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시계공 사이언스 클래식 3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용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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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런 비유를 한다. 시계부품들을 다 해체시켜 놓고 나서, 그것들을 상자에 담고 나서, 상자를 막 흔들고 놓았을때, 과연 다시 시계의 기능을 할 수 있게끔 다시 조합될 수 있는 확률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지구상의 많은 생명체또한 이런 신비한 조화가 어찌 우연이 발생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창조론자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그러나 누적적인 자연선택이 모든 생물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며, 그것이야 말로 조물주의 역할은 했던, 의도적이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눈먼 시계공이라는 것이다. 솔직하게 책을 읽고 나서의 느낌은 실망스러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철저한 과학적인 객관적인 기반으로, 진화론을 풀어갔다기 보다는 자신의 진화론적인 심증을 어떻게든 과학적인 가설로 설명해보려한 시도라는 것이다. 물론, 창조론이냐 진화론 이냐의 문제는 과학적인 틀로 결론 내릴 수 없는 부분인 것은 틀림없다. 어떤 부분에서는 관찰과 검증의 대상의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책에 대해서 실망스러운 것은 다음 두가지이다. 첫째는, 과학적인 가설로 생명의 존재에 대해 설명한 자기 심증적인 책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과학서인 것처럼 책을 꾸몄다는 것이다. 아마도, 고의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일반 사람들에게 ''과학으로는 마치 진화론으로 결론지을 수 밖에 없는'' 인상을 주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저자가 생명의 존재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가설들이나 컴퓨터 시뮬레이션들은 터무니없이 단순화되었고, 그의 추측의 설명도 터무니없이 단순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진화론에 대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적절히 설명하려 하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해는 하지만, 정말로 저자가 그런식의 설명을 했다는 것에 대해 의아치 않을 수 없다. 사실, 창조론이 맞냐, 진화론이 맞냐는 것은 섣불리 결론내리기가 힘들다. 내가 결론내리기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결론을 내린다"로 말할때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어떠한 기준점 (reference)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간을 얘기할때, 시간의 기준점이 되는 어떤 시작시간이 있거나, 혹은 상대시간점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생명의 존재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는, 조물주가 만들었냐, 우연히 먼지로부터 발생한 것인지에 대한 것은, 우리 인간이, 실험해보고 증거를 조사하는 많은 부분에서 아직도, 아마도 미래에서도, 헛점도 많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많다. 이말은 꺼꾸로 얘기하면, 창조론일수도 있고 혹은 진화론일 수도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작은 결론을 내릴 때가 왔다. 그렇다면, "심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과연 당신은 어느쪽이 맞는 것 같냐?" 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이 받아왔던 신앙교육, 과학교육, 선입견, 그런 것들속에서 최대한 자신을 객관화 시키고, 자신에게 최대한 솔직하게 물어봐야하는 고통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오면서, 어떠한 교육이나 선입견을 통해서, 이미 마음속에 적어도 창조론,진화론에 대해서는 심증을 가지고 있다. 창조론에 심증을 굳힌 사람들은 창조론과학을 주장하는 것이고, 진화론에 심증을 가진 사람은 진화론과학을 파고든다. 문제는 과학이 절대 근거가 될수 없기에 그것으로 출발하여 결론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연구틀을 자기의 심증에 갖다 붙이고 마는 꼴이 되고 만다. 나는 이것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만일 과학이란 것이, 우리의 감각과 우리눈에 확인할 수 있는 법칙 넘어의 뭔가를 다룰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뭔가 새로운 장이 열릴 수는 있다. 그러나, 또한 이렇게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그리 낙관적이진 않다. 한 사람의 얘기를 하고 글을 마칠까 한다. 그리고 책을 다시 읽을때는 내가 전문적인 부분에서 책을 평가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다. 다음 글은 (www.nosuchjesus.com) 에서 발췌한 것이다. 미국무성의 고위 관리이면서 공산당 스파이로 13년 간의 이중 생활을 했던 휘테이크 챔버스가 자서전 ‘증인’(Witness)에서 자신이 왜 공산당원이 되었고 또 왜 탈당했는지를 이렇게 밝혔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평생을 걸고 끊임 없이 추구해야 할 두 가지 과제가 있는데 하나는 꼭 살아 있어야 할 이유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 놓고 죽을 수 있는 이유다. 