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천사와 Love Love 1
신조 마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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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프레이즈>가 알라딘 독자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걸 보고, 나는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읽어본 후, 혹 그런 평가가 부당하다는 결론을 얻으면 독자서평에 글을 올려 신조 마유의 작품에 대한 구명운동(?)을 펼치리라 다짐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많은 사람들이 '별로'라고 하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 때로는 대중의 눈이 너무도 대중적이라 작품의 겉만 보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소수 심미안을 가진 이들만이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기도 하지만, 내가 감히 단언하건데 신조의 작품들은 그런 경로로 해서 소위 '컬트'에 진입하기도 힘든 것들이다.

<수호천사와 Love Love>도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뒤집어 생각하면 바로 그것이 신조의 작품세계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신조는 이야기를 엮는 재주가 없는 작가다.

내게는 인간의 뇌구조나 사고과정의 매커니즘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이야기에는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 궤적을 좇는 어떤 단계가 있다고 믿는다. 이야기가 그런 단계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면 설사 엉뚱한 설정에서 출발했을지라도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거두절미한 채로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단지 너이기 때문에' 라는 식의 얘기는 물론 매우 감동적이지만(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독자에게서 '뭐야? 또 뻔한 얘기구만!' 이상의 반응을 기대하긴 어렵다.

이야기가 짧아서 그런 거라면, <수호천사…>의 여덟 배는 넘는 분량인<두근두근…>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단계성의 결여에서 오는 허술한 이야기는 완벽한 몸매, 훤칠한 키, 전교 수석에다 수영 챔피언인, 슬쩍 봐도 섹시한(원제가 <SEXY 가디언>이다) 시부키가 간절한,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내 이성을 마비시키기엔 충분해' 라는 대사를 토해내는 대목에서 나로 하여금 실소를 내뿜게 했다. 작가가 여성독자들을 넉다운 시키고자 심혈을 기울인―어떻게 하면 더 멋지게 할까 수십번 고민한 끝에 완성했음이 분명한―그 장면에서 말이다.

신조 마유란 작가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양질의 작품만이 만들어질 가치가 있고 나머지는 모조리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내가 뭐라고 그런 말을 하겠는가?). 만화라는 장르가 저급으로 취급되던 서럽던 시절, 정말 별 것 아닌 작품들 속에서 만화키드들은 장르의 위신을 세워줄 누군가를 고대했다. 그 기다림이 어찌나 절절했던지 곧 그 이상을 해내는 작가들을 만난다. 발전은 가속화된다. 장르의 수준은 상향 평준화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고대하던 메시아는 나타나지 않았나 보다. 신조는 그 기다림의 맹목성의 강도를 높이는 이 땅의 시련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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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절 1
오사카 미에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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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절. 원제는 벨 에포크Belle Epoque. 올 2월까지 불문학도였던(지금도 여전히 마음은 불문학도지만) 나에게 '벨 에포크'란 말은 19세기 중반에서 1차 세계대전 전까지의 프랑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박물관이 탄생하고 제 나름의 소장품이 생겨난 이 시기는 그들에겐 '좋은 시대'였다(보통 프랑스 관련서에서는 '벨 에포크'를 '아름다운 시절'로 번역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 제목으로는 잘 어울린다.).

오사카 미에코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나이를 서른 전후로 설정해놓고 이들의 현재 삶을 다양한 변주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 이들 나이 서른이 인생에서 아름다운 시절이란 얘길 하고 싶은가 보다. 왜 굳이 서른일까? 라는 질문엔 글쎄……, 주인공(모두들 주인공이랄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이 대표를 뽑아야 한다면) 키레이의 대사처럼 어른의 세계와도 10대 정도의 어린 세대와도 소통 가능한 나이이기 때문이라서……? 한번 추측해본다.

많은 분들의 찬사에 걸맞게 오사카는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을 잘 구현해냈다. 깔끔한 연출, 담백한 그림체, 그럼에도 풍부한 인물들의 표정은 작가가 우리네 인생 얘기를 맛깔스럽게 풀어내는 탁월한 이야기꾼일 뿐 아니라,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도 고도의 숙련가임을 짐작케 한다. 그 '기술적인 면' 가운데 특히나 높은 점수를 주고픈 부문은 원근법의 기막힌 사용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으로 보여주려는 회화야 말로 진정 대단한 예술이라는 마스터 키튼의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이렇게 해서 벌써 들먹였지만) 작가가 그려내는 2차원 속의 3차원은 평소에는 정공법으로 지극히 자연스런 광경을 묘사하는 데 주력하다가, 인물의 심리상태를 쫓을 필요를 느낄 때면 원경과 근경의 극도의 대비를 통해 이를 물리적으로 구체화해 단 한 장면만으로도 징한 울림을 이끌어낸다.

모든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에피소드마다의 분량과 여기쯤에서 <팍>하고 터져준다는 조절은 전체 이야기를 하나로 보고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산한 작가의 탁월한 프로젝트 관리 능력이겠지. 책을 읽다 보면 가끔씩 관계의 발전단계를 어디에다 그래프로 만들어 놓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된다. 뭣에 쫓겨서, 마감에 맞추려고 비약하거나 쓸데 없는 얘기를 집어 넣는다거나 한 흔적을 찾긴 어렵다.

