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하고 고결한 밤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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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2000년대 여성 시인으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즈 글릭'의 시집이 드디어 국내에 정식 발매되었다. <아베르노>, <야생 붓꽃>, 그리고 <신실하고 고결한 밤>이 바로 그 산물.

그중에서도 <신실하고 고결한 밤>은 산문시 형식으로(물론 위의 다른 시집들도 그러하지만) 특히나 더 시가 아닌 하나의 연결된 소설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드는 작품이었다. 마치 한 사람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느낌에 함께 온 나희덕 시인의 해설집을 읽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은 루이즈 글릭이 말년이 된 시점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며 써내려간 자전적 시들의 모음집이라고 한다.

<우화>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의 첫 문을 여는 시였는데, 어디로 어떤 여행을 떠날 것이며 어떤 것을 목표로 할지 부산스럽게 고민하다 때론 햇살도 만나고 때론 비도 만나는 그러한 과정을 몇번이고 반복하였다는, 그러나 그 많은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여전히 첫 시작에 머물러 있었다는 내용을 통해 그녀가 지나온 인생이 어떠하였는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최근에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이기도 한, '나는 어떠한 목표를 향해 인생이란 여행을 떠날 것인가'. 이에 대해 그녀 역시 수없이 고민하였겠지. 하지만 나이가 들어 되돌아보니 여전히 스타트 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인생이란 그런 과정의 반복이란 것을. 그녀는 자신이 얻은 이러한 삶의 교훈을 미리 말하고 시작하며 회고의 첫 시작을 멋지게 알렸다.

그렇게 화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저 덤덤하게. 어렸을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자신이 겪은 아픔을 말하기도 하며, 이미 돌아가신 화자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등장한다. 그렇게 화자는 '밤'이 찾아올 때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옛 기억도 떠올리며 과거로의 끝없는 여행을 계속하다 다시 낮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또 다시 밤. 또 다시 낮. 낮과 밤이 계속되며 그렇게 화자는 과거와 현실을 오가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런 생각을 했어, 모든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는 사람들과

뒤로 돌아가길 원하는 사람들로 나뉜다고.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계속 움직이려는 사람들과

번뜩이는 검에 의해 달리던 궤도에서

멈추어지길 원하는 사람들.

-시 <신실하고 고결한 밤> 中. 나는 이 시점에서,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나? 아니면 뒤로?

한밤중에 누가 전화를 할까?

고민이 전화하고 절망이 전화하지.

기쁨은 아기처럼 잠을 자고 있고.

-시 <밖에서 오는 사람들> 中.

밤이란 시간은 참 신기하다. 수많은 고민이 찾아오는 시간. 그걸 이렇게 표현하다니 개인적으로 정말 재밌게 느껴진 구절이었다.

이 시집에서 화자는 앞으로 나아가 미래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다시 과거로 돌아가버리는 여행을 시작하고야 만다. 시작은 시작인데, 미래로의 시작이 아닌 과거로의 시작을 택한 것. 그렇게 화자는 끊임없이 과거를 그리워하고, 과거로 회피하고자 한다. 시 <시원의 풍경>에서 화자는 시간이 흘러 모두가 세상을 떠나고 자신이 홀로 남겨졌음을 깨닫는다. 이제부턴 자신이 혼자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화자는 소리치며 뛰어가지만 기차 안내원은 말한다.

"여기가 끝이란 걸, 당신 분명 알죠, 선로가 더는 없어요.

나는 내 사정을 더 강조했다. 그치만 선로는 돌아가잖아요.

... 집에 가 그 도시를 다시 보고 싶지 않나요?

여기가 나의 집입니다, 그가 말했다.

그 도시- 그 도시는 내가 사라진 곳이다."

선로를 돌려 기차를 타고 고향, 즉 과거로 돌아가려는 화자. 화자는 고향이 그립지 않냐고 안내원에게 묻지만 안내원은 이제 여기가 내 집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시 <유토피아>에서도 기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는 기차를 타기를 망설여하지만 여인은 말한다. "너는 기차를 타야 해."

시집을 읽는 내내 화자의 방황하는 마음이 공감되어, 현재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겪고 있는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하여 깊이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화자는 계속해서 방황하지만 수많은 의문들을 떠올리며 나름대로 답을 찾아가기도 한다. 시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갈수록 화자는 좀 더 발전된 듯한, 깨달음을 얻은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마침내 과거들 속에서 추억과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법을 깨달은 듯 하다. 과거와 미래의 공존. 시집의 제목에서 화자가 과거를 찾아 나섰던 '밤'을 마침내 신실하고 고결하다고 표현하게 된 것도 그러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닐까.라고 내멋대로 해석해본다. (시집 제목의 night는 knight(기사)와 night(밤)의 발음이 동일하다는 것에 착안해 나온 제목)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인생을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작에서 끝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라고들 하지만, 글릭은 조금은 다른 시선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인생이란 게, 꼭 앞, 즉 미래를 향해서만 달려야 하는 것인가? 가끔은 과거로 돌아가기도 하는 게 미래를 향한 시작이 될 수도 있다. 과거와 미래의 반복. 시작과 끝의 반복. 인생은 모순된 것들의 무한한 반복으로 이어지며 끝을 향해 나아가지만 끝에 다와갔을 때 문득 이렇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아 결국 시작점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였구나. 마치 시 <우화>에서 언급하였듯.

이러한 주제에 걸맞게 시집에 수록된 시들도 계속해서 무언가가 반복되는 듯한, 왔다갔다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실하고 고결한 밤>은 그녀의 3부작 중 <야생 붓꽃>, <아베르노>에 이어 마지막으로 읽게 된 작품이었는데, 다 읽고 보니 그녀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들이 몇 가지 있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 신이라는 존재가 화자로 등장하면서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가 서술된다는 점. 시작과 끝, 삶과 죽음, 낮과 밤, 아늑함과 난폭함 등 서로 양극단에 위치한 모순된 존재를 함께 가야 하는 존재로 표현하였다는 점. 자연이 굉장히 중요한 소재로서 비중 있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 무언가 알쏭달쏭한 흐름으로 시가 이어지지만 그것이 오히려 몰입력을 높여 자꾸 곱씹고 곱씹어보게 된다는 점.. 이 모든 것들이 내게 새롭고 참신하게만 다가왔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시들의 연속이었다.