그런데 그 두 가지를 공산주의(Marxism)에서 발견했기에 공산당에 입당을 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불행과 고통은 가진 자와 못 가진자 간의 갈등에 기인하므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살도록 하는 공산주의에 자기의 전 인생을 걸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도 또 탈당을 한 이유는 공산 세계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돈과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뉘며 그 체계가 오히려 더 부패하고 불평등한 죄악을 저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어 탈당했다고 덧붙였다. 볼티모어의 아파트에서 자기 딸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동안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귀엽다. 눈코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라고는 한군데도 없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 입가에 아이스크림이 덕지덕지 묻어 있고 콧물이 흐르는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그야말로 자기 인생의 가장 큰 기적이자 삶의 보람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과연 저런 아이가 자연의 원자들이 우연히 합성해서 생긴 것일까? 전기적 자극으로 단백질 원자가 분자가 되고 그래서 단세포를 형성하여 아메바에서 물고기와 원숭이를 거쳐서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라는 의심이 생겼고 생각하면 할수록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다는 심증이 들기 시작했다. 저렇게나 아름답고 너무나 섬세한 아이라면 반드시 선하고 완전하며 정미한 설계자 창조주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솟았다.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의 손가락이 자기 영혼을 만져준 것 같은 체험을 했고 그것이 자기 인생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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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처한 이성
필립 존슨 지음, 양성만 옮김 / IVP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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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오래전에 사 놓고도 정독을 요하는 책이라 최근에 와서야 읽게 되었는데, 두번을 내리 읽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추천필독서에 넣고 싶다. 역사서를 읽고 나면, 비행기를 타고 높은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면 내가 사는 동네가 어떤 모양이고, 어디쯤 위치에 위치에 있는지 가늠해 볼수 있는 것 처럼, 내가 살고 있는 현 시대의 문화와 양상을 어느정도 객관적으로 윤곽지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미 태어날때부터 현 시대의 사조에 담귀어서 교육받고 영향받아온, 유물론적 자연주의 사상과 유신론적 사상을, 균형을 가지고 지성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책 내용의 골자를 좀 간추려 보았다. ----------------------------------------------------------------- 한 시대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항은 사람들이 논쟁하고 있는 관점이 아니라, 현 사회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전제들, 즉 너무나 자명하게 참인 듯이 보이기 때문에 거의 변호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분명하게 설명되지도 않는 전제들이다. 이 전제들이 합리성에 대한 문화적 정의를 형성하며 이성의 시작점이 된다. 20세기 말 지식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과학이 실재를 묘사하는데 탁월한 권위를 갖고 있고, 과학은 ''신을 믿는 다는 것''을 현사회의 사조에서 주변화시키게 되었다. 즉 하나님을 위한 공간은 오직 상상의 세계에만 한정된다는 것을 함축하게 되었다. 과학의 권위는 점점 우세해져서 심지어는 궁극적인 기원과 같이 경험론적 탐구가 불가능한 주제에 대해서도 특권을 행사한다. 신학자들의 반대진술은 ''근본보수주의''라는 이름으로 무시된다. 과학적 주장의 신빙성은, 관찰 가능한 조건하에 발생하는 물질적 인과관계를 다루는 문제들만을 다룰때 얻을 수 있다. 과학적 방법은 그 성격상 가치나 목적록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힘이 없다. 예컨대 생명의 기원이나 인간의 행동을 기술하려고 할때 과학은 어떠한 ''철학적인 가정''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과학적 자연주의가 인간의 삶에 공공철학을 대변해 주고 이끌어 주는 역할을 기대하게 된 이유는, 초 자연적인 계시에 관한 서로의 대립적인 주장에 대해 논증할 공통의 기초를 발견하기가 어려운 만면, 과학의 감각경험은 정상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과학적 방법은 보편적으로 존중되고, 실험적인 검증을 받을 수 있는 문제들과 관련하여 현대사회를 통일시켜 주는 요소가 될수 있기 때문이었다. 19 세기 20세기를 거치면서 신앙인들은 과학이 자연스런 한계를 지킬 것이며, 유신론적 사상이 여전히 중요한 문제들 (생명이 무엇이고, 선과 악, 죽음이후의 구원문제들)을 알려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태는 다르게 판명되었는데, 그 이유는 현대주의적 과학이 제국주의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과학이 문화에게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을 말할 권위를 얻었을 때, 과학은 문화에게 ''실제는 신을 배제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신은 자연주의적 우주의 거대한 형이상학적 이야기를 말하기를 열망하는 과학에게는 불편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적 자연주의는 실제를 물리적 소립자와 비인격적인 법칙으로 환원시키고, 삶을 오직 생존과 번식을 위해 존재하는 유기체들 사이의 무의미한 경재으로 그리며, 정신을 뇌의 생화학반응에서 나타난 속성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냈다. 