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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르노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평점 :
2020년, 노벨문학상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시인이자 2000년대 여성 시인으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즈 글릭.' 시집 '아베르노'는 명실상부 그녀의 최고 대표작이다.
시집 아베르노를 구입하면 시집뿐만이 아닌 김소연 시인과 옮긴이 정은귀가 작성한 이 시집의 해설집도 같이 오는데, 개인적으로 이 해설집을 정말 인상깊게 읽었다. 본격적으로 시집을 읽기에 앞서 해설집의 앞부분부터 정독하였는데, 루이즈 글릭을 '자신의 경험을 '되기억'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겨 온 시인'이라고 표현한 점이 마음에 남았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재정의하기 위해 해체를 수행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또 삶을 살아가는 내내 스스로의 허물을 벗겨내고 또 벗겨내 여러 번 죽음으로써 여러 생애를 겹쳐 산다는, 그래서 자연과 같다는. 그래서 기억에서 빠져나가 두려움 없이 되살아나고 되살아나 계속 살아가는 존재"라고. 이 표현이 뇌리에 박혀,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 이 점을 기억하며 아베르노를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아베르노는 총 18개의 시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베르노'는 라틴어로 '지옥'을 뜻하며, 이탈리아 나폴리 서쪽의 호수 이름이기도 하다. 그 옛날 로마인들은 여기에 지하 세계로 향하는 입구가 있다고 믿었다고 하는데, 지하 세계의 입구를 의미하는 시집 아베르노는 '지하의 신 하데스에게 납치된 데메테르(대지의 신)의 딸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를 차용하고 있다.
도입부의 시 <야간 이주>에서 화자는 새들의 야간 이주 풍경을 보며 죽은 이들은 더 이상 이러한 풍경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곧 화자는 깨닫는다.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들이 과연 이러한 풍경을 보기를 원할까? 그러고는 이에 스스로 대답한다. 영혼은 더 이상 이러한 즐거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살아있는 자들은 이미 떠난 죽은 이들을 안타까워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안타까운지는 모르는 일이다. 우린 아직 그 누구도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감히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평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자신의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 것. 이러한 사실을 시작부터 일깨워주는 이 시가 내게는 굉장히 새롭게 다가왔다.
나 더는 신경 쓰지 않아
바람이 무슨 소리를 만드는지
언제 내가 조용해졌는지, 그 소리를 묘사하는 게
언제 처음 무의미하게 느껴졌는지
그게 무슨 소리이건 그 자체를 바꿀 수 없으니-
'시월' 中
인상 깊었던 시 중 하나였던 <시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시월(10월)의 1편에서 화자는 이미 추위와 밤, 공포와 아픔이 끝난 게 아니었나 생각했지만, 그것들은 다시 찾아왔다.
그러면서 2편에선 여름이 끝난 이후(아마도 시의 제목인 10월)를 '난폭함 이후의 아늑함'이라고 비유하는데, 난폭함 이후의 아늑함, 즉 병 주고 약 주는 건 지금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면 이미 폭력(난폭함)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놓았으니. 일단 바뀌었고, 굳어졌으니 다시 반응해달라고 요구하지 말라고 한다. 이미 내 몸은 차가워져서 벌거벗은 벌판과도 같다고.
내면의 상처(난폭함)로 (아늑함)이 찾아왔음에도 바뀌어버린 나의 모습을, 여름날 강렬한 햇빛(난폭함)이 지나가고 찾아온 10월(아늑함)의 자연의 모습(차가움)에 비유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10월은 그 여름날 난폭함이 지나고 아늑함이 가득한 계절이지만, 동시에 겨울에 다다르며 차가워지고 대지가 굳어져간다. 상처 받은 내 마음이 이미 굳어버린 듯.
그렇다면 시인은 왜 여름날의 강렬한 햇빛을 난폭함으로 표현하였을까? 열렬함은 좋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때로는 그 열렬함이 누군가를 옥죌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내내 열심히 달렸음에도, 열심히 살았음에도 상처는 찾아온다.
(혹은, 이 시집이 페르세포네 신화에 착안하여 작성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관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페르세포네에 대한 하데스의 열렬한 사랑이 (난폭함)이 되어 납치란 행위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납치 이후 하데스는 온 힘을 다해 페르세포네를 사랑해주었지만(아늑함), 난폭함 뒤의 아늑함은 이미 상처로 얼룩진 그녀를 치유해주기에 과연 충분했을까.
