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내면의 빛을 보는 법에 대하여
에디트 에바 에거 지음, 안진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4월
평점 :
절판



과거에 있었던 일은 바뀌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을 패배자로 낙인찍고 자기만의 감옥에 가둘 것인지, 현재를 빛낼 동력으로 바꾸어 낼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에디트 에바 에거는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안진희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1)라는 책에서 이 ‘선택’을 강조한다. 그녀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마흔이 넘어 심리치료사가 되었고 93세인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임상 심리치료사다.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는 세 개의 줄기로 이루어져 있다. 에디트의 유년 시절과 열여섯에 아우슈비츠에서 경험한 처절한 생존의 이야기, 그리고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후 심리학을 공부하며 자신을 치유로 이끌었던 삶, 마지막으로 치료사가 되어 사람들을 도우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엮여 있다. 거기엔 치유를 향해 끝없이 선택했던 저자의 경험이 담겨 있다. 충격과 아픔의 기록은 공감과 치유의 에세이로, 그리고 각자의 내면으로 이끄는 안내서로 그 빛을 바꾸어 간다. 에디트 에바 에거의 책은 마음 감옥에서 벗어날 열쇠를 찾는 길로 우리를 이끈다.



발레리나를 꿈꾸었던 열 여섯 살 유대인 소녀 에디트는 전쟁으로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 엄마를 죽인 적군 요제프 맹겔레 박사 앞에서 춤을 추어야 했고 지독한 굶주림속에서 매일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겨준 말이 희망의 빛처럼 남아 있었다. “이것만 기억해. 네가 마음에 새긴 것은 아무도 네게서 뺏을 수 없단다.”(p.72) 마그다 언니와 서로를 지켜주는 길잡이별이 되어주면서, 고통과 두려움을 유머로 바꾸어 내면서 그녀는 살아남는다. 삶에 대한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으며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녀를 생존하게 했다.



소녀는 시체 더미가 쌓인 수용소에서 숨만 붙어 있는 상태로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다. 생존자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주하는 것은 상실뿐이다. 유년기와 꿈꿀 수 있는 미래를 잃었고, 부모님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그리고 ‘왜 내가 살아남았을까?’라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과거를 부정하고 고통을 숨긴 채 미국으로 이민해 새 삶을 일구지만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다. 상실감은 지속되었고 일상 곳곳에서 그녀를 위협했다. 뒤늦게 대학에 진학해 심리학을 공부하던 그녀는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용기 내어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의 경험이 얼마나 불만스럽든 지루하든 제한적이든 고통스럽든 억압적이든 간에, 우리는 항상 어떻게 대응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

p.280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안진희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1)



인생의 ‘매 순간은 선택’이며, 자신에게도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인생의 행로를 바꾼다. 심리 치료를 통해 감정을 들여다보고 수용하면서 변화를 위한 힘이 자신에게 있음을, 과거의 기억에 어떻게 반응할지 선택할 수 있음을 배운다. 그리고 왜 살아남았는지 묻기를 멈추고, 희생자 되기를 그만둔다. 오십의 나이에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상처 받은 이들을 도우며 그녀는 자기만의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나는 결코 과거를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구원할 수 있는 삶은 있다.

바로 나의 삶이다. 내가 바로 지금 이 삶, 이 귀중한 순간이다.”

p.410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안진희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1)



책에는 심리치료사로서 그녀가 만난 내담자들이 각자의 문제를 극복해갔던 과정 또한 담겨 있다. 부모와 자식, 결혼과 연인 등 관계에서 비롯되는 결핍과 불균형의 문제에서부터 어린 시절의 상처나 트라우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황, 성취나 인정에 매달리는 왜곡된 자아상 등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익숙하게 경험하는 심리 문제가 다루어진다.



내게도 실패에 사로잡혀 우울증을 앓았던 경험이 있다. 하나의 실패는 삶 전체를 실패가 쌓인 거대한 무덤처럼 보이게 했다. 그때 치유 글쓰기 수업을 통해 숨어 있던 감정을 들여다보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회피했던 감정을 수용하는 경험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원망하던 마음은 사그러 들었고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러한 상태를 에디트는 ‘자유의 춤’이라고 부른다. 그 첫 단계는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지는 것”(p417)으로, 감정을 억압하거나 다른 이의 탓으로 돌리길 그만두고, 자신의 감정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인간관계를 결정짓는 역학 관계 속에서 자신이 하는 역할을 인정하고 그 역할에 책임 지는 법을 배울 수 있다.”(p420)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삶을 수용하고 진정한 자신이 되는 자유에 다가갈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녀가 말하는 치유의 과정과 마음 감옥에서 탈출하는 선택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지난한 시간과 노력,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홀로코스터의 생존자로서 삶 전체를 치유를 위한 노력과 선택에 몰두했던 이의 솔직한 고백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건넨다. 임상심리치료사인 저자가 내담자와의 상담을 통해 치유로 나아가는 과정은 우리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치유의 길로 향하는 마중물이 되어 준다.