실용주의사상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진리의 가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실존한다고 주장하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반영하는 주장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방식은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거대한 과학의 형이상학적 유물론 이야기가 진리임으로 드러날 수도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두렵다고 스스로 객관적인 진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는 종교라면 그것은 곧 죽을 운명에 처해있는 것 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삶과 세계관과 공동체의 기초를 오류가 아닌 진리에 둘 수 있도록 도와줄 제1원리와 전제들을 발견하는 일에 전력을 해야한다. 문제가 이런 식으로 제기되면 피신할 필요를 느끼는 쪽은 자연주의자들이다. 과학은 중립적이었다고 하는둥, 과학은 절대적인 진리를 갖고 있다고 결코 주장한 적이 없었다는 둥 하는 것이다. 내가 믿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사실적 전제는 하나님이 목적을 갖고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우리의 목적지는 미래의 영광스러운 곳이 라는 것이다. 이제 바른 질문은, 만일 이 전제가 옳다면 어떻게 사태가 지금과 같이 혼란스런 상태로 빠졌는가라는 것이다. 그 대답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그 지으신 만물 속에서 보았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길로 들어서서 자기들 스스로 우상을 만들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의 우상의 형상은 과학의 거대한 형이상학적 이야기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며 사물의 진정한 존재 방식을 인정하는 것이 이성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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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Wins (International Edition, Paperback)
랍 벨 지음 / Harper Collins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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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여기가 천국인가? (책소개) Love Winds by Rob Bell 김승재 인간의 이성과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동 (East) 과 서 (West) 가 한 방향을 가리킨다”라든지 “흰색이라고 해서 검은색과 다른 것은 아니다”, “둥그런 삼각형”등등의 말들은 물리법칙이라든지 이성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어불성설 (語不成說) 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다른 공간과 세상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 볼 수는 있다. 만일 그 공간과 세상에 인간이 아닌 신(神)이 있는 곳이라면 모든 것이 우리의 이성과 물리적 법칙에 따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동과서가 한방향일 수 있는 게 말이 되는 공간이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의 상상을 훨씬 넘어 이미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린 현상이 지배하는 곳일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에서 묘사되는 하나님의 속성 중 상상 없이 이성적인 생각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속성이 있다. 하나님은 ‘사랑’과 동시에 ‘정의’라는 속성이다. ‘정의’와 ‘사랑’은 서로 미묘한 긴장의 관계에 놓여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잘못에 대해서 대개는 정의롭지 못하게 들어난다. 자식의 잘못을 감추거나 늘 용서하는 방식으로 끝나지, 잘못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지는 않는다. 이런 미묘한 관계는 성경에서 나오는 ‘지옥’의 개념이 들어가면 더욱 상충되어 보이기 시작하면서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게 되어 버린다. 결국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들을 영원한 지옥으로 넣으시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아무리 길어도 인생에서의 유한한 시간동안 지은 죄의 대가로 끝이 없는 영원한 지옥행이라는 것이, 사랑의 하나님이 행하시는 올바른 정의라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과 감각으로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지옥’은 인류역사상 종교와는 빼놓을 없는 중요한 개념이었다. 여전히 기독교에서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은 죄의 대가이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한 베스트셀러 기독교목사가 이런 전통적인 교리에 도전을 했다. 