더 이상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두려워 우울할 때,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고찰해보고 싶을 때, 이 시집을 다시금 꺼내들게 될 것 같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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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1
에밀리 브론테 지음, 황유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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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은 영국의 요크셔 지방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제인 에어의 작가 샬롯 브론테의 동생 에밀리 브론테가 생전에 남긴 유일한 소설이자 명실상부 영미문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이다.

 


 <줄거리>

언쇼 가문과 린턴 가문. 캐서린을 사랑했던 히스클리프의 이 두 가문을 향한 복수극

록우드라는 한 청년은 속세와 단절된 조용한 곳을 찾아 요크셔 지방에 위치한 한 저택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로 이주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워더링 하이츠에 거주 중인 자신의 집주인 히스클리프씨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집에 방문했다가 느낀 여러 기묘한 분위기에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지나치게 과묵하고 음습한 기운이 느껴지던 히스클리프씨, 인형 같은 외모의 소유자이지만 사교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며느리 캐서린, 하인인 줄 알았건만 캐서린의 사촌이었던 헤어턴. 이렇듯 알 수 없는 이상한 관계의 가족 구성원과 방에서 발견한 캐서린 언쇼(앞에서 언급한 캐서린과는 다른 사람)라는 사람의 일기장, 그리고 그녀의 유령이 나타나는 꿈, 창밖을 향해 광란에 찬 고통으로 캐서린이라는 이름을 울부짖던 히스클리프의 외침까지.

이 모든 것에 궁금증을 느끼게 된 록우드는 자신의 가정부이자 오랫동안 히스클리프를 알고 지내온 엘렌 딘에게 히스클리프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하게 되고, 이에 딘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본디 저택 워더링 하이츠에는 언쇼 집안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언쇼씨는 리버풀에 출장을 나갔다 길거리에 떠돌고 있던 검은 머리 남자아이를 불쌍히 여기고 집으로 데려와 키우게 되는데, 이 아이가 바로 '히스클리프.' 언쇼씨의 부인은 물론이거니와 자녀인 힌들리와 캐서린, 그리고 가정부로 일하고 있던 딘까지, 모두가 이 히스클리프의 존재를 탐탁치 않아 한다. 그럼에도 언쇼씨는 히스클리프를 자신의 친자식들보다도 더 아꼈으며, 캐서린 역시 서서히 마음을 열고 히스클리프와 둘도 없는 친한 존재가 되지만, 힌들리는 여전히 히스클리프를 증오하였고 이로 인해 언쇼씨의 눈밖에 나 내쫓기듯 대학에 보내지게 된다.

 

하지만 곧 언쇼씨는 죽게 되었고, 이로 인해 대학에 갔던 힌들리가 부인인 프랜시스와 함께 워더링 하이츠로 돌아오게 되며 모두를 망치게 한 비극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게 된다. 힌들리는 생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던 히스클리프를 미워해 그를 고립시켰으며, 교육받지 못하게 해 그를 '무지'하게 만들어버렸고, 그를 학대하기 시작한다. 이에 캐서린은 힌들리에 반발하며 히스클리프를 끊임없이 보호하였고,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서로에게 의지한 채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날이 깊은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캐서린은 우연한 기회로 린턴 가문이 거주하고 있던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방문하게 되고, 그 집의 아들 에드거 린턴에게 호감을 느껴 곧 그와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에드거에게 청혼을 받던 날, 캐서린은 딘에게 자신이 청혼 받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이러한 말을 하는데...

"저기 저 사악한 인간(힌들리)이 히스클리프를 그렇게 천하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나는 이 결혼은 생각지도 않았겠지.

지금으로서는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내 품위가 떨어지고 말 거야.

그러니까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애가 알아서는 안 돼.

그건 그 애가 잘생겨서 그런 게 아니야.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지.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그 애의 영혼과 내 영혼은 같아.

..

히스클리프는 지금까지 평생 그랬듯 앞으로도 내게 소중한 존재일 거야.

에드거도 그 아이에 대한 반감을 떨쳐야 하고, 아니면 적어도 그 아이를 참아줄 줄 알아야만 해.

...만일 히스클리프와 내가 결혼하면 우리 둘 다 거지꼴을 면치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

그에 반해 내가 린턴이랑 결혼하면 나는 히스클리프가 성공하도록 도와줄 수 있고, 오빠(힌들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도 있어."

-pp.139~142

캐서린이 에드거와의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에드거를 진심으로 사랑해서가 아닌, 어디까지나 '히스클리프'를 위해서였다. 에드거와 결혼해 그의 재산으로 힌들리에게 학대 당하고 있는 히스클리프를 구해주기 위해서. 자신이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둘 다 거지가 될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에 그녀는 히스클리프를 저버리고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인 에드거와의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캐서린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이 앞에 말한 '지금으로서는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내 품위가 떨어지고 말 거야'라는 말만 듣고 그녀를 오해해 집을 나가버렸고, 그 길로 워더링 헤이츠를 떠나게 된다. 폭풍우가 치는 날 밤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캐서린은 뒤늦게 그를 찾아 떠돌지만 결국 그를 찾지 못한 채 약속대로 에드거와 결혼하게 된다.

 

.

.

.