또 한편으로는 난폭함 뒤의 아늑함이란 말이 데메테르에게도 적용된다. 하데스의 페르세포네 납치라는 (난폭함)이 휩쓸고 지난 후 찾아온 가을의 (아늑함)이 그녀에겐 참을 수 없이 화났을 것이다. 그랬기에 대지를 수확과 풍요가 가득한 가을에서 겨울로 바꾸어버렸겠지)
3편에선 다시 겨울이 지나고 초록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며 화자에게 내게로 오라며 손을 건넨다. 그러면서 말한다. '죽음은 나를 해칠 수 없어. 내 사랑하는 삶, 네가 나를 해친 것 이상으로는.'
우리는 때때로 죽음보다도 삶이 더 무섭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죽음이 당도함으로써 이 모든 삶의 무게를 내려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하다. 그만큼 아무리 죽음이라 할지라도 삶만큼 나를 해칠 수는 없을 거라는 화자의 말에서 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4편에서 그리고 다시 봄이 지나고 가을의 빛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가을은 다시 화자에게 말한다. 넌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서 '네'가 등장한다. 화자는 이런 가을임에도 여전히 네 안에선 불타오름이 느껴진다고, '박탈된 희망이 너를 파괴하지 않았지'라고 말한다.
가을이 되면 차갑게 식고 굳어져버리는 화자와는 달리 네는 가을에도 사그러지지 않는 열기를 갖고 있는 사람인가보다.
화자는 그런 네를 보고 네는 '특혜'를 받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말하고 있다.
5편에서 이 세계는 각자 생각에 잠겨 말은 않지만 동반자로서 우리들이 서 있고, 나는 말은 않지만 일하고 있으며, 시는 말한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6편에서 화자는 내 친구 '대지'가 씁쓸해한다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햇살(여기서 햇살은 아마도 앞에서 말한 여름날의 강렬한 햇살. 즉 (난폭함)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이 대지를 망쳤다고 한다. 대지는 이제 혼자 남겨지기를 원하고, 대지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정말 포기해야 할 때라고. 그렇게 대지를 망쳤던 낮의 햇살이 지고, 밤이 찾아오며 차가운 별이 떠오른다. 그리고 대지를 망친 햇살과는 달리, '별들은 아무것도 주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즉 무관심. 화자는 이런 별과 비슷한 존재인 달을 보며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이 시를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에서 해석해보자면, 화자는 시 전반에 걸쳐 여름날, 혹은 낮의 '따갑고 강렬한 햇살'을 '난폭함'이라고 표현한다. 그러고 6편에서 봤듯이, 이에 대조되는 '차가운 별'은 무관심하기에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그리 강하지 않은 빛으로 우리를 비추고 있다며 호감을 드러낸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화자는 오히려 지나치고 열렬한 관심에서 벗어나 그저 그 자리에 묵묵히 있어주는, 그런 무관심을 오히려 원하지 않았을까 싶다.
때때로 지나친 관심은 독이 되듯이, SNS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말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치게 만든다. 그렇기에 때때로 그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혼자 사색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는데 아마 화자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마치 시월의 6편에서 태양과 끝난 대지가 이제는 혼자 남겨지기를 원한다는 대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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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석이 무조건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시월>을 읽고 이러한 점들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시'에서 작가의 의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은, 내가 그 시를 읽고 어떻게 느끼고 해석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렇기에 나는 아베르노를 이렇게 느꼈지만, 다른 사람은 또 다른 해석, 다른 관점에서 이 시를 바라봤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 감상은 즐겁다.
신과의 경기장에서 당신 차례가 온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페르세포네 그 방랑자' 中
페르세포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하의 신 하데스에게 납치되었다. 즉,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로 생각한다면 페르세포네는 신과의 경기에서 패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루이즈 글릭은 이 페르세포네 신화를 전복하는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페르세포네가 사실은 자신의 의지대로 납치된 것이었다면? 한번도 그러한 관점에서 이 신화를 바라보았던 적이 없던 나이기에, 내게는 이러한 새 제안이 굉장히 낯설면서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시 <페르세포네 그 방랑자>에서 글릭은 어쩌면 페르세포네 입장에서 대지와 죽음은 똑같은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녀는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죽음의 세계로 끌려갔다. 그러나 글릭의 시에서 페르세포네는 자신에게 부여된 '딸'이라는 역할에서 벗어나고자 대지(그녀의 어머니인 데메테르)를 떠나고 싶어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지(데메테르)나 죽음(하데스)이나 그녀에겐 같은 부류라는 것이다.