에디트 에바 에거는 자신을 찾은 내담자들의 흔한 진단명을 ‘굶주림’이라고 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정, 관심, 애정’에 늘 굶주려 있다. 이 굶주림이 마음에 감옥을 짓는다. 수용소라 이름 붙지 않았을 뿐, 수용소에 갇힌 것과 다름없는 삶은 여전히 존재한다. 에디트는 생존의 문제가 사라지면 ‘하지만’의 문제가 따라온다고 했다. “우리에겐 먹을 빵이 있다. ‘그래, 하지만 무일푼이지.’ (...) 너는 살아남았어. ‘그래, 하지만 우리 엄마는 죽었지.’”(p.151) ‘하지만’의 문제는 끝없이 우리 삶에 등장한다. 저자는 강조한다. ‘하지만’의 감옥에 갇힐지, 거기서 벗어날지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고.



상처없는 이도 없고, 자신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삶이란 상처 없이 건널 수 없는 시간의 강이니까. 그러니 상처 받기를 거부하기보단 그걸 보살피는데로 관심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다 나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의 상처가 언제든 다시 욱신거릴 수 있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언젠가 다시 내 안의 감옥에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면, 이 책을 펼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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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의 방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4
버지니아 울프 지음, 김정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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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의 방>은 버지니아 울프가 전통적 소설 쓰기에서 벗어나 과감하고 급진적인 글쓰기 실험을 감행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소설은 <출항>, <밤과 낮>에 이어 울프가 세번째로 내놓은 작품이다. 제이콥이란 인물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지만, 그를 모호하게 남겨둠으로써 다양한 해석의 반향을 만드는 작품이다. 제이콥의 성장 과정을 따라 무수한 인물을 주변에 배치하여 삶과 순간, 존재와 관계, 기억과 욕망을 들춰보려는 울프의 시도를 어렵사리 더듬어볼 뿐이다. 주인공으로 제시된 인물 제이콥은 소설 속에서 단 한번도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주인공을 따라 소설을 읽고 이해하는데 익숙한 일반 독자에게 이 소설은 난해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제이콥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하는 소설은 케임브리지에서 보내는 대학 시절, 그리고 런던에서의 삶과 그리스로의 여행 등 이십대로 접어든 그의 행로를 따라 전개된다. 그와 직접적으로 마주치거나 그의 주변인과 연결된 인물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면서 제이콥의 존재는 중심에 내세워 졌다가도 금세 배경으로 물러난다. 제이콥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하기 보다 주로 다른 인물에 의해 말해진다. 다양한 인물의 시선으로 ‘제이콥’이 그려지고 만들어진다. “단호했다, 그러면서도 젊음이 넘치고, 무심하고,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고”, “무례하고 경험이 없었지만,” “감수성있고”, 무엇보다 “내실이 있는 젊은이”라는 식으로. ‘아주 서툴고’, ‘그러나 아주 기품 있는 모습’이라거나 “당신은 우리가 본 사람 중 가장 멋진 사람이에요,”라고 노골적으로 찬탄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과 같은 말은 표상적인 수준에서만 맴돈다.




제이콥이라는 인물은 애초에 명확한 캐릭터로 제시된다기보단 소설 전반에 걸쳐 캐릭터를 구축해가는 과정 속에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는 소설이 제이콥의 성장 과정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20대 초반의 젊은 날을 떠올려보면 세상을 다 가진 듯 자기도취에 빠지고 무한한 가능성에 벅차오르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르는 상태이기도 했다. 20대 초반을 지나는 제이콥의 모습이 그렇게 다가왔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러쿵 저러쿵 그의 일면들이 제시되지만 모두 단편적으로 느껴진다. 그가 지닌 젊음은 빛을 발하고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끌어내지만 ‘기품있는 젊은 영국 신사’ 이상의 이미지는 없다. 진정한 자아는 채워 져야하는 무엇으로 남아있다는 듯. 젊음만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시간을 따라 찾고 쌓아가야 할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듯, 소설은 마지막까지 그의 완전한 캐릭터를 보여주지 않는다.




소설을 통해 캐릭터를 쌓아가는 과정에 대해 작가가 어떤 실험이나 탐색을 하고 있는 걸까? 존재의 의미란 지속되는 순간 속에서 쌓아 올려야 하는 것이며 제이콥은 그 시간을 충분히 살지 못했다는 의미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제이콥이라는 인물에 대해 도통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빠져드는 여성들이 등장하지만, 그녀들이 사랑한 제이콥의 실체 또한 겉모습에 치중한 것이다. 진짜 제이콥은 어디 있는가. 무수한 사람들이 등장해 이야기하지만, 어디에도 진짜 제이콥은 없다. 사람들을 통해 접하는 것은 그의 편린들이다. 그것 만으로 우리는 누군가의 진실한 내면에 다가갈 수 있을까? 소설의 마지막에 주인없이 남겨진 방처럼, 소설에 그려진 제이콥이라는 인물은 영혼 없이 이름으로만 텅 빈 채 존재한다.




