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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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를 기리기 위해 1977년 UN에서 국제 기념일로 공식 지정했다. 1908년 열악한 작업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은 ‘빵과 장미’를 달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저임금에 시달리던 여성 노동자에게 빵은 생존권을, 장미는 인간으로 존엄할 권리, 즉 참정권을 의미했다.




세상은 ‘빵과 장미’를 외치는 여성들에게 침묵을 요구했지만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역사의 긴 흐름 속에, 그리고 평범한 일상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그 덕분에 여성의 권리는 신장되어 왔다. 성별에 따른 임금의 격차, 여성의 역할에 한계를 긋는 시선, 젠더 권력 구조 속 제도화된 성폭력이 드러나게 된 것은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나’의 몸으로 존엄하게 살기 위해



여성 혐오와 차별적 시선,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역할과 잣대, 변하지 않는 현실은 존재한다.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적 시선 또한 여기 해당될 것이다. 불가능에 가까운 완벽한 몸매를 아름다움의 정석이라는 듯 보여주는 매체에 둘러싸여 인생 최고의 성취란 체중 감량에 성공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살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아름다움의 기준과 동떨어진) 자기 몸에 너그럽기란 쉽지 않다.




몸은 의지로 만들거나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고 많은 여성들이 평생 다이어트를 생각한다. 아침을 거르며 간헐적 단식을 생활화하고 있는 내게도 몸무게에 대한 걱정은 따라다닌다. 여성의 몸에 제약과 한계를 긋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몸을 인정하고 존중받기 위해, 우리에겐 ‘장미’가 필요하다. 그런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보았으면 하는 목소리가 있다.




상처받은 몸으로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직시한 여성, 아이티계 미국인으로 퍼듀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며 ‘나쁜 페미니스트’로 페미니즘의 열풍을 몰고 온 작가 록산 게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과 허기에 대한 고백을 <헝거>(노지양 옮김, 사이행성)에 썼다. 이 책에는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 사회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기까지, 그녀만의 삶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그녀는 열두 살에 집단 성폭행을 당했고 그 일은 평생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는 먹는 걸 택했다. ‘더 단단하고 더 강하고 더 안전하다’고 느끼기 위해 자신을 살 찌웠다. 190센티미터에 261킬로그램. 그녀의 몸은 자신을 가두는 ‘우리(cage)’가 되었고 또 다른 폭력을 불러왔다.




스스로 자신을 가두었음을, 자신이 만든 몸이 감옥이 되었음을 그녀는 안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바닥부터 들여다보기로 한다. 몸에 새겨진 상처의 역사를 천천히 되짚으며 자신을 직시한다.





자신을 직시하고 몸에 가둔 진실을 말하기



날씬한 몸에 가치를 두고 비만을 ‘비난의 잣대’로 삼는 사회에서 록산 게이는 흑인, 성폭력 피해자, 초고도 비만이라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상처투성이 몸을 바라본다.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는 반향이 되어 정상성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수시로 겪는 잔인한 현실을 보여준다.




​​​​​​​있지만 없는 사람처럼 취급되는 상황, 적절한 의자와 공간이 없어 공공장소에서 몸을 편안하게 둘 수 없는 여건, 남성들에게 듣는 혐오와 비하의 말과 사람들의 경멸적인 시선.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여성에게 악의적인 문화, 여성의 몸을 끊임없이 통제하려는 문화’를 예리하게 꼬집는다.





소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배운다. 날씬하고 아담해야 한다고. 자리를 많이 차지해선 안 된다고. 남자들 눈에 보기 좋아야 한다고. 사회에서 받아들일 만해져야 한다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알고 있다. 우리는 점차 작아지고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32쪽, <헝거>, 록산 게이, 노지양 옮김, 사이행성




‘날씬함을 자기 가치와 동일하게 놓으라’고 최면을 거는 사회, ‘체중 감량에 대한 욕망을 여성 정체성의 기본 요소라고 여기는 문화’에서 ‘비만인의 몸은 무절제와 타락과 나약함의 상징’이며 ‘행복이란 오직 날씬함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다루어진다고 록산 게이는 말한다. 사회는 지속적으로 여성에게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것에 대한 비합리적인 기준’을 제시한다고. 그런 사회에서 여성은 끝없는 자기 부정과 불만족, 수치심에 시달린다. 여성의 ‘몸’은 하나의 골칫거리이자 문제로 타자화된다.




그것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몸에 관해 이 문화가 보내는 해로운 메시지’ 임을 분명히 하고 그 기준에 힘없이 굴복하지 말고 저항해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고 자신이 겪은 ‘폭력의 역사’를 드러내야 하는 이유를 그녀는 안다. 침묵 속에 삭제되고 지워진 진실은 말하기를 통해서만 되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처럼 각각의 고유한 몸이 겪는 고통과 폭력의 경험은 더 많이 말해지고 더 들어야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내 몸은 나의 선택



<헝거>를 읽고 내 몸에 대한 생각을 돌아보았다. 성장하면서는 조심하고 감춰져야 하는 것, 성장 후엔 끝없는 비교 속에 부끄러운 대상이었던 몸. 거기에는 사회적으로 주입된 시선과 내 몸을 온전히 통제하기 어려웠던 경험이 덧대어져 있다.




책장을 덮은 후,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분투한 록산 게이의 목소리와 함께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 하나 더 떠올랐다. 여성 스스로가 건강권과 재생산권을 온전히 소유하길 여구하는 “My body, My choice”라는 구호가 바로 그것이다.




나의 몸은 나의 선택. 자신의 몸에 관한 결정은 스스로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짧은 말. 이는 낙태죄 폐지를 위해 긴 시간 여성들이 외쳐 온 구호다. 여성이 건강할 권리, 그리고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와 낳을 권리까지 모두 포함한 재생산권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여성들이 과거부터 끈질기게 말해온 이 구호 덕분에, 2019년 한국에서도 낙태죄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이는 여성들이 스스로 말할 때 기울어진 세상의 각도가 드러나고, 더디더라도 평평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내 몸은 나의 선택”, 그리고 “내 가치는 몸에 달려 있지 않다.(336쪽)” 자신의 몸에 적대적인 사회에 맞서 목소리를 낸 모든 여성들, 그리고 록산 게이의 숭고하고 용감한 고백은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내가 살아온 역사와 내 몸 또한 인정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알려준다.




