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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자리는 역시 병원이 좋겠어
한수정 지음 / 희유 / 2024년 1월
평점 :

죽을 자리는 역시 병원이 좋겠어 - 한수정
*본 도서는 출판사로 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외과 의사인 주인공 남유진. 병원에서 어머니의 수술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1년째 메스를 잡지 못하고, 대면 진료만 보고 있다. 사람들의 구설수에 병원에서의 입지도 좁아진 상태다. 병원에서도 이제 짤라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주인공은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삶의 구심점을 잃어버린 상태라 삶을 놓아버릴 계획을 세운다. 다른 방법들은 좀 무섭고, 생각보다 의사라서 좋은 점은 모르핀으로 자살 계획을 세운다. 쉽게 가자면서.
병원에서는 트라우마에서 극복하지 못하는 남선생을 위해 아는 정신과 과장도 붙여줬다가 다시 모르는 정신과 선생님에게 상담을 받아보라는 배려를 해준다. 결국 그 어떤 사람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유진. 엄마와의 추억이 서린 집보다는 병원 당직실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반복한다. 거의 먹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오는 유진이 측은하다. 나도 그래봤기 때문에. 살아도 산 게 아닌 것 같은 기분 알지, 그럼.
찬스처럼 상면 병원 의사로 내려가게 되는데, 거기 또 연명치료를 위해 모르핀이 필요한 환자가 있다고 하니 그래, 죽을 자리는 역시 병원이 좋겠다며 상면으로 내려간다. 가기 전 집 정리를 하며 동창인 지훈이 많이 도와준다. 엄마의 추억이 담긴 방의 가구를 차마 정리하지 못하는 기분은 너무 짠했다.
이제 신나게 마지막 남은 하루를 생각하며 병원 개원 전 모르핀을 비롯 폐교를 개조한 병원에서 하루를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필요 없을 것 같았던 CCTV를 꺼두자마자 마을에서는 환자가 발생한다. 쌍욕을 해대는 환자를 향해 시원하게 뼈를 맞춰주고, 혹시 모를 골절 대비해 상급병원에 데려다 주었다. 응급차가 없고 마을에서 활용할 수단이 유진의 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삶의 마지막 여정을 시작해 볼까 하고 금고로 모르핀을 찾으러 가는데, 어라, 향정이자 내 자살도구가 사라졌다. 향정신성의약품은 도난 당한지 5일 안에 신고하면 된다. 5일 안에 범인을 찾아서 모르핀을 돌려받기로 계획하고 본인의 생명 연장 5일을 마음먹는다. 하루에서 조금 더 늘어난다고 별일이야 있겠냐는 생각이다. 그 뒤로 얼마나 과로사로 이리 뛰고 저리 뛸지 모르는 유진. 새벽 7시 반부터 병원에 줄을 선 환자들 때문에 기함한다. 상면 출신이자 스위스에서 자살 조력자 이력이 있는 미경 간호사의 활약도 대단하다. 둘은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이 책에서 모르핀 도둑을 찾는 여정도 한 축이지만, 이 두 여자가 삶에 대해 서로 이해하는 방향에의 대화가 제일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한다. 본인의 의사를 존중했기에 스위스까지 따라간 사람과 준비하지 못했는데 자책하며 자기 탓이라 생각하는 사람.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은 정말 우주만큼 멀지만, 또 그렇기에 서로를 이해한다. 계획대로 술술 풀릴 것 같던 유진의 자살계획은 잘 실현될 수 있을까.
마을의 수 많은 사람들의 저마다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또한 벽지의 의료 관련한 불편함이 이런거겠구나. 소외계층의 사정은 또 이런 의미에서 겠구나 하는 생각도 같이 가지게 되었다. 이래서 나이 들수록 집의 명당자리는 큰 병원 옆이라고 하는 게 맞나보다. 무거운 주제지만 속도감 있게 읽혀서 즐거웠다. 삶의 의지가 없을 때 또 한 번 읽으면 다르게 보일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