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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2010년 9월. 추석 연휴를 병원에서 보냈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 끝은 진통실이었다. 산 만큼 큰 배를 움켜진 산모 틈에 나도 나름 아직은 산모라며 배를 앞으로 내세웠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어차피 끝난 것을.
“터미네이션”
인턴이 피곤한 얼굴로 진통실 간호사에게 건조하게 던진 말이다. 끝. 끝이다. 그랬다. 나는 끝내려고 와 있는 사람이었다. 각종 종이 서류를 받고 설명을 듣고 링거를 꽂았다. 배가 사르르 아파졌다. 생리통보다 더 아팠다. 온몸이 추웠다. 춥다고 말했는데 간호사는 얼음 팩을 가지고 왔다. 정신없이 일이 끝난 후 회복실에서야 이불을 얻을 수 있었다.
‘24주’라는 영화가 내 상황을 그대로 복기했다. 주인공은 유명한 코미디언이다. 첫째 아이가 이미 있고 둘째를 임신한 채 왕성한 활동을 한다. 임신 중기에 아이가 다운증후군임을 알게 된다. 부부는 이를 감당하려 한다. 이후 검사를 통해 태아에게 심장 이상까지 발견된다. 태어나서 행복한 일보다는 괴로운 일이 많을 것임을 엄마는 직감으로 안다. 엄마인 주인공은 고민한다. 그 사람이 정한 결정을 어느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더 이상 뱃속에 아이는 없다. 주인공은 빈 배를 감싸 안고 공허한 눈으로 화면 밖에 있는 나를 바라본다.
이제 가을이다. 더위가 끝났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 더위가 가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더위 끝은 행복이 아니라 공허다. 더위가 간 자리에는 아팠던 예전 기억이 대신 들어와 앉는다. 여름에 피어있던 꽃이 진다. 낙엽은 색이 변하며 떨어진다. 내 마음도 같이 가라앉는다. 억지로 웃으려 하지만 입꼬리가 무겁다. 힘겹게 입은 웃지만 눈이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손에 잡힌 책이 ‘숨결이 바람 될 때’라는 책이다. 흰색 표지에 가을바람 같은 글씨체로 이루어진 표지. 이 책을 펼친다. 저자는 나와 나이가 같다. 서른여섯.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까지 마친 후, 다시 의학 대학원에 진학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전문의가 되기 직전 그는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다. 그가 꿈꾼 삶은 그랬다. 치열한 생과 사를 겪는 의사 생활을 경험한 뒤 이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는 두뇌를 고치는 신경외과 의사다. 미래 올리버 색스를 꿈꾸는 전도 유망한 로맨티시스트 의사였다. 그가 그린 삶은 몸이 망가지며 끝난다.
건강했을 시절 저자가 의사로서 산부인과 실습을 했던 기억을 이야기한다. 쌍둥이를 조산한 산모. 급박한 상황에서 제왕절개를 결심하고 결국 아이를 꺼냈지만 쌍둥이 둘은 금방 생명을 잃는다. 과연 다른 선택을 했다면 쌍둥이는 살 수 있었을까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24주에 나온다면 태아는 살 수 있다. 안타깝게도 쌍둥이는 그 정도 주수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의사는 태아를 꺼내는 결정을 했다. 앞서 영화 ‘24주’에 나오는 주인공 선택과 같은 게 아닐까? 이 결정을 한 의사는 당당하게 말한다. 내 결정은 옳았다고.
젊지만 그는 죽는다. 죽어가고 있다. 끝이 정확히 보이는 그때, 그는 체외수정을 통해 아이 낳기를 결정한다. 자신이 죽은 후, 아내가 살아내야 할 미래를 걱정한다. 걱정한다면 과연 자신 유전자를 남기는 일이 의미 있는 걸까? 아내에게 육아에 대한 짐을 맡기고 죽음을 맞이하는 건 오히려 더 큰 짐이 아니었을까? 부부는 결국 딸을 낳았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일. 죽음이 앞에 보이는 사내와 그를 사랑하는 아내가 내린 결정이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새 생명에게 끝을 결정한 ‘24주’ 주인공을 원망할 수 없다. 같은 의미로 죽지만 생명을 책임 지려는 마음을 어느 누구도 평가해서는 안 된다.