자기혐오와 비하로 엉망인 당신에게, 여성에게 들이대는 잣대로 상처받은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읽고 이야기하며 목소리를 내면 좋겠다. 여성의 몸에 비합리적인 기준을 들이대는 사회에 저항하자고. 괜찮지 않다고, 차별에 침묵하지 않겠다고, 앞선 여성들의 외침에 목소리를 더하자.






※ '오마이뉴스'에서 '시민기자 북클럽'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14658&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ews&CMPT_CD=E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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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듣는 시간 - 다른 세계를 여행하는 다큐멘터리 피디의 독서 에세이
김현우 지음 / 반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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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후보들은 표를 얻기 위한 공약과 자기 주장을 펼치느라 분주하다. 그런 와중에 편을 가르고 갈등과 혐오를 부추기는 발언들이 이어져 우려스럽다.



그들은 대중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표면적 현상에만 주목할 뿐 그 너머 개개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현상과 수치가 아닌 그 속의 구체적인 개인을 알 때 말과 선택, 결정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혐오와 배제의 말이 쉽게 흘러나올 수 있는 이유는 구체적인 개인의 자리를 그려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갈등의 프레임만 만들 뿐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이야기에는 무심한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 다큐멘터리 PD이며 번역가로 활동해 온 김현우 작가가 쓴 <타인을 듣는 시간>(반비, 2021)이다.



어떻게 들을 것인가

이 책은 타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가져야 할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자신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을 하는 작가의 직업적 고민이 담겨 있기도 하다.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독서와 연결되었고 그가 만드는 다큐멘터리처럼 타인의 경험을 전달하는 논픽션을 읽으며 그는 방향을 찾으려 했다.



이 책은 저자가 신발 공장 노동자, 트랜스젠더, 이주노동자, 학교폭력 가해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을 풀어낸 에세이이자 거대한 서사 속에서 개인 삶의 맥락과 차이를 섬세하게 짚어낸 열세 권의 논픽션에 대한 서평이다.



저자는 앤드루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을 읽고 <부모와 다른 아이들>이라는 다큐를 찍었던 경험을 엮어 소외된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협소함을 성찰한다. 언어의 부족은 이해의 가능성을 좁히고 혼돈을 낳지만 다름이 혐오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이해와 상관없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함께 사는 사회의 토대가 되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또한 코타키나발루의 고무 농장에서 30년 넘게 고무 채취를 해온 할아버지, 슬로바키아의 운동화 공장에서 평생을 일한 할아버지들을 인터뷰했던 경험을 헨미 요의 <먹는 인간>을 엮어 풀어내기도 한다. ‘운동화’가 누군가에게는 삶 전체를 의미할 수 있으며 ‘소박한’이나 ‘만족’이라는 단어의 기준도 저마다 다르다는 발견을 통해 언어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알려준다. 그런 개별적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려는 세심한 노력이 서로에 대한 결례를 줄여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혐오 범죄를 경험한 마을 사람들을 인터뷰해 쓰인 희곡 <래러미 프로젝트>(모이세스 코프먼·텍토닉 시어터 프로젝트)와 연결하여서는 타인의 자리로 몸을 옮겨 그 감각을 경험하려는 노력 없이 타인에 대해 안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저자가 고무 가공 공장에서 일하는 한 여성을 인터뷰했던 경험이 특히 인상적이다. 그 여성은 열다섯 살에 결혼해 아이 다섯을 낳고 몸이 불편해진 남편을 대신해 자신의 몸무게와 다를 바 없는 고무 덩어리를 포장하는 작업을 했다. 인터뷰에서 아이들이 잘 되기만 바란다는 그녀에게 저자는 당신 자신을 위해 바라는 것은 없는지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모르겠습니다.”였다. 시내에서 떨어진 밀림 속 허름한 목조 주택에서 아이들과 남편을 부양하는 그녀의 삶이 ‘좋은 삶’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저자는 그녀가 살아온 삶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 보라고 질문한 것이다.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하며 웃고 마는 그녀를 보며 작가는 이 인터뷰가 실패했음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녀와 며칠이라도 더 시간을 보냈더라면 섣부른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타인의 삶을 나의 맥락으로만 바라볼 때 때로 무례하거나 무력한 말이 나온다고. 그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나의 맥락에서 타인을 생각하지 말고 타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기다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이해 없이 환대하기

‘어떻게 들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김현우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다름’이라는 전제다. 저자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싫어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 말에 담긴 ‘차이’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차이를 무시할 수 있는 건 편협한 둔감함이다. 타인의 다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둔감함,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타인이 맞추길 강요하는 둔감함일 테다. 저자는 “탓해야 할 것은 타인이 지닌 낯선 특징이 아니라 그 세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나의 편협함이어야 한다.” (38쪽)고 말한다.



그러므로 함부로 ‘우리’라는 말로 묶어 둔감해지지 말 것을, 어떤 단어에 대해 내가 아는 의미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하지 말 것을, 나의 맥락 안에서 타인을 이해하려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내가 모르는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 ‘무엇을 하겠다’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겠다’만 생각해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는 조언한다. 상대의 몸의 경험, 감각의 경험을 내 몸과 감각으로 경험해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가질 것을, 섣불리 자신이 이해했다고 생각한 바를 말하기보다 타인의 이야기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는 게 먼저라고 청자의 윤리를 설명한다.



책을 읽으며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내내 생각했다. 타인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의 맥락으로 동일하게 감각할 수 없는 한 완전한 이해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해가 반드시 동의를 의미하지 않고, 관대해 지라는 뜻도 아니라는 걸 책에서 배운다. 이해란 내가 타인과 얼마나 다른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이의 이야기를 듣고 다름을 인식할 때 타인은 내 안에서 새롭게 탄생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구체적인 자리가 비로소 만들어진다고. 타인의 자리를 온전히 인정하면서 ‘우리’가 아닌 상태에서도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으며 공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지킬 수 있는 개인들이 늘어날수록 관련한 사회적 논의는 성숙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존중과 공존을 위한 성숙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라고 지속적으로 묻고 들어줘야 할 것이다.