 

그리고 3년 후. 히스클리프는 다시 캐서린의 눈 앞에 나타난다. 몰라보게 변해진 모습으로. 힌들리로 인해 교육받지 못했던 이전과는 달리 매우 지적여졌으며, 용모 역시 비실비실대고 더럽던 그가 아닌 우람하고 깔끔한 외모를 갖춘 채. 그렇게 그는 다시 돌아와 자신을 학대한 힌들리에 대한 복수(언쇼 가문에 대한 복수), 그리고 자신이 사랑해 마지 않던 캐서린을 빼앗아간 연적 에드거 린턴에 대한 복수(린턴 가문에 대한 복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캐서린은 복수에 눈먼 히스클리프를 바라보며 괴로워하고 그를 멈추어보려고도 노력하지만, 그는 멈추는 법 따위 모르듯 그저 앞만 보고 돌진하는 폭풍과도 같이 자신의 복수를 이행해간다.

그렇게 모두가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게 되는데...

과연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어떠한 막을 내리게 될까.

 

 


<느낀 점>

'복수'만을 위한 삶은 얼마나 허무한가

이 소설은 말 그대로 '폭풍'과도 같은 소설이었다. 작가의 필력도 거침없었고, 폭풍과도 같은 머리 아픈 사건들이 끊임없이 휘몰아쳤으며, 등장인물 역시 모두가 폭풍과도 같은 성격을 가졌기 때문. 정말 하나같이 성격이 예사롭지가 않아 읽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과장 안 하고 정말이지 대화의 80%가 증오와 분에 가득한 말들뿐이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인물인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사랑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무시했던 힌들리, 그리고 자신의 연적 에드거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바쳤다.

그의 복수 솜씨는 놀라웠고, 읽는 내내 정말 '악마'같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수준이었다.

고전문학을 읽다 보면 복수심에 눈이 멀어 가스라이팅을 해대는 존재를 종종 접할 수 있는데(예를 들어 위대한 유산의 헤비셤 양), 히스클리프는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봉이었다.

그는 가스라이팅으로 정말 많은 인간을 조종해나갔다. 힌들리에 대한 복수로 힌들리를 도박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만들었으며, 그의 아들 헤어턴을 무지와 야만으로 가득찬 아이로 만들어버린다. 마치 어린 시절 힌들리에 학대 당해 무지해지고 망가져버린 자신처럼 말이다. 그 증거로 헤어턴은 작품 내내 사투리만을 구사하고 글은 전혀 읽을 줄도 모르는 상태로 나온다. 이는 히스클리프의 보살핌 아래 헤어턴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또한, 히스클리프는 에드거 린턴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그의 여동생 이저벨라에게 접근해 결혼식을 올리는데, 이로 인해 이저벨라의 삶은 아주 제대로 망가지게 된다. 이뿐인가.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던 캐서린의 딸 캐서린을 자신의 아들 린턴과 강제로 결혼하게 만들어 린턴 가의 재산을 아주 탈탈탈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복수'만이 그의 유일한 삶의 목표였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린턴가가 진심 제일 안타깝다. 에드거는 괜히 캐서린 한명 좋아했다가 도대체 얼마나 인생이 망한 거야. 물론 비이성적인 캐서린의 모습을 보고도 그녀를 사랑한 에드거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 역시도 사랑하며 동시에 증오했다. 그녀를 사랑한만큼 자신을 저버린 그녀가 용서되지 않았다고. 역시 그냥 사랑보다도 '애증'이 무서운 법이다.

캐서린에 대한 그의 사랑은 요즘 말로 '집착광공'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캐서린을 보기 위해 캐서린의 무덤을 삽으로 퍼내려는 장면에서 레알로 기겁했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그는 종국엔 평생을 염원하던 자신의 복수를 이루지만, 모든 것을 끝낸 후 캐서린을 닮은 헤어턴과 캐서린(캐서린의 딸)이 함께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말을 흘린다.

"형편없는 결말이야, 안 그래?

지독히도 애를 썼거만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끝나버리고 말다니?

..

그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지?"

-p.544. 결국 결말을 선포하는 히스클리프의 대사.

소설을 읽는 내내 깊이 혐오했던 히스클리프이지만, 이 대목에서만큼은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그는 캐서린을 닮은, 자신의 복수 대상이었던 이들의 2세들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마무리짓는다.

이미 복수가 끝나기도 하였고, 결국 캐서린을 닮은 그들을 복수하는 것은 캐서린을 복수하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복수만을 위한 삶을 살아간 인물들 중에 그 끝이 좋았던 인물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과연 그 성대한 복수극을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 지나친 복수는 그들을 짓누르는 데에 대한 기쁨보다도 좌절과 절망이 더 클 뿐, 점점 자신을 망쳐버리고야 만다. 부정적인 감정은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깊게 자신을 좀먹고 갉아먹기에.

 

이 작품 속에서 히스클리프는 누가 뭐래도 악역이 맞다.

복수해야 하는 대상뿐만이 아닌 엄한 사람들까지도 끌어들여 모두의 인생을 망쳐놓았으므로.

그러니 나는 그를 동정하고픈 마음은 없다.

 

 

 

"격자창 옆의 전나무를 흔들던 그 바람 소리를 듣고 싶어.

그 바람을 느끼게 해줘.

황야에서 곧장 불어오는 그 바람을.

그 바람을 한 번만 들이마시게 해줘!"

-p.214. 히스클리프, 린턴과 한바탕 한 후 정신이 미쳐가던 캐서린의 한 마디

또한 히스클리프의 영혼의 동반자나 다름 없었던 캐서린은 마지막까지 자유를 갈망하며 서서히 미쳐간다.

자신으로 인해 시작된 히스클리프의 복수로 모든 것이 망가져버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거겠지.

이러한 상황속에서, 그녀는 그렇게 그저 아무것도 몰랐던 순수했던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캐서린이란 캐릭터가 재밌었던 점은, 그저 얌전하고 여린 여자주인공이 아닌 히스클리프에 맞먹는 성깔을 가진 터프함의 소유자였다는 점.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곧이곧대로 다 말하는 말괄량이 같은 캐릭터였다는 점에서 매우 참신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느낀 가장 큰 고통은 히스클리프가 느낀 고통이었고...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건 바로 히스클리프야.

