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잠시 여행을 다녀왔다. 짐을 꾸리면서 여행이 마냥 즐겁지만 않다는 걸 느꼈다. 집을 떠나기 위한 준비와 집을 벗어남으로 맞닥뜨릴 불편이 성가셨다. 떠나기 전부터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훌쩍 떠난다는 건 지금의 내겐 불가능해 보였다.


여행은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 생각보다 춥고 바람이 거셌던 날에는 삶의 보금자리를 두고 떠나왔기에 더 춥고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봄이 왔다는 듯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었던 날엔 언제 그랬냐는 듯 기지개를 켜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디서든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여행의 반은 화창한 날씨 덕분에 즐거웠고 나머지 반은 매서운 바람 때문에 불안하고 우울했다.





유난히 거칠게 바람이 휘몰아치던 날, 숙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귤밭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불길한 소리를 내던 날, 가방 속에 넣어갔던 책을 꺼내 읽었다. 날씨와 환경 탓에, 전날 있었던 어떤 사건 탓에 마음엔 불안이 자라고 있던 그 찰나에. 어쩌면 줌파 라히리의 <그저 좋은 사람>(박상미 옮김, 마음산책)을 읽기엔 적기였는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아버지가 루마의 일 얘기를 다시 꺼냈다. “일은 중요하다, 루마야. 경제적인 안정도 주지만 정신적인 안정도 있다. 내 평생, 열여섯 살 때부터 난 쭉 일을 해왔다.”

“이제 은퇴하셨잖아요.”

“하지만 아무 일도 안 하고는 못 지낸다. 그래서 내가 여행을 그리 많이 다니는 거다. 사치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크게 쓸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중요하다, 루마야.” 그는 말을 이었다. “인생은 놀랄 일의 연속이야. 오늘은 네가 아담한테, 아담 수입에 의존할 수 있다고 하지만 내일은 또 모르는 거야.”

50쪽, ‘길들지 않은 땅’, <그저 좋은 사람> 중에서




집으로 돌아갈 날을 앞두고 있었다. 아무 걱정 없이, 어떤 계획 없이 풀어져 지내던 며칠이 끝나가고 있었다. 돌아가면 다시 매일의 일상이 펼쳐질 테다. 끝도, 결말도 알 수 없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다. 나가야 할 직장은 없지만 그 대신 챙겨야 할 가족과 집이 있는 삶. 끝없는 도돌이표 같은 삶. 어떤 날엔 무탈한 일상만으로 고맙기도 하지만 그날따라 삶이 막막하게 다가왔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엄마와 아내로, 나의 반쪽을 내어주고 반쪽만으로 사는 인생 같았다. 평온하다가도 주기적으로 불안이 찾아오는 이유는 ‘일이 주는 정신적 안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매일을 지탱할 선명한 일이 내게도 있었으면. 소설 속 루마의 아버지가 하는 말이 다 나를 향한 말처럼 들렸다.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그와 비슷한 말을 하셨을 거라고.



조금씩 변한 것도 같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끼니야 적당히 때운다 쳐도 아이를 챙기는 일은 대부분 나의 몫이다. 여행을 와도 거기엔 변함없었다. 남편은 아이와 놀아주기만 할 뿐, 아이를 돌보는 것에서는 발을 빼고 있다. (놀아주는 것만도 어디냐고, 자주 생각한다.) 아침저녁으로 씻고 입는 일로 실랑이를 벌이고, 어디를 가고 무얼 할지로 아이를 설득하고,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선을 그어주는 일까지, 주양육자의 역할이 내게 고정되어 있다. 아마도 그런 때문에 자주 내 삶이 어딘가 묶여 옴싹달싹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 같다.



나의 시간과 관심이 아이를 향할수록 부부의 삶은 줄어들었다. 남편의 무심함에 짜증을 내다 적당히 체념하게 되었고 그와 나의 차이라고 받아들였다. 우리는 함께 하는 시간을 기대하지 않은지 오래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의 우리는 사라졌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의 우리를 ‘우리’라고 묶어 부를 만한 무언가가 있기는 한가 싶을 만큼.



