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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흔에 K-장녀를 그만두기로 했다 - 책임감과 희생에 갇힌 K-장녀의 해방일지
잔디아이 지음 / 저녁달 / 2024년 12월
평점 :
나는 마흔에 K-장녀를 그만두기로 했다 - 잔디아이
*본 도서는 출판사로 부터 제공받았습니다.*
나도 k-장녀다. 기질적으로 크게 책임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철이 덜든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자라면서 이런 건 당연하게 생각했었나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작가의 부모님과 비슷한 결도 아닌 것도 있어서 내가 이렇게 사고하는 것은 우리 집 분위기가 이래서였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다. 처음 신혼 살림에 벽지도 제대로 못 고르는 에피소드에서 친정 엄마의 말대로 하는 마무리로 끝났다면 이 책을 다 읽지 않았을 것에 한 표를 던진다. 거기서도 K-장녀의 문제해결 기지를 발휘해서 민트색 벽지로 사장님과 살짝 합의를 봤기에 망정이지. 나의 경우였다면 색상이 아니라 가격 때문에사달이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돈을 들여서 도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원초적인 싸움이 일었을 것이다.
특히 작가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 중에서 아버지와의 이야기가 매우 충격적인 부분이 많았다. 책을 읽는 동안 무척 차분하고 이지적이며 많은 해탈을 해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책에 냉해를 입은 과일처럼 얼어있은 얼음가시가 박혀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유리가시였지만 지금은 얼음 정도로 많이 옅어진 그 피나는 노력을 했을 것이라는 짐작에 의한 소감임을 밝힌다. 미역국에 고기 특히 싱크대에 버린 걸 다시 주워서 먹으라고 한 이야기에서는 이건 채식주의자의 영혜보다 더 심각하잖아! 하고 놀라버렸다. 어린 아이였을 뿐인데 그렇게까지 훈육을 하시다니. 장점이라면 단 하나 시어머니 빌런에게 기가 눌리지 않을 경험을 쌓아주셨다는 거 그 뿐일려나...
나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이 어린 시절의 경험이나 훈육을 물려줄 대상이 없다. 그렇지만 작가는 자신의 아픔을 심리상담과 절대 자기 같은 마음의 짐을 주지 않으려고 육아에 애를 쓰는 듯 보인다. 급한 일 때문에 아이를 다그쳤던 일이나(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항상 본다) 언니만 양보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시키지 않는 이유다. 똑같이 어리지만 맏이라는 이유로 어리지만 보호자를 겸해야 했던 모든 맏이들에게는 이런 엄마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지만 피곤함이나 바쁨 혹은 가족이라는 권위를 앞세워 지금도 많은 장녀들에게 집안일이나 동생 돌봄이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어린 동생의 출생으로 지금까지 누려왔던 더 유년 시절의 기억은 사라지고 항상 양보를 강요받으면서 살 텐데..
책의 곳곳에 들어있는 태평해 보이는 사자는 작가의 분신이다. 특히 K-장녀 이야기에 <사자>가 있다니 신기하네 했지만 이는 자신의 꿈도 부모에 의해서 많이 접혀야만 했던 슬픈 이야기도 들어있다. 기질은 사자지만 태평한 녀석. 그렇게 본인을 인정하고 원가족에게서 거리를 둔 것 만으로도 기특한데 작가는 준 전문가급으로 성찰을 많이 해본 듯하다. 역시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은 멀고 험난하지만 자신이 겪은 일들을 직시하고 부모님과 소통하는 내용 역시 박수를 쳐주고 싶다. 기억나지 않지만 네가 그랬다면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이제 약해진 시기라 억지사과의 느낌이 많았지만 말이다. 남보다 못한 사람들과는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이 제일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구나 다시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