결국 얼마 전에는 타임스 (Times) 잡지에서 “Is hell dead (지옥은 없나)?" 란 선정적인 제목의 기사를 달고 그 목사의 이야기를 다루게 되었다. Rob Bell이란 목사는 미국 미시건주에서 꽤 큰 교회로 성장한 교회의 40대초의 젊고 유망한 목사로 알려져 있다. 타임스 잡지에 소개된 그의 이야기는 최근에 새로 발표한 그의 책 ‘Love Wins’ 을 골자로 하고 있어서, 나도 그 책을 사서 읽어 보게 되었다. 책은, 저자가 처음부터 언급한대로, 로브목사의 독창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2000년의 기독교역사가운데 늘 한 분파로 존재해 왔던 천국과 지옥에 관한 소수? 사람들의 생각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정리한 로브목사의 설교식 내용을 담고 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마저도 언젠가는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로브목사의 강한 메시지와 함께, 일반 교회에서 이야기되고 이해되는 ‘천국’과 ‘지옥’에 관한 고착된 개념에 대한 따끔한 일격을 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은 저 어딘가의 세상에 뚝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매우 현실적이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 인간의 죄로 그 자신과 주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지옥이 이 세상에 흔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믿음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가치와 순전한 기쁨을 누리는 천국의 경험도 이 땅에서 배워가지만, 결국 모든 것이 ‘회복’이 되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이 연합 되는 천국이 도래하는 때가 오리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무런 종교나 아무런 신앙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로브목사는 주장하지는 않는다. 예수그리스도의 초청에 대한 응답으로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운명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결국엔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대한 관계는, 언뜻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초반에 언급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적인 한계는 우리의 상상으로 어느 정도 보완이 된다. 이런 점에서, 로브목사는 상상력이 좋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성경을 재고해보면서 하나님의 ‘회복’에 대한 강한 확신이 ‘사랑’과 ‘정의’에 관한 이성적인 모순을 보완시켜주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께 받았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았던 한 사람이, 무시무시한 지옥문을 등 뒤로 하고 자신에게는 미소를 지어보이는 하나님의 온화한 모습에 대한 모순을, 처절하게 질문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준 로브목사에게, 그의 메시지를 기존 교회들이나 신앙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던 간에, 나는 경의를 표하고 싶다. 왜냐하면 나도 그런 질문을 늘 던지며 고민하며 살고 있는 이성적인 그리스도인이고, 또한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천국과 은혜를 경험하는 죄 많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경험안에 하나님이 속해져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갈 때마다 늘 놀래지만 그래서 더 하나님을 기대하게 된다. (타임스 기사 참조) http://www.time.com/time/nation/article/0,8599,2065080,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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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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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김승재

과 학의 발전이 가져오는 변화의 영향력은 양쪽으로 날카로운 날이 선 칼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적인 발견으로 말미암아서 문화와 인간의 삶에 큰 혜택을 주었고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에게 심각한 가치 체계의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사실 과학적인 발견 그 자체는 중립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따르느냐에 따라 그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쉬운 예로,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종의기원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그 이론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생명에 대한 인류가 지녀왔던 전통적인 가치관에 큰 도전을 주었고 ‘신'이 없어도 인간이 혼자 있을 수 있다는 믿음에 발판이 되어주었다. 전통의 와해는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과학의 발달로 병에 드는 것이 귀신의 장난이 아닌 것을 알았고, 과학적 인식의 발달로 태어난 신분으로 한평생사회에서 노예로 살 필요도 없어졌고, 여성의 지위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학발달이 항상 전통을 진보시켜주지는 않는 것 같다.





