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가방 여행
피터 비들컴 지음, 원재길 옮김 / 열림원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시립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나는 피터 비들컴이란 낯선 이름 옆에 나란히 놓인 원재길이란 익숙한 이름을 보고 놀랐다. 나는 그를 소설가로만 알고 있었기에 그가 번역을 한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들고 보기 편한 작은 판형이라 나란히 꽂힌 책들 틈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이 책은, 그러나 본문에 들어가기 전 몇 페이지를 읽은 후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의아함과 심하게는 불쾌감을 심어주기 충분한 존재로 탈바꿈해버린다.

저자는 꽤 고압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여행을 위한 여행은 낭비다. 진정한 여행은 마르코 폴로와 같은 목적-여기서는 사업상의 목적을 말한다-을 지닌 여행뿐이다.' 저자는 사업상 여러 나라(무려 160개국)를 방문(/여행)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런 그가 이렇게 고압적인 어조로 나오는 데는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덮어놓고 이해해보고도 싶지만, 순도 100%의 관광을 위한 여행을 꿈꾸는 순진한 독자들-나처럼 해외 여행 경험이 적은-은 기가 꺾여버릴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풀이 죽어 버린, 아니면 이제까지 자신이 감행했던 무수한 여행들이 폄하된 것에 대한 불쾌감을 강하게 드러내고픈 사람들이라면 이야기의 첫 장인 브뤼셀로 진입하기를 그만 두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무엇에 이끌렸는지 브뤼셀로의 초대에 응했다. 그것은 적을 알고 나를 알자는 선조들의 가르침 때문이었을까?

저자의 말에서의 엄한 꾸짖음과는 달리 본문의 내용은 비들컴씨가 사업상 방문해야만 했던 각 도시들에서의 사건기록에 불과하다. 그는-도대체 그가 정확히 어떤 회사에서 일하는 건지 여전히 모르겠다-일 때문에 그 도시(나라) 사람들을 만났고, 그 도시(나라) 이미지는 '업무 관련'이란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것들로 한정돼 있다. 그러나 해당 도시의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그가 길 위에서 보낸 시간들을 고려한다면 그도 얼마간 총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낸 것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자신의 이런 업무상 여행 경험을 많은 글로 녹여 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타고난 재능인지) 자주 발견되는 위트 넘치는 표현들은 초반 그에게 품었던 악감정(?)을 수그러들게 만든다(배신자라고 낙인찍히는 건 아닌지). 방콕의 대기 오염 상태를 매우 입체적으로 묘사한 부분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밖에도 독일인의 특성과 미처 몰랐던 스위스적인 기질에 대한 구체적 사례는 내 상식의 수위를 높여주었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닌가?

'개인이 지니는 개체성의 기묘함이란 모든 카테고리나 일반론을 넘어선다.'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떠올려본다. 나는 개체성의 기묘함을 정중히 인정한다는, 그런 자세를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 책을 끝까지 읽었다. 비들컴씨의 생각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나는 그의 말에 한번 귀기울여 보기로 했고, 그 결과 나는 얻은 게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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