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수인 세트 - 전2권 수인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황석영 자서전 '수인'.

캐나다에 올 때 수업교재 외에 몇권을 더 챙겨왔는데, 지난해 나온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이번 기회에 읽어야지, 하고 일부러 사서 왔다. 겨울 방학을 맞아 완독.



나는 4.19세대는 진짜 별 고민 없이 사회에 편입한 줄 알았다. 극심한 탄압을 오랫동안 받았던 것도 아니고 이념적인 그늘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4.19세대인 이기택 이명박 같은 정치인들을 봐도 그렇고, 서울 시내에 있는 4.19혁명기념관도 얼마나 짱짱한지, 저 사람들은 그냥 어린 시절에 의분을 낸 것으로 평생 먹고 사는 군!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요즘 20대,30대들이 386세대나 나 같은 X세대를 보는 시선이 아마 그럴 것이다. 언제나 내가 겪지 않은 고통은 가벼워 보이거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책을 보면서 제대로 알게 됐는데, 황석영은 경복고 2학년 때 4.19시위에 어정쩡 참가했다가 친구가 총에 맞아 죽는 경험을 했다. 어쩌면 그 트라우마가 그를 평생 쫓아다닌 것 아닌가 싶다. 그의 친구들도 4.19 이후로 방황하다 요절하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폐인이 되기도 했다. 그도 고교시절에 이미 문재를 떨칠 정도로 필력을 드러냈지만 4.19를 겪은 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방황했다. 황석영의 성장소설인 '개밥바라기별'이나 비슷한 또래인 이문열의 '젊은날의초상' 같은 작품들에 나오는 택도 아닌 무모한 낭만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책은 그의 자서전이지만 그가 한국사회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에 맞서 늘 글과 삶으로 싸우며 살았기에 그대로 한국현대사이기도 하다. 오랜 방황 끝에 어렵사리 문단에 발을 디뎠지만 그 뒤로도 박정희 정권과 투쟁하고 전두환 정권에서 광주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나중에는 북한을 방문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가정적으로 불행한 일을 겪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유를 추구한 작가에게 분단과 독재로 얽매여 있던 땅은 감옥과 다름 없었고, 이 땅이 감옥이라는 것을 자각하며 그 틀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다 개인적으로는 적지 않은 아픔을 겪었다. 그의 삶은 감옥에 갇히지 않으려 자유를 꿈꾸다 그 꿈 때문에 감옥에 갇혀버리는 수인囚人의 그것이었다.

이 책은 때론 장길산 같고 때론 객지 같고 때론 오래된 정원 같다. 오랜 망명과 수감 생활 얘기 앞뒤로 유년시절과 청년기의 방황, 그 과정에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기록했다. 북한에서 만난 김일성이나 민주화운동을 함께 한 김남주 문익환 같은 인물들은 물론이고 감옥에서 만난 절도범과 사기꾼, 어린 시절 영등포 피난민마을에 살던 아이들과 이웃 술주정꾼 아저씨 얘기까지 한사람 한사람 애정을 기울여 마치 열전을 기록하듯 썼다. 그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힌 이야기를 따라가며 전쟁과 분단의 역사, 70~80년대 문학사, 민주화운동사의 한 부분을 생생하게 간접체험했다.

내가 황석영을 좋아하게 된 것은 고교 1학년 때 학교 도서관에 있던 '장길산' 덕분이었다. 그 뒤로 삼포가는 길, 객지, 무기의 그늘 같은 소설을 읽으며 그에게서 풍기는 장돌뱅이 분위기랄까, 반항아적이고 풍운아 같은 분위기에 매료됐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9년에 황석영이 방북을 했는데,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뒤로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고 독일로 미국으로 떠도는 것이 안타까웠다.

손님이란 소설은 대학생 때 읽었는데, 분단의 상처를 가장 깊이 드러낸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을 탄다면 박완서 아니면 황석영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박완서 선생님은 돌아가셨으니...

그의 자서전을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이야기에 나보다 더 어린 세대들은 얼마나 귀를 기울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4.19세대의 이야기를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고 그들의 고통을 눈여겨 보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의 젊은 세대들도 우리나 우리 윗세대가 겪은 고통과 상처, 투쟁 같은 것에 무관심하지 않을까....

상처와 고통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보상이나 대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상처와 고통을 겪(었)고 그를 극복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황석영이나 박완서 같은 작가들의 글은 두고두고 널리 읽히면 좋겠다.


그녀가 택시를 타고 떠났고 나는 잠시 길 위에 서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의 결별의 시작이 되디라고는 알지 못했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과 함께 깊은 회한이 밀려온다.

시간의 감옥, 언어의 감옥, 냉전의 박물관과도 같은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서 작가로 살아온 내가 갈망했던 자유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던가.

앓고 나서 나는 이제야 내가 양손잡이였던 것을 깨닫는다. 이제는 양손을 벌려 포옹할 수 있게 되었다. 노환 끝에 철이 드는 모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