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그는 늘 인생의 테두리에서 한걸음만 비켜 서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그의 말대로 현실에 다소 지각하였거나 그렇지 않으면 현실이 그보다 늘 몇 시간 뒤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면서부터도 한 인생의 망명자였던 것이다.
-서(序) 中

인생의 어떠한 격렬한 장면에서도 그의 시와 생리(生理)는, 늘 평균 체온보다 몇 분(分) 도리어 낮은 체감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서(序) 中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날개 中

거울이란 제 얼굴을 비칠 때만 실용품이다. 그 외의 경우에는 도무지 장난감인 것이다.
-날개 中

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맑스, 말사스, 마도로스, 아스피린, 아달린.
아내는 한 달 동안 아달린을 아스피린이라고 속이고 내게 멕였다.
-날개 中

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 온 스물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몽롱한 기억 속에서는 이렇다는 아무 제목도 불그러져 나오지 않았다.
나는 또 내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그런 대답은 하기가 싫었다. 나는 거의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
-날개 中

나는 또 오락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서는 피곤한 생활이 똑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흐늑 허비적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들을 못한다.
나는 피로와 공복 때문에 무너져 들어가는 몸뚱이를 끌고 그 오락의 거리 속으로 섞여 들어가지 않는 수도 없다 생각하였다.
나서서 나는 또 문득 생각하여 보았다. 이 발길이 지금 어디로 향하여 가는 것인가를...
-날개 中

이때 뚜-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날개 中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날개 中

스물세 살이오- 삼월이오- 각혈이다.
-봉별기(逢別記) 中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이런 시(詩) 中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거울 中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권태(倦怠) 中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권태(倦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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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길은 보지도 않고 달만 쳐다보며 노래는 그 이상은 외우지도 못하는 듯 첫 줄 한 줄만 되풀이하면서 전에는 본 적이 없었는데 담배를 다 뻑뻑 빨면서 지나갔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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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뜨거운 햇볕 때문에 뺨이 타오르는 듯했고, 땀방울은 눈썹 위에 고여 가고 있었다.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같은 태양이었다.

당신은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다. 내가 빈손인 듯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는 확신이라는 게 있다. 나 자신에 대한 것,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당신보다 더한 확신. 내 인생과 곧 닥쳐올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생명이 사그라져 가는 그때에 ‘약혼자‘를 둔 것인지 왜 다시 시작하는 놀이를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처음부터 다시 살 준비가 되었던 게 틀림없다.

나와 세계가 무척 닮아 마치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려면 내게 남은 소원은 오직 하나, 내가 덜 외로워하도록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그날 많은 구경끌들이 몰려 와 증오에 가득 찬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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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담은 죽기 얼마 전까지도 자신의 철학과 관련된 여러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했다. 어떻게 하면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쓸모가 있을까? 그가 생각한 방법 하나는 시체를 해부학 연구에 사용하도록 하는것이었다. 하지만 위대한 철학자라면 육체를 그대로 보존해 후대 사상가들에게 자극을 주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벤담은 두 번째 방법을 택했다.
제러미 벤담은 죽어서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촉진하고 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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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Itgoes 2024-04-03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거 보면서 마지막 문장에 엄청 웃었어요
 

불행도, 타락도, 죽음도, 그리고 신이나 악마가 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우리 사이를 떼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나를 버린 거야. 내가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찢어놓은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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