이런 괜찮은 만화를 놓고 괜히 어떻게든 단점을 끄집어 내려는 노력은 결코 필요 없지만, 한없이 아름다운, 이 세상의 빛이요, 소금 같은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정말 괜히 《지뢰진》의 이이다 형사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싶어진다. 내겐 이 세상이 썩 괜찮지 않고 나 살고 있는 지금이 그리 아름답지 않은 시절이라 생각돼서일까? 그렇다고 키레이에게 태클을 시도하면 안 되겠지. 그녀는 열심히 살고 있으며 충분히 행복해질 자격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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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하의 만화토피아 - 마니아가 추천하는 일본 망가 베스트 50
오은하 지음 / 한겨레출판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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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격세지감이라고 해야하나? 뭐 그렇게 세상을 오래 살진 않았지만, 때로는 나도 격세지감이란 감정에 접어드는 때가 있다. 불확실하긴 해도 아마 우리가 대본소를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해서 하는 말이다. 곧 도서대여점이란 이름으로 변신해버렸으니까.

내가 만화라는 걸 처음 접했던 것은 초등학교 때였는데, 소년00일보 등에 실리는 명랑만화가 그것이었다. 장르의 이름이 말해주듯 그것은 매우 '명랑'한 것이었다. 3등신(때로는 가슴 아프게 2등신 정도로 짧아지기까지 하는) 인물들이 갖가지 비틀어진 상황 속에 놓이고, 그런 상황 때문에 우스꽝스런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만화. 재미는 덤이 아닌 기본인 그런 만화. 당시엔 다분히 내용 중심으로 봤지만, 작가마다 그림체가 다르다는 걸 곧 깨닫게 되었다.

나름대로 취향도 생겼다. 길창덕보다는 윤준환이 내게 맞는다는 뭐 그런 거. 김동화의 별이 많이 들어간, 그렁그렁한 눈을 가진 소녀가 나오는 만화를 보게 된 건 그 후였는데, 소년중앙으로 기억한다. 3등신 만화가 이 세상 만화의 전부인 줄 믿고 있던 내게 그것은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찰랑거리는 머리와 기다란 팔다리, 모호한 이야기를 지닌 소녀-이 작품의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내 평생의 오점으로 남으리라-는 詩가 네루다에게 온 것처럼 어느 날 내게로 왔고, 만화라는 장르는 그렇게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만다.

이 책은 이렇게 나처럼 서서히, 시나브로 만화를 알게 되고 깊이(?) 있게 이해하기까지 이른 독자들에게 흥미진진한 읽을거리다. 이렇게 알고 있는 건 내가 과문한 탓인지도 모르나, 내가 뭐에 홀린 듯 만화를 읽어대던 시절(중1때부터였는데)에 만화를 본격적인 담론의 소재로 사용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다. 하물며 이런 책이 나온다는 건 더더욱... 나는 이 책을 붙들고 이렇게 두 번 격세지감에 빠진다.

저자는 나보다 무척 연상인데도 만화란 대상에 대해 나와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물론 나는 '테리우스·알버트 아저씨 논쟁'에 참여는 못해봤고 저자와 달리 만화를 숨어서 읽었단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점차적으로 만화를 넓게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래 여학생들처럼 '순정'만을 편애하다가 탈장르를 선언하였고, 내용이나 그림에만 집중하던 눈이 어느덧 페이지 전체를 보게되면서 작가마다의 연출을 읽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바스트 샷이라든가 심리 컷의 삽입이라든가 하는 용어를 써가며 '이 장면엔 이 컷이 안 어울려'하며 제법 아는 척을 하게 된 것까지(아, 물론 '아는 척'은 내 경우에만 적용되는 말이며, 책에는 저자의 발전 단계를 위와 같은 내용으로 명시하진 않았음을 밝혀둔다).

혹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런 식으로 신경 써가며 만화를 읽는 행위가 도리어 과거 단순한 즐거움만을 취하던 시절의 만화 읽는 기쁨을 앗아간 것은 아니냐는. 그 말엔 이렇게 반박하겠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것이 피카소의 작품이 됐든 에코의 소설이 됐든 간에 내가 읽어낼 수 있는 폭이 넓어지면 질수록 대상을 향유하는 기쁨도 커진다고. 당연히 만화도 마찬가지라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이겠다. 그런 감식안을 지닌 독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진정 멋진 만화가 탄생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으로 보고 양손을 들어 환영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역사는 진보하는 게 아니라 순환하는 것일 뿐이라 했던가? 그러나 만화의 역사는 분명 진보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행복한 격세지감 속에서 다시금 만화 읽는 황홀감에 빠져 있다. 이 책은 이런 나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위한 축전 서곡쯤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찬사가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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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가방 여행
피터 비들컴 지음, 원재길 옮김 / 열림원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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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나는 피터 비들컴이란 낯선 이름 옆에 나란히 놓인 원재길이란 익숙한 이름을 보고 놀랐다. 나는 그를 소설가로만 알고 있었기에 그가 번역을 한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들고 보기 편한 작은 판형이라 나란히 꽂힌 책들 틈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이 책은, 그러나 본문에 들어가기 전 몇 페이지를 읽은 후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의아함과 심하게는 불쾌감을 심어주기 충분한 존재로 탈바꿈해버린다.