...린턴을 향한 나의 사랑은 숲속의 나뭇잎과도 같아. 겨울이 오면 나무가 변하듯 시간이 지나면 변할 거라는 걸 나도 잘 알아.

하지만 히스클리프에 대한 나의 사랑은 땅 아래 있는 영원한 바위와도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거야.

넬리, 내가 곧 히스클리프야."

-p.143.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이렇게 성격까지 똑 닮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복잡미묘한 사랑의 감정은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이다.

특히나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고백하는 캐서린의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그가 착해서, 매력적이여서, 나를 사랑해주어서라는 이제껏 들어온 흔해 빠진 사랑의 이유가 아니었기 때문.

그녀가 히스클리프를 사랑한 이유는 그저 '그가 곧 나'였기 때문에.

그가 내게 기쁨만을 가져다주는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고, 그의 고통마저 곧 나의 고통이었기 때문에.

히스클리프와 자신의 영혼을 동일시하는 캐시의 모습에서 이제껏 내가 생각해온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단번에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곧 나처럼 느껴지는 사람. 그런 사람을 단 한번뿐인 짧은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극히 어려우면서도 축복과도 같은 일이 아닐까. 그렇기에 히스클리프에 대한 캐서린의 사랑이 더욱더 위대하게만 느껴졌다.

 

캐시는 린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숲 속의 나뭇잎'과도 같고, 히스클리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땅 아래 있는 영원한 바위'와도 같다고 하였다. 나뭇잎은 지상 위에 있는 존재로서 눈에는 보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색이 바래져 변해버리고 마는, 즉 린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끝이 유예된 사랑이지만,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은 땅 아래 있어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무기한의 사랑이라고. 히스클리프 대신 린턴을 택해야만 하는 그녀의 사랑을 이렇게 비유하다니. 사랑에 대해 이러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그 의미를 풀어나간 에밀리 브론테의 필력에 매우 감탄한 대목이었다.

 

 

 

"마음이 착하면 얼굴도 예뻐지는 거란다, 얘야.

마음이 나쁘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얼굴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추하게 변하는 법이지."

-p.100. 딘의 말.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정말이지 모두가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감정에 휩쓸리고, 하나같이 폭풍과도 같은 거센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이성적이고 따뜻한 면모를 보이는 인물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소설의 화자인 '엘렌 딘.'

모두를 증오했던 히스클리프도 딘에게만큼은 나름 정중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캐서린과 이저벨라 역시 어떻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공감능력을 잃지 않은 채 늘 한결같이 따뜻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느냐고 딘에게 묻는다.

딘은 이 모든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제3자이며, 진심으로 이 복수극에 휘말린 모든 이들을 불쌍히 여겼다. 그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에게 해주는 말들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정곡을 찌르는 말들뿐이며 그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이 피해를 받지 않도록 중재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 또한 보이고, 주변 사람들을 알뜰살뜰하게 챙긴다. 게다가 그녀의 유쾌함, 그리고 그녀와 조지프의 케미는 이 소설에서 감초 역할을 아주 제대로 수행해낸다. 딘마저 없었더라면 이 소설은 정말 황폐함과 우울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소설을 보는 내내 딘이란 인물에 굉장히 큰 감명을 받아 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딘이야말로 귀인이 아닐까 싶다.

 

 


<마무리>

그렇게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로 시작해 그들이 남긴 2세들의 이야기로 끝이 난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 많은 일을 겪고 드디어 서로에게 의지하게 된 히스클리프에 의해 침몰당한 린턴가문과 언쇼가문의 캐서린과 헤어턴을 보며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결국 그들의 부모들은 히스클리프로 인하여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그들의 자식들은 그럼에도 히스클리프에 굴복하지 않고 저들이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나갔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폭풍의 언덕>은 뛰어난 흡입력으로 이야기 구성이 마치 막장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이 흥미진진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읽어내려나간 소설이다. 사실 아직도 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감정선이 그렇게 막 잘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그들의 사랑에 어이없게 말려들어 인생을 망친 다른 등장인물들이 너무나도 안타깝지만.. 어찌되었든 작가의 필력이 그 모든 것을 정당화시켜줄만큼 너무나도 좋았다. 내가 마치 워더링 하이츠에 와 있는 것만 같이 그 모든 사건들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사건들의 연속,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나 드디어 폭풍이 걷힌 워더링 하이츠. 이번 겨울을 폭풍이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는 이 소설과 함께 시작하게 되어 영광이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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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르노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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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노벨문학상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시인이자 2000년대 여성 시인으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즈 글릭.' 시집 '아베르노'는 명실상부 그녀의 최고 대표작이다.

시집 아베르노를 구입하면 시집뿐만이 아닌 김소연 시인과 옮긴이 정은귀가 작성한 이 시집의 해설집도 같이 오는데, 개인적으로 이 해설집을 정말 인상깊게 읽었다. 본격적으로 시집을 읽기에 앞서 해설집의 앞부분부터 정독하였는데, 루이즈 글릭을 '자신의 경험을 '되기억'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겨 온 시인'이라고 표현한 점이 마음에 남았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재정의하기 위해 해체를 수행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또 삶을 살아가는 내내 스스로의 허물을 벗겨내고 또 벗겨내 여러 번 죽음으로써 여러 생애를 겹쳐 산다는, 그래서 자연과 같다는. 그래서 기억에서 빠져나가 두려움 없이 되살아나고 되살아나 계속 살아가는 존재"라고. 이 표현이 뇌리에 박혀,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 이 점을 기억하며 아베르노를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아베르노는 총 18개의 시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베르노'는 라틴어로 '지옥'을 뜻하며, 이탈리아 나폴리 서쪽의 호수 이름이기도 하다. 그 옛날 로마인들은 여기에 지하 세계로 향하는 입구가 있다고 믿었다고 하는데, 지하 세계의 입구를 의미하는 시집 아베르노는 '지하의 신 하데스에게 납치된 데메테르(대지의 신)의 딸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를 차용하고 있다.