저자와의 북 토크에서 김현우 작가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던 말은 이것이다. “이해가 환대의 전제 조건이 아니다. 이해와 상관없이 타인은 환대하는 것이다.” 타인은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정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환대는 불가능하거나 대단한 무엇이 아닐 것이다.



환대는 희미한 친절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타인에게 친절할 수 있다. 이해와 상관없이 그들을 인정할 때 환대와 연대가 가능하다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작가의 말처럼 환대란 ‘당신을 해칠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남은 선거 기간에는 배제와 혐오가 아닌 인정과 포용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길 바란다. 개개인의 이야기를 더 활발히 묻고 들으며 공존과 환대를 위한 비전을 만들어가는 선거의 장이 되길 기대해본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08307


※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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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대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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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행에서 마주쳤던 힌두교인의 참배 모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뇌리에 남아있다. 자신의 온 존재를 바칠 듯 무아지경으로 기도에 빠져 있던 여인의 모습. 그녀의 몸은 현실에 존재했지만 의식은 이곳에 있지 않아 보였다. 그 믿음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어 아득해졌던 느낌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녀에게 종교는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일 거라고 감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 종교에서 시작되어 종교와 합치되는 삶. 그로 인해 카스트라는 신분제가 유지되는 곳, 인도. 그곳에서는 절대적인 신앙과 믿음이 삶의 근간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는 것 같았다. 인도인에게 신이 절대적이듯, 신에 의해 부과된 가족과 계급은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무엇이지 않을까.



인도 출신 미국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줌파 라히리에게도 그런 인도인의 관념이 영향을 미쳤을까. 가족이라는 인연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이끌고 가는지, 거기서 벗어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지, 정체성이란 가족이라는 근간을 벗어나 형성 불가능한 것인지, 그녀의 소설은 거기서 맴돌며 질문한다.



어쩌면 그녀 또한 인도적 가치관과 문화, 가족이나 정체성이라는 얽매임에서 벗어나고자 소설 쓰기에 매달렸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뿌리 중 선천적으로 부여된 것을 잘라내려는 시도가 그녀의 글쓰기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거미는 자신의 실로써 공간의 자유에 이른다”(466쪽)는 인도 철학 경전 속 말처럼, 자신이 써 내려간 문장을 실 삼아 그녀는 자신만의 집을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에서도 자유롭기 위해 거미처럼 자기만의 집을 짓는 행위. 그것이 그녀의 소설 쓰기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줌파 라히리의 장편 소설 <저지대>는 3대에 걸친 삶과 소용돌이를 다루는 대하소설 성격의 작품이다. 인도의 정치 사회적 격변의 시대에 캘커타에서 태어나고 자란 수바시. 그는 한 살 터울인 남동생 우다얀과 한 몸처럼 성장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정치적 입장에 차이가 생기면서 둘의 삶은 갈라진다. 수바시는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 미국 로드 아일랜드로 유학을 떠나고 우다얀은 캘커타에 남아 정치 운동에 가담한다. 그러던 중 가우리를 만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지만 결혼 2년 차 우발적 사고로 경찰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우다얀의 사망 소식에 인도로 돌아온 수바시, 우다얀의 아이를 품고 있는 가우리에게 책임을 느낀다. 부모님의 냉대와 인도의 정치 상황으로부터 그녀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그는 동생의 아내와 결혼을 결심하고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온다.



가우리는 자신과 아이를 위해 수바시의 제안을 수락하지만 그와 결혼을 하고도 그를 남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벨라를 낳은 후 철학 공부를 병행하면서 아이의 엄마로 자신의 존재를 견디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수바시가 벨라와 함께 인도를 방문하는 사이 결국 그녀는 집을 떠난다.



가우리가 떠난 이후 벨라의 곁에서 아빠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수바시, 엄마의 부재(떠남) 로 인한 상처와 아픔 속에 방황하며 성장하는 벨라, 가족을 떠나 고립된 생활 속에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가우리 등 주요 인물의 삶이 정치 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변주되는 소설은 흡입력을 가지고 독자를 빨아들인다. 각 인물이 지닌 남다른 성장 배경과 삶의 선택은 때로 독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하지만 줌파 라히리는 한 인간이 나이 들며 변해가는 과정의 보편성과 삶의 우발적 사건이 드리우는 개별성을 절묘하게 엮어낸다. 섬세하고 치밀한 라히리식 서사는 그 자체로 타당성을 부여하며 나아간다. 독자는 이야기에 깊숙이 연결될수록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곤란함을 느낀다. 그리고 삶을 향해 던져지는 깊고 난해한 질문 앞에 걸음을 멈추게 된다.



부모로부터 부과되는 역할, 형제 자매간 느끼는 의무와 경쟁심,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과정과 부모됨, 낯선 환경에서 삶의 터전을 개척하거나 사랑하는 이를 잃는 아픔 속에서도 지속해야하는 삶. 성장 단계에 따라 짊어지게 되는 역할과 의무, 삶의 단계에 따라 마주하는 그 무게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걸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이 소설은 특히 가족 간의 역학 내에서 만들어지는 한 사람의 정체성과 그걸 받아들이고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에 집중한다. 줌파 라히리의 이전 소설에서도 다루어졌던 정체성과 가족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이어진다.



수바시의 충직하지만 다소 수동적인 성격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며, 우다얀과의 결혼으로 가우리의 삶이 어떤 변화의 물살을 타게 되었는지, 또한 가우리가 아이를 떠나는 선택을 하기까지 그녀 성장 배경의 흔적, 벨라가 아빠가 없는 아이를 낳아 기르기로 한 결심(엄마와 닮은꼴의 삶) 등, 가족 관계 내에서 형성되고 대를 이어 전해지는 어떤 운명의 연결 고리, 혹은 연쇄 작용 같은 것이 그렇다. 태어남과 동시에 연결되는 가족이라는 틀은 한 사람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주홍 글씨를 새기는 것일까. 그것은 의지로 벗어날 수 없는 어떤 궤도 속에 존재하는 것인가. 줌파 라히리가 지어 올린 완벽한 세계 속에 빠져들고 나면 이런 의심에서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 우리의 삶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강력한 자장 안에서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고.