얼 마 전 미국의 연방대법원에서 청소년범죄에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하는 너무 중한 처벌을 방지하는 헌법의 수정조항에 대한청문회가 열렸다. 플로리다에서 조설리번(Joe Sullivan)이라는 13살 된 소년이 그의 친구와 72세의 어떤 할머니의 집을 털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그 노인의 집을 찾아가 그 할머니를 성폭행 했다. 이 범죄로 조설리번은 가석방의 여지가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앞으로의 인생이 창창한 13세 된 소년에게 가석방의 여지가 없는 종신형은 너무 심한처벌 아닌가 하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청소년들의 범행에 대한 판결은 그 나이를 참작하여 정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러한 참작의 영역에 이제는 과학적(?)인 발견들이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의 발전된 신체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영상장비나 인류가 쌓아온 과학기술의 노하우로 인해 뇌의 신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져왔고 많은 연구결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신경 행동 과학 (neurological and behavior science)분야의 어떤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청소년들의 뇌는 성인들의 뇌에 비해 덜 발달해서 충동적일수 밖에 없고 결정을 내릴 때 본성적 (by nature) 위험을 앉는 결정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과학적? 연구 결과들의 자료가‘청소년범죄에 대한 형량 적합성’에 대한 주장으로 뒷받침 되어 대법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꼭 청소년의 범죄에 대한 판결에만 이런 식의 뇌구조적 접근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최근에, 한 이탈리아 판사는 어떤 성인 범죄자의 유전자가 폭력적인 성향의유전자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형량을 감소한 판례가 있었다. 범죄자의 형량을 결정할 때 그들의 유전자나 뇌의 구조 상태를 관찰하여 고려해야 한다는 개념은 유전자나 뇌를 관찰할 수 있는 기술과 지식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과학적발전이인류에게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신비한 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문제가 될수 있다. 인간이 자기 행동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하는지에 대한 원론적인 문제가 대두될 것이며, 인간에게 과연 고유하고 독립적인 정신세계가 있는 것인지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유전자게임은 형량을 감소하는 대신 형량을 늘이는 쪽으로도 사용될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법원의 형량 결정은 유전자나 뇌신경의 의과학접근과는 무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인류가 뇌나 유전자의 신비를 캐내면 캐낼수록 이러한 원초적인 문제의 답에 어떠한 결론을 내릴지는 상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과학의 발전과 지식의 축적으로 인해 이제 더 이상 관찰적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영역들만 과학으로 다루지어지지 않고 이제는 주관적이라고 여겨졌던 영역들마저도 과학으로 재 해석 되는 경향이 있다. 위에서 말한 인간의 행동 (의사 결정)에 관한 영역이 바로 그렇다.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의 생각이나 의사결정은 주관적 (독립적)이며 고유한 영역이라고 여겨왔다. 육체는 억압을 받고 한계를 받더라도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정신의 절대적 자유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 되어 주었고 한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본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기계와 기술을 이용하여 그 사람의 유전자를 해독하고 뇌의 활동패턴을 연구할 것이며, 사람의 생각이나 의사결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구조에 의존적이라는 가능성을 과학적 연구결과를 통해 말하려고 할 것이다.그리고 그렇게 주장하고 싶어하는 과학적 발견들은 다윈이 주장했던 이론만큼이나 인류역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이론 아래에서, 인간의 본질이나 존엄성에 대한 가치와 전통이 예리한 칼날로 파헤쳐지고 재정의 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런 앞으로의 변화들에 대해 내가 노파심을 가지는 이유는 현대의 정신적 사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현대사회 안에서는 사람들은 큰 상실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동안 우리 행동이나 가치를 지탱해 주던 전통이 빠른 속도로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데, 전통은 인간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밀접한 연관이 되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고유한 정신과자신의 특수한 행동마저 자신의 세포 속에 있는 유전자와 자신의 뇌속의 활동패턴분석을 통해 예측 가능하다고 떠드는 시대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삶의 의미가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내적인 공허, 자신 안의 허무가 늘 따라다니는 것을 느낀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사람들은 돈의 욕구 또는 권력욕으로 그 좌절을 대신 보상받으려고 한다. '나’라는 고유한 존엄성조차도 한낱 뇌 속의 신경세포들의 집합체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과학이 가져다준 신개념이라기보다는 암울한 사실인 것처럼 느껴진다. 고귀한 인간의 생명이 한낱 단백질덩어리에서 시작되었다는 인식은 인간을 무지 속에서 해방시켜주었다기보다는 삶의 허무의 혼돈 속으로 우리를 가두어 버린 것 같다. 이러한 현대사조는 ‘절대적인 의미’를 더 이상보장해 줄 수 없는 사회 속에 우리를 가두었고, 그 안에서는 당연히 각 개인이 지니는 절대적인 가치도 찾을 수 없다. 이런 사회에서는 단지 기능성과 유용성으로 사람의 가치를 정의하므로 사회적으로 명예를 얻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요즘사회의 특징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차이를 애매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나이가 들어서, 불치의 병에 걸려서,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해서 사회적으로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사람들을 집단 살해했던 히틀러집단의 행동의 정당성에 대해 별로 대응할 명분을 없게 만들어 주었고, 대의와 명분을 위해 목숨과 가진 것을 바꾸었던 사람들의 희생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고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사회가 되어 간다.






