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하고 고결한 밤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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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2000년대 여성 시인으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즈 글릭'의 시집이 드디어 국내에 정식 발매되었다. <아베르노>, <야생 붓꽃>, 그리고 <신실하고 고결한 밤>이 바로 그 산물.

그중에서도 <신실하고 고결한 밤>은 산문시 형식으로(물론 위의 다른 시집들도 그러하지만) 특히나 더 시가 아닌 하나의 연결된 소설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드는 작품이었다. 마치 한 사람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느낌에 함께 온 나희덕 시인의 해설집을 읽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은 루이즈 글릭이 말년이 된 시점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며 써내려간 자전적 시들의 모음집이라고 한다.

<우화>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의 첫 문을 여는 시였는데, 어디로 어떤 여행을 떠날 것이며 어떤 것을 목표로 할지 부산스럽게 고민하다 때론 햇살도 만나고 때론 비도 만나는 그러한 과정을 몇번이고 반복하였다는, 그러나 그 많은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여전히 첫 시작에 머물러 있었다는 내용을 통해 그녀가 지나온 인생이 어떠하였는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최근에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이기도 한, '나는 어떠한 목표를 향해 인생이란 여행을 떠날 것인가'. 이에 대해 그녀 역시 수없이 고민하였겠지. 하지만 나이가 들어 되돌아보니 여전히 스타트 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인생이란 그런 과정의 반복이란 것을. 그녀는 자신이 얻은 이러한 삶의 교훈을 미리 말하고 시작하며 회고의 첫 시작을 멋지게 알렸다.

그렇게 화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저 덤덤하게. 어렸을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자신이 겪은 아픔을 말하기도 하며, 이미 돌아가신 화자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등장한다. 그렇게 화자는 '밤'이 찾아올 때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옛 기억도 떠올리며 과거로의 끝없는 여행을 계속하다 다시 낮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또 다시 밤. 또 다시 낮. 낮과 밤이 계속되며 그렇게 화자는 과거와 현실을 오가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런 생각을 했어, 모든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는 사람들과

뒤로 돌아가길 원하는 사람들로 나뉜다고.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계속 움직이려는 사람들과

번뜩이는 검에 의해 달리던 궤도에서

멈추어지길 원하는 사람들.

-시 <신실하고 고결한 밤> 中. 나는 이 시점에서,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나? 아니면 뒤로?

한밤중에 누가 전화를 할까?

고민이 전화하고 절망이 전화하지.

기쁨은 아기처럼 잠을 자고 있고.

-시 <밖에서 오는 사람들> 中.

밤이란 시간은 참 신기하다. 수많은 고민이 찾아오는 시간. 그걸 이렇게 표현하다니 개인적으로 정말 재밌게 느껴진 구절이었다.

이 시집에서 화자는 앞으로 나아가 미래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다시 과거로 돌아가버리는 여행을 시작하고야 만다. 시작은 시작인데, 미래로의 시작이 아닌 과거로의 시작을 택한 것. 그렇게 화자는 끊임없이 과거를 그리워하고, 과거로 회피하고자 한다. 시 <시원의 풍경>에서 화자는 시간이 흘러 모두가 세상을 떠나고 자신이 홀로 남겨졌음을 깨닫는다. 이제부턴 자신이 혼자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화자는 소리치며 뛰어가지만 기차 안내원은 말한다.

"여기가 끝이란 걸, 당신 분명 알죠, 선로가 더는 없어요.

나는 내 사정을 더 강조했다. 그치만 선로는 돌아가잖아요.

... 집에 가 그 도시를 다시 보고 싶지 않나요?

여기가 나의 집입니다, 그가 말했다.

그 도시- 그 도시는 내가 사라진 곳이다."

선로를 돌려 기차를 타고 고향, 즉 과거로 돌아가려는 화자. 화자는 고향이 그립지 않냐고 안내원에게 묻지만 안내원은 이제 여기가 내 집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시 <유토피아>에서도 기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는 기차를 타기를 망설여하지만 여인은 말한다. "너는 기차를 타야 해."

시집을 읽는 내내 화자의 방황하는 마음이 공감되어, 현재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겪고 있는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하여 깊이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화자는 계속해서 방황하지만 수많은 의문들을 떠올리며 나름대로 답을 찾아가기도 한다. 시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갈수록 화자는 좀 더 발전된 듯한, 깨달음을 얻은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마침내 과거들 속에서 추억과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법을 깨달은 듯 하다. 과거와 미래의 공존. 시집의 제목에서 화자가 과거를 찾아 나섰던 '밤'을 마침내 신실하고 고결하다고 표현하게 된 것도 그러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닐까.라고 내멋대로 해석해본다. (시집 제목의 night는 knight(기사)와 night(밤)의 발음이 동일하다는 것에 착안해 나온 제목)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인생을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작에서 끝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라고들 하지만, 글릭은 조금은 다른 시선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인생이란 게, 꼭 앞, 즉 미래를 향해서만 달려야 하는 것인가? 가끔은 과거로 돌아가기도 하는 게 미래를 향한 시작이 될 수도 있다. 과거와 미래의 반복. 시작과 끝의 반복. 인생은 모순된 것들의 무한한 반복으로 이어지며 끝을 향해 나아가지만 끝에 다와갔을 때 문득 이렇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아 결국 시작점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였구나. 마치 시 <우화>에서 언급하였듯.

이러한 주제에 걸맞게 시집에 수록된 시들도 계속해서 무언가가 반복되는 듯한, 왔다갔다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실하고 고결한 밤>은 그녀의 3부작 중 <야생 붓꽃>, <아베르노>에 이어 마지막으로 읽게 된 작품이었는데, 다 읽고 보니 그녀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들이 몇 가지 있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 신이라는 존재가 화자로 등장하면서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가 서술된다는 점. 시작과 끝, 삶과 죽음, 낮과 밤, 아늑함과 난폭함 등 서로 양극단에 위치한 모순된 존재를 함께 가야 하는 존재로 표현하였다는 점. 자연이 굉장히 중요한 소재로서 비중 있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 무언가 알쏭달쏭한 흐름으로 시가 이어지지만 그것이 오히려 몰입력을 높여 자꾸 곱씹고 곱씹어보게 된다는 점.. 이 모든 것들이 내게 새롭고 참신하게만 다가왔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시들의 연속이었다.

더 이상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두려워 우울할 때,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고찰해보고 싶을 때, 이 시집을 다시금 꺼내들게 될 것 같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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