무지와 희망 속에서 의도적으로 기대를 하는 것,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시부모님은 자식을 위해 증축한 집에서 수바시와 우다얀이 나이 들어갈 것으로 기대했다. 그분들은 수바시가 톨리건지로 돌아와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우다얀은 사회 전체가 바뀌기를 바라며 미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가우리는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그와 함께 결혼 생활을 꾸려가기를 바랐다. 수바시는 로드아일랜드에서 그와 가우리와 벨라가 한 가족으로 지내기를 바랐다. 가우리가 벨라의 엄마이자 그의 아내로 남기를 바랐다.

244쪽, <저지대> 줌파 라히리, 서창렬 옮김, 마음산책




한 사람의 정체성과 삶은 가족이라는 관계와 영향 속에서 만들어진다. 관계 속에서 부여되는 기대가 삶의 방향을 이끌기도 한다. 하지만 기대와 어긋난 선택이 우발적으로든 의지적으로든 발생하기 마련이고 그로 인한 상처와 흉터가 삶에 새겨진다. 기대에 응하는 방식은 희미한 밑그림을 지니고 사는 삶과 비슷할 것이다. 그럴 때 삶은 조금 더 안정적이고 일정한 방향을 지닐 수 있다. 그것이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면 기대에 응하지 않는 방식이 있을 테다. 밑그림 없이 삶의 불안정성 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방향을 만들어가는 삶. 수바시의 삶이 전자의 것이라면 가우리의 삶이 후자에 닿아 있다.



가우리는 이 소설에서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수바시 또한 가족을 벗어나는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듯 보였지만 가족으로서의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책임을 다하는 인물로 머무른다. 하지만 가우리는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우다얀과 결혼했고, 이후에는 수바시를 따라 인도를 떠났으며, 피붙이인 딸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과감함을 보인다. 자신에게 연결된 가족이라는 뿌리를 잘라내며 오로지 자신으로 남는 인물이다.



그녀의 선택은 합당한 대가를 요구한다. 남편과 딸을 잃고 고립이라는 현실에 처하게 되는 것. 하지만 그녀는 고립을 친구 삼아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법을 터득하기도 한다. 그러니 그 삶을 단순히 불행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의 삶을 선택했더라도 그녀의 삶이 온전하게 행복하긴 어려웠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녀의 선택, 스스로 뿌리를 잘라냈던 선택에 대해서도 함부로 옳고 그름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은 아내에서 과부로, 제수에서 아내로, 엄마에서 자식 없는 여자로 바뀌어갔다. 우다얀을 잃은 것은 예외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자신은 능동적으로 이런 길을 선택해왔다.

자신은 수바시와 결혼했고, 벨라를 포기했다. 자신은 또 다른 모습의 자기 자신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전환을 관철하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신의 삶을 켜켜이 쌓아왔지만 결과적으로 삶은 발가벗겨졌고, 결국 혼자가 되었다.

382쪽




수바시 인생에는 세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아들을 잃고 황폐해진 어머니 비졸리, 그리고 첫 번째 남편을 잃고 그의 형을 남편으로 받아들인 가우리, 그녀의 딸인 벨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아들을 상실한 삶의 고통에 휩쓸려 자신을 잃고 마는 비졸리와 대조적으로 남편을 잃고 스스로 딸을 버리면서도 자신의 삶을 붙잡는 가우리는 의지적이며 주체적인 여성으로 보인다. 그녀가 했던 과감한 선택은 그녀의 딸 벨라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벨라는 자신의 성장 배경을 인정하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섣불리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홀로 딸을 낳아 키우는 선택을 한다.



소설은 비졸리에서 가우리로, 그리고 벨라로 시간과 공간(인도에서 미국)의 변화를 따라 여성의 삶이 변해가는 추이를 그려 보여 준다. 수동적으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비졸리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벨라로 넘어가는 연결 고리로서 가우리가 존재한다. 가우리는 새 삶의 가능성을 여는 인물, 도발적인 선택과 시도로 삶의 정형성을 벗어던지는 인물이다. 현실의 가치를 거스르는 인물, 그러므로 변화의 물꼬를 트는 도전적이고 입체적 인물인 가우리의 존재는 이 소설에 특별한 아우라를 부여한다.



수바시의 인생의 세 여자-어머니, 가우리, 벨라-중에서 한 사람만 남았다. 어머니의 정신은 이제 황무지처럼 황폐했다.

(…)

그 황폐함이 어머니의 유일한 자유였다. 어머니는 집 안에 갇혀 지내면서 매일 한 번씩만 밖에 나갔다. 디파가 어머니를 돌보면서 위험할 수 있는 행동을 못하게 하고, 당황스러운 일을 못하게 하고,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가우리의 정신은 자신을 구해냈다. 똑바로 설 수 있게 했다. 자신이 나아갈 길을 냈다. 떠날 수 있게 자신을 준비시켰다.

339~340쪽




줌파 라히리는 환경에 의해 주어졌던 영어(모국어)에서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처럼 이탈리아어의 매력에 빠져들어 수년간 이탈리아어를 배운 후 그녀는 미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영어를 버리고(영어 소설로 인정을 받았음에도 자신의 기반을 버리고)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선택을 했다. 그녀 스스로 주어진 모습에서 탈피하여 자신을 만들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 소설 속 가우리의 모습에 줌파 라히리가 겹쳐지는 이유다.



소설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가우리는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이 남달랐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 또한 줌파 라히리의 관심과 겹쳐지는 부분은 아닐는지. 이탈리아와 미국을 오가며 가르치고 글을 쓰는 그녀는 삶 속에서 공간을 넘나들며 시간을 오간다. 그 속에서 뽑아내는 유려하고 빼어난 실로 자기만의 집을 짓는다. 작품이 거듭될수록 그녀가 공들여 지은 자유의 공간이 조금씩 확장됨을 느낀다. 그녀의 세계가 어디까지 확장될지 지켜보는 것, 이 또한 독자의 기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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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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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여행을 다녀왔다. 짐을 꾸리면서 여행이 마냥 즐겁지만 않다는 걸 느꼈다. 집을 떠나기 위한 준비와 집을 벗어남으로 맞닥뜨릴 불편이 성가셨다. 떠나기 전부터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훌쩍 떠난다는 건 지금의 내겐 불가능해 보였다.


