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각본 살인 사건 1 백탑파 시리즈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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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다’로 딱 한 번 만난 작가였다. 펑펑 울면서 읽었지만 문장이 만족스럽진 않았다. 문장보다는 전하고자 하는 바가 더 명료했고 간절한 글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작가에 대한 마음이 조금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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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각본’은 목판인쇄로 찍어낸 글을 말하는 것 같다. 요컨데 인쇄 소설인 것이다. 조선시대의 인쇄 소설, 그것만으로도 구미가 당긴다. 종종 궁금했다, 그 당시는 서책이 몹시 귀했다는데 만 권이 넘는 책을 읽거나 소장하는 것에 대해서. 빌려 읽고 필사하고, 필사가들도 있었을 테고, 인쇄술도 발달했겠지. 게다가 이 책엔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김홍도, 백동수가 등장한다. 역사에 큰 관심이 없어도 알만한 인물들이 튀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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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막론하고 시대극을 좋아한다. 아버지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 그 탓인지 성장기 청소년도 역사에 관심이 많다. 역사,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 접점을 발견하는 것이 재밌다. 과거에서 현재를 확인하는 것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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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통이 기록을 방해하는 탓에 길게 쓸 수 없지만 나쁘지 않았다.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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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낙관주의자 - 심플하고 유능하게 사는 법에 대하여
옌스 바이드너 지음, 이지윤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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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라면 나’도’ 낙관주의자란 사실이다. 이 글에 의하면 세상의 2/3는 낙관주의자가 분명하다. 누가봐도 낙관이나 긍정, 밝음과는 안친한 나를 이 책에서는 낙관주의자라고 말한다. 염세주의, 회의주의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나는 낙관주의자더라. 물론 낙관주의에도 많은 종류(부류-)가 있고 그 중 ‘게으른 낙관주의자’ 유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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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초입에 작가는 낙관주의자에 대한 오해를 말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낙관주의자’는 끝없이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며 별 고민이나 갈등이 없는 밝고 활기 넘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전체 글을 읽고 나니 낙관주의자란 가능성을 긍정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성을 긍정하는 사람.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대부분 가능성, 희망,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기대한다. 며칠 뒤의 파티에 설레고 몇 년 뒤의 나를 그려보며 살아간다. 어떤이는 100%의 가능성을 어떤이는 0.1%의 가능성을 품고 살아간다. 숱한 실패 속에서도 이번만은 잘 될거야, 예감이 좋아라고 긍정한다. 지독한 좌절 속에서도 자신의 좋은(그나마 괜찮은-)점을 찾아낸다. 무수한 사람들 속에서 나보다 못한 사람을 찾아내어 스스로를 위로한다. 낙관주의자의 범주는 엄청 커다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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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낙관주의자들과 낙관주의자의 장단점에 대해 말한다. 뭐 어쨌든 일단 낙관주의자가 되는 훈련을 하자- 그걸로 만사 오케이! 라는 인상이다. 결국은 우리가 무엇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다. ‘낙관주의자’라면 밝기만한 사람을 상상하지만 사실은 어둠 속에서 한 점 빛을 발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잘 되거라고 생각하는 마음, 내가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는 마음 그 두 가지면 충분하다. 읽으면서 많이 웃었다. 엉망진창 난리부르스에 사고뭉치여도 낙관주의자가 낫다고 말하는 작가의 태도부터가 지극히 낙관주의자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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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주의자가 쓴 낙관주의 예찬론이라 볼 수 있겠다. 특히나 지적인(상황을 분석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내고 실행할 의지가 있으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낙관주의자에 대해 말한다. 주로 사회생활에서의 긍정적 효과에 대해 말하지만 내겐 ‘자존감을 높여라’로 읽혔다. 어떤 상황에 대한 낙관보다도 자신에 대한 긍정과 낙관이 스스로에게 큰 작용을 한다고 이해했다. 어차피 나도 낙관주의자의 범주에 속할 거라면 ‘지적인 낙관주의자’를 위한 훈련을 해봐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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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는 일상의 그늘에 숨어 지낸다 - 범죄심리학자 이수정과 프로파일러 김경옥의 프로파일링 노트
이수정.김경옥 지음 / 중앙M&B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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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시작은 대체 언제일까? 인류의 시작과 거의 같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점점 증가했을까, 감소했을까? 어떤 범죄가 증가하고 어떤 범죄가 감소했을까?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아니- 범죄란 과연 무엇이고, 범죄자는 대체 어떤 자들일까? 에서 범죄자는 과연 어떤 자들인가에 대한 글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사회에 깊이 개입하고 관심을 가질수록 두렵다. 잔인하고 끔찍한 범죄가 나날이 늘어가는 것만 같다. 고개만 돌려도 범죄자와 부딪힐 것만 같아 움츠러든다. 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우리가 그들을 구분할 수 있기나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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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어릴적부터 피해자가 되는 것보다 가해자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점점 더 나쁜 사람이 되면 어쩌나. 내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면 어쩌나. 의도치 않았대도 누굴 다치게 하면 어쩌나. 몹시 두려웠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지만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내가 가진 충동과 어둠이 더 크고 잔인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아직 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지만(앞으로도 없을 것 같지만-) 범죄자들의 심리를 이해한 적은 많다. 