'결국엔, 이상하게도, 똑같아 보이는 대지와 죽음 사이를 너는 떠돈다. ('페르세포네 그 방랑자' 中)'
그리고 시 <순수의 신화>에서, 페르세포네는 아예 하데스에 의한 납치가 사실은 자기가 의도한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기라도 한 듯 하데스가 나타났다고. 그렇게 더 이상 순진한 소녀가 아닌 여자가 되어버린 자신을 그녀는 바라본다.
<헌신의 신화>는 하데스의 관점에서 쓰여진 시다. 하데스는 페르세포네를 사랑했기에 그녀를 위해 세상의 복사판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말한다. '사랑하오, 아무것도 당신을 해칠 수 없소'가 아닌, '당신은 죽었소, 아무것도 당신을 해칠 수 없소'라고. 그게 더 진실하고 그럴듯한 시작인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동감한다. 때론 진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도움이 되지.
이 시에서는 페르세포네를 납치한 하데스가 로맨틱하게 표현되는데, 이러한 관점이 색달랐다.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나는 납치되지 않았어.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내가 나를 바친 거야,
나는 내 몸을 벗어나고 싶었어, 심지어, 가끔은,
내가 이걸 의도했어.
'순수의 신화' 中. 사실 이 납치극은 자신이 의도한 것이었음을 페르세포네는 고백한다.
시집 <아베르노>는 전반적으로 내가 이해하기에 쉬운 시집은 아니었다. 이러한 류의 시집을 제대로 읽어본 것이 처음이라 그런지 더욱더 그랬다. 그럼에도 읽는 내내 흥미로웠다. 시집 전체에 걸쳐 공통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대지'인데, 화자는 과연 이 대지를 어떠한 의미로 사용하였을까 그 점이 궁금했다. 페르세포네 신화를 차용한 이 시집. 그리고 그 페르세포네의 어머니이자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 그렇다면 대지는 데메테르를 의미하는 걸까?
2부에서부터는 시가 뭔가 이해가 안 된다 싶으면 이게 데메테르가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페르세포네가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상상하며 읽었다. 그러니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 생겼다. 절벽에 꽃을 피워 페르세포네를 유혹한 하데스, 페르세포네를 잃고 상실감에 겨울이란 계절을 만들어버린 데메테르의 심정, 가끔 대지 위를 추억하는 페르세포네 등의 이야기들.. 아베르노를 읽기 전 꼭 페르세포네 신화를 한번 읽어보고 감상하는 걸 추천한다.
그렇다고 꼭 페르세포네 이야기에만 한정시켜 이 시를 감상할 필요는 없다.
이 시는 자신이 나고 자란, 자신의 어머니가 있는 고향 '대지'를 떠나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지하 세계', 즉 죽음의 세계로 들어선 페르세포네의 떠남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 모두 역시 살아 생전 고향에만 살지는 않는다. 성장하고 어른이 됨에 따라 새로운 세계로 입성하게 된다. 마치 대지를 떠나 지하로 간 페르세포네처럼.
그렇기에 새로운 세계에서 변화를 맞이하는 페르세포네의 감정이 더욱더 공감된다. 그녀는 대지에서의 추억을 그리워하다가도, 낯선 세계에 대해 갈망하며 새로움을 발견한다. 모순된 감정의 공존. 부모님을 떠나 사회로 첫발을 내딛는 과정과 똑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페르세포네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
글릭은 페르세포네가 사실은 자신의 의지대로 납치된 것이었다면?이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우리가 고향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서듯, 그녀 역시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낯섦과 새로움은 언제나 리스크를 동반한다. 이에 글릭은 경고한다. '하지만 무지는 앎을 의도할 수 없다. 무지는 상상되는 어떤 것을 의도한다, 존재한다고 믿는 것을.' 페르세포네는 대지를 떠나기 위해 지하세계로 납치되는 것을 의도했다 하지만, 그 지하세계에 정작 뭐가 있을 줄 알고 무모하게 그런 납치를 의도한 걸까. 그녀가 지하세계가 실상 어떤 곳인지 그에 대해 무지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 역시,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환상을 쉽게 갖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무지가 어리석은 생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글릭은 이 구절을 통해 말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알고도 시도하는 게 인간 호기심의 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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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마지막, 아베르노의 대미를 장식한 <페르세포네 그 방랑자>를 읽는 순간 소름이 돋으면서도 무언가 큰 깨달음이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 루이즈 글릭이 페르세포네 신화를 차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
데메테르는 자신이 생명을 부여했던 그 존재(페르세포네)가 자신을 벗어나자, 그녀가 돌아오기를 계속해서 부르짖는다. 자식을 내보낸 부모의 마음은 다 이와 같겠지.