여행은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 생각보다 춥고 바람이 거셌던 날에는 삶의 보금자리를 두고 떠나왔기에 더 춥고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봄이 왔다는 듯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었던 날엔 언제 그랬냐는 듯 기지개를 켜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디서든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여행의 반은 화창한 날씨 덕분에 즐거웠고 나머지 반은 매서운 바람 때문에 불안하고 우울했다.





유난히 거칠게 바람이 휘몰아치던 날, 숙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귤밭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불길한 소리를 내던 날, 가방 속에 넣어갔던 책을 꺼내 읽었다. 날씨와 환경 탓에, 전날 있었던 어떤 사건 탓에 마음엔 불안이 자라고 있던 그 찰나에. 어쩌면 줌파 라히리의 <그저 좋은 사람>(박상미 옮김, 마음산책)을 읽기엔 적기였는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아버지가 루마의 일 얘기를 다시 꺼냈다. “일은 중요하다, 루마야. 경제적인 안정도 주지만 정신적인 안정도 있다. 내 평생, 열여섯 살 때부터 난 쭉 일을 해왔다.”

“이제 은퇴하셨잖아요.”

“하지만 아무 일도 안 하고는 못 지낸다. 그래서 내가 여행을 그리 많이 다니는 거다. 사치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크게 쓸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중요하다, 루마야.” 그는 말을 이었다. “인생은 놀랄 일의 연속이야. 오늘은 네가 아담한테, 아담 수입에 의존할 수 있다고 하지만 내일은 또 모르는 거야.”

50쪽, ‘길들지 않은 땅’, <그저 좋은 사람> 중에서




집으로 돌아갈 날을 앞두고 있었다. 아무 걱정 없이, 어떤 계획 없이 풀어져 지내던 며칠이 끝나가고 있었다. 돌아가면 다시 매일의 일상이 펼쳐질 테다. 끝도, 결말도 알 수 없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다. 나가야 할 직장은 없지만 그 대신 챙겨야 할 가족과 집이 있는 삶. 끝없는 도돌이표 같은 삶. 어떤 날엔 무탈한 일상만으로 고맙기도 하지만 그날따라 삶이 막막하게 다가왔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엄마와 아내로, 나의 반쪽을 내어주고 반쪽만으로 사는 인생 같았다. 평온하다가도 주기적으로 불안이 찾아오는 이유는 ‘일이 주는 정신적 안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매일을 지탱할 선명한 일이 내게도 있었으면. 소설 속 루마의 아버지가 하는 말이 다 나를 향한 말처럼 들렸다.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그와 비슷한 말을 하셨을 거라고.



조금씩 변한 것도 같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끼니야 적당히 때운다 쳐도 아이를 챙기는 일은 대부분 나의 몫이다. 여행을 와도 거기엔 변함없었다. 남편은 아이와 놀아주기만 할 뿐, 아이를 돌보는 것에서는 발을 빼고 있다. (놀아주는 것만도 어디냐고, 자주 생각한다.) 아침저녁으로 씻고 입는 일로 실랑이를 벌이고, 어디를 가고 무얼 할지로 아이를 설득하고,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선을 그어주는 일까지, 주양육자의 역할이 내게 고정되어 있다. 아마도 그런 때문에 자주 내 삶이 어딘가 묶여 옴싹달싹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 같다.



나의 시간과 관심이 아이를 향할수록 부부의 삶은 줄어들었다. 남편의 무심함에 짜증을 내다 적당히 체념하게 되었고 그와 나의 차이라고 받아들였다. 우리는 함께 하는 시간을 기대하지 않은지 오래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의 우리는 사라졌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의 우리를 ‘우리’라고 묶어 부를 만한 무언가가 있기는 한가 싶을 만큼.



아밋은 잠시 생각했다. “사실 둘째 이후에 우리 결혼 생활은…….” 적당한 단어를 찾느라 잠시 머뭇거렸다. “사라졌어요.” 좀 어색한 단어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를 설명하기엔 그 단어가 유일했다. 손가락 사이로 뭔가 빠져나가듯, 뭔가 없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

그는 메건이 앉아 있는 쪽을 보았다. 오늘 저녁 내내 그랬듯 빛나는 활기에 가득 차 아직도 제러드와 얘기하고 있었다. 호텔에선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아내는 저렇게 멀리 있다. 그는 부엌을 치우고 마야와 모니카를 목욕시키고 재운 후 혼자서 텔레비전을 볼 때 느끼던 분노를 느꼈다. 아이들을 돌보다가 또 하루가 지났고, 메건은 그 속에 있지 않았다. 한집에 살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잤고, 그와 아이들밖엔 모르는 아내였지만, 때로 아밋은 랭포드에 처음 입학했을 때처럼 외로웠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메건이 미워질 때가 있었다. 술이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을 억눌렀을 것이다.

140쪽, ‘머물지 않은 방’, <그저 좋은 사람> 중에서



한동안 남편은 직장과 학업을 병행했고 나와 아이는 남편 없이 저녁 시간을 보냈다. 아이와 둘이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고 가끔 힘에 부치면 부재하는 남편을 미워했다. 가족을 위해서 애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종종 그가 자신만을 위해 모든 시간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사실에 분노했다. 아이를 돌보다가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지났고, 남편은 그 속에 있지 않았다. 한집에 살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잤고, 나와 아이밖엔 모르는 남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알 수 없는 부당함 속에 외로웠다.



