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조너선 프랜즌 지음, 공보경 옮김 / 은행나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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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소설인 것처럼 뻥치는 출판사의 광고문구 때문에 대단한 기대를 하고 산 것이 아니었다면 재밌고 만족했을 소설이다. 물론 그런 광고가 없었다면 800쪽이 넘는 소설을 읽기 시작하지 않았겠지만.


비밀을 만드는 이유와 이를 다루는 방법에 관한 소설이라고 점잖게 표현할수도 있겠지만, 그냥 출생의 비밀과 인터넷 폭로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엮어가면서 위키리스크와 저널리즘에 관한 번뜩이는 통찰을 곳곳에서 말하는 작품이다. 한국에서 이런 소설을 쓴다면 아마 나꼼수 같은 팟캐스트나 저널리즘인 척하면서 조회수 올리기용 영상을 올리는 유튜버들이 소재가 되겠지.



이 혁명이나 저 혁명이나 비슷비슷하게 마련임을 안드레아스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는 혁명성을 큰 소리로 외치는 혁명을 또다시 맞닥뜨렸다. 합법적 혁명-이를테면 과학혁명-은 혁명성을 떠벌리지 않고 그저 발생할 뿐이었다. 약하고 두려움에 차 있으며 불법적인 혁명만이 혁명성을 떠벌렸다. 약하고 두려움에 찬 정부는 사람들을 해방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사람들 주변에 벽을 세워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고, 그 정부의 지배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안드레아스는 동독이 감사하게도 역사의 선봉에 서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영원한 싸움이 계속되는 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다시금 떠올렸다. 비밀은 권력이었다. 돈도 권력이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점도 권력이었다. 권력, 권력, 권력. 권력을 차지해봤자 지독히 외롭고 억눌리는 삶을 살 뿐인데 세상은 어째서 권력 차지를 위한 아귀다툼을 중심으로 돌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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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수인 세트 - 전2권 수인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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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황석영 자서전 '수인'.

캐나다에 올 때 수업교재 외에 몇권을 더 챙겨왔는데, 지난해 나온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이번 기회에 읽어야지, 하고 일부러 사서 왔다. 겨울 방학을 맞아 완독.



나는 4.19세대는 진짜 별 고민 없이 사회에 편입한 줄 알았다. 극심한 탄압을 오랫동안 받았던 것도 아니고 이념적인 그늘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4.19세대인 이기택 이명박 같은 정치인들을 봐도 그렇고, 서울 시내에 있는 4.19혁명기념관도 얼마나 짱짱한지, 저 사람들은 그냥 어린 시절에 의분을 낸 것으로 평생 먹고 사는 군!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요즘 20대,30대들이 386세대나 나 같은 X세대를 보는 시선이 아마 그럴 것이다. 언제나 내가 겪지 않은 고통은 가벼워 보이거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책을 보면서 제대로 알게 됐는데, 황석영은 경복고 2학년 때 4.19시위에 어정쩡 참가했다가 친구가 총에 맞아 죽는 경험을 했다. 어쩌면 그 트라우마가 그를 평생 쫓아다닌 것 아닌가 싶다. 그의 친구들도 4.19 이후로 방황하다 요절하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폐인이 되기도 했다. 그도 고교시절에 이미 문재를 떨칠 정도로 필력을 드러냈지만 4.19를 겪은 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방황했다. 황석영의 성장소설인 '개밥바라기별'이나 비슷한 또래인 이문열의 '젊은날의초상' 같은 작품들에 나오는 택도 아닌 무모한 낭만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책은 그의 자서전이지만 그가 한국사회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에 맞서 늘 글과 삶으로 싸우며 살았기에 그대로 한국현대사이기도 하다. 오랜 방황 끝에 어렵사리 문단에 발을 디뎠지만 그 뒤로도 박정희 정권과 투쟁하고 전두환 정권에서 광주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나중에는 북한을 방문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가정적으로 불행한 일을 겪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유를 추구한 작가에게 분단과 독재로 얽매여 있던 땅은 감옥과 다름 없었고, 이 땅이 감옥이라는 것을 자각하며 그 틀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다 개인적으로는 적지 않은 아픔을 겪었다. 그의 삶은 감옥에 갇히지 않으려 자유를 꿈꾸다 그 꿈 때문에 감옥에 갇혀버리는 수인囚人의 그것이었다.

이 책은 때론 장길산 같고 때론 객지 같고 때론 오래된 정원 같다. 오랜 망명과 수감 생활 얘기 앞뒤로 유년시절과 청년기의 방황, 그 과정에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기록했다. 북한에서 만난 김일성이나 민주화운동을 함께 한 김남주 문익환 같은 인물들은 물론이고 감옥에서 만난 절도범과 사기꾼, 어린 시절 영등포 피난민마을에 살던 아이들과 이웃 술주정꾼 아저씨 얘기까지 한사람 한사람 애정을 기울여 마치 열전을 기록하듯 썼다. 그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힌 이야기를 따라가며 전쟁과 분단의 역사, 70~80년대 문학사, 민주화운동사의 한 부분을 생생하게 간접체험했다.

