른이 가까이에 없다. 테오는 절박한 마음을 무뎌지게 하려고 몰래 술을 마신다.



어린 테오는 아빠의 비밀은 지켜줘야 하고 엄마에게는 상처를 주면 안 된다고 믿는다. 아빠와 엄마 둘 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사랑하는 부모를 보호하려는 마음 때문에 자신에게 상처를 내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아이들은 믿음으로 인해 저주를 받는다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말처럼 테오의 믿음과 충실함이 아이의 삶을 망가뜨린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느끼면서 테오는 누군가 이러한 상황을 알아채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아빠는 죽을 것 같아 무섭고 엄마의 증오와 무관심은 몸에 난 상처처럼 아파서. 다행스러운 건 테오의 신호를 감지하는 어른이 한 명 있다는 것이다. 테오의 담임선생 엘렌. 어려서 아빠에게 학대받은 경험이 있는 그녀는 아이의 충혈된 눈과 어눌한 말투, 회피하는 태도에서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드러난 증거가 없어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데도 그녀만은 의심하고 질문하며 테오와 그 주변을 지켜본다. 마음이 울리는 경보를 무시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충실한 마음이 위기 상황에서 테오를 구한다. 



“충실한 마음.

(…)

몸속 어딘가 잠들어 있는 어린 시절의 법칙, 우리를 바로 서게 하는 가치, 저항하게 하는 근거, 우리를 갉아먹고 가두는, 해독할 수 없는 원칙. 우리의 날개이자 굴레.”

11, <충실한 마음>, 델핀 드 비강



델핀 드 비강은 소설의 첫 페이지에서충실한 마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를 바로 서게 하는 가치이면서우리를 갉아먹고 가두는 굴레이기도 한 것. 이야기는 굴레로서의 충실함과 지켜야 할 가치로서의 충실함을 나란히 보여주며 맹목적 충실함이 만드는 상처와 고통, 무관심과 증오를 살펴본다. 특히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거짓된 충실함이 서로를 어떻게 고립시키는지 이혼 가정과 청소년 음주, 사이버 공간에서의 혐오 표현 등 최근 이슈를 통해 풀어낸다. 그 고민이 다다른 지점에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 타인(특히 여리고 미성숙한 아이들)에게 잘못된 믿음을 심어 주지 않기 위해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다. 무해한 어른이 되기 위해 우리 안의 믿음을 의심하고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은 중요하다.



아이들은 어른의 기분과 집안의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알아채는 능력이 있다. 어떻게 하면 엄마 아빠가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는지 파악하고 나면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 어린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엄마가 걱정할 것을 걱정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아프거나 속상한 일이 있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어리고 여렸던 마음은 부모님이 좋아하는 방식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러느라 내 마음을 숨기고 억눌렀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표출했다. 싸늘하고 냉랭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던 사춘기 시절, 닫힌 표정 안에 SOS 신호를 숨기고 있던 건 아닐까. 누가 내 마음을 알아채 주면 좋겠다고, 힘들고 벅차다는 걸 이해해주고 같이 울어주면 좋겠다고.