모니카가 태어나고부터, 함께 시간을 보낼 궁리보다는 어떻게 하면 각자 혼자 시간을 보낼까 궁리하지 않았던가? 쉬는 날 아내가 아이들을 볼 동안 그는 공원에 가서 조깅을 했고, 또 거꾸로 아내가 서점에 가거나 네일 살롱에 갈 수 있도록 그가 아이들을 보았다.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혼자 있는 그 순간을 그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오죽하면 혼자 지하철을 타고 있을 때가 하루 중 최고의 시간이라 생각했었는지 말이다. 인생의 짝을 찾는다고 그렇게 헤매고서, 그 사람과 아이까지 낳고서, 아밋이 메건을 그리워한 것처럼 매일 밤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그렇게 절실하게 혼자 있길 원한다는 건 끔찍하지 않은가. 아무리 짧은 시간이고, 그조차 점점 줄어든다 해도 사람을 제정신으로 지켜주는 건 결국 혼자 있는 시간이라는 사실이.

140~141쪽, ‘머물지 않은 방’, <그저 좋은 사람> 중에서



그런 시간을 지나면서 아이를 둔 가족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던 것 같다.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 하고 누군가는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고. 지금 당장 어떻게 바꿀 수 없다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각자의 만족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함께 시간을 보내려 애쓰기보단 어떻게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지 모색했다. 주말 아침 남편이 운동을 하고 오면 오후에는 내가 외출하는 방식으로. 가족이란 모든 걸 함께 하며 시간을 같이 보내야만 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걸 차츰 깨달아갔다.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절대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사랑해서, 함께 있고 싶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모순적이게도 절절하게 혼자를 원하게 된다는 걸. 한동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현실을 인정하면서 차츰 편안해졌다.



“결혼 생활이라는 건 어쩔 수 없이 나빠진다”는 루마 아버지의 말이 싫지 않았다. 그 말에는 나빠지기도 하고 그러다 좋아지기도 하고, 그렇게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변해가는 게 감정이고 관계일 테니까. “이건 그저 노인네의, 이제는 아이처럼 되어버린 노인네의 생각일 뿐”(69쪽)이라고 그는 덧붙이지만 결혼과 가족이라는 현실을 건너기 위해 적당히 내려놓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변함없는 기대는 관계를 더 힘들게 하기도 하니까.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 없다면 누구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인간 고독의 본성을, 결혼(혹은 가족)은 일깨워준다. 결혼(혹은 가족)이 건네는 가장 큰 교훈 중 하나는 고독 앞에 진실해진다는 것. 그건 달리 말해 자신(자신의 욕망)에게 진실해진다는 것일 테다.





단편 소설집 <그저 좋은 사람>에서 줌파 라히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숨겨진 흠집을 보여준다. 단란해 보이는 가정집 안, 오래된 방 한 구석 누렇게 때가 탄 벽지 같은 걸. 거기만 잘라낼 수 없고 그 부분만 새로 덮어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그런 식으로는 오히려 보기 흉하게 드러날 뿐인 그런 자리를. 알면서도 눈 감았던 가족 내 구성원들의 상처와 외로움, 실패와 상실, 원망과 두려움이 거기에 있다. 그건 내가 미처 몰랐던 낯설고 새로운 이면이 아니다. 오히려 빤히 보아왔던, 내 삶에서 이미 지나왔거나 지나고 있는 과정 속의 이야기들이다. 그런데도 새삼 아팠다.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 경험하는 미묘한 어긋남과 껄끄러움. 닳고 닳을 만큼 경험한 익숙한 것인데도,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다른 언어로 목격되는 틈새는 이상하게 날카로워 저릿했다.



애정 없는 아빠와 삶에 찌든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 아이를 낳고 무직의 평범한 엄마가 되어버린 딸을 바라보는 아빠의 시선, 일로 바쁜 아내 대신 아이들을 챙기는 남편이 아내를 바라보는 시선, 엄마를 잃고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재혼하는 아빠를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 조금만 자리를 옮겨 바라보면 당연한 것도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된다는 자명한 진실. 의무와 책임, 애정과 불만, 오해와 착각, 기대와 실망, 그 모든 게 뒤엉킨 실타래 같은 감정이 가족을 지탱한다는 서글픈 현실. 내 삶에서도 경험했던 일들이 또 다른 생경함으로 다가왔다.



나는 엄마의 삶을 딱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엄마의 삶이 얼마나 황폐한지 알게 되었다. 엄마는 일을 한 적이 없었고 낮에는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엄마의 유일한 일은 아빠와 나를 위해 청소하고 밥을 하는 것뿐이었다. 외식은 드물었다. 아빠는 싸구려 음식점에서조차, 집에서 먹는 것보다 얼마나 비싼지 항상 지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엄마가 교외에서 사는 게 얼마나 싫고 얼마나 외로운지 불평을 할 때마다 아빠는 위로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렇게 불행하면 캘커타로 돌아가지”라고 하면서. 떨어져 있어도 자긴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나도 아빠에게 엄마를 다루는 방법을 배웠고, 그래서 엄마를 두 배로 외롭게 했다. 내가 전화를 너무 오래 하거나 방에만 있다고 엄마가 소리를 지르면 맞받아 소리치는 걸 배웠다. 엄마가 한심하다고, 나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는 말도 했다. 내게 더 이상 엄마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엄마와 내게 모두 갑작스레 분명해졌다. 프라납 삼촌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96쪽, ‘지옥-천국’, <그저 좋은 사람> 중에서



"나는 엄마의 삶을 딱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엄마의 삶이 얼마나 황폐한지 알게 되었다." "엄마가 한심하다고, 나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는 말도 했다. 내게 더 이상 엄마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언젠가 나의 딸이 내게 이런 시선을 던질 것이다. 내가 나의 엄마를 이렇게 바라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그럴 수 있는 게 인생이라는 걸, 그런 관계가 가족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바뀔 수 없는 게 존재한다는 것도, 씁쓸하지만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완전한 이해와 변함없는 애정을 바라지 않는 게 가족으로 공존할 수 있는 비결인지도 모른다. 각자 서로에 대한 오해와 비밀스러운 욕망을 지닌 채, 어긋난 상태로 공존하는 사람들이 가족이기도 하니까. 책 뒤에 실린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끝내 불완전한 이방인으로 남는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가족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라는 걸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유지하는 일은 여기나 저기나, 과거나 지금이나 막막한 바다를 건너는 일같다. 어쩌면 인도 출신 미국인으로 자란 배경이 줌파 라히리에게 가족이라는 혈연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정서를 새겨 넣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섣불리 화해나 극복을, 이해와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일 테다. 줌파 라히리는 과장이나 환상, 지나친 연민이나 동정 없이, 삶의 생살을 도려내어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가족이 한 사람에게 지우는 무게와 정체성에 대한 그녀의 묘사는 탁월하다. 섬세하고 예리한 시선으로 독자의 눈앞에 펼쳐지듯 장면을 그려내는 그녀. 내 삶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게 그 시선은 누구나의 삶에 밀착되어 있다. 그 촘촘한 필치가 아픔을 더 또렷하고 생생하게 만든다.