내가 황석영을 좋아하게 된 것은 고교 1학년 때 학교 도서관에 있던 '장길산' 덕분이었다. 그 뒤로 삼포가는 길, 객지, 무기의 그늘 같은 소설을 읽으며 그에게서 풍기는 장돌뱅이 분위기랄까, 반항아적이고 풍운아 같은 분위기에 매료됐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9년에 황석영이 방북을 했는데,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뒤로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고 독일로 미국으로 떠도는 것이 안타까웠다.

손님이란 소설은 대학생 때 읽었는데, 분단의 상처를 가장 깊이 드러낸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을 탄다면 박완서 아니면 황석영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박완서 선생님은 돌아가셨으니...

그의 자서전을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이야기에 나보다 더 어린 세대들은 얼마나 귀를 기울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4.19세대의 이야기를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고 그들의 고통을 눈여겨 보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의 젊은 세대들도 우리나 우리 윗세대가 겪은 고통과 상처, 투쟁 같은 것에 무관심하지 않을까....

상처와 고통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보상이나 대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상처와 고통을 겪(었)고 그를 극복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황석영이나 박완서 같은 작가들의 글은 두고두고 널리 읽히면 좋겠다.


그녀가 택시를 타고 떠났고 나는 잠시 길 위에 서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의 결별의 시작이 되디라고는 알지 못했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과 함께 깊은 회한이 밀려온다.

시간의 감옥, 언어의 감옥, 냉전의 박물관과도 같은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서 작가로 살아온 내가 갈망했던 자유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던가.

앓고 나서 나는 이제야 내가 양손잡이였던 것을 깨닫는다. 이제는 양손을 벌려 포옹할 수 있게 되었다. 노환 끝에 철이 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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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소년 1~3 세트 - 전3권
이상무 지음 / 씨엔씨레볼루션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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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의 까치, 허영만의 이강토, 혹은 이두호의 까목이보다 앞서 만화가의 페르소나였던 캐릭터, 이상무의 독고탁.


독고탁은 어떤 의미에서 까치나 이강토의 원형이다. 물론 그보다 앞에는 황제의 흑나비도 있었지만 독고탁은 동시대의 인물로서 인생에 닥쳐온 불행을 웃음과 의지로 이겨내는 츤데레 캐릭터의 완성형이었다.


1978년부터 어깨동무에 연재됐던 울지않는소년은 축구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독고탁 이야기다. 만화를 보면 알 수 있지만 80년까지도 연재된 것 같다.


연재될 때 본 뒤 거의 40년만에 다시 만난 울지않는 소년.


놀랍게도, 여전히 재미있다. (참고로 이두호의 임꺽정은 전질을 사놓고 1권만 보고 덮어버렸다


불행한 축구선수의 아들 독고탁이 '한국축구의 비밀병기가 돼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성취한다는, 어찌보면 뻔한 스포츠만화 스토리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캐릭터들이 살아 있다. 독고탁의 대부와 짝사랑 숙이, 엄마와 형, 심지어 축구장 경비원할아버지까지 그의 주변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인간미가 있다. 저마다 독고탁과 얽힐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고, 그와 부딪치는 사연들이 깔려 있다. 캐릭터마다 독특한 성격과 말투는 몸개그의 소재로 적절히 쓰인다.


독고탁이 마지막에 축구영웅이 될 것을 알지만, 도무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지 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스토리도 일품이다.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운다든지 하는 지금과 다른 그 시대의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 내 어릴 적 친구 독고탁을 깔끔하게 인쇄된 새책으로 만난다는 기쁨이 크다.


내 기억에 울지않는 소년 뒤에 아홉개의빨간모자 라는 독고탁의 또 하나의 야구만화가 어깨동무에 연재된 것 같다. 그 작품도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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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다시 묻다 - 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 비아 제안들 시리즈
후카이 토모아키 지음, 홍이표 옮김 / 비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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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회가 아닌 일본의 대학에 신학과가 필요한가?

도쿄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던 저자는 이런 질문을 가지고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개괄한다.

초대교회는 왜 신학을 만들어야 했는가? 중세 유럽사회는 왜 신학에 매달렸나?

(종교개혁 이후) 독일에서, 영국에서, 프랑스와 미국에서 당대의 신학은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가?

모두 8차례 일본의 일반인들에게 강연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강연한 내용이라 그런지 잘 읽힌다. 수많은 신학자가 언급되지만 주석이 충실하게 돼 있어서 신학을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들도 읽어나가기 어렵지 않다.