나 는 ‘과학의 양면성’에 대해 경각심을 호소하긴 했지만, 이 시대가 정말 이렇게 암울한 환경에 처한 것은 ‘과학’ 자체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과학’이란 단어만 들어가면 별로 의심하지도 않고 믿고 따라가는 사회적 경향과 인식이 진실의 왜곡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핵심점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과학적 결과들이라도 그것을 이용하여 어떤 식의 주장을 만들어 낼 것 인가는 또 다른 믿음과 인식체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의 정신의 자유가 우리 자신의 뇌가 만들어진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뇌의 로직(logic)안에 갇혀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세계의 존엄성에 절대성을 줄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은 철저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주변 환경과 유전자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면 인간의 자유는 어떤 것인가? 인간으로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 선을 그어야 할 것인가? 어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에 아무런 정신적 자유도 없단 말인가? 우리가 믿는 이론, 즉 인간은 여러 조건과 환경적인 요인 ?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성격으로 이루어진- 이 만들어낸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 인간은 이런 여러요소들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매우 무겁고 심각한 질문들이다.






지 금은 작고했지만, 신경정신과의사로서 정신분석학분야에 프로이트만큼이나 중요한 정신요법을 창시한 빅터프랭클 (Viktor E. Frankl) 이란 의사가 있었다. 그의 특이한 경력이라면 나치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3년 넘는 보낸 체험을 하고 운좋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인간의 극한점의 체험을 바탕으로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그들은 수용소에서도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을 해야 했는데, 그 결정이란 자신의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가겠다고 위협하는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다고 주장한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배고픔이라는 절박한 압박이 커짐에 따라 각 개인의차이가 모호해지지 않고 도리어 그 반대로 그 차이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돼지와 성자의 두부류로 나뉘어졌으며,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였다고 기술한다.






우 리에게 닥치고 질문해야 할 심각한 질문들에 대해 빅터프랭클은 그의 체험을 통해 이미 확실한 답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그리고 그의 인간에 대한 주장과 믿음은 사막에서 찾은 생수처럼 반갑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에서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거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해도 좋고, 과학을 남용하는 미숙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자책해도 좋다. 그러나 당신이나 나는 우리 자신의 존엄성에 대해, 우리 자신의 정신과 영혼?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는지 자문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 답을 알고 지켜내야만 바르게 살 수 있는 시대는 곧 올 것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가치와 의미, 우리가 선택한 사랑과 책임, 우리가 꿈꿨던 미래의 세계가 '실존적 허무주의'의 쉽게 자폭해 버리지 않는 희망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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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실종 데이비드 웰스 4부작 시리즈
데이비드 웰스 지음, 김재영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I. 내 이야기
I-1. 두(2)개의 좋은 방
새로운 직장으로 옮겨 일한지가 일년이 훌쩍 넘었다. 일하는 중에 힘든 부분이 있었다면 오피스문제였다. 빛과 소리에 특히 민감한 나였기에 창문도 없고, 여러 사람이 들락 달락 하면서 부산한 느낌의 오피스에서 하루 종일 앉아서 일하는 게 힘들게 느껴졌다. 특히 보스의 방과 바로 붙어있어 그 안에서 하는 말들이 다 들리는 것도 때론 힘들었다. 같이 일하던 다른 직장동료와 함께 오피스 재정비에 대해 보스에게 요구를 해 보았다. 왜냐하면, 바로 옆 건물에 보스의 이름만 걸려있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보스의 또 다른 오피스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곳을 나와 동료의 오피스로 쓸 수 있을까 해서였다. 보스는 두개의 좋은 방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보스의 그 두 번째 방은 계속 빈방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 후 나는 지나다니면서 그 빈방이 눈에 보일 때마다 '욕심'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좀 더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혜택이나 권한을 덜 가진 사람에게 조금 떼어주기를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혹시나 나중에 그것이 자기에게 필요해서 일까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욕심'이란 확신이 들었다. 여하튼 분명히 이것은 나의 보스에 대한 불만이었고 그 보스에 대한 객관적평가라고 생각했다.