“내 등장인물들 뒤에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동굴을 파고 있는가에 대해. 그것들은 정확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을 줄 수 있다. 인간성, 유머, 깊이. 내 아이디어는 이 동굴을 연결해서 그것들 하나하나가 현재의 순간에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p.109)

“아직도 분명치 않은 것은 댈러웨이 부인의 성격이다. 너무 경직돼 있고, 너무 번쩍거리고, 너무 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댈러웨이 부인을 지탱하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을 등장시킬 수 있다. (…) 내가 터널 작업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하기까지 1년간의 모색이 필요했다. “ (p.111)

<울프 일기>, 버지니아 울프, 박희진 옮김, 솔 출판사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에서 인물의 성격을 구축하기 위해 등장 인물 뒤에 동굴 또는 터널을 만드는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실제 <댈러웨이 부인>에서는 주인공 내부로 여러 갈래의 깊은 길을 파기도 하고, 주변 인물들의 내면과 기억 속으로 파고들어 주인공을 향하는 터널을 내기도 했다. 그 터널이 연결되면서 주인공의 캐릭터가 생생하게 부각되고 인물의 관계가 명확해 졌다. 버지니아 울프는 <제이콥의 방>에 대해 이후 소설 쓰기에 대한 실험의 장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댈러웨이 부인>에서 터널 작업을 본격적으로 실현하기에 앞서 그 작업의 가능성을 <제이콥의 방>에서 타진해 보았던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실험에서는 인물을 향한 무수한 터널만 존재할 뿐 그 길을 하나로 연결하여 별이든, 동그라미든, 또렷한 형태로 드러내는 단계까지는 도달하지 못한게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20대 초반에 사망한 오빠 토비를 모델로 했다 하더라도 제이콥이라는 인물은 마지막까지 유령처럼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하나의 인물로 생생하게 독자 앞에 살아 숨쉬는 것이 아니라, 소설 전반에 그림자처럼, 혹은 유령처럼 희미하게 드리워져 있다.




해설에서 옮긴이 김정은 제이콥이라는 인물을 거둬내고 그 주변에 그려진 여성들을 통해 소설을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제이콥’과 ‘제이콥의 방’을 통해 자신의 기억과 욕망을 바라보며 ‘존재의 순간’에 닿고자 했던 여성을 통해 울프의 목소리를 체험하는 데 소설 읽기의 비밀 열쇠가 있다고 말한다. 김정은 “제이콥의 방에 제이콥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며 또 그 방의 주인은 제이콥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울프가 이전의 소설 형식을 뒤집으며 “‘삶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며 기억은 꼭 유용한 행동을 이끌어내지 않을 수도 있으며 방향이 정해진 의미 있는 시간은 시간보다는 공간에 속한다’는 실험을 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서 주요 여성 인물을 분류하고 제이콥을 통해 바라보았던 그들 자신 내면의 욕망을 더듬어 본다. 김정의 시선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도 소설 읽기가 가능하며, 주인공을 중심으로 대표적 서사에 몰두한 읽기가 얼마나 편협할 수 있는지 일깨워준다. 하지만, 이러한 독서법은 왠만한 내공 없이 단번에 시도할 수 없는 방식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의 경우, 해설을 먼저 읽고 소설을 읽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삶이란 무도한 거야-삶이란 가증스러워,” 로즈 쇼가 소리 질렀었지. 삶이 낯설어지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수백 년에 걸쳐 삶이 어떠한지 그 본질이 분명히 드러난 것 같은데도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남겨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런던의 거리에는 지도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열정에는 지도가 없다. 만일 당신이 이 모퉁이를 돌아서면 무엇을 맞닥뜨릴까?” (p.135)

<제이콥의 방> 버지니아 울프, 김정 옮김, 솔 출판사




제이콥 주변을 둘러싼 주요 여성 인물의 기억과 욕망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소설을 이해하려 애쓰지 못했더라도 울프가 소설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메시지들은 충분히 음미할 수 있다. 울프는 <제이콥의 방>에서도 인물이 바라보는 풍경과 시선이 닿는 지점의 사유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며 ‘순간’과 ‘찰나’ 속에서 의미를 길어내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도 순간이 갖는 의미를 탐색하고, 찰나가 지닌 한계 속에서도 그 속에서만 빛나는 삶의 의미가 있음을 드러낸다. 삶과 타인, 세계의 질서와 원리 등 그 진실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무엇일지라도, ‘순간’과 ‘찰나’에서 저마다의 의미를 길어내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변하고, 결국 ‘죽음’에 도달하지만 존재하는 순간에만 영롱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고. 그걸 찾기 위해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수백만의 책장을 뒤적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여자나 남자나 다 똑같이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와 다른 성에 대해 근원적이고 공평무사한, 그리고 절대적으로 공정한 의견이란 결코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우리가 남자이건 아니면 여자이건. 우리가 냉정한 사람이건, 아니면 감상적인 사람이건. 우리가 젊은이건 늙어가고 있건. 어떤 경우에라도 삶이란 그림자의 행렬일 뿐인데, 그런데 왜 이다지도 우리는 그 그림자를 열렬히 껴안는지, 그리고 그들이 떨어져 나가 그림자가 되는 것을 그렇게 고통에 차서 바라보는지. 그리고 왜, 만일 이것이, 이것보다 더한 것이 진실이라면, 왜 우리는 아직도 창문 모퉁이에 서서 이 갑작스러운 영상, 즉 의자에 앉아 있는 그 젊은이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실재적이고 가장 견고하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라는 것에 이다지도 놀라는 것인가?-왜 진정으로? 왜냐하면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거면서도.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보는 방식이다. 또한 우리의 사랑의 조건이기도 하고.”(p.100-101)

