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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 유하 산문집, 개정증보판
유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시인으로서의 유하와 영화감독으로서의 유하 중 어느 편을 선호하는가? 아니, 유하 감독의 영화와 유하 시인의 시 중 어느 것을 선호하는가? 쉽게 결정하기 힘든 난해한 질문이다. 그래도 난 영화감독으로서의 유하를 선택한다. 유하의 시들 중 몇몇 편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솔직히 시(유하의 시가 아니라 일반론적 시를 말한다)는 읽으면서 충분히 이해하기가 어렵고, 그에 비해 영화는 좀 더 쉬운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물론 영화라고 모두 이해하면서 본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산문집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는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이 적은 시보다는 훨씬 쉽고 설명적이면서도, 시적 함축성이나 간결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좋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책의 초판본 제목 ‘이소룡 세대에게 바친다’라는 문구가 말해주듯이 책은 저자의 유년 시절의 추억을 다루다 보니, 청룡(청룽), 주윤발, 장국영을 보고 자란 세대인 내게는 낯설지는 않지만 쉽게 공감하기 힘든 풍경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몇몇 이야기들에서 겨우 그의 추억의 끝자락을 붙들 수 있었다.
게다가 책의 초판본이 1995년이라 유하의 시들에 대한 이야기는 담겼어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93년에 개봉한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개봉 첫날의 풍경뿐이다. <말죽거리 잔혹사>, <결혼은 미친 짓이다>, <비열한 거리>, <쌍화점>, 그리고 최근 개봉작 <하울링>까지의 영화 이야기를 기대한 내게는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주 매력적이다. 유하가 자신의 시들에 대해, 시적 상징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해주고 있는 것도 그렇고, 허수경이나, 진이정 등 그의 지인인 시인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재미있다. 또한 1990년대 영화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괴로웠던 대학시절 첫사랑(?)의 이야기도 재미있고 매력적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것은 담백한 글솜씨다. 시처럼 간결하고 함축적인 문체와 깊이 있는 사고, 우리 사회를 꿰뚫어보는 눈은 단연 돋보인다. 물론 대체될 수 있는 좋은 표현이 우리말에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거슬릴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외래어·외국어의 남용은 옥에 티다.
어쨌든 이 책은 ‘이소룡 세대’에게는 향수를, 유하 시인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그의 시 세계를, 90년대 영화 마니아에게는 옛 추억을 선물하는 재미있는 책이다.
사족: 이소룡 세대는 우리 사회에서 386세대로도 불린다. 익숙하지만 흔한 386세대라는 말보다 이소룡 세대라고 지칭하니 덜 정치적이면서 문화적인 느낌이 들어 좋다. 이소룡 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