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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처한 이성
필립 존슨 지음, 양성만 옮김 / IVP / 2000년 10월
평점 :
이 책은 오래전에 사 놓고도 정독을 요하는 책이라 최근에 와서야 읽게 되었는데, 두번을 내리 읽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추천필독서에 넣고 싶다. 역사서를 읽고 나면, 비행기를 타고 높은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면 내가 사는 동네가 어떤 모양이고, 어디쯤 위치에 위치에 있는지 가늠해 볼수 있는 것 처럼, 내가 살고 있는 현 시대의 문화와 양상을 어느정도 객관적으로 윤곽지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미 태어날때부터 현 시대의 사조에 담귀어서 교육받고 영향받아온, 유물론적 자연주의 사상과 유신론적 사상을, 균형을 가지고 지성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책 내용의 골자를 좀 간추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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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항은 사람들이 논쟁하고 있는 관점이 아니라, 현 사회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전제들, 즉 너무나 자명하게 참인 듯이 보이기 때문에 거의 변호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분명하게 설명되지도 않는 전제들이다. 이 전제들이 합리성에 대한 문화적 정의를 형성하며 이성의 시작점이 된다. 20세기 말 지식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과학이 실재를 묘사하는데 탁월한 권위를 갖고 있고, 과학은 ''신을 믿는 다는 것''을 현사회의 사조에서 주변화시키게 되었다. 즉 하나님을 위한 공간은 오직 상상의 세계에만 한정된다는 것을 함축하게 되었다. 과학의 권위는 점점 우세해져서 심지어는 궁극적인 기원과 같이 경험론적 탐구가 불가능한 주제에 대해서도 특권을 행사한다. 신학자들의 반대진술은 ''근본보수주의''라는 이름으로 무시된다.
과학적 주장의 신빙성은, 관찰 가능한 조건하에 발생하는 물질적 인과관계를 다루는 문제들만을 다룰때 얻을 수 있다. 과학적 방법은 그 성격상 가치나 목적록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힘이 없다. 예컨대 생명의 기원이나 인간의 행동을 기술하려고 할때 과학은 어떠한 ''철학적인 가정''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과학적 자연주의가 인간의 삶에 공공철학을 대변해 주고 이끌어 주는 역할을 기대하게 된 이유는, 초 자연적인 계시에 관한 서로의 대립적인 주장에 대해 논증할 공통의 기초를 발견하기가 어려운 만면, 과학의 감각경험은 정상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과학적 방법은 보편적으로 존중되고, 실험적인 검증을 받을 수 있는 문제들과 관련하여 현대사회를 통일시켜 주는 요소가 될수 있기 때문이었다.
19 세기 20세기를 거치면서 신앙인들은 과학이 자연스런 한계를 지킬 것이며, 유신론적 사상이 여전히 중요한 문제들 (생명이 무엇이고, 선과 악, 죽음이후의 구원문제들)을 알려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태는 다르게 판명되었는데, 그 이유는 현대주의적 과학이 제국주의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과학이 문화에게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을 말할 권위를 얻었을 때, 과학은 문화에게 ''실제는 신을 배제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신은 자연주의적 우주의 거대한 형이상학적 이야기를 말하기를 열망하는 과학에게는 불편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적 자연주의는 실제를 물리적 소립자와 비인격적인 법칙으로 환원시키고, 삶을 오직 생존과 번식을 위해 존재하는 유기체들 사이의 무의미한 경재으로 그리며, 정신을 뇌의 생화학반응에서 나타난 속성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냈다.
실용주의사상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진리의 가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실존한다고 주장하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반영하는 주장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방식은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거대한 과학의 형이상학적 유물론 이야기가 진리임으로 드러날 수도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두렵다고 스스로 객관적인 진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는 종교라면 그것은 곧 죽을 운명에 처해있는 것 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삶과 세계관과 공동체의 기초를 오류가 아닌 진리에 둘 수 있도록 도와줄 제1원리와 전제들을 발견하는 일에 전력을 해야한다. 문제가 이런 식으로 제기되면 피신할 필요를 느끼는 쪽은 자연주의자들이다. 과학은 중립적이었다고 하는둥, 과학은 절대적인 진리를 갖고 있다고 결코 주장한 적이 없었다는 둥 하는 것이다.
내가 믿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사실적 전제는 하나님이 목적을 갖고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우리의 목적지는 미래의 영광스러운 곳이 라는 것이다. 이제 바른 질문은, 만일 이 전제가 옳다면 어떻게 사태가 지금과 같이 혼란스런 상태로 빠졌는가라는 것이다. 그 대답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그 지으신 만물 속에서 보았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길로 들어서서 자기들 스스로 우상을 만들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의 우상의 형상은 과학의 거대한 형이상학적 이야기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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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며 사물의 진정한 존재 방식을 인정하는 것이 이성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