며칠 전 아이의 이를 닦아 주는데 입술 아래 옴폭 들어간 부분에서 타박상을 발견했다. 어디에 부딪힌 건지 푸르게 멍이 들고 군데군데 실핏줄이 터져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갑자기 발견한 타박상에 놀라 넘어졌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모르겠다고 했다. 어린이집에서 놀다 그랬냐고 해도 기억이 안 난다고 얼버무리는 아이를 보며 가슴이 철렁했다. 상처를 보니 꽤나 아팠을 것 같은데 아프다는 내색도 없는 모습에서 뭘 숨기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때로는 아플 때 아프다고,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는 게 어렵다.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쉽지 않다. 우리 사회가 더 강인해지길, 아픔을 내보이지 말 길 강요하는 면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감정을 드러내고 주변에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회가 위험을 예방하고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지 않을까. 아이가 아플 때 아프다고 큰 소리로 울었으면 좋겠다. 아이의 울음을 억지로 그치게 하지 않고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엄마이고 싶다. 건강하게 자신의 상처를 표현하고 타인과 나누는 법을 아이와 함께 배울 수 있길 바란다.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부끄러운 게 아니고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건 나약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우리는 저마다 고유한 통점을 가지고 있고 그걸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연약함을 드러내는 이를 무능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사회가, 부당한 고통을 인내하라고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곁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고 다른 기척에 예민하게 반응해주는 사회이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우선은 자신의 연약함에 너그러워져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감정을 보살피고 건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너그러움이 타인의 연약함까지 포용하게 해 줄 것 같다. 내 마음을 보살피는 충실함이 타인의 표정까지 돌아보는 충실함의 바탕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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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숨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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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의 소설집 <환한 숨>에는 우리 사회의 곳곳에 위치한 취약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나이든 비혼의 여성, 계약직을 전전하는 사람들, 안전망없이 놓여진 공장 노동자, 가난한 예술가와 아픈 사람들. 그런데 그들은 외따로 존재하지 않고 어떻게든 연결된다. 죽어가는 친구를 간병한 강희는 죽은 친구의 아들일 수도 있는 탈영병을 만나고(<환한 나무 꼭대기>), 계약 만료를 앞둔 기간제 교사는 실습 중 사고로 의식불명이 된 하나(<하나의 숨>)의 담임이다. 파업 중인 언론사에 수습기자로 들어간 연진은,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떠난 선배 윤희를 흠모하고(<경계선 사이로>), 성추행 가해자의 딸인 효진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보낸다(<높고 느린 용서>). 각자가 위태롭고 고된 자리에 있으면서 그처럼 또 다른 무게와 상처를 지닌 사람들의 삶으로 흘러 들어가는 이야기가 우리 안에 짙은 반향을 그린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는 기댈 수 있는 ‘지팡이’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발자국’ 같은 게 반드시 필요하니까(해설<연루와 비밀> 김미정). 길을 걷다 깨달았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혼자인 적이 없다는 것을. 하늘 아래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내뱉고 들이마시는 숨결로 서로에게 엮이어 들고 있었다. 매순간 보이지 않는 숨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깊숙하고 내밀하게 숨을 나누면서도 타인의 사정과 속마음까지는 절대 알 수 없다는 게 오히려 기이하고 슬프다. 그래서 때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다른 이를 외롭게 한다는 게 가혹한 형벌처럼 우리를 가둔다.



자신의 삶의 무게와 고독의 깊이로 버거운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돌볼 수 있을까. 각자가 이토록 취약한데 어떻게 서로에게 버팀목이 될 수 있을까. 내밀한 상처와 고독으로 절뚝거리는 내가 어떻게 당신의 지팡이가 될 수 있을까. 내 삶의 방향조차 가늠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에게 발자국으로 길을 알려줄 수 있을까. 각자가 말할 수 없는 부분을 품고 있는데, 그런 상태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된 연결을 갈망할 수 있을까…… 조해진의 소설을 읽는 동안 피어난 질문들은, 간절했다. 이 물음은 금세 눈물이 터져 나올 것처럼 긴박하고 곡진해서 우리의 마음에 짙은 어둠을 드리우는데, 조해진 작가는 끝내 그곳에 달빛처럼 환한 빛을 비춘다.



강희는 탈영병에게 줄 먹을 것을 싸 들고 가고, 기간제 교사인 ‘나’는 하나도 보았을 갈매기를 쫓아 무의식적으로 하나를 찾아간다. 연진은 윤희의 냉랭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아가 절박한 마음으로 경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높은 곳에서 천천히 이동하는 구름을 보며 어디선가 오고 있을 용서를 떠올리는 피해자는 다시 한 번 편지를 쓴다. 사회의 무수한 패러다임이 그어 놓은 경계를 간신히 지우며 아픈 타인의 자리를 상상하고 끝내 걸음을 옮겨보는 사람들이 소설 속에 있다. 각자가 지닌 삶의 무게를 알아채 주려 한다면 우리는 ‘숨’, ‘숨결’로라도 연결된다고, 그러면 우리의 고유한 이야기가 빛이 되어 환하고 높게 떠오를 수도 있겠다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오래오래, 그녀와 나의 숨결이 같은 분량으로 서로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나는 이제야 떳떳하고도 공평한 세계로 입장한 기분이 들었다."

<숨결보다 뜨거운> 조해진, 『환한 숨』, 문학과 지성사



이웃을 오롯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어떻게 지내요?”라고 물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시몬 베유는 말했다. 시몬 베유가 쓴 말을 불어로 풀이하면 “당신의 고통은 무엇인가요?”라고 시그리드 누네즈는 썼다. 조해진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준 ‘환한 숨’ 같은 게 여기 있지 않을까. 내 안의 연약함이 타인의 연약함에 반응하여 안부를 묻는 마음에. 서로의 상처를 불러줄 때 우리는 고유하고 공평해진다. 서로에게 '지팡이'나 '발자국'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경계를 지울 수 있다는 가능성, 그런 것을 쥐고 있는 한 우리의 뒤엉킨 숨은 어둠 속에서도 희붐한 빛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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