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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서울 이야기 - 우리가 몰랐던
배한철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5년 5월
평점 :

옛적 서울 이야기 - 배한철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역사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텍스트로 된 역사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싫은 사람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추천하는 이유는 옛적 서울과 서울에 살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상당히 방대한 사료(특히 사진)를 통해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현재 신문기자이고, 출판사도 매일경제신문사라서 이렇게 많은 사진을 담았을 것이라 합리적으로 추론을 해본다.
글을 읽다가도 이런 곳이었어? 이렇게 하는 거였어? 시각적으로 굉장히 잘 다가와서 꽤 두꺼운 책임에도 즐겁게 완독할 수 있었다. 1부는 한양을 2부는 한양에 살던 사람들 이야기다. 특히 본보기로 사람을 처형한 다음에 삼각대 같은 모양으로 참수한 (효수) 사진도 실려 있어서 깜짝 놀랐다. 한양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서 사육신은 큰길과 대형 시장에서 처형당하기도 했다. 길을 지날 때 마다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까. 이후 공식 사형장은 서소문 밖이 되었다고 한다. 그 뿐인가, 조선 팔도에 호환으로 벌벌 떨던 사람들을 위해 호랑이 사냥이 성행했고 1921년 경주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한반도 호랑이의 명맥이 끊긴 사진도 등장한다. 이후 한반도에서 멸종이라니.. 최근 재야생화에 대한 책을 읽었던 터라 이정도 맹수가 아니더라도 사라진 많은 동물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한양 인구 절반이 노비였다는 이야기는 <일천측천>을 언급한다. 부모 중 한 명이 노비면 당연히 노비가 되는 법에 따라 계속 노비의 인구수가 증가하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 서울의 양반은 16%, 노비가 53%였다고 한다. 이후 영조가 <종모제>를 시행하여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이 될 수 있는 법안을 시행했다. 그렇지만 노비가 사라진 것은 고종 31년 갑오개혁 때이다. 노비가 늘어난다는 것은 조세를 부담할 양인이 적어진다는 뜻이므로 아마 인구비율을 조절해야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던 이야기는 <거세당한 내시들이 1등 신랑감이었다?>라는 이야기였다. 일단 제목부터가 호기심을 당기지 않는가. 내시인데 왜 일등 신랑감이었을까 살펴보니, 내시가 왕을 가까이서 모시다 보니 공신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이런 신분상승의 기회를 위해서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청하여 되는 사람이 많았단다. 여의도에 움막으로 된 고자 시술소가 영업했다는 이야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고종 34년 (1887년)까지도 영업했단다. 물론 사료가 있지는 않고 구전된 이야기라고. 내시 말고도 전문직에 버금가는 궁녀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있다.
삶의 애환이 담긴 고개에 담긴 이야기들도 좋았다. 230개 정도의 고개가 있었다고. 특히 버티고개는 산적이 출몰한 곳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용산 당고개는 앞서 말한 처형장이 있었다.
지금의 서울과 과밀화인 점은 같지만, 다른 생활상을 비교해보며 옛적 서울과 여전히 반짝거리는 서울을 같이 놓고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