도입부의 시 <야간 이주>에서 화자는 새들의 야간 이주 풍경을 보며 죽은 이들은 더 이상 이러한 풍경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곧 화자는 깨닫는다.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들이 과연 이러한 풍경을 보기를 원할까? 그러고는 이에 스스로 대답한다. 영혼은 더 이상 이러한 즐거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살아있는 자들은 이미 떠난 죽은 이들을 안타까워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안타까운지는 모르는 일이다. 우린 아직 그 누구도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감히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평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자신의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 것. 이러한 사실을 시작부터 일깨워주는 이 시가 내게는 굉장히 새롭게 다가왔다.

나 더는 신경 쓰지 않아

바람이 무슨 소리를 만드는지

언제 내가 조용해졌는지, 그 소리를 묘사하는 게

언제 처음 무의미하게 느껴졌는지

그게 무슨 소리이건 그 자체를 바꿀 수 없으니-

'시월' 中

인상 깊었던 시 중 하나였던 <시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시월(10월)의 1편에서 화자는 이미 추위와 밤, 공포와 아픔이 끝난 게 아니었나 생각했지만, 그것들은 다시 찾아왔다.

그러면서 2편에선 여름이 끝난 이후(아마도 시의 제목인 10월)를 '난폭함 이후의 아늑함'이라고 비유하는데, 난폭함 이후의 아늑함, 즉 병 주고 약 주는 건 지금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면 이미 폭력(난폭함)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놓았으니. 일단 바뀌었고, 굳어졌으니 다시 반응해달라고 요구하지 말라고 한다. 이미 내 몸은 차가워져서 벌거벗은 벌판과도 같다고.

내면의 상처(난폭함)로 (아늑함)이 찾아왔음에도 바뀌어버린 나의 모습을, 여름날 강렬한 햇빛(난폭함)이 지나가고 찾아온 10월(아늑함)의 자연의 모습(차가움)에 비유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10월은 그 여름날 난폭함이 지나고 아늑함이 가득한 계절이지만, 동시에 겨울에 다다르며 차가워지고 대지가 굳어져간다. 상처 받은 내 마음이 이미 굳어버린 듯.

그렇다면 시인은 왜 여름날의 강렬한 햇빛을 난폭함으로 표현하였을까? 열렬함은 좋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때로는 그 열렬함이 누군가를 옥죌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내내 열심히 달렸음에도, 열심히 살았음에도 상처는 찾아온다.

(혹은, 이 시집이 페르세포네 신화에 착안하여 작성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관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페르세포네에 대한 하데스의 열렬한 사랑이 (난폭함)이 되어 납치란 행위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납치 이후 하데스는 온 힘을 다해 페르세포네를 사랑해주었지만(아늑함), 난폭함 뒤의 아늑함은 이미 상처로 얼룩진 그녀를 치유해주기에 과연 충분했을까.

또 한편으로는 난폭함 뒤의 아늑함이란 말이 데메테르에게도 적용된다. 하데스의 페르세포네 납치라는 (난폭함)이 휩쓸고 지난 후 찾아온 가을의 (아늑함)이 그녀에겐 참을 수 없이 화났을 것이다. 그랬기에 대지를 수확과 풍요가 가득한 가을에서 겨울로 바꾸어버렸겠지)

3편에선 다시 겨울이 지나고 초록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며 화자에게 내게로 오라며 손을 건넨다. 그러면서 말한다. '죽음은 나를 해칠 수 없어. 내 사랑하는 삶, 네가 나를 해친 것 이상으로는.'

우리는 때때로 죽음보다도 삶이 더 무섭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죽음이 당도함으로써 이 모든 삶의 무게를 내려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하다. 그만큼 아무리 죽음이라 할지라도 삶만큼 나를 해칠 수는 없을 거라는 화자의 말에서 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4편에서 그리고 다시 봄이 지나고 가을의 빛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가을은 다시 화자에게 말한다. 넌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서 '네'가 등장한다. 화자는 이런 가을임에도 여전히 네 안에선 불타오름이 느껴진다고, '박탈된 희망이 너를 파괴하지 않았지'라고 말한다.

가을이 되면 차갑게 식고 굳어져버리는 화자와는 달리 네는 가을에도 사그러지지 않는 열기를 갖고 있는 사람인가보다.

화자는 그런 네를 보고 네는 '특혜'를 받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말하고 있다.

5편에서 이 세계는 각자 생각에 잠겨 말은 않지만 동반자로서 우리들이 서 있고, 나는 말은 않지만 일하고 있으며, 시는 말한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6편에서 화자는 내 친구 '대지'가 씁쓸해한다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햇살(여기서 햇살은 아마도 앞에서 말한 여름날의 강렬한 햇살. 즉 (난폭함)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이 대지를 망쳤다고 한다. 대지는 이제 혼자 남겨지기를 원하고, 대지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정말 포기해야 할 때라고. 그렇게 대지를 망쳤던 낮의 햇살이 지고, 밤이 찾아오며 차가운 별이 떠오른다. 그리고 대지를 망친 햇살과는 달리, '별들은 아무것도 주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즉 무관심. 화자는 이런 별과 비슷한 존재인 달을 보며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이 시를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에서 해석해보자면, 화자는 시 전반에 걸쳐 여름날, 혹은 낮의 '따갑고 강렬한 햇살'을 '난폭함'이라고 표현한다. 그러고 6편에서 봤듯이, 이에 대조되는 '차가운 별'은 무관심하기에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그리 강하지 않은 빛으로 우리를 비추고 있다며 호감을 드러낸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화자는 오히려 지나치고 열렬한 관심에서 벗어나 그저 그 자리에 묵묵히 있어주는, 그런 무관심을 오히려 원하지 않았을까 싶다.