저자가 결론에서 하는 얘기가 요즘 한국사회를 보면서 내가 가지는 질문과 닿아 있어서 앞으로 그의 사상이 어떤 경로로 뻗어갈지 궁금해졌다.

"신학은 현대 사회에서, 현대인에게 진정한 상대화를 가르치는 학문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리고 신학은 현대 사회의 관용 없는 그릇된 절대주의, 그 반대편에 있는 무절제한 상대주의, 그리고 그 양쪽에 잠복해 있는 자기절대화 모두를 거부하고 비판한다. .... 그리스도교가 본래 가지고 있던 모습과 사회적인 기능을 회복하는 일에 신학이 기여함으로써 신학은 오늘날 세계에 말을 건네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현대인, 특히 대한민국에서 사는 대다수는 초월에 대한 믿음이나 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나'의 '느낌'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어떻게 '나' 바깥의 세계와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 나 바깥의 세계를 인정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SNS나 미디어를 통해 바깥의 세계를 만나는 것 같이 착각하지만 사실은 자신과 같은 시각의 무수한 변주를 보면서 "음 나와 같은 생각인 사람이 많군=내가 맞군"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더 크다.

굳이 타인을 만나야 할까? 왜 낯선 세계와 조우해야할까?

지난 대통령선거 때 일이다. 사전투표 첫날 투표를 하고 온 사람들 중 일부가 "후보자들 이름 사이에 빈틈이 없어서 엄청 긴장하면서 도장을 찍었다"고 온라인에 올렸다. 후보자 이름 사이에 빈틈이 없으면 공식투표용지와 다르기 때문에 무효가 될 수 있다고 누군가 지적하자, 많은 사람들이 "나도 같은 경험을 했다"면서 무효표를 만들기 위한 음모일지 모른다고 흥분했다. 이들은 "바로 몇시간전에 내가 투표하고 왔는데, 분명히 후보자들 이름 사이에 빈틈이 없었다"고 확신하고 맹세했다. 투표조작 우려가 점점 커졌다. 하지만 사전투표 이틀째에는 그런 보고를 한 사람이 없었고, 최종투표 뒤 개표에서도 그런 표는 나오지 않았다. 후보가 많아서 칸이 좁아졌는데, 신중하게 투표하느라 긴장한 사람들이 착각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온라인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면서 더 큰 진실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같은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서로 착각을 주고 받으며 잘못된 확신을 키웠을 뿐이었다.

낯선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자폐적 나르시즘에 머무는 미숙한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초월적인 세계가 있든 없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So I don't care).

내가 보기에는, 어떤 면에서 현대(한국)인은 자신의 세계에서 신의 존재를 지우면서 타인의 존재마저 삭제해버렸다. 나보다 더 큰 어떤 존재-그것이 생명이든 세계이든 에너지든 우주든-앞에 나를 상대화시키는 경험은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한대로 관용없는 절대주의나 극단적인 상대주의의 오류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다.

그런 길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학이 이 시대에 해야하는 역할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깊이 공감이 된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비기독교사회에 사는 우리는 이 지점에 머물지 못하고, 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친다.

그 구원의 길이 굳이 기독교의 야훼여야 하는가? 그것이 굳이 예수이어야 하고, 그 세계를 교회에서 찾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도 우리는 비기독교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답을 내놓을 수 있는가? 오늘 한국(과 일본)의 모든 기독교인에게 놓여진 질문이다.

물론 기독교 신앙을 장식으로 걸고 있지 않는 한 기독교인들은 저마다 이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답들을 함께 내어놓고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장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다.

교회에선 정해진 답만을 말하기를 바라고, 신학은 그런 교회에 복무하기만을 요구 받고 있다.

기독교인도 아닌 일반인들이 신학자와 이런 강연회를 가지고 또 그 내용을 책으로 정리해 펴내는 일본사회와 교회의 힘이 조금 부럽다.


신학은 현대 사회에서, 현대인에게 진정한 상대화를 가르치는 학문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리고 신학은 현대 사회의 관용 없는 그릇된 절대주의, 그 반대편에 있는 무절제한 상대주의, 그리고 그 양쪽에 잠복해 있는 자기절대화 모두를 거부하고 비판한다. .... 그리스도교가 본래 가지고 있던 모습과 사회적인 기능을 회복하는 일에 신학이 기여함으로써 신학은 오늘날 세계에 말을 건네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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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다시 묻다 - 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 비아 제안들 시리즈
후카이 토모아키 지음, 홍이표 옮김 / 비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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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들이 신학의 역사를 개괄하기에도 아주 좋은 책입니다.
˝기독교 사회가 아닌 일본에서 신학이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는 질문을 가지고, 답을 찾기 위해 초대교회부터 유럽-미국으로 이어지는 신학의 역사를 훑어봅니다. 한국교회도 같은 질문을 가지고 답을 모색해야할 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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