I-2. 두개의 좋은 모니터
나는 보스와 같은 오피스에서 주로 일하긴 하지만 실험할 일이 있으면 옆 건물에 있는 실험실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피스 말고 실험실 안에도 나를 위한 조그만 책상과 컴퓨터를 따로 두었다. 그러나 실험실은 더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라 실험할 때가 아니면 그 곳에 앉아 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도, 매일 실험실에 상주하며 일하는 사람들이 쓰고 있는 컴퓨터의 모니터만큼 제법 큰 좋은 모니터를 챙겨 실험실의 내 컴퓨터에 설치해 두었다. 가끔이라도 쓸 일이 있으니 큰 모니터를 챙겨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피스에서도 매일 사용하는 제법 큰 좋은 모니터가 있으니, 나는 두개의 좋은 모니터를 두고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I-3. 유유상종
내가 보스에게 불만을 품고, 두개의 오피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쓰지 않은 것마저 사람들에게 허용하지 못하는 것을 욕심일 것이라고 적나라하게 지칭했을 때, 어렴풋하게 그것은 보스만의 문제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한개는 별로 쓰지도 않으면서 두개의 좋은 모니터를 양쪽으로 챙기고 있는 나의 모습은 바로 내가 생각하는 보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분명히 욕심일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바로 내 오피스의 옆자리에 앉아서 몇 달간 일해오고 있는 한 동료는 오래되고 작은 모니터를 매일 8시간씩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나의 행동은 욕심으로 부터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음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들을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는 있다. 내 옆에서 작은 모니터를 일하는 그 동료 직원은 작은 모니터의 불편을 전혀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는 좀 더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위해 좋은 컴퓨터 환경이 필요한 것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작은 모니터를 업그레이드해줄 생각을 하지 않는 보스의 책임이지 나의 욕심은 아닐 것이다. 이런 식의 다양한 이유들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피스 방에 관한 보스의 결정도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의 '정당'하다는 것은 궁여지책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나의 양심은 또 알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욕심이었다. 많은 인원과 제한된 자원사이에서의 내가 선취할 수 있는 것은 선취하고 싶은 나의 욕심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숨겨진 이런 욕심을 어쩌면 남의 욕심을 통해 거울처럼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일 뿐이다.

II.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기
II-1. 두개의 믿음-(좀 더 깊게 생각하기)
사람들은 '진보 (발전)' 에 대해 대부분 긍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기술의 발전으로 삶은 예전보다 윤택해지고 세상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무지의 장막을 넘어서 그 끝이 어딘지 모르게 넓어져만 가고 있다. 더 좋은 물건, 더 좋은 의약품, 더 좋은 이론을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의 진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에 대한 진보는 이것과 별개이다. 인간이 자신의 도덕성, 자신의 부패성까지도 뛰어넘어 더 나은 자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 진보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현대사상은 개인의 존엄성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존엄성을 강조하다보니 부패성을 가진 인간의 조건에 관해서는 전부 잊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인간은 자기스스로 나아질 수 없는 존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창피하지만 이것이 내가 매일 경험하는 것 (위의 "파트 I .내 이야기" 참조) 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으로부터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믿음도 있다. 예를 들어 베이컨, 민주주의의 선구자 루소,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인간 본성의 바탕에는 이데올로기든지 경제적인 것이든지 모든 외부에서 불어 닥치는 폭풍우를 이길 수 있는 힘과 합리성과 선함이 깔려 있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공리주의자들은 집단적 이기성에서 덕이 나올 수 있었다고 믿었다. 계몽주의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혁신의 꿈을 꾸게 했으며 인류의 역사를 통해 초월적인 것으로부터 구속받는 사람들에게 세상과 삶을 이해하는 관점을 재구성하게 해 주었다. 과거에 절대적으로 지속되는 것으로 생각된 규범들과 가치들은 그 근거가 되었던 신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현대사상의 주변으로 밀려났다. 진리라는 개념은 더 이상 외부적으로부터의 근거가 아니라 오직 재화 생산의 효율성과 자기의 직관 및 주관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이 되었다. 이 모든 사상의 흐름은 근대 역사를 거쳐 매우 급변 적이었고 어디로 귀결되고 있다기보다는 도리어 해체되고 있는 시점이라고 느껴진다. 궁극적관심사가 신이 주관했던 역사로부터 인간이 만들어 가는 역사로 대체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이런 현대사상의 변동의 결정요인은 사람들이 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II-2. 하나의 선택?