아밋은 잠시 생각했다. “사실 둘째 이후에 우리 결혼 생활은…….” 적당한 단어를 찾느라 잠시 머뭇거렸다. “사라졌어요.” 좀 어색한 단어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를 설명하기엔 그 단어가 유일했다. 손가락 사이로 뭔가 빠져나가듯, 뭔가 없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

그는 메건이 앉아 있는 쪽을 보았다. 오늘 저녁 내내 그랬듯 빛나는 활기에 가득 차 아직도 제러드와 얘기하고 있었다. 호텔에선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아내는 저렇게 멀리 있다. 그는 부엌을 치우고 마야와 모니카를 목욕시키고 재운 후 혼자서 텔레비전을 볼 때 느끼던 분노를 느꼈다. 아이들을 돌보다가 또 하루가 지났고, 메건은 그 속에 있지 않았다. 한집에 살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잤고, 그와 아이들밖엔 모르는 아내였지만, 때로 아밋은 랭포드에 처음 입학했을 때처럼 외로웠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메건이 미워질 때가 있었다. 술이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을 억눌렀을 것이다.

140쪽, ‘머물지 않은 방’, <그저 좋은 사람> 중에서



한동안 남편은 직장과 학업을 병행했고 나와 아이는 남편 없이 저녁 시간을 보냈다. 아이와 둘이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고 가끔 힘에 부치면 부재하는 남편을 미워했다. 가족을 위해서 애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종종 그가 자신만을 위해 모든 시간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사실에 분노했다. 아이를 돌보다가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지났고, 남편은 그 속에 있지 않았다. 한집에 살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잤고, 나와 아이밖엔 모르는 남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알 수 없는 부당함 속에 외로웠다.



모니카가 태어나고부터, 함께 시간을 보낼 궁리보다는 어떻게 하면 각자 혼자 시간을 보낼까 궁리하지 않았던가? 쉬는 날 아내가 아이들을 볼 동안 그는 공원에 가서 조깅을 했고, 또 거꾸로 아내가 서점에 가거나 네일 살롱에 갈 수 있도록 그가 아이들을 보았다.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혼자 있는 그 순간을 그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오죽하면 혼자 지하철을 타고 있을 때가 하루 중 최고의 시간이라 생각했었는지 말이다. 인생의 짝을 찾는다고 그렇게 헤매고서, 그 사람과 아이까지 낳고서, 아밋이 메건을 그리워한 것처럼 매일 밤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그렇게 절실하게 혼자 있길 원한다는 건 끔찍하지 않은가. 아무리 짧은 시간이고, 그조차 점점 줄어든다 해도 사람을 제정신으로 지켜주는 건 결국 혼자 있는 시간이라는 사실이.

140~141쪽, ‘머물지 않은 방’, <그저 좋은 사람> 중에서



그런 시간을 지나면서 아이를 둔 가족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던 것 같다.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 하고 누군가는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고. 지금 당장 어떻게 바꿀 수 없다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각자의 만족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함께 시간을 보내려 애쓰기보단 어떻게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지 모색했다. 주말 아침 남편이 운동을 하고 오면 오후에는 내가 외출하는 방식으로. 가족이란 모든 걸 함께 하며 시간을 같이 보내야만 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걸 차츰 깨달아갔다.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절대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사랑해서, 함께 있고 싶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모순적이게도 절절하게 혼자를 원하게 된다는 걸. 한동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현실을 인정하면서 차츰 편안해졌다.



“결혼 생활이라는 건 어쩔 수 없이 나빠진다”는 루마 아버지의 말이 싫지 않았다. 그 말에는 나빠지기도 하고 그러다 좋아지기도 하고, 그렇게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변해가는 게 감정이고 관계일 테니까. “이건 그저 노인네의, 이제는 아이처럼 되어버린 노인네의 생각일 뿐”(69쪽)이라고 그는 덧붙이지만 결혼과 가족이라는 현실을 건너기 위해 적당히 내려놓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변함없는 기대는 관계를 더 힘들게 하기도 하니까.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 없다면 누구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인간 고독의 본성을, 결혼(혹은 가족)은 일깨워준다. 결혼(혹은 가족)이 건네는 가장 큰 교훈 중 하나는 고독 앞에 진실해진다는 것. 그건 달리 말해 자신(자신의 욕망)에게 진실해진다는 것일 테다.





단편 소설집 <그저 좋은 사람>에서 줌파 라히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숨겨진 흠집을 보여준다. 단란해 보이는 가정집 안, 오래된 방 한 구석 누렇게 때가 탄 벽지 같은 걸. 거기만 잘라낼 수 없고 그 부분만 새로 덮어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그런 식으로는 오히려 보기 흉하게 드러날 뿐인 그런 자리를. 알면서도 눈 감았던 가족 내 구성원들의 상처와 외로움, 실패와 상실, 원망과 두려움이 거기에 있다. 그건 내가 미처 몰랐던 낯설고 새로운 이면이 아니다. 오히려 빤히 보아왔던, 내 삶에서 이미 지나왔거나 지나고 있는 과정 속의 이야기들이다. 그런데도 새삼 아팠다.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 경험하는 미묘한 어긋남과 껄끄러움. 닳고 닳을 만큼 경험한 익숙한 것인데도,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다른 언어로 목격되는 틈새는 이상하게 날카로워 저릿했다.



