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책태기를 겪고 있다. 40중반에 사회복지학을 공부해보겠다고 이번 학기부터 방통대 수업을 듣고 있는데, 수업과 직장일과 가사일을 함께 하다보니 심신이 지친걸까? 기말시험이 끝나면 책을 부지런히 읽어야지 했는데, 막상 시험이 끝났지만 책을 부지런히 읽지 못하고 있다. 날씨가 춥다보니 전기장판을 틀어놓고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게 되고, 책을 펴고 30분도 넘기지 못하고 잠이 든다. 잠들기 전 바디스캔 명상을 하는데, 요즘은 책만 폈다 하면 잠이 들어서 바디스캔 명상은 고사하고 침대 스탠드 불도 신랑이나 딸이 꺼주고 있다. 감기기운이 2주째 계속되고 있어 항생제와 알레르기약을 계속 복용중인데 약기운이 더해져서 더 잠이 오는 걸까? 읽고 싶은 책은 잔뜩인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요즘 계속 좌절중이다.
기말시험을 앞두고 윤석열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계엄령 이후 일상이 멈춰으리라 생각하는데, 나 역시 그날 이후 일상이 멈췄다. 속보를 놓칠까 핸드폰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고 직장일도, 책읽기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계엄령은 해제되고 윤석열 탄핵안이 가결됐지만 여전히 정국은 어수선하고 국민들은 모두 불안해한다. 여당의 헛발질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분노를 하게 되는데, 어쩌면 이런 마음으로 집중해서 책을 읽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작년 여름부터 아파트 단지 2군데에서 고양이 밥을 챙겨주고 있는데, 한 아이가 출산을 했다. 작년 겨울 스티로폼으로 만든 고양이집을 가져다 뒀는데, 그 안에서 아이를 낳은 모양이다. 캔을 따주면 늘 밥을 먹으로 오는 아이가 스티로폼 집 안에서 꼼짝을 하지 않길래 환할 때 가서 봤더니 손바닥만한 까만 애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경계심이 늘었는지 하악질도 심해져서 아는 척 한 번 못하고 밥과 물만 채워주고 오기 빠빴는데, 하루는 밤새 많은 비가 내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갓 태어난 애기 고양이와 출산을 한 엄마 고양이가 너무 걱정이 되서 고양이집을 감싸주는 바람막이? 비닐 온실을 구입해서 스티로폼집 위에 덧씌웠다. 엄마 고양이는 내가 비닐 온실을 덮기 위해 부스럭거리자 후다닥 뛰쳐 나가 차 밑에 숨어 나를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비닐 온실이 비바람을 막아줄거란 생각에 혼자 뿌듯해했는데, 며칠 뒤 나의 오지랖이었음이 밝혀졌다. 비닐 온실을 씌우고 이삼일 엄마 고양이가 밥을 먹으러 나오지 않길래 혹시나 해서 집을 들쳐 봤더니 엄마와 애기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내 오지랖이 그나마 따뜻하게 몸을 맡길 수 있었던 집에서 아이들을 쫒아낸 건 아닌가 하는 후회와 자책으로 오랜만에 눈물 콧물을 펑펑 쏟으며 울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비닐 온실을 치우고 집 바닥에 깔린 담요를 새 담요로 바꿔주고, 늘 그랬든 밥과 물을 갈아주고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는 게 화가나고 마음이 아팠다.
나를 둘러싼 거시적 세계에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미시적 세계에서 엄마 고양이와 애기 고양이가 나의 오지랖 때문에 사라졌다. 나의 노력과 기대와는 전혀 상관없이 굴러가는 흐름과 질서는 존재하는데, 나는 늘 그 사이에서 휘청거린다. 발바닥과 코어에 힘을 주고 단단하게 서 있으려고 마음은 먹지만 늘 이리저리 흔들리고 부딪히고 깨진다.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길에서 출산한 엄마 고양이와 갓 태어난 아기 고양이의 '길 위의 삶'은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늘 이런 사소한 것들 때문에 아프고 마음을 다친다. 내가 마주할 수 있는 세상이 살만해진다면 거시적 세계까지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살지만, 내가 마주할 수 있는 세상 속에 길에 사는 고양이들이 지낼 추운 겨울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과연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윤석열 탄핵안 2차 표결날 많은 시민들이 광장에 모였다. 이번 집회는 MZ세대의 참여와 아이돌 응원봉, 광장을 채운 K팝 등으로 더 감동적이었는데, 탄핵안이 가결되고 울려 퍼지던 '다만세'는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한강 작가님은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또한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지'라며 수많은 이들이 겪어온 고통 속에서 빛을 찾기 위해 글을 써오셨다. 묵묵히 슬픔과 아픔, 고통을 대면하고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아름답고 선한 방향으로 조금씩 걸어가는 게 지금 나에게는 최선이겠지. 책도 다시 열심히 읽고 내가 마주할 수 있는 세계를 넓혀가기 위해 정신 바짝 차리자.
이번 주말에 읽으려고 주문한 책.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는 강유정 의원님의 유튜브 채널에서 언박싱 영상을 보다가 장바구니에 담았고 [관조하는 삶]은 제목에 끌려 충동구매했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는 슈테판 츠바이크가 나치를 피해 브라질로 망명을 가서 기록한 에세이로 세계대전이라는 어둡고 야만적인 시절임에도 인간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주는 글들이 담긴 책이고,[관조하는 삶]은 무위의 상태에서 세계를 관조하라는 책이다. 이번 주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2권의 책을 읽고 책태기를 극복할 계획이다. 책은 내가 중심을 잡고 서 있을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필수적인 장치다. 실은 며칠 전 주문한 책들도 읽지 않고 책장에 꽂혀 있지만 다시 읽자. 그리고 힘을 내자.
-엄마 고양이와 애기 고양이는 이틀 만에 돌아왔다. 고맙고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