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지금
다비드 칼리 지음, 세실리아 페리 그림, 정원정.무루(박서영) 옮김 / 오후의소묘 / 2021년 3월
평점 :
일시품절




떠들썩하게 보낸 연휴 다음 날, 피로감으로 몸이 찌뿌둥한 아침이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고 그냥 늘어져 영화나 봤으면 싶은 날이었다. 등원하는 아이와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커피 한 잔을 내렸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자 살 것 같은 기분이다. 내게 필요한 건 이거였다, 커피 한 모금이 주는 여유와 각성.


커피를 들고 거실로 갔다. 창 밖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아까시나무 숲이 보였다. 푸른 나뭇잎과 하얀 아까시 꽃무더기가 바람이 부는대로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런거지, 우리의 마음도 저렇게 흔들리는 거지. 좋다가도 슬프고, 우울하다가도 괜찮아지는 거. 그런대로 인생인거지, 뭐.



<인생은 지금>(다비드 칼리 글 세실리아 페리 그림 정원정/박서영 옮김 오후의 소묘)이라는 그림책에는 은퇴한 노부부가 등장한다. 할아버지는 은퇴라며 당장 어디든 떠나자고 외친다. 그도 아니면 외국어나 악기든, 뭔가 새로운 걸 배워보자고. 젊었을 때처럼 밤낚시를 가거나 풀밭에 가만히 누워있자고 신이 나서 떠들어댄다. 곁에 있는 할머니는 시큰둥하다. 여행은 나중에, 이제 와서 뭘 새로 배워, 류마티스에, 디스크에 몸이 아픈데 밤낚시라니, 설거지도 해야되고 청소도 해야되니 내일하자고. 그런 할머니에게 할아버지가 말한다. “왜 자꾸 내일이래, 인생은 지금인데.”


처음 읽을 때는 즐거움이란 다 잃어버린 얼굴로 시큰둥한 할머니가 안쓰러웠다. 왜 일상을 털고 떠나지 못할까. 왜 그냥 지금을 즐기지 못할까 싶었다. 그러다간 시간이 다 흘러가버린다고, 그러니 당장 즐기자고 외치는 할아버지의 심정이 나와 더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봄바람에 흔들리는 아까시 숲을 바라보는 순간, 인생은 이미 여기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딘가로 떠나고, 무언가 신나는 일을 할 때 인생이 내게 오는 게 아니라, 이미 항상 있었다는 걸. 그러니 할머니에겐 인생을 즐기기 위해 굳이 어디로 떠나거나 무언가에 도전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할아버지는 일에 쫓겨 자신의 인생을 뒤로 미뤄 둔 걸까? 그래서 은퇴를 하자 이제부터 진짜 자신의 인생을 살겠다고 생각한 걸까? 그런데 말이다, 떠나고, 배우고, 선망했던 것들을 하면 진짜 인생을 누리게 될까? 가슴을 두근거리며 멀리 여행을 가고, 배우지 못했던 것에 도전하고, 밤낚시를 가고 풀밭에 한가로이 누워있는 일에, 과연 그런 일에만 진짜 인생이 있을까? 그렇다면 날마다 잠자는 자리를 쾌적하게 유지하고 세끼 밥을 챙기는 일은 누가 하지? 그런 것 없이는 삶이 유지될 수 없는데... 삶의 바탕은 그런 사소한 일에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할머니는 떠나자는 할아버지를 뒤로한 채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한다. 자기 앞에 놓인 삶을 가꾸며 오늘을 산다. 내일을 위한 오늘이 아니라, 그냥 오늘 자체로 존재하는 오늘을 산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즐겁기 위해 삶의 바탕이 되는 일을 돌본다. 내가 있는 곳을 깨끗하게 해서 마음을 즐겁게 하고, 맛있는 밥을 먹어 힘을 채우고, 설거지를 하며 삶을 정돈한다. 언젠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을 위해서. “인생은 지금이니까.”




가슴 뛰는 무언가를 하는 것만이 인생을 즐기는 법은 아니다. 커피 한 잔에 온 마음을 풀어 놓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며 상념에 젖어들 때, 빨래를 접으며 삶을 개키고 설거지를 하며 자잘한 일상의 때를 말끔히 씻어내는 순간에서도 인생은 즐길 수 있다. 함께 길을 걷고, 아이가 웃는 모습을 바라보고, 저녁상을 차리며 정리하는 일상 속에서, 오늘을 살고 싶다. 인생은 바로 지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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