여정은 끝이 났고 짐 속에 불안을 구겨 넣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독으로 피곤한 아침 사소한 가족의 일로 신경이 곤두섰다. 소설의 여파인지, 여행의 여파인지 알 수 없는 껄끄러움이 내 안에서 달그락거렸다. 한 번 벌어진 틈새는 완전히 봉합될 수 없다고.



열려버린 상처를 덮고 살아간다. 다른 가족들과 다르지 않은, 똑같이 그저 그런 삶을 살고 있을 뿐이라고, 줌파 라히리의 소설이 나를 다독인다.



그녀는 더 이상 자기를 신뢰하지 않을 남편과 이제 막 울기 시작한 아이와 그날 아침 쪼개져 열려버린 자기 가족을 생각했다. 다른 가족들과 다르지 않은, 똑같이 두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210쪽, ‘그저 좋은 사람’, <그저 좋은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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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뒤에 숨은 사랑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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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우발성과 임의성을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 있다. 줌파 라히리의 <이름 뒤에 숨은 사랑>(박상미 옮김, 마음산책)이다. 뜻하지 않은 일련의 사건이 연속되면서 한 사람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그런대로의 삶이 일구어짐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거기에는 인도 출신 미국 이민자 가정의 2대에 걸친 삶이 그려져 있다. 고국을 떠나 낯선 환경에서 상실과 단절을 이겨내며 힘겹게 삶을 꾸려가는 부모 세대 아시마와 아쇼크의 이야기에서부터 그들의 아들 고골리가 부모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자신이 경험하는 사회 문화적 관계 사이에서 갈등하며 한 사람으로 자리하기까지의 긴 시간이 담겨 있다. 그 삶은 인도라는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미국이라는 사회 문화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가는 특별한 가정의 이야기인데도 누구나의 삶과 묘하게 닮아 있어 삶의 보편적 의미를 떠올려 보게 한다.



“여러 면에서 그의 가족의 삶은 예상하지 못하고 뜻하지 않았던 하나의 사고가 다음 사고를 낳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시작은 아버지의 기차 사고였다. 이 사건은 처음엔 아버지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었지만, 나중에는 최대한 멀리 떠나고 싶은 욕망을 낳게 하였고, 세상 저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했던 것이다. 다음은 고골리의 증조할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 담긴 편지가 캘커타와 케임브리지 사이 어딘가에서 사라진 사고였다. 이로 인해 얼떨결에 고골리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되었고, 이 이름은 수년 동안 고골리라는 한 인간의 윤곽을 형성함과 동시에 괴롭혀왔었다. 그는 이런 임의성을, 이런 빗나감을 바로잡으려 해왔다. 그러나 자신을 완벽하게 새로 창조하는 것은, 그 엉뚱한 이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책의 첫장에 실린 위의 글처럼 여러 사건 사고와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중 고골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부유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는 부모가 준 이름을 부정하고 새 이름을 만들지만 이름으로 자신을 바꿀 수 없으며 그것이 한 인간을 온전히 대변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고골리의 아버지 아쇼크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러시아 문학을 읽으며 자랐다. 스물두 살 무렵 기차 여행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사고를 겪고 손에 들려 있던 책덕에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그때 그를 구해준 책이 <니콜라이 고골리의 단편 모음집>이다. 그는 이 사고를 계기로 인도를 떠나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부모의 주선으로 아쇼크는 아시마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의 이름이 적힌 외할머니의 편지가 분실되는 바람에 한동안 이름을 짓지 못하다 우연히 ‘고골리’라는 애칭을 붙여주게 된다. 고골리는 아쇼크가 좋아하는 러시아 작가이자, 기적처럼 그의 목숨을 구해준 책의 저자였다. 태어난 아이는 아쇼크에게 하나의 기적이자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했다. 아이에게 붙여지면서 ‘고골리’라는 이름 또한 상기하고 싶지 않은 기차 사고가 아닌 아이의 탄생으로 그에게 주어진 또 다른 삶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애칭으로 주어진 ‘고골리’라는 이름은 외할머니의 편지가 영영 도착하지 않고 아시마의 아버지가 급작스레 돌아가시는 등의 사건을 통해 아이의 공식적인 이름이 된다. 고골리는 성장하면서 러시아 작가의 그림자를 품고 있는 자신의 이름이 싫어졌다. 부모님이 고수하는 인도식 삶의 방식이나 전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듯, 그 이름이 자신에게 걸맞지 않다고 여겼다. 그가 열네 살 되던 생일날 아쇼크는 고골리에게 <니콜라이 고골리의 단편 모음집>을 선물하며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 속에서 나왔다’라는 말을 전하지만 그 속에 숨은 뜻을 고골리는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인도 출신 부모가 고수하는 관습처럼 그에게 주어진 ‘고골리’라는 이름이 불만이었던 그는 열여덟 살에 이름을 ‘니킬’로 바꾸고 대학 진학과 동시에 부모를 떠나 자신의 삶을 일구어가기 시작한다. 자신을 고골리로 알았던 사람들에게서 분리되어 ‘니킬’이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을 만들어 간다. 부모가 원했던 공학이 아닌 건축을 전공하고 맥신이라는 미국 여성을 만나 연애를 하면서 부모로부터 그에게 전해졌던 사회문화적 배경을 지우며 새로운 경험을 쌓아간다. 하지만 아버지 아쇼크의 급작스런 죽음을 계기로 고골리라고 불리었던 부모의 집, 소원했던 가족 문화의 일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고골리는 인도 출신 부모 아래 자란 모슈미와 결혼하지만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신 없이 이끌리듯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껄끄러움이 생기면서 이혼을 맞는다. 아버지의 죽음과 이혼이라는 우연하고 결정적인 사건을 겪으며 고골리는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펼쳐보지 않았던 고골리의 책, 아버지가 선물해주었던 <니콜라이 고골리의 단편 모음집>을 뒤늦게 다시 들여다보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고골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고골리’라는 이름 속에서 방황하는 모습은 니콜라이 고골리의 ‘외투’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외적 요인-태생과 문화와 관습에서부터 개인의 취향이 반영된 의식주까지-이 한 개인을 설명하는 전부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부모로부터 주어진 이름과 부모 세대에게서 받은 영향이 뒤섞여 개인의 일부를 이룰 테지만 성장하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이 덧대어지면서 개인의 정체성은 만들어질 것이다.