그렇게 페르세포네는 1년 중 3분의 2는 지상에서, 3분의 1은 지하에 머무르게 되는, 그렇게 지상과 지하, 즉 삶과 죽음을 계속해서 오가는 삶을 살게 된다.
'삶과 죽음을 오가는 삶'.
김소연 시인이 말했던, 루이즈 글릭은 여러 번 죽음으로써 되살아난다는 것. 그래서 두려움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
죽었음에도 계속해서 살아나기를 반복하는 글릭의 삶은, 마치 죽음(지하)과 삶(지상)을 오가는 페르세포네와 같은 삶이었던 것이다.
죽어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되살아나는 것, 그것은 나 자신과의 끝없는 투쟁. 글릭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분명 더욱 단단하고 발전된 존재가 됐음이 틀림없다.
해설집에서 옮긴이 정은귀는 이런 말을 한다. "딸을 기다리는 어미의 눈물도, 죽어 가는 아비를 바라보는 자식의 슬픔도, 이 세상을 잇게 만드는 모든 사랑의 말들도 모두 죽음 안에서, 죽음을 알 때 비로소 자유롭다."
루이즈 글릭은 시를 써내려가며 죽음을 인식하고, 또 여러 번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참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갔다.
그러한 점에서 그녀의 시를 읽다보니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 '하이데거'의 사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죽음을 인식하고 수용하여라. 그러면 참된 실존을 회복할 수 있을 테니.
나는 모순된 단어가 참 좋다. 죽음과 삶. 난폭함과 아늑함. 애정과 비탄. 두려움과 용기. 글릭은 이러한 모순된 감정을 시로써 풀어나갔다. 이 세상은 어느 한 가지만을 택할 수는 없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임에도 항상 함께할 수밖에 없는 것.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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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했듯이, 그리고 아베르노를 읽으며 느꼈듯이, 루이즈 글릭은 자신의 기억을 재정의하기 위해 시를 써내려갔다. <아베르노>에 수록된 시들을 읽다보면 화자가 과거를 기억하기를 회피하거나 그 사이에서 방황하거나(시 <풍경>), 또 어느 순간 그 기억들을 끄집어내기도 하는(시 <프리즘>) 모습을 보이는 걸 알 수 있다. 회피하고픈 자신의 아픈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 해체하는 작업은 여간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재정의하고 발전시켜나가는 루이즈 글릭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동시에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내 삶을 재정의하고 발전시켜나갈 것인가'라는 과제가 내 머릿속에 던져졌다.
더불어, 전부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즈 글릭의 시들을 꼭 한번 읽고 음미해보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번역본으로 나와 그녀의 걸작을 감상하고 곱씹어보고 또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점에서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녀가 내 최애 시인이 될 것 같은 느낌.
페르세포네 이야기라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차용함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려는 노력을 담은 그녀의 시집 <아베르노>는 정말 흥미롭고 새롭다. 노벨문학상을 탄 거장인만큼, 그녀의 시가 궁금하다면 명실상부 그녀의 대표작 이 <아베르노>부터 먼저 접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시들의 모음집이 한편의 소설처럼 읽히는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것이다.
정말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부분들의 모음.
그건 기다림의 시간,
유예된 행동의 시간이었다.
나는 현재에 살았다,
그건 네가 볼 수 있는 미래의 일부였다.
과거는 내 머리 위에 떠돌아 다녔다.
보이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해와 달처럼.
온갖 모순에 지배되는 시절이었다,
가령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와 겁이 났어처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현재의 내 심정을 이토록 잘 대변해주는 구절이 또 있을까)
..
평생을, 너는 좋은 때를 기다린다.
그러면 그 좋은 때는
행해진 행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풍경' 中
내 잠에 대해선, 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소리쳤을 때,
뜻밖에도 내 목소리가 나를 달래 주었다.
의식의 침묵 속에서 나는 내게 물어보았다:
내 인생을 왜 내가 거절했지? 그리고 대답했다
Die Erde iiberwaltigt mich:
대지가 나를 무너뜨린다.
'풍경' 中
대지는 애도하는 법을 모른다는 걸,
애도하는 대신에 바꿀 거라는 걸.
그런 다음 그가 없어도 계속 존재할 거라는 걸.
'아베르노' 中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