애정 없는 아빠와 삶에 찌든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 아이를 낳고 무직의 평범한 엄마가 되어버린 딸을 바라보는 아빠의 시선, 일로 바쁜 아내 대신 아이들을 챙기는 남편이 아내를 바라보는 시선, 엄마를 잃고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재혼하는 아빠를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 조금만 자리를 옮겨 바라보면 당연한 것도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된다는 자명한 진실. 의무와 책임, 애정과 불만, 오해와 착각, 기대와 실망, 그 모든 게 뒤엉킨 실타래 같은 감정이 가족을 지탱한다는 서글픈 현실. 내 삶에서도 경험했던 일들이 또 다른 생경함으로 다가왔다.



나는 엄마의 삶을 딱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엄마의 삶이 얼마나 황폐한지 알게 되었다. 엄마는 일을 한 적이 없었고 낮에는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엄마의 유일한 일은 아빠와 나를 위해 청소하고 밥을 하는 것뿐이었다. 외식은 드물었다. 아빠는 싸구려 음식점에서조차, 집에서 먹는 것보다 얼마나 비싼지 항상 지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엄마가 교외에서 사는 게 얼마나 싫고 얼마나 외로운지 불평을 할 때마다 아빠는 위로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렇게 불행하면 캘커타로 돌아가지”라고 하면서. 떨어져 있어도 자긴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나도 아빠에게 엄마를 다루는 방법을 배웠고, 그래서 엄마를 두 배로 외롭게 했다. 내가 전화를 너무 오래 하거나 방에만 있다고 엄마가 소리를 지르면 맞받아 소리치는 걸 배웠다. 엄마가 한심하다고, 나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는 말도 했다. 내게 더 이상 엄마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엄마와 내게 모두 갑작스레 분명해졌다. 프라납 삼촌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96쪽, ‘지옥-천국’, <그저 좋은 사람> 중에서



"나는 엄마의 삶을 딱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엄마의 삶이 얼마나 황폐한지 알게 되었다." "엄마가 한심하다고, 나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는 말도 했다. 내게 더 이상 엄마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언젠가 나의 딸이 내게 이런 시선을 던질 것이다. 내가 나의 엄마를 이렇게 바라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그럴 수 있는 게 인생이라는 걸, 그런 관계가 가족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바뀔 수 없는 게 존재한다는 것도, 씁쓸하지만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완전한 이해와 변함없는 애정을 바라지 않는 게 가족으로 공존할 수 있는 비결인지도 모른다. 각자 서로에 대한 오해와 비밀스러운 욕망을 지닌 채, 어긋난 상태로 공존하는 사람들이 가족이기도 하니까. 책 뒤에 실린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끝내 불완전한 이방인으로 남는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가족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라는 걸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유지하는 일은 여기나 저기나, 과거나 지금이나 막막한 바다를 건너는 일같다. 어쩌면 인도 출신 미국인으로 자란 배경이 줌파 라히리에게 가족이라는 혈연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정서를 새겨 넣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섣불리 화해나 극복을, 이해와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일 테다. 줌파 라히리는 과장이나 환상, 지나친 연민이나 동정 없이, 삶의 생살을 도려내어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가족이 한 사람에게 지우는 무게와 정체성에 대한 그녀의 묘사는 탁월하다. 섬세하고 예리한 시선으로 독자의 눈앞에 펼쳐지듯 장면을 그려내는 그녀. 내 삶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게 그 시선은 누구나의 삶에 밀착되어 있다. 그 촘촘한 필치가 아픔을 더 또렷하고 생생하게 만든다.





여정은 끝이 났고 짐 속에 불안을 구겨 넣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독으로 피곤한 아침 사소한 가족의 일로 신경이 곤두섰다. 소설의 여파인지, 여행의 여파인지 알 수 없는 껄끄러움이 내 안에서 달그락거렸다. 한 번 벌어진 틈새는 완전히 봉합될 수 없다고.



열려버린 상처를 덮고 살아간다. 다른 가족들과 다르지 않은, 똑같이 그저 그런 삶을 살고 있을 뿐이라고, 줌파 라히리의 소설이 나를 다독인다.



그녀는 더 이상 자기를 신뢰하지 않을 남편과 이제 막 울기 시작한 아이와 그날 아침 쪼개져 열려버린 자기 가족을 생각했다. 다른 가족들과 다르지 않은, 똑같이 두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210쪽, ‘그저 좋은 사람’, <그저 좋은 사람>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