<제이콥의 방> 버지니아 울프, 김정 옮김, 솔 출판사




버지니아 울프는 <제이콥의 방>에서도 타인과의 소통과 대상에 대한 진실한 이해, 언어로 그걸 표현하는 문제에 대해 변함없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진실로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순간의 인상으로 타인에 대한 의견을 갖기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의견 또는 인상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대상에게 적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순간은 지나고, 모든 것은 변한다.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남겨질지도 모른다. 삶이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마는 그림자의 행렬이라고 울프는 말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그림자를 열렬히 껴안으며 잠시 존재하는 찰나의 것을 붙잡으려 한다. ‘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될지라도 그런 방식으로라도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손을 뻗고, 닿고자 애쓰는 과정 속에서만 삶의 의미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수백만의 책장처럼 무수한 순간들을 넘기며 삶을 산다. 무엇을 찾으려는지 우리 스스로도 모른 채. 어쩌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단편들, 삶의 편린들 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거기서 각자가 어떤 인상이나 의미를 그러모으려 애쓰는 것은, 잠시나마 우리의 존재가 또렷하게 다가오고 빛을 낸다고 느껴지는 것은 어떤 순간들 속에서 가능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거친 삽화들, 마치 우리가 책장을 넘기고 또 넘기면 마침내 우리가 찾던 걸 찾기라도 할 것 같은 책 속의 그림들이다. 모든 얼굴, 모든 가게, 침실의 창문, 술집, 어두운 광장이 우리가 그렇게 열에 들떠 넘긴 그림인가-무엇을 찾으려고? 책도 마찬가지다. 그 수백만의 책장을 넘기면서 우리가 찾는 것이 무엇인가? 아직도 희망을 가지고 책장을 넘긴다-오, 여기 제이콥의 방이 있군.”(p.138)

<제이콥의 방> 버지니아 울프, 김정 옮김, 솔 출판사




울프는 타인과의 소통, 혹은 타인을 이해하는 방편으로서 편지를 쓰는 일, 즉 말하려는 시도에 대해 언급하기도 한다. “우리 자신이 쓴 편지 봉투가 다른 사람의 탁자에 놓인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빨리 우리의 행위가 별개의 것이 되어 낯설게 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말하려는 시도 말이다. 이 유서 깊은 편지라는 존재, 무한히 용기 있고, 버림받고 그리고 잊혀지는.”(p.131) 이는 일견 그 방식에 회의적으로 접근하는 듯 보이지만 뒤이어 “편지가 없다면 삶이 산산조각이 날 것”이라고 덧붙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 시도하고 있는 것들에 의심을 품고 질문을 던지면서도 그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울프의 질문처럼 진실함은 순간에만 존재하는가? 진실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어떤 곳이고 우리는 매 순간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애를 써 볼 따름일까? 그럴지라도 무언가에 닿기 위해 무수히 시도하면서 삶을 축적하는 수 밖에 없다. ‘존재의 순간’에 닿고자 하는 노력이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있게 할 테니까.




‘제이콥의 방’이라는 표면적 이미지에 갇혀 다른 것을 바라보지 못하면 이 소설을 읽는데 실패하고 말 것이다. 이 소설에서 '방'은 '자기만의 방'으로 가기 위해 타인을 통해 자신(여성 인물들의 내면 또는 욕망)을 들여다보는 장치로 작용하는 것 같다. 소설의 분량 대비 지나치게 많은 인물의 등장, 주요 인물로 제시된 여성들이 충분한 무게로 구축되지 못한 애매함, '제이콥'을 전면에 내세운 구조 등이 소설과 메시지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졌던 주제들을 통해 소설의 의미를 더듬어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와 타인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알 수 있는지, 진실한 소통이란 가능한지, 시간 속에서 순간과 찰나가 지니는 한계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존재의 의미를 얻을 수 있는지, 영원히 답을 내릴 수 없는 모호한 개념을 언어로 풀어내고자 노력했던 울프의 목소리는 명백히 존재한다. 불분명한 주제 의식을 쫓느라 힘겨웠지만 울프 본연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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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지금
다비드 칼리 지음, 세실리아 페리 그림, 정원정.무루(박서영) 옮김 / 오후의소묘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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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썩하게 보낸 연휴 다음 날, 피로감으로 몸이 찌뿌둥한 아침이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고 그냥 늘어져 영화나 봤으면 싶은 날이었다. 등원하는 아이와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커피 한 잔을 내렸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자 살 것 같은 기분이다. 내게 필요한 건 이거였다, 커피 한 모금이 주는 여유와 각성.


커피를 들고 거실로 갔다. 창 밖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아까시나무 숲이 보였다. 푸른 나뭇잎과 하얀 아까시 꽃무더기가 바람이 부는대로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런거지, 우리의 마음도 저렇게 흔들리는 거지. 좋다가도 슬프고, 우울하다가도 괜찮아지는 거. 그런대로 인생인거지, 뭐.



