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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로 가야겠다
도종환 지음 / 열림원 / 2025년 11월
평점 :

고요로 가야겠다 - 도종환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신작 시집 <고요로 가야겠다>를 읽었다. 추천사를 통해서 시인이 정치에도 몸담았었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 시인과 정치라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곽재구 시인의 추천사처럼 시인의 맑음이 한 방울 정도는 그 판에 희석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흡사 산문집처럼 두꺼운 두께다. 시집이라고 으레 생각하는 그 얇은 책이 아니었다.
물론 각 파트의 첫 시들을 행들을 연처럼 쪼개서 카드뉴스처럼 만든 덕에 조금 더 통통해지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그 형식의 변화가 좋은 쪽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제는 한 연으로 된 시조차 끊어서 읽어도 될 만큼 사람들은 조급해졌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원래 시집의 맨 처음 실린 시를 그렇게 사랑하는 편은 아니었다. 제목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손님을 끌어라 하는 듯한 마케팅이 느껴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간판처럼 사람을 매혹시키라고. 그런데 이번에 처음 등장한 <이월>이라는 시는 내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지나온 내 생애도 찬바람 몰아치는 날 많았는데
그때마다 볼이 빨갛게 언 나를
나는 순간순간 이월로 옮겨다 놓곤 했다
이 대목이다. 찬바람이 몰아쳐도 비바람이 쳐도 나는 얼어있고 혼자고 춥지만 그래도 봄이라는 희망이 있는 이월로 데려간다는 것이 말이다. 그 어떤 읽었던 시보다 희망차게 느껴졌다. 물론 최근 내 멘탈이 부서지면서 눈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잘못은 내가 더 많이 했는데 결국은 돌아갈 수 없는 나 자신이 추위에 떨고 있는 화자처럼 느껴졌다.
<연두>라는 시에서는 말로 표현하는데는 한계가 있어서 색깔로 드러냈다는 연두의 초록이 그려졌다. 식집사로서 늘 그 연두빛을 보고 싶어서 매번 봐도 그 경탄함이 질리지가 않는편인데 그 느낌을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
<벚꽃>이라는 시는 초로의 시인이 이렇게 20대 인터넷 밈처럼 상큼한 시를 쓸 수 있다고? 쓴다고 해도 수록할 수 있다고? 하는 파격적인 감성에 놀랐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벚꽃을 보면 스러저가는 봄을 놓치기 전에 나가봐야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엉덩이를 벚나무 앞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가보자고. 올해 봄 그래도 좋은 벚꽃을 봤다는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다시 새 벚꽃은 너무도 사랑하는 나와 봐야겠지만.
오늘은 핑계대고 조퇴하자
벚꽃이 십 리 가득 피었는데
이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 건
내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내가 해야만 하는 일처럼 느껴진 <저녁연기>로 마무리하고 싶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제공받았고
그렇게 많은 기회를 부여받았으니
지난날의 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조용히 지워지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