때때로 지나친 관심은 독이 되듯이, SNS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말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치게 만든다. 그렇기에 때때로 그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혼자 사색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는데 아마 화자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마치 시월의 6편에서 태양과 끝난 대지가 이제는 혼자 남겨지기를 원한다는 대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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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석이 무조건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시월>을 읽고 이러한 점들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시'에서 작가의 의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은, 내가 그 시를 읽고 어떻게 느끼고 해석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렇기에 나는 아베르노를 이렇게 느꼈지만, 다른 사람은 또 다른 해석, 다른 관점에서 이 시를 바라봤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 감상은 즐겁다.

신과의 경기장에서 당신 차례가 온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페르세포네 그 방랑자' 中

페르세포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하의 신 하데스에게 납치되었다. 즉,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로 생각한다면 페르세포네는 신과의 경기에서 패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루이즈 글릭은 이 페르세포네 신화를 전복하는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페르세포네가 사실은 자신의 의지대로 납치된 것이었다면? 한번도 그러한 관점에서 이 신화를 바라보았던 적이 없던 나이기에, 내게는 이러한 새 제안이 굉장히 낯설면서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시 <페르세포네 그 방랑자>에서 글릭은 어쩌면 페르세포네 입장에서 대지와 죽음은 똑같은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녀는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죽음의 세계로 끌려갔다. 그러나 글릭의 시에서 페르세포네는 자신에게 부여된 '딸'이라는 역할에서 벗어나고자 대지(그녀의 어머니인 데메테르)를 떠나고 싶어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지(데메테르)나 죽음(하데스)이나 그녀에겐 같은 부류라는 것이다.

'결국엔, 이상하게도, 똑같아 보이는 대지와 죽음 사이를 너는 떠돈다. ('페르세포네 그 방랑자' 中)'

그리고 시 <순수의 신화>에서, 페르세포네는 아예 하데스에 의한 납치가 사실은 자기가 의도한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기라도 한 듯 하데스가 나타났다고. 그렇게 더 이상 순진한 소녀가 아닌 여자가 되어버린 자신을 그녀는 바라본다.

<헌신의 신화>는 하데스의 관점에서 쓰여진 시다. 하데스는 페르세포네를 사랑했기에 그녀를 위해 세상의 복사판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말한다. '사랑하오, 아무것도 당신을 해칠 수 없소'가 아닌, '당신은 죽었소, 아무것도 당신을 해칠 수 없소'라고. 그게 더 진실하고 그럴듯한 시작인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동감한다. 때론 진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도움이 되지.

이 시에서는 페르세포네를 납치한 하데스가 로맨틱하게 표현되는데, 이러한 관점이 색달랐다.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나는 납치되지 않았어.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내가 나를 바친 거야,

나는 내 몸을 벗어나고 싶었어, 심지어, 가끔은,

내가 이걸 의도했어.

'순수의 신화' 中. 사실 이 납치극은 자신이 의도한 것이었음을 페르세포네는 고백한다.

시집 <아베르노>는 전반적으로 내가 이해하기에 쉬운 시집은 아니었다. 이러한 류의 시집을 제대로 읽어본 것이 처음이라 그런지 더욱더 그랬다. 그럼에도 읽는 내내 흥미로웠다. 시집 전체에 걸쳐 공통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대지'인데, 화자는 과연 이 대지를 어떠한 의미로 사용하였을까 그 점이 궁금했다. 페르세포네 신화를 차용한 이 시집. 그리고 그 페르세포네의 어머니이자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 그렇다면 대지는 데메테르를 의미하는 걸까?

2부에서부터는 시가 뭔가 이해가 안 된다 싶으면 이게 데메테르가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페르세포네가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상상하며 읽었다. 그러니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 생겼다. 절벽에 꽃을 피워 페르세포네를 유혹한 하데스, 페르세포네를 잃고 상실감에 겨울이란 계절을 만들어버린 데메테르의 심정, 가끔 대지 위를 추억하는 페르세포네 등의 이야기들.. 아베르노를 읽기 전 꼭 페르세포네 신화를 한번 읽어보고 감상하는 걸 추천한다.

그렇다고 꼭 페르세포네 이야기에만 한정시켜 이 시를 감상할 필요는 없다.

이 시는 자신이 나고 자란, 자신의 어머니가 있는 고향 '대지'를 떠나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지하 세계', 즉 죽음의 세계로 들어선 페르세포네의 떠남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 모두 역시 살아 생전 고향에만 살지는 않는다. 성장하고 어른이 됨에 따라 새로운 세계로 입성하게 된다. 마치 대지를 떠나 지하로 간 페르세포네처럼.

그렇기에 새로운 세계에서 변화를 맞이하는 페르세포네의 감정이 더욱더 공감된다. 그녀는 대지에서의 추억을 그리워하다가도, 낯선 세계에 대해 갈망하며 새로움을 발견한다. 모순된 감정의 공존. 부모님을 떠나 사회로 첫발을 내딛는 과정과 똑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페르세포네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

글릭은 페르세포네가 사실은 자신의 의지대로 납치된 것이었다면?이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우리가 고향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서듯, 그녀 역시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낯섦과 새로움은 언제나 리스크를 동반한다. 이에 글릭은 경고한다. '하지만 무지는 앎을 의도할 수 없다. 무지는 상상되는 어떤 것을 의도한다, 존재한다고 믿는 것을.' 페르세포네는 대지를 떠나기 위해 지하세계로 납치되는 것을 의도했다 하지만, 그 지하세계에 정작 뭐가 있을 줄 알고 무모하게 그런 납치를 의도한 걸까. 그녀가 지하세계가 실상 어떤 곳인지 그에 대해 무지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 역시,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환상을 쉽게 갖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무지가 어리석은 생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글릭은 이 구절을 통해 말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알고도 시도하는 게 인간 호기심의 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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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마지막, 아베르노의 대미를 장식한 <페르세포네 그 방랑자>를 읽는 순간 소름이 돋으면서도 무언가 큰 깨달음이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 루이즈 글릭이 페르세포네 신화를 차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

데메테르는 자신이 생명을 부여했던 그 존재(페르세포네)가 자신을 벗어나자, 그녀가 돌아오기를 계속해서 부르짖는다. 자식을 내보낸 부모의 마음은 다 이와 같겠지.