그렇다해도 납득하고 용납할 순 없었다. 충동과 어둠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을 어떻게 제어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위해선 바른 가치관이 필요하고 쉼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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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과거엔 칭찬이었고 지금은 조롱.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렇게 사소한 범법에 익숙해지고 당연시한다. 에이, 그정도는으로 지나치고 눈감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자유 아닌 방종을 허락하고 융통성있고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 그 정도쯤이라고 눈감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잊는다. 전혀 의식조차 않는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된다’는 속담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겠지만, 바늘쯤이야 괜찮다고 웃고 넘어가는 사람은 많은 것이다. 장난으로 개구리를 돌로 쳐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홧김에 몇 대 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농담으로 가벼운 희롱이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조금씩 더 용인하게 될 것이다. 결코 가벼이 해서는 안된다. 피해자가 되는 것이 두려운 만큼 가해자가 되는 것 역시 두려워해야한다. 나는 절대 그럴리 없다고, 내 친구가 그럴 리 없다고, 내 가족이 그럴 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의심하고 경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다. 바늘 도둑일 때 고칠 수 있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그들과 딱히 다르지 않다. 범죄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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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으로 약자인 경우 범죄에 노출되기 쉽다. 범죄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려면 범죄의 그늘을 줄여나가야만 한다. 범죄자를 줄여나가고 범죄를 줄여나가야 한다. 법과 제도, 인식과 태도 조금씩 바뀌지 않으면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장담하기란 어렵다. 어떤 것도 그저 비켜갈거라고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의 안전이 내일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늘 퀭한 눈으로 두리번 거리고 움츠리며 지낼 순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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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화와 공감능력에 대해 생각한다. 점점 그것을 잃어가는 다음 세대를 마주한다. 앞으로는 무엇보다 인성이 가장 귀한 능력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그것이 안타까우면서도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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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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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괴물인데, 실제로는 괴물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다. 괴물에겐 이름이 없다. 괴물이 생명을 얻자마자 그 존재를 혐오하는 프랑켄슈타인이 버리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미친듯이 매달려 창조해낸 생명체를 버리고 도망친 댓가는 컸다. 모든 것을 잃고서야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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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의 두번째 만남에서 괴물은 말한다. 나를 창조해낸 네겐 돌보고 교육하고 외롭지 않게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이름없는 괴물은 탄생을 원한 적이 없다. 그런 모습으로 태어나길 원한 적도 없는데 닥친 세상은 혐오와 멸시로 가득하다. 알아서 배우고 익히고 살아가면서 만난 세상은 괴물 만큼이나 끔찍하다. 아무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다.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저 만들어진대로 탄생했을 뿐인데 모든 것들 감당해야 한다. 괴물의 억울함과 외로움이 사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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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가 인간을 교육하는 방식은 이상하다. 마치 우수한 기계를 창조하는 것처럼 합리와 효율과 능력과 그럴싸한 외양을 요구한다. 왜? 자의에 의해 태어나지 않아서 자의에 의해 살아갈 권리마저 빼앗는 걸까? 인권을 논하기에 앞서 최소 가정에서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보다 먼저라는 사실을 깨끗이 지운다. 그것은 의무 이전에 인간의 권리임을 잊어선 안된다. 해설에서처럼 ‘가정에 심리적 닻을 내리지 않은’ 인간으로 자라게 해서는 안된다. 인간에겐 여러 자질과 욕구가 있는데, 그것이 사회화를 통해 교육된다면. 우리의 교육은 어떤 방향이어야 하는 지 생각해야 한다. 단순하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과 살아가고 싶은지를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사회의 발전과 번영 이전에 함께 살아가야할 공동체이다. 나는 대단히 훌륭하고 의지적이고 우러러 볼만한 이웃이나 친구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답고 서로 해를 끼치지 않고 기왕이면 다정하고 기왕이면 나눌 수 있는 친구와 이웃을 원한다. 이런 평범하고 선한 이웃들이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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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혹은 창조에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는 그 책임을 저버려선 안된다. 아이에겐 사랑과 행복을 가르치고 사회엔 안전과 평등을 요구해야 한다. 대단하고 아니고는 개인의 온전히 선택에 달려있다. 개인의 성취 욕구와 열정에 맡기자. 그 개인을 훌륭하고 대단하게 만드는 것은 부모의 역할도 아니고 사회의 역할도 아니다(물론 영향이 없다는 것은 아니나-).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고 지지해야 한다. 온전히 닻을 내리고 안전하게 해야한다. 그래서 행복한 인간이 되도록 그 행복한 인간들이 안전할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살만한 세상이 되려면 사회도 바뀌어야 하지만 우리도 온전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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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에는 끝이 없다. 이상한 것은 양육법에도 유행이 있다는 것이다. 끝없이 본질을 찾으려는 나는 납득하기 어렵다.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 그 외에 무엇이 필요한가. 양육과 교육에 대해 흥분하며 말했더니 성장기 청소년이 말한다. ‘그 사람들도 모르니까 불안해서 그런거 아닐까’라고. 그렇다, 언젠가 내가 뱉은 말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 집에서 학교로 가는 골목길에서의 대화.