<인생은 지금>(다비드 칼리 글 세실리아 페리 그림 정원정/박서영 옮김 오후의 소묘)이라는 그림책에는 은퇴한 노부부가 등장한다. 할아버지는 은퇴라며 당장 어디든 떠나자고 외친다. 그도 아니면 외국어나 악기든, 뭔가 새로운 걸 배워보자고. 젊었을 때처럼 밤낚시를 가거나 풀밭에 가만히 누워있자고 신이 나서 떠들어댄다. 곁에 있는 할머니는 시큰둥하다. 여행은 나중에, 이제 와서 뭘 새로 배워, 류마티스에, 디스크에 몸이 아픈데 밤낚시라니, 설거지도 해야되고 청소도 해야되니 내일하자고. 그런 할머니에게 할아버지가 말한다. “왜 자꾸 내일이래, 인생은 지금인데.”


처음 읽을 때는 즐거움이란 다 잃어버린 얼굴로 시큰둥한 할머니가 안쓰러웠다. 왜 일상을 털고 떠나지 못할까. 왜 그냥 지금을 즐기지 못할까 싶었다. 그러다간 시간이 다 흘러가버린다고, 그러니 당장 즐기자고 외치는 할아버지의 심정이 나와 더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봄바람에 흔들리는 아까시 숲을 바라보는 순간, 인생은 이미 여기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딘가로 떠나고, 무언가 신나는 일을 할 때 인생이 내게 오는 게 아니라, 이미 항상 있었다는 걸. 그러니 할머니에겐 인생을 즐기기 위해 굳이 어디로 떠나거나 무언가에 도전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할아버지는 일에 쫓겨 자신의 인생을 뒤로 미뤄 둔 걸까? 그래서 은퇴를 하자 이제부터 진짜 자신의 인생을 살겠다고 생각한 걸까? 그런데 말이다, 떠나고, 배우고, 선망했던 것들을 하면 진짜 인생을 누리게 될까? 가슴을 두근거리며 멀리 여행을 가고, 배우지 못했던 것에 도전하고, 밤낚시를 가고 풀밭에 한가로이 누워있는 일에, 과연 그런 일에만 진짜 인생이 있을까? 그렇다면 날마다 잠자는 자리를 쾌적하게 유지하고 세끼 밥을 챙기는 일은 누가 하지? 그런 것 없이는 삶이 유지될 수 없는데... 삶의 바탕은 그런 사소한 일에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할머니는 떠나자는 할아버지를 뒤로한 채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한다. 자기 앞에 놓인 삶을 가꾸며 오늘을 산다. 내일을 위한 오늘이 아니라, 그냥 오늘 자체로 존재하는 오늘을 산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즐겁기 위해 삶의 바탕이 되는 일을 돌본다. 내가 있는 곳을 깨끗하게 해서 마음을 즐겁게 하고, 맛있는 밥을 먹어 힘을 채우고, 설거지를 하며 삶을 정돈한다. 언젠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을 위해서. “인생은 지금이니까.”




가슴 뛰는 무언가를 하는 것만이 인생을 즐기는 법은 아니다. 커피 한 잔에 온 마음을 풀어 놓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며 상념에 젖어들 때, 빨래를 접으며 삶을 개키고 설거지를 하며 자잘한 일상의 때를 말끔히 씻어내는 순간에서도 인생은 즐길 수 있다. 함께 길을 걷고, 아이가 웃는 모습을 바라보고, 저녁상을 차리며 정리하는 일상 속에서, 오늘을 살고 싶다. 인생은 바로 지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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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수전 손택 & 조너선 콧 지음,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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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사명은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거라고 말했지만, 저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바 작가의 소명은 온갖 종류의 허위에 맞서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에요." p.196



1933년 태어나 2004년 골수성백혈병으로 사망한 수전 손택은 미국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예술 문화 평론가로 연극 연출가, 영화 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열다섯에 버클리 대학교에 입학, 시카고대학교에서 철학과 고대사, 문학을 공부하고 스물다섯에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파리대학교, 옥스퍼드대학교 등에서 수학했으며 컬럼비아대학교, 뉴욕시립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1963년 첫 소설 <은인>을 출간했고 이듬해 <파르티잔리뷰 Partisan Review>에 <’캠프’에 관한 단상>을 발표하면서 문단과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 예술 작품에 대한 과도한 해석에 반기를 든 글로 수전 손택은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를 통해 전쟁과 미국의 허위를 고발했고, 내전 중인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상연하는 등 실천가적 행보를 걸었다. 주요 저서로 소설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 <인 아메리카>, 에세이 <해석에 반대한다>, <사진에 관하여>, <은유로서의 질병>, <타인의 고통>등이 있다.



