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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반만이라도
이선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월
평점 :
˝그거 아니? 사람들은 누구나 밤을 갖고 태어나. 갓난아이 속에 갓 난 어둠이 있는 셈이지. 그런데 사람의 몸속에 밤이 심겨 있는 건 아주 잠깐뿐이야. 보통 사람들은 탯줄처럼 밤과 연결되어 있다가 밤에게 버림받아. 너도 그렇고. 그런데 나랑 내 딸은 버림받지 않았단다. 밤이 우리 안에 뿌리내리기를 선택했고, 내가 계속 밤을 품고 있기를 선택한 거야.˝
8편의 단편들은 각각 퀴어 여성들이 화자이다. 그렇다고 확실히 퀴어적인 작품은 아니다. 절절한 사랑이야기보단 구질구질한 삶의 이야기에 여성들의 사랑이 살짝 첨가된? 웃기면서 슬픈 이야기다. 그래서 좋더라. 나랑 똑같이 다들 힘들게 사는 것 같아서. 같은 고민은 아니지만 삶의 무게가 같다고 느껴져서.
각 작품은 앞서 말했듯 삶의 무게가 담겨있는데 저자 특유의 유머가 있어 마냥 무겁지는 않았다. 사실 웃으면서 읽었다. 특히 돌아가신 할머니의 애인을 찾아간 이야기인 [망종], 한마디 전달 받을 때마다 촌철살인인 화분이 나오는 [보금의 자리] 같은 작품은 ‘풋’ 소리를 내며 읽었다.
특히 눈이 보이지 않는 엄마 ‘미수’에게 활동보조를 하는 새엄마를 따라가 불이켜져도 “왜 이렇게 어둡게 있냐“는 새엄마의 말에 ”아줌마 얼굴이 더 어둡다“라고 받아치는 기센 미수가 둔 딸 ‘다운’ 역시 시력을 잃어가고 그런 다운에 관심을 갖는 ‘나’. 이 셋이 눈 내린 산을 등산하는 장면에서 부러진 막대기를 한참동안 찾아 미수에게 갔더니 “고려장인 줄 알았다.”로 시작해 “원하시는 거면 해볼게요.” 라고 받아치고 “속이 참 깊구나”로 비꼬는 장면에선 미수와 ‘나’의 팽팽한 기싸움에 한참 웃었다.
마냥 웃긴 장면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대놓고 웃기려는 저자의 위트에 세상천지 진지하게 살아가는 고민보다 살살, 좋은게 좋은거며 쉽게 쉽게 살아가는 나에겐 딱이다. 우울한 장면에 집중하기보다 어떻게든 웃기려는 글에 눈길이 갔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겨울을 배경으로 슬프지만 웃긴단편들을 읽으며 ’이젠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구나‘생각하며 읽으니 이 작품을 더 보내주기가 싫다. 어쩐지 겨울을 보내주고 봄을 맞이하는 것 같아서. 정말 계절이 끝나고 한 해가 끝나고 다음 해가 시작되는 것 같아서. 진짜 내가 한 살 더 먹은 것 같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