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여행에서 마주쳤던 힌두교인의 참배 모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뇌리에 남아있다. 자신의 온 존재를 바칠 듯 무아지경으로 기도에 빠져 있던 여인의 모습. 그녀의 몸은 현실에 존재했지만 의식은 이곳에 있지 않아 보였다. 그 믿음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어 아득해졌던 느낌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녀에게 종교는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일 거라고 감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 종교에서 시작되어 종교와 합치되는 삶. 그로 인해 카스트라는 신분제가 유지되는 곳, 인도. 그곳에서는 절대적인 신앙과 믿음이 삶의 근간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는 것 같았다. 인도인에게 신이 절대적이듯, 신에 의해 부과된 가족과 계급은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무엇이지 않을까.
인도 출신 미국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줌파 라히리에게도 그런 인도인의 관념이 영향을 미쳤을까. 가족이라는 인연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이끌고 가는지, 거기서 벗어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지, 정체성이란 가족이라는 근간을 벗어나 형성 불가능한 것인지, 그녀의 소설은 거기서 맴돌며 질문한다.
어쩌면 그녀 또한 인도적 가치관과 문화, 가족이나 정체성이라는 얽매임에서 벗어나고자 소설 쓰기에 매달렸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뿌리 중 선천적으로 부여된 것을 잘라내려는 시도가 그녀의 글쓰기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거미는 자신의 실로써 공간의 자유에 이른다”(466쪽)는 인도 철학 경전 속 말처럼, 자신이 써 내려간 문장을 실 삼아 그녀는 자신만의 집을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에서도 자유롭기 위해 거미처럼 자기만의 집을 짓는 행위. 그것이 그녀의 소설 쓰기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줌파 라히리의 장편 소설 <저지대>는 3대에 걸친 삶과 소용돌이를 다루는 대하소설 성격의 작품이다. 인도의 정치 사회적 격변의 시대에 캘커타에서 태어나고 자란 수바시. 그는 한 살 터울인 남동생 우다얀과 한 몸처럼 성장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정치적 입장에 차이가 생기면서 둘의 삶은 갈라진다. 수바시는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 미국 로드 아일랜드로 유학을 떠나고 우다얀은 캘커타에 남아 정치 운동에 가담한다. 그러던 중 가우리를 만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지만 결혼 2년 차 우발적 사고로 경찰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우다얀의 사망 소식에 인도로 돌아온 수바시, 우다얀의 아이를 품고 있는 가우리에게 책임을 느낀다. 부모님의 냉대와 인도의 정치 상황으로부터 그녀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그는 동생의 아내와 결혼을 결심하고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온다.
가우리는 자신과 아이를 위해 수바시의 제안을 수락하지만 그와 결혼을 하고도 그를 남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벨라를 낳은 후 철학 공부를 병행하면서 아이의 엄마로 자신의 존재를 견디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수바시가 벨라와 함께 인도를 방문하는 사이 결국 그녀는 집을 떠난다.
가우리가 떠난 이후 벨라의 곁에서 아빠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수바시, 엄마의 부재(떠남) 로 인한 상처와 아픔 속에 방황하며 성장하는 벨라, 가족을 떠나 고립된 생활 속에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가우리 등 주요 인물의 삶이 정치 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변주되는 소설은 흡입력을 가지고 독자를 빨아들인다. 각 인물이 지닌 남다른 성장 배경과 삶의 선택은 때로 독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하지만 줌파 라히리는 한 인간이 나이 들며 변해가는 과정의 보편성과 삶의 우발적 사건이 드리우는 개별성을 절묘하게 엮어낸다. 섬세하고 치밀한 라히리식 서사는 그 자체로 타당성을 부여하며 나아간다. 독자는 이야기에 깊숙이 연결될수록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곤란함을 느낀다. 그리고 삶을 향해 던져지는 깊고 난해한 질문 앞에 걸음을 멈추게 된다.
부모로부터 부과되는 역할, 형제 자매간 느끼는 의무와 경쟁심,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과정과 부모됨, 낯선 환경에서 삶의 터전을 개척하거나 사랑하는 이를 잃는 아픔 속에서도 지속해야하는 삶. 성장 단계에 따라 짊어지게 되는 역할과 의무, 삶의 단계에 따라 마주하는 그 무게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걸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이 소설은 특히 가족 간의 역학 내에서 만들어지는 한 사람의 정체성과 그걸 받아들이고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에 집중한다. 줌파 라히리의 이전 소설에서도 다루어졌던 정체성과 가족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이어진다.
수바시의 충직하지만 다소 수동적인 성격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며, 우다얀과의 결혼으로 가우리의 삶이 어떤 변화의 물살을 타게 되었는지, 또한 가우리가 아이를 떠나는 선택을 하기까지 그녀 성장 배경의 흔적, 벨라가 아빠가 없는 아이를 낳아 기르기로 한 결심(엄마와 닮은꼴의 삶) 등, 가족 관계 내에서 형성되고 대를 이어 전해지는 어떤 운명의 연결 고리, 혹은 연쇄 작용 같은 것이 그렇다. 태어남과 동시에 연결되는 가족이라는 틀은 한 사람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주홍 글씨를 새기는 것일까. 그것은 의지로 벗어날 수 없는 어떤 궤도 속에 존재하는 것인가. 줌파 라히리가 지어 올린 완벽한 세계 속에 빠져들고 나면 이런 의심에서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 우리의 삶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강력한 자장 안에서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