우리집은 성적으로 혼내지 않는데, 다른 친구들은 한 두개 틀려도 혼난다고. 학원을 몇개씩 보내고 9시 넘어서 집에 가는 애도 있다고. 왜 부모들이 애들을 괴롭히는 지 모르겠다는 아들에게 말했었다. 그 부모들도 그렇게 배워서 그래. 나중에 힘든 것보다 지금 힘든 게 낫다고 생각해서 그래. 부모도 부모 노릇이 처음이라 불안해서 그래.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방식이 다른거야. 내가 말해놓고 잊는다. 쉽게 흥분한다.
아이는 이만치 자라서 나와 키가 같아지고, 나는 왠지 심보만 고약해지는 것 같다. (옆으로만 자라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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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이가 닮는 것은 부모다. 좋은 것을 닮을 수 있게 노력하자. 결국 피조물이 닮는 것은 창조주다. 바람직하고 닮을만한 어른이되자. 그리고 세상 누가 뭐래도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응원해주자.고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작심삼일을 삼천만번 쯤 하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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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8-08-13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사람들도 불안해서 그런 거 아닐까’라는 말에 폭풍 공감해요. 전 아직 부모가 아닌데도 막냇동생 보면 자꾸 성적으로 걱정하게 되더라고요... 사실 숫자보다는 자주 얘기하고 생각을 나누고 대화하는 데에 초점을 둬야 하는데;;;
 
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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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 읽었던 미스테리 소설과 어딘지 닮았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 범인이 누군지를 쫓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기억을 더듬는 이야기랄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미스테리로 다가온다. 우리의 기억이 온전히 사실에 기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런저런 것들이 뒤엉켜서 사실로 착각하게되는 무엇인 경우가 많다. 같은 사건이나 상황에도 서로 다른 기억을 갖게 되기도 한다. 특히 어린시절의 기억은 아이들 각자의 상황이 더 크게 인식되고 그것이 온전하지 않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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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분명 미스테리지만 조금 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성장과 맞물려 있기 때문일까? 몇 십년이 지나 다시 기억을 끄집어내고 어른의 시선으로 짜맞춘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조금 안타까웠다. 과거의 것들이 현재까지 붙드는 아픔들은 그것을 잊고 지우려고 애쓰는 것보다 산산히 파헤쳐서 확인하는 쪽이 미래를 위해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두려워서 불안해서 포기하는 심정과 어쩔 수 없다고 외면한다. 아무것도 괜찮아지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도 좋아지지 않는다. 많은 것들을 감수하기란 쉽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미래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좀 다른 자신을 원한다면 어쩔 수 없다. 매끄럽고 완전한 결말이 아니라도 해결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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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에 집중했던 것은 아니다. 왠지 주인공이 범인 같아서 딱히 궁금해지지 않았다. 정작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왜? 어째서? 였달까. 그 부분이 조금 아쉽지만 다른 것들이 이야기를 충실히 메꾸고 있다. 골탕먹일 생각으로 저지른 일이 큰 사건이 되기도 하고 나쁜 버릇이 모든 것을 뒤흔들기도 한다. 공모없이 공범이 되기도 하고 오해가 진실을 가리기도 한다. 모두가 뒤엉킨 다양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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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사람들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좀 더 생각해보자. 무엇을 주장하고 요구하고 외치기 전에 거울을 한 번 보자. 나는 어떤가- 완벽한 언행일치 까지는 아니라도 노력하고 있는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려고 하는가. 무엇을 판단할 때, 얼마나 생각하고 얼만큼 반문하는가. 타인에 대한 상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심지어 근거도 없이 내 주장만 하진 않는가. 아무도 모를 거라며 나쁜짓을 하고 겉으로는 태연하게 가장하고 있진 않은가.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있다면 그것을 가장 먼저 적용해야할 것은 나 자신이다.
늘 반성이 필요하다. 또 한 번 뒤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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