그렇게 페르세포네는 1년 중 3분의 2는 지상에서, 3분의 1은 지하에 머무르게 되는, 그렇게 지상과 지하, 즉 삶과 죽음을 계속해서 오가는 삶을 살게 된다.

'삶과 죽음을 오가는 삶'.

김소연 시인이 말했던, 루이즈 글릭은 여러 번 죽음으로써 되살아난다는 것. 그래서 두려움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

죽었음에도 계속해서 살아나기를 반복하는 글릭의 삶은, 마치 죽음(지하)과 삶(지상)을 오가는 페르세포네와 같은 삶이었던 것이다.

죽어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되살아나는 것, 그것은 나 자신과의 끝없는 투쟁. 글릭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분명 더욱 단단하고 발전된 존재가 됐음이 틀림없다.

해설집에서 옮긴이 정은귀는 이런 말을 한다. "딸을 기다리는 어미의 눈물도, 죽어 가는 아비를 바라보는 자식의 슬픔도, 이 세상을 잇게 만드는 모든 사랑의 말들도 모두 죽음 안에서, 죽음을 알 때 비로소 자유롭다."

루이즈 글릭은 시를 써내려가며 죽음을 인식하고, 또 여러 번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참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갔다.

그러한 점에서 그녀의 시를 읽다보니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 '하이데거'의 사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죽음을 인식하고 수용하여라. 그러면 참된 실존을 회복할 수 있을 테니.

나는 모순된 단어가 참 좋다. 죽음과 삶. 난폭함과 아늑함. 애정과 비탄. 두려움과 용기. 글릭은 이러한 모순된 감정을 시로써 풀어나갔다. 이 세상은 어느 한 가지만을 택할 수는 없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임에도 항상 함께할 수밖에 없는 것.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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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했듯이, 그리고 아베르노를 읽으며 느꼈듯이, 루이즈 글릭은 자신의 기억을 재정의하기 위해 시를 써내려갔다. <아베르노>에 수록된 시들을 읽다보면 화자가 과거를 기억하기를 회피하거나 그 사이에서 방황하거나(시 <풍경>), 또 어느 순간 그 기억들을 끄집어내기도 하는(시 <프리즘>) 모습을 보이는 걸 알 수 있다. 회피하고픈 자신의 아픈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 해체하는 작업은 여간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재정의하고 발전시켜나가는 루이즈 글릭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동시에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내 삶을 재정의하고 발전시켜나갈 것인가'라는 과제가 내 머릿속에 던져졌다.

더불어, 전부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즈 글릭의 시들을 꼭 한번 읽고 음미해보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번역본으로 나와 그녀의 걸작을 감상하고 곱씹어보고 또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점에서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녀가 내 최애 시인이 될 것 같은 느낌.

페르세포네 이야기라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차용함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려는 노력을 담은 그녀의 시집 <아베르노>는 정말 흥미롭고 새롭다. 노벨문학상을 탄 거장인만큼, 그녀의 시가 궁금하다면 명실상부 그녀의 대표작 이 <아베르노>부터 먼저 접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시들의 모음집이 한편의 소설처럼 읽히는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것이다.


정말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부분들의 모음.

그건 기다림의 시간,

유예된 행동의 시간이었다.

나는 현재에 살았다,

그건 네가 볼 수 있는 미래의 일부였다.

과거는 내 머리 위에 떠돌아 다녔다.

보이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해와 달처럼.

온갖 모순에 지배되는 시절이었다,

가령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겁이 났어처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현재의 내 심정을 이토록 잘 대변해주는 구절이 또 있을까)

..

평생을, 너는 좋은 때를 기다린다.

그러면 그 좋은 때는

행해진 행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풍경' 中

내 잠에 대해선, 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소리쳤을 때,

뜻밖에도 내 목소리가 나를 달래 주었다.

의식의 침묵 속에서 나는 내게 물어보았다:

내 인생을 왜 내가 거절했지? 그리고 대답했다

Die Erde iiberwaltigt mich:

대지가 나를 무너뜨린다.

'풍경' 中

대지는 애도하는 법을 모른다는 걸,

애도하는 대신에 바꿀 거라는 걸.

그런 다음 그가 없어도 계속 존재할 거라는 걸.

'아베르노' 中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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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붓꽃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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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이맘때쯤, 2000년대 여성 시인으로서는 최초로 '루이즈 글릭'이라는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거머쥐었다는 소식에 그녀의 시를 찾아 읽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 정식 발매된 루이즈 글릭의 시집이 하나도 없었던 터라 류시화 시인이 번역했다고 들은 '눈풀꽃'만을 하나 읽었었는데, 시의 내용이 인상적이고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해 가끔 생각날 때면 다시 찾아 읽곤 했다.


이 시가 너무 마음에 남아 언젠간 그녀의 시집이 국내에 발매된다면 꼭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는데,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시공사에서 마치 선물처럼 루이즈 글릭의 정식 시집을 무려 3가지나 출간해주었다. 이름은 「야생 붓꽃」, 「아베르노」, 「신실하고 고결한 밤」.


