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자들 걷는사람 소설집 4
임성용 지음 / 걷는사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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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목이 없는 책을 파는 조물주 공원 조 씨: 기록자들 - 임성용

 

*본 도서는 출판사로 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오래간만에 재미있게 읽은 단편 모음집이었다. 아무래도 책 이야기를 하다보면 각 단편의 결말이나 스포일러가 포함될테니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피하시면 좋겠다. 다른 이들의 즐거움을 뺏고 싶진 않기에.

 

 

이번 연구는 실패했어. 너도 그만 인정해. 인간은 달라지지 않아. 더 이상 신화도 종교도 그들에게 통하지 않아. 오히려 자기 식대로 이용만 해 먹고 있잖아. 먹고 싸고 차지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실패한 생물이야. 이대로라면 지구는 백 년도 버티지 못해. 솔직히, 이 행성에서 가장 해로운 생명체가 인간이야. 투자한 물과 햇볕이 아까울 지경이라고. 빨리 할당량이나 채우고 이 쓰레기 같은 행성을 뜨자고. 어차피 멸망할 행성 따위야 회사에서 뽑아먹을 만큼 뽑아먹은 다음에 알아서 처리하겠지. 우리는 연구실에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 그게 우리가 살길이야.

 

─「공원 조 씨, 기록자들 - 임성용 p.76

 

제목에 쓴 것처럼 제목이 없는 책을 파는 조물주 공원 조씨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비평가는 조씨가 삼풍백화점 사고로 인해 아내와 딸을 잃고 나서 자신이 존재를 잊고 조물주라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내서 그 안에서 이뤄지는 이야기라고 보고 있더라. 사람이 보통 큰 충격을 받으면 그 충격을 받은 자신과 멀쩡한 자신( 충격을 받기전의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자아)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있듯이 말이다. 이 단편을 읽은 소감의 나는 조씨가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생각안하고, 큰 유니버스 세계관으로 진짜 이런 일들이 이렇게 랜덤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건 아닐까. 그래서 그 정보를 엿본 책값 <오만원> 대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인간처럼 필연적으로 악운이 온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외계 생명체라고 여기며 다른 사람들에게 미래를 선물하러왔다고 말하지만 그의 세계밖의 사람이 보기에 그는 한낮 미친 사람이다. 뒤를 돌아가는 그를 궁금해 하던 사람에게 이러이러 해서 미쳤대 라고 말해주는 부분은 창조주 세계관을 세워서 믿어버린 나같은 독자에게는 깜찍한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덧붙여, 여러 다른 세계에 빠져버리신 분들도 이러이러한 간택의 과정을 거친거 아냐? 하는 상상력도 발휘해 보게 되었다. 지금 인간이 하는 행태를 보면 알파와 오메가가 지구를 포기하고 리셋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이유를 알 것 도 같다.

 

 

그리고, 재미있게 읽었던 두 번째 단편은 <아내가 죽었다> 이다.

 

나는 가르치는 재능도 인내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반년을 채우지 못하고 학원을 나왔다. 아내는 가장으로서의 무능력을 탓하지도, 아비의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아내의 그런 태도가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처럼 불안하게 생각되었지만, 곧 익숙해졌다. 아내는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사람 같았다. 내가 열 살 때 휴화산이었던 갈라파고스 제도의 화산이 서른이 넘은 지금도 휴화산인 것처럼, 폭발 따위는 내 대에서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아내도 견디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어차피 남녀가 같이 산다는 건 주어진 상황을 함께 견디는 연습 같은 것이었다.

 

─「아내가 죽었다, 기록자들 - 임성용 p.199

 

지금까지 조금 어두운, 미친(?) 사람들만 등장하다가, 그래도 조금은 과보호에 휩싸인 남자사람이지만 정상적인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아내가 갑자기 자살로 죽고, 그로 인해 부인을 만나게 된 과정, 자신의 가정이 해체되게 된 이유. 그 중간에서 자기가 온실속의 화초로 자라나 중간자적 입장을 전혀 할 줄 모르고, 가장으로서 무능력했던 현실을 담담히 토로하고 있다. 그래서 이혼하게 되었고, 그런데도 화자는 부인이 왜 죽음까지 갔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보통 이혼하러 오는 사람들은 그 중간에 지리멸렬한 개싸움을 하느라 법원에 와서는 그나마 선뜻 젠체 하는데, 이 지옥같은 생활을 놓자니 서글프고, 벗어나려니 두려운 그 마음으로 아내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죽어서야 그 잔소리를 멈추고 남편의 어머니로만 돌아가다니. 화자는 장례식장에서도 딸과 서먹한 관계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마 억지로 어머니의 부재를 통해 딸과의 화해를 그렸다면 내심 실망했을텐데, 요새의 가족을 개개인으로 잘 그려낸 것 같아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오래간만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편을 만나서 좋았고, <맹순이 바당>등의 아픈 역사를 그려낸 단편도 추천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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