저자는 꽤 고압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여행을 위한 여행은 낭비다. 진정한 여행은 마르코 폴로와 같은 목적-여기서는 사업상의 목적을 말한다-을 지닌 여행뿐이다.' 저자는 사업상 여러 나라(무려 160개국)를 방문(/여행)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런 그가 이렇게 고압적인 어조로 나오는 데는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덮어놓고 이해해보고도 싶지만, 순도 100%의 관광을 위한 여행을 꿈꾸는 순진한 독자들-나처럼 해외 여행 경험이 적은-은 기가 꺾여버릴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풀이 죽어 버린, 아니면 이제까지 자신이 감행했던 무수한 여행들이 폄하된 것에 대한 불쾌감을 강하게 드러내고픈 사람들이라면 이야기의 첫 장인 브뤼셀로 진입하기를 그만 두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무엇에 이끌렸는지 브뤼셀로의 초대에 응했다. 그것은 적을 알고 나를 알자는 선조들의 가르침 때문이었을까?

저자의 말에서의 엄한 꾸짖음과는 달리 본문의 내용은 비들컴씨가 사업상 방문해야만 했던 각 도시들에서의 사건기록에 불과하다. 그는-도대체 그가 정확히 어떤 회사에서 일하는 건지 여전히 모르겠다-일 때문에 그 도시(나라) 사람들을 만났고, 그 도시(나라) 이미지는 '업무 관련'이란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것들로 한정돼 있다. 그러나 해당 도시의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그가 길 위에서 보낸 시간들을 고려한다면 그도 얼마간 총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낸 것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자신의 이런 업무상 여행 경험을 많은 글로 녹여 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타고난 재능인지) 자주 발견되는 위트 넘치는 표현들은 초반 그에게 품었던 악감정(?)을 수그러들게 만든다(배신자라고 낙인찍히는 건 아닌지). 방콕의 대기 오염 상태를 매우 입체적으로 묘사한 부분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밖에도 독일인의 특성과 미처 몰랐던 스위스적인 기질에 대한 구체적 사례는 내 상식의 수위를 높여주었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닌가?

'개인이 지니는 개체성의 기묘함이란 모든 카테고리나 일반론을 넘어선다.'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떠올려본다. 나는 개체성의 기묘함을 정중히 인정한다는, 그런 자세를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 책을 끝까지 읽었다. 비들컴씨의 생각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나는 그의 말에 한번 귀기울여 보기로 했고, 그 결과 나는 얻은 게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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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내 아름다운 파출부 - 해외현대소설선 3
크리스티앙 오스테르 지음, 임왕준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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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해리는 독특한 독서습관이 있었는데, 새로 읽기 시작한 책의 결말부분을 꼭 먼저 들춰보는 버릇이 그것이다. 이유인 즉, 책을 다 읽기 전에 자신에게 어떤 사고가 닥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단 시작해 놓은 책의 결말도 모르는 채 죽기라도 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하니까.

내 경우는 해리와 같은 이유에서는 아니지만, 책(거의 소설이다)을 읽기 시작해서 한 10분 정도 경과한 후에 끝부분을 슬쩍 들춰본다. '들춰본다'라기 보다는 그냥 본다(단, 추리소설만은 제외다). 마지막 장을 다 읽어버리는 게 아니라, 대개는 마지막 두 세 문장만을 읽는다. 내가 읽었던 책들 대부분, 그 결말을 먼저 알아서 독서의 재미가 반감되었던 것은 없었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내지는 짐작만으로는 불충분한 비약을 메우는 과정이 바로 나의 독서과정인 것이다.

이 소설, <로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파출부를 고용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이 소설은 내가 마지막 장을 들추려 마음먹기 전까지-아니, 들춰본 후까지- 주인공(화자)의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인물간의 대화는 약속된 문장 기호에서 뛰쳐나와 서술문 속에 대화가 아니라는 듯 자리하고 있다. 묘한 형식이다. 내용을 보자, 화자는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파출부를 고용했고, 이야기는 고용된 파출부(당연히 그녀의 이름은 로라다)와 화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기록이다.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소설인 만큼, 여기 저기에서 발견되는 화자의 깊은 사유도 발생하는 사건들과 동등한 자격을 지닌다. '깊은 사유'가 등장했다. 이렇게 묻고 싶을 거다. 지루하냐고.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 앉은자리에서 많게는 3시간 정도 투자하면 너끈히 읽어낼 수 있는 소설이다. 재미있기까지 하다. 뒤에 실린 역자 해설까지 눈에 집어넣은 후에는 아카데믹한 기분마저 느끼게 된다.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그리고 이 서평의 완결성을 위해 <로라..>의 마지막 문장을 이쯤에서 말해둔다. '저기 좀 보세요, 따님이 오고 있네요.' 도대체 화자와 로라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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