<수전 손택의 말>은 <롤링스톤>의 에디터이자 작가인 조너선 콧이 파리와 뉴욕에서 두 번에 걸쳐 손택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터뷰에 대한 논평이 추가되거나 기사화를 위한 편집 없이 ‘육성’을 그대로 포착한 녹취록이라는 점에서 글은 생명력을 지닌다. 사유를 중심으로 정돈 수렴된 글로서 ‘책’을 읽었다는 느낌보다 사람으로서 손택을 ‘만났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손택은 <’캠프’에 관한 단상>과 <해석에 반대한다>로 일약 미국 지성계의 스타로 떠오른 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다 1974년 유방암 선고를 받고 2년간 투병 후 완치되었다. 책에 담긴 인터뷰는 손택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 살아 돌아온 시점, 질병을 앓으며 써낸 <은유로서의 질병>의 출간을 앞둔 1978년 이루어졌다. 마흔 다섯에 죽음과 싸워 이긴 승리자로 돌아온 그녀는 패기로 뭉쳐 있다.



"나는 최대한 책임감을 갖고 싶어요. 아까도 얘기했듯이 내가 희생자라는 느낌을 받는 게 싫어요. (...) 가능한 한, 그리고 미치지 않는 선에서 나는 내가 주체적으로 자취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자각을 최대한도로 확장하길 원해요. 그래서 우정이나 연애에서도 좋고 나쁜 것 모두에 기꺼이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 (...) 그래야 실제로 내가 더 강하게 느껴지고 또 어쩌면 상황이 다르게 풀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p.46 



그녀의 저서인 <은유로서의 질병>, <사진에 관하여>,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에 대한 인터뷰를 중심으로 책과 사랑,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훑으며 그녀의 삶을 아우르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작가의 주요 저작에 대한 관심 뿐만 아니라 손택이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고조시킨다. 스스로도 ‘군더더기 없고, 정확하고, 요란하지 않고, 꾸밈없’는 문체를 구사했지만 ‘쓸데없는 걸 다 벗어던진 적나라한 특질 때문에’ 베케트와 카프카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작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최대한 책임감을 갖고’, '삶 속에 온전히 현존하고' 싶으며 ‘로큰롤을 사랑’하며,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어떻든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두고 싶지는 않’다고 주저없이 말하는 여성.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 결정하고 책임지면서, 다수의 시선에 반기를 드는 여성 작가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적어도 은유에 극단적인 회의론을 품고 있다고 해야겠죠. 은유는 사유에 핵심적이지만 쓸 때는 은유를 믿으면 안 돼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허구라는 걸 알아야 하죠. 아니, 필수적인 허구가 아닐 수도 있어요. 은유를 품지 않은 사유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죠. 그러나 바로 그런 사실이 그 사유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거예요. 내 마음을 끄는 건 항상 그런 회의주의를 표현하면서 은유를 넘어 깨끗하고 투명한 무언가로 나아가는 담론이에요." p.101



"우리가 나이가 들고 피부가 좀 더 쭈글쭈글해진다고 해서 뭐가 어떻단 말이죠? 무슨 상관이에요? 나이가 몇 살이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무언가 유치하다거나 어른스럽다는 생각에 근거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어떤 관념을 부과하려 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p.146



손택은 좋은 사회란 주변인에게 너그러워야 하며, 여성은 물론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도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해서는 안되며, 지나친 은유와 해석으로 허위를 씌우기보단 ‘실재’에 주목할 것을 강조한다. 사유하지 않으면 '클리셰를 옮기는 매개체'가 되기 십상이며, 적극적으로 살기를 주저하는 자는 '질병과 공범'이나 마찬가지다, 가슴을 뛰게 하고 삶을 바꾸기도 하는 음악과 예술의 힘은 대중과 고급 예술로 나뉘어 있지 않다는 등 거침없는 발언으로 생각의 틀을 깬다. 세상의 모든 이분법과 사회문화적 관념이 덧씌우는 시선에 철저히 저항하는 글을 썼던 작가이지만, 그를 수놓은 ‘명성’이라는 허위 속에 사람-손택은 가려져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런 이미지를 가졌던 독자에게 사람-손택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로서 이 책은 가치를 발휘한다. 가까운 사람들 속에서 허위를 벗고 사랑을 나누는 삶을 원하는 여성이자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어머니 손택을 발견할 수 있다.



인터뷰라는 형식으로 인해 상황에 따라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고 하나의 주제를 깊이 파고들 수 없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로 인해 여성주의와 관련하여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발견된다. 문학에 있어 ‘여성적 시선’을 구분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는 입장은 이분법을 철폐한다는 명분으로 현실에 명백히 존재하는 차별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이런 질문들은 그의 저서를 찾아 읽은 후 다시 판단해볼 수 있겠다.



시대의 지성으로 문화 예술의 중심에 있었고, 이름 자체로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던 손택. “전 자신을 스스로 창조했다는 생각을 해요.”(p.194)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중심에 서 있는 것이란 ‘공감’이며 ‘사람들이 편을 갈라놓은 것 이상’을 보게 해주는 의미라고 했다. 특출 나기도 했지만 스스로가 자신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고 삶을 연출했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하지만 아직은 모든 판단을 유보하기로 한다. 이 멋있는 여성을 더 알고 싶다는 강렬한 호기심으로 다음 책을 펼칠 것이다. <수전 손택의 말>은 손택 읽기의 첫 단추로 적절했다.