그중 '야생 붓꽃'은 내가 읽었던 시 '눈풀꽃'이 수록된 시집으로,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받은 그녀의 대표작이다. 야생 붓꽃이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시집은 자연, 즉 '가드닝(정원 가꾸기)'을 소재로 한 시들의 모음집이다. 시집에는 시적화자가 총 3명이 등장하는데, 바로 '신, 식물, 인간'이다. 그래서 특이하게도 전반적으로 식물은 인간에게, 인간은 신에게, 신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흥미로운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야생 붓꽃에 수록된 시들을 모두 유기성 있게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그냥 읽으면 처음엔 약간 이해가 안 되는 불분명한 부분들이 있을 수 있는데, 시집과 함께 딸려오는 해설집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시집에 대한 큰 틀을 말해주는 것은 물론, 처음 시를 읽을 땐 내가 감상하고 느낀 대로 시를 해석해본 후 그 다음에 해설집을 읽으니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동시에 아,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라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야생 붓꽃에서 '식물'들은 인간을 때로 힐난하기도 하며 깨달음을 건네준다. 눈 앞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괜히 다른 대상에게 화풀이하는 인간의 못난 모습, 생각하지 말고 한번 활짝 열고 느껴보라는 꽃양귀비의 말,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않고 가난한 생각에 갇혀있는 모습을 지적하고, 솔직한 마음을 얘기해보라는 식물들의 말. 식물의 관점에서 관찰한 '인간'이란 존재를 읽으며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 깨달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들의 진심 어린 충고들을 읽으며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져만 갔다.


그와 동시에 화자가 '인간'인 여러 '기도' 시들을 통해선 인간의 우울증에 관해 언급하는데, 우울했을 때의 내 감정을 대변해주는 듯한 말들에 많은 공감이 되었고 또 용기도 얻을 수 있었다. '신'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의 모습 역시 흥미로웠다. 너희에게 대지란 침대와 대기의 담요, 모든 걸 다 주었지만, 엄청난 존재가 되지 못한 채 그저 조잘대는 작은 모습에 멈춘 너희 인간들이 가엽다는 신의 말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야생 붓꽃은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시집이었다. 단순히 인간인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 존재에 대해선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실을, 식물이 생각하는 인간,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 신이 생각하는 인간 총 3가지의 시점을 읽어보며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지 그에 대해 보다 입체적으로 생각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들의 말에서 때론 팩트 폭력에 반성을 하기도 하고, 때론 다정한 말에 위로를 얻고, 공감도 하며 루이즈 글릭이란 시인이 인간에 대해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있는지 느낄 수 있는 그런 따뜻한 시들이었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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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지워드립니다 - 특수청소 전문회사 데드모닝
마에카와 호마레 지음, 이수은 옮김 / 라곰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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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눈이 내리는 밤하늘과 불이 켜진 건물이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책 <흔적을 지워드립니다>는 특수청소 전문회사인 데드모닝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데드모닝은 단순히 누군가의 방을 치워주는 평범한 청소회사가 아니다. 그들은 주로 고립사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유품을 정리해주며 그들의 이승에서의 흔적을 지워주는 일을 한다.

 

소설의 주인공 와타루는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상복을 입은 채 착잡한 마음으로 한 일식집에 들어서게 된다. 그곳에서 자신과 같이 상복을 입은 의문의 사나이 사사가와를 만나게 되는데, 사사가와의 옷에 토사물을 묻히게 된 와타루는 그의 옷을 깔끔히 세탁한 후 이를 돌려주기 위해 사사가와가 운영하는 회사인 '특수청소 전문회사 데드모닝'에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사사가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그의 권유로 유품을 정리하는 일을 아르바이트로 시작하게 된다.

 

와타루는 사사가와를 도와 여러 죽음의 현장을 다니며 돌아가신 이의 흔적을 청소한다. 같은 집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의 죽음을 모르고 있던 형, 화해하지 못한 채 결혼식을 앞두고 사고로 죽게 된 남편을 잊지 못한 아내, 자식의 죽음을 외면하고픈 어머니 등 여러 사연을 가진 죽은 이의 유족을 만나며 그는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소설의 처음에 와타루는 사사가와에게 이런 말을 한다. "대충 사는 거죠. 거창한 꿈이나 희망이 없더라도 살 수 있잖아요. 해파리처럼요. 제 목표는 해파리 같은 삶이에요. 그저 도시를 떠다니는 거죠. 그런 인생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인생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독이 되는 법이거든요."(p.20) 이러한 말을 내뱉던 와타루의 말이 왜인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목적 없이 살게 된 많은 현대인의 마음을 대변해주던 와타루가, 다른 이의 유품을 정리하며 많은 것을 느끼고, 또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며 마음 한 구석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그의 삶을 응원하고 싶었다.

 

죽음이 인간에게 주는 충격은 강렬하다. 우리는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자주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씩 들려오는 가까운 이의 죽음, 뉴스에서 들려오는 사망 소식 등은 우리로 하여금 그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렇기에 삶은 소중하다. 나는 다시는 오지 않을 한번뿐인 생애를, 한번뿐인 나의 인생을 잘 꾸려나가고 있는 것인가. 소설 속 죽은 이의 사연을 읽으며 이러한 생각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누군가의 이승에서의 흔적을 정리하는 일은 단순히 '청소'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죽은 이를 기리고,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며, 그 혹은 그녀를 대신해 이승에서의 삶을 대신 마무리해주는 뜻깊은 일이다. 유품을 정리하는 걸 께름칙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결례다. 이는 한때 이 세상에 발을 디뎠던 한 사람의 생을 기억하고 존경하며 떠나보내는 경건한 의식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사가와가 했던 말로 서평을 마무리하고 싶다.

"장례식이 끝난 뒤에 소금을 뿌리는 건 죽음으로 더럽혀진 내 몸을 씻는다는 의미야. 하지만 죽음은 더러운 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언젠가는 찾아오는 당연한 현상이야. 그러니까 소금 뿌리지 마. 소금은 수박이나 튀김에 뿌려야지."(p.16)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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