그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영향이 큰지 알 수 없지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한 사람은 만들어진다. 고골리가 니킬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그가 완전히 고골리가 아니라고 할 수 없고 니킬이면서 고골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개인의 정체성에는 의지로 떼어낼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결말에 이르러 소설은 부여된 것과 선택한 것이 뒤섞여 한 사람이 형성됨을 보여준다. 니킬로 이름을 바꾸고, 부모가 고수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탐색했던 그는 새로운 환경과 다양한 관계와 연결되면서 부모 세대와는 다른 형태로 삶을 변형시켰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지우고자 했던 '고골리'라는 이름 뒤에 숨은 특성은 결코 놓아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것임을 발견한다.



급작스레 아버지를 잃고 임종을 지키지 못한 후에야 고골리는 먼 고향 땅에서 부고가 전해 올 때마다 죽음을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에 커다란 슬픔을 드러냈던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아버지의 죽음과 이혼을 통과하면서 벗어나고자 했던 가족, 부모의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다. 그곳은 '고골리'로 불리는 태생적인 그를 알기에 부연설명 없이 그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 속에 놓인 자리이다.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과 슬픔의 웅덩이를 가족과 함께 하는 매일 저녁의 채식 식사로 매꾸며 그는 가족 문화와 관습이 알게 모르게 자신의 일부를 이루었음을 깨닫는다. '고골리'라는 이름을 통해 애정을 주고 받은 사람들, 가족안에서만 공유할 수 있는 기억과 슬픔이 있다는 것을. '고골리'라는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을 그렇게 발견한다.



고골리에서 니킬로 이름을 바꾸고도 하나의 이름으로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남자를 보여주며 이 소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한 사람을 이루는 정체성은 고정된 이름 하나로 지칭할 수 없음을, 시기와 조건, 환경과 관계에 따라 유동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부유하는 게 삶이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삶의 혼돈과 어려움은 아시마나 아쇼크, 고골리나 모슈미의 특별한 인생에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나 정체성을 만들고 삶을 꾸려가는 이라면 모두가 엇비슷하게 경험하는 흐름일 것이다.




***




“여러 면에서 그의 가족의 삶은 예상하지 못하고 뜻하지 않았던 하나의 사로가 다음 사고를 낳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시작은 아버지의 기차 사고였다. 이 사건은 처음엔 아버지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었지만, 나중에는 최대한 멀리 떠나고 싶은 욕망을 낳게 하였고, 세상 저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했던 것이다. 다음은 고골리의 증조할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 담긴 편지가 캘커타와 케임브리지 사이 어딘가에서 사라진 사고였다. 이로 인해 얼떨결에 고골리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되었고, 이 이름은 수년 동안 고골리라는 한 인간의 윤곽을 형성함과 동시에 괴롭혀왔었다. 그는 이런 임의성을, 이런 빗나감을 바로잡으려 해왔다. 그러나 자신을 완벽하게 새로 창조하는 것은, 그 엉뚱한 이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결혼 또한 실수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가족의 곁을 떠나신 것은 사고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사고였다. 아버지는 마치 오래전에 그러니까 사고가 나던 그날 밤 죽음의 연습이라도 하신 것처럼, 그날 이후 남은 일은 그저 어느 날 조용히 가는 것이라는 듯이 돌아가셨다. 그러나 고골리를 형성한 것은, 결정적으로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이것들은 사전에 준비가 불가능한 일들이지만, 되돌아보려면, 돌아보며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이해하려면 평생이 걸리는 일들인 것이다. 일어나서는 안 될, 제자리를 벗어난 곳에서 잘못 일어난 일들이지만, 결국 끝까지 삶을 지배하는 동시에 삶을 견뎌낸 것들이었다.”

369~370쪽



모든 이의 삶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조건도 이런 일련의 임의적이고 빗나간 사건들일 것이다. 사전에 준비가 불가능하면서 돌아보며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이해하려면 평생이 걸리는 일들. 어쩌면 죽음이 우리를 가로막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일들. 그중에는 일어나서는 안 될, 제자리를 벗어난 곳에서 잘못 일어난 일들도 있을 테지만, 그것을 헤아리고 보듬으려는 노력이 결국 끝까지 삶을 지배하는 동시에 삶을 견뎌내게 하는 무엇이기도 하다는 걸, 소설을 읽으며 어렴풋이 이해한다.



고골리는 아주 늦게서야, 아버지가 선물한 <니콜라이 고골리의 단편 모음집>을 다시 펼쳐 들게 된다. 그가 아주 늦게서야 아버지의 본모습과 부모 세대가 경험한 상실감과 슬픔, 죄책감과 삶의 불안정성을 조금이나마 더듬어볼 수 있었던 것처럼.



삶에서 진실이나 진심이라는 것은 이렇게 늘, 뒤늦게 우리에게 당도한다. 그러므로 제때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우리의 나약함과 불완전함을 생각하게 된다. 나라는 개인을 이루는 바탕에 존재하는 무수한 연결과 우연성을 떠올리면 삶 앞에, 그리고 죽음 앞에 겸손하게 두 손을 모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저마다의 ‘외투’를 걸치고 살아간다. 그것은 얼핏 삶의 겉면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쉽게 벗어버릴 수 없으며 그러는 사이 내면 깊숙한 곳에 연결되기도 한다. 어쩌면 그 외투로 우리의 나약함과 불완전함을 간신히 감싸며 모진 삶의 사건들을 헤쳐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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