"자기 공간은 스스로 창조해야만 해요. 침묵과 책들로 가득한 공간 말이에요."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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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95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아카넷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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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두번째 소설 <밤과 낮>에는 전통있는 가문의 한 여성 캐서린이 결혼을 앞두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을 찾고자 분투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 과정에서 가부장제 하의 결혼이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남성의 지배적 권력 속에서 여성의 삶이 지닌 한계를 들춰내고 여성의 독립적인 삶에 대한 고민과 가족 제도가 지닌 강압적 의미를 파고들기도 한다. 여성의 참정권조차 없던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울프의 고민과 시도가 급진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울프가 여성이 꾸려가는 삶의 의미를 강조하고 독립적인 존재로 자유롭게 삶을 영위할 권리를 옹호하고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소설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댈러웨이 부인>이나 <출항>에서 느꼈듯 울프 소설의 매력은 인물들간의 대화나 인물이 자기 내면의 생각 속으로 빠져드는 장면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우리가 언어로 명명하기 어려운 감정과 생각, 어떤 순간의 흔적이 마술같은 단어로 풀려나온다. 그의 언어는 진심을 알 수 없어 헤매이는 인물들 간의 대화에서도 일말의 진실에 다다르고자 무수히 시도한다. 말은 끝없이 밀려오고 부서지고 마는 파도처럼 쏟아지지만 허무하게 사라지는게 아니라 파도에 쓸려 고유의 무늬를 간직하게 된 돌맹이나 조개껍질처럼 독자의 마음에 인상을 새긴다.



"그녀는 그 모든 이야기를 들었고, 워털루 브리지가 보일 때쯤에는 그 내용에 대해 시험이라도 치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발밑의 포석을 헤아리는 이상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평생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기분이었다. 임뱅크먼트를 따라 걸어가는 동안 그녀의 눈앞에 생생히 떠오른 것이 대수 기호로 가득 찬 책들과 점, 분수기호, 괄호투성이의 페이지들이라는 사실을 데넘이 알았다면, 그녀가 자신의 말을 경청해주는 데서 느끼던 은밀한 기쁨은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

그러는 동안 내내 그녀는 망원경을 통해 별세상의 새하얀 원반들과 그 그늘진 협곡들을 관찰하는 공상에 빠져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에게 두 개의 몸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나는 랠프와 함께 강가를 걷는 동안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덮고 있는 지저분한 거품 같은 수증기 너머 푸르른 창공 저 높이 떠 있는 은빛 구체에만 몰두해 있는 것이었다. 

(…) 

이 행복감에는 아무 이유도 없음을 재확인했다. 자유롭지도 않았고, 혼자도 아니었고, 여전히 무수한 실에 묶여 땅에 매여 있었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집에 가까워질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에 없이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공기는 더 신선하고, 빛은 더 선명했으며, 무심한 듯 아닌 듯 손으로 내리쳐본 난간의 차가운 돌은 더 차고 딱딱했다. 데넘에 대한 짜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어떤 방향을 선택하든, 집으로 가든 달나라로 가든 분명 아무 방해도 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기분이 그라는 존재 내지는 뭔가 그가 한 말 때문임을 그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였다."

 p.382 <밤과 낮>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아카넷



인용한 장면 속 캐서린처럼 마법에 걸린 듯 순간 속에서 자기 존재가 또렷하게 살아나는 느낌은 모두가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친밀한 대상과의 만남이나 대화의 순간, 혹은 좋아하거나 편안하게 느끼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거나 본연에 가까운 내면의 소리에 다가가는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그런 찰나는 생에 대한 경이와 살아있음이 주는 순수한 충족감을 우리에게 건넨다.



그런 순간에 대해 울프만큼 멋지게 묘사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 소설 속 캐서린과 메리, 메리와 랠프, 캐서린과 랠프가 만나고,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은 우리에게도 그런 만남이 있었고, 어떤 찰나들을 통해 인생의 떨림을 느꼈던 기억을 더듬어보게 한다. 그건 단지 이성과의 만남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식과 허위를 벗어던지고 진실하게 내면을 드러내고자 애썼던 순간, 각자가 지닌 그늘이 살며시 포개어짐을 느꼈던 찰나, 우리가 도달했던 순수한 즐거움은 더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 동안 아직 남아있을 진실한 대화의 순간을 고대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온전한 고독 속에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누군가와의 소통과 만남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기쁨을, 동시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미지의 자신과 조우하게 되는 순간을 말이다.



"쓰다 지우다 하기를 무수히 거듭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비록 인간들은 상호 소통에 끔찍하게 서투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소통이 최상이리라는 가능성을 전하려 했다. 더구나 그들은 서로가 개인사와는 무관한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가령 법률이나 철학의 세계라든가, 좀 더 신기하게는 전날 저녁 그가 언뜻 엿보았던 것 같은 세계로 말이다. 그날 저녁 자기들은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창조하는 것만 같았었다. 어떤 이상을 – 현재 상황에 앞서 펼쳐보는 비전 같은 것을. 만일 그런 금빛 테두리가 떨어져 나간다면, 인생이 더 이상 환상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다면 (하지만 그것이 그저 환상이기만 하겠는가?) 끝까지 산다는 것은 너무나 삭막한 일이 될 것이었다."

p.618



자기 내면의 소리를 그대로 언어로 표현하는 일, 그걸 타인과 소통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의식 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진실되게 표현해낸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타인과의 진실한 소통이란 도달할 수 있는 일일까?