사람은 저마다 이해하는 통로(관점)가 있다. 인간본성에 대해서, 역사에 관해, 삶의 의미에 관해, 인생의 궁극적 목표에 관해서 이해하는 방식이 있다. 현대사회는 우리의 손으로 통제가 불가능한 너무 많은 정보, 책임, 변화, 선택, 상황의 큰 파도 속을 살아가는 경험을 하게 한다. 현대성이 만든 도시화가 만들어 낸 공적인 환경은 그 안에 비인격적인 구조로 형성된 사고방식 그리고 인간관계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사회의 재편성이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구분해 서로 다른 가치가 지배하는 두 개의 영역을 만들고 있다. 하나의 세계는 개인적인 가치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 세계는 자본주의 구조 가운데 감당하고 있는 역할과 기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계 안에서 개인이 지니는 중요성은 그들의 됨됨이나 그들이 가지는 가치들과 신앙이 아니라 각 개인이 행하는 효율성이다. 현대의 공공생활은 정당성과 삶과 방향을 오로지 사회가 요구하는 효율성에서만 찾게 만들고, 그나마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가치와 신념마저 자신만의 사적인 공간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붙잡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내적인 경험과 인식인데, 기꺼이 자신의 내적 경험이나 인식을 참된 실재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런 인식마저 없다면 참된 실재는 세상에 없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 이런 현상은 진리란 것은 사적이고 사유화된 진리일 수밖에 없을 거라는 가치의 상대화 (다원주의)를 우리 마음속에 심어 주었다. 그러나 진리는 개인적인 통찰도 아니고, 개인의 직관도 아니다. 그 진리는 삐뚤어진 인간본성의 자아 안에서 추구되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져야 하는 것이며 역사를 통해 확인되는 객관적이고 공적인 근거야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계시가 들어난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관점으로의 회복을 나는 선택한다. 내가 이쪽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현대사상에 대한 나의 불신앙이다. 두개의 믿음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단순한 흑백논리처럼 비하될 문제는 아니다. 이미 자기도 모르게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자신의 믿음이 어느 쪽의 믿음인지 되살펴 보게 되는 것 뿐이다.

III. 마무리하기
책의 공감되는 부분적 이야기들을 나의 경험과 함께 써 보았다.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핵심 내용은 간결하지만 저자가 다루려고 했던 내용은 많다. 특히 복음주의의 교회가 어떻게 현대사상으로 인해 변해가고 있는가에 대해 중점을 많이 두었다. 교회마저 세속주의에 빠졌다는 것이다. 세속주의는 더 이상 어떤 초월적인 질서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는 전망과 가치를 말한다. 세속화는 이와 같은 가치를 만들어 내고 공인해 주는 현대화과정을 말한다. 현대의 공공생활은 정당성과 삶의 의미를 오로지 그 자신에게 찾게 만들고, 그런 영향은 교회의 구성원들조차 참된 신학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모두 직감적이고 주관적이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풍조로 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중요한 전통을 잃어가고 있으며 무사안일에 빠진 교회 안에서 먼저 회복이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저자가 지적했던 방향으로의 회복이, 신앙인들마저 이미 물질만능사회에 길들여져 있는 이 시대에,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왜냐하면 그 희망은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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