다행히 저자가 가진 암은 점점 작아진다. 덕분에 다시 직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차라리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나.레지던트 생활을 하면서 다시 암이 재발한다. 그렇게 죽음은 순식간에 찾아온다. 아무리 많은 끝을 준비했다 해도 끝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놀라웠다. 남겨진 아내는 슬픔을 넘어섰다. 그가 그립지만 슬픔보다 더 소중한 마음이 피어났다고 말했다. 오히려 암이 발견되기 전에 둘은 이혼 위기가 있었다. 암은 그 둘을 다시이어주었고 새 생명을 품을 용기를 주었다. 끝은 다른 시작을 만들었다. 끝이지만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사랑을 배우고 간절함을 배우고 생명이 주는 경외를 경험했다. 이 두 명이 경험한 끝은 이렇듯 특별했다.
낙엽이 떨어진 땅만 보길 멈추고 나무 위를 바라본다. 푸른 하늘이 끝없이 높게 펼쳐져 있다. 구름 없는 하늘이 청명하다. 그 옆에 나뭇가지에 감이 달려있다. 점점 붉은빛으로 변해간다. 어느 나무에서는 대추가 달려있다. 낙엽이 끝을 알리고 그 자리를 과실이 대신한다. 열매가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2010년 임신을 간절히 바랬다. 의사 말을 잘 들었다. ‘명의’에도 나온 그 의사 말을 신뢰했다. 뱃속에 뛰는 심장이 세 개가 있었다. 빠른 시간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절대 내게 이런 선택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해야 했다. 태아 세 명을 30주 이상 품고 있지 못하리란 엄마로서 직감을 믿었다. 한 아이를 보낸 후 뱃속 세 태아 모두 내 뱃속에서 버티지 못했다. 그렇게 나머지 태아마저 9월에 모두 보내야 했다.
간사한 내 마음에 수치심이 일었다. 세 아이를 보냈지만 매달 임신이 되지 않아 눈물을 흘렸던 그때보다 덜 슬픈 나를 마주 했기 때문이다. 책 안에서 힘든 몸 때문에 암이 전이가 심해서 수술이 취소되길 바랐던 그 마음과 같았다. 다음에 다시 임신할 수 있는 몸이란 위로가 죽은 아이들에 대한 슬픔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늦가을에 첫째 딸을 낳고, 늦여름에 둘째를 낳았다. 이제 가을이다. 아이 셋을 모두 보냈던 그 가을. 곧 내 만삭도 끝이 난다. 내 뱃속에서 세 번째 아이가 인생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임신을 종료하기 위해 갔던 진통실에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러 간다. 세 아이 생명이 끝난 곳이 다시 내 세 아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곳이 됐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95)
‘숨결이 바람이 될 때’ 저자가 항상 마음에 품고 있었던 질문이다.
개구쟁이 딸 둘이 끊임없이 내게 요구한다. 물을 달라고 배고프다고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놀이동산에 가고 싶다고. 그 요구는 끝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집안 먼지와 빨랫감, 설거지할 그릇들. 해 놓으면 다시 또 어질러진 채 그대로 있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일들이다.
인정한다. 이런 일들이 내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아이가 하는 요구를 들어주고 빨래를 하고 집을 청소하고 먹거리를 만드는 일. 이 일이 나를 살아있게 해 준다. 사소한 작은 일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끝은 다시 시작을 만든다. 끝은 더 이상 허무와 공허가 아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일 뿐이다.
더위 대신 바람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가을. 떨어져 있던 마음도 같이 주섬주섬 주어본다. 다시 힘내어 두 아이를 안아 본다. 뱃속에 꿈틀대는 세 번째 아이를 쓰다듬는다. 뱃속에서 밀고 있는 다리를 쓰다듬는다. 내 몸과 이어져 있는 아이. 나와 분리되는 순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 엄마만이 아는 뱃 속 아이와 일체감. 이 경험도 곧 끝이다. 새로운 시작 전에 이 순간을 즐겨야겠다. 아마도 다시는 이런 경험은 없을 수도 있다. 끝은 항상 준비되지 않을 때 오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