인물의 생각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들 내면의 소리를 언어로 형성화하고자 하는 울프의 노력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에 대해 일말의 희망을 갖게 한다. 울프가 빚어낸 생생한 문장들을 읽어가노라면 우리가 노력한다면 개개인이 각자 숨겨놓은 마음 속 종잇장들이 어떤 순간에는 밖으로 드러나 살며시 마주치거나 운 좋게 포개어질 수도 있다고 말이다. 삶의 내밀한 부분, 우리가 진실이라고 부르는 부분으로 다가가 그걸 소통하려고 애쓰는 인물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노라면 그런 순간에만 우리 영혼이 진정으로 살아 숨쉬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그녀가 어두운 붉은 불꽃과 그것을 휘감은 연기에 대해 열띤 어조로 말하자,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이라는 어둑하고 광막한 가운데로 문턱을 넘어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그 광막함 가운데서 그토록 크고 그토록 희미한 형체들이 움직이며, 어쩌다 섬광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냈다가 또다시 어둠 속에 묻혀가는 것이었다." p.639~640



우리는 타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느꼈던 게 언제였던가? 그런 경험에서 까마득히 멀어졌다는 자각은 삶의 진실을 캐기 위한 시도에서 분리되었다는 안타까움으로 이어진다. 진실에 가닿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 동떨어진 삶이 알맹이를 잃은 껍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생각 속에서는 완전한 자유에 익숙해져 있으면서, 왜 실제 행동에서는 항상 그렇게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걸까? 왜 생각과 행동 사이, 혼자 있을 때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사이에는, 이렇게 끊임없는 간극이, 이 어이없는 절벽이 있어야 하는 걸까? 절벽 한쪽에서는 영혼이 환한 대낮인 듯 활발해지는데, 다른 쪽에서는 밤처럼 어둡고 명상적이 되는 걸까?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아무런 근본적인 변화 없이, 똑바로 고개를 들고 건너갈 수는 없는 걸까?"

p.430



소설을 읽노라면 마음이 통하는 이와 함께 걸으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대화의 기쁨에 젖어들고 싶어진다. 때론 가없는 침묵에 잠기더라도 누군가와 같이 있다는 것에서 일종의 완전함을 경험하게 되는 일을 꿈꾸게 된다. 울프의 소설은 진실한 소통에 대한 열렬한 갈망, 혹은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처럼 다가온다. 환상일지라도 그 가능성을 믿고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의 누추한 삶에도 가느다란 빛줄기가 드리워질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때에야 비로소 빛이 들어오는 금빛 테두리가 우리 삶에 둘러져 있다. 환상일지라도, 그런 환상마저 없다면 긴 시간 쇠토의 길을 걷는 삶이 드리우는 환멸의 감각을 무엇으로 거둬낼 수 있겠는가. 이 빛에 대한 소망마저 없다면 삶이 건네는 소박하지만 놀랍기도 한 기쁨을 어디서 끌어올 수 있겠는가. 이 환상은 나이 지긋한 힐버리 부인(캐서린의 엄마)이 삶을 바라보는 초연하면서도 낭만적인 시선과도 맞닿아있다. 소설에서 마지막 순간 여성이 지닌 섬세한 통찰과 위엄을 가지고 어긋난 조각을 말끔히 끼워맞추는 사람이 또한 그녀이다.



"우린 자신의 환상을 믿어야 한단다."

(...) "그러지 않으면, 네 말처럼-" 그녀는 자신도 아주 모르지 않는 그 환멸의 심연을 전광석화 같은 눈길로 일별했다.

p.616


"인생이란" 하고 힐버리 부인은 분명 벽에 걸린 초상화들에서 영감을 얻은 듯 말을 꺼냈다. "기차를 놓치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지. 그리고 또 이렇게 찾는..."

p.628



<밤과 낮>은 버지니아 울프의 다른 작품에 비해 독자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고 전통적 소설 기법을 답습했다는 이유로 저평가 된 작품이다. 하지만 <출항>에 이어 읽어본 <밤과 낮>은 전작에 비해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지니고 정돈된 톤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울프가 작가로서 기반을 갖추게 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출항>에서는 격렬한 감정의 기복이 느껴졌다면 <밤과 낮>은 한층 더 정제되어 일정한 깊이를 유지한다는 인상이다. 거기에는 (레너드 울프와 함께) 결혼이라는 관문을 넘어선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으로서 '자기만의 방'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독립된 삶에 대한 갈망을 구체화해가는 과정도 담겨있다. <밤과 낮>을 지배하는 색채는 <출항>의 울렁거림과 달리 차분하지만 그 속에서도 삶의 진실된 기쁨을 건져내고자 하는 울프의 노력은 변함이 없다. 일체의 관념과 허위에서 벗어나, 순간 순간 진실에 닿고자 했던 작가의 시선은 독자의 매마른 삶으로 넘어와 생기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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