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실종 데이비드 웰스 4부작 시리즈
데이비드 웰스 지음, 김재영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I. 내 이야기
I-1. 두(2)개의 좋은 방
새로운 직장으로 옮겨 일한지가 일년이 훌쩍 넘었다. 일하는 중에 힘든 부분이 있었다면 오피스문제였다. 빛과 소리에 특히 민감한 나였기에 창문도 없고, 여러 사람이 들락 달락 하면서 부산한 느낌의 오피스에서 하루 종일 앉아서 일하는 게 힘들게 느껴졌다. 특히 보스의 방과 바로 붙어있어 그 안에서 하는 말들이 다 들리는 것도 때론 힘들었다. 같이 일하던 다른 직장동료와 함께 오피스 재정비에 대해 보스에게 요구를 해 보았다. 왜냐하면, 바로 옆 건물에 보스의 이름만 걸려있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보스의 또 다른 오피스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곳을 나와 동료의 오피스로 쓸 수 있을까 해서였다. 보스는 두개의 좋은 방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보스의 그 두 번째 방은 계속 빈방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 후 나는 지나다니면서 그 빈방이 눈에 보일 때마다 '욕심'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좀 더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혜택이나 권한을 덜 가진 사람에게 조금 떼어주기를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혹시나 나중에 그것이 자기에게 필요해서 일까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욕심'이란 확신이 들었다. 여하튼 분명히 이것은 나의 보스에 대한 불만이었고 그 보스에 대한 객관적평가라고 생각했다.

I-2. 두개의 좋은 모니터
나는 보스와 같은 오피스에서 주로 일하긴 하지만 실험할 일이 있으면 옆 건물에 있는 실험실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피스 말고 실험실 안에도 나를 위한 조그만 책상과 컴퓨터를 따로 두었다. 그러나 실험실은 더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라 실험할 때가 아니면 그 곳에 앉아 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도, 매일 실험실에 상주하며 일하는 사람들이 쓰고 있는 컴퓨터의 모니터만큼 제법 큰 좋은 모니터를 챙겨 실험실의 내 컴퓨터에 설치해 두었다. 가끔이라도 쓸 일이 있으니 큰 모니터를 챙겨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피스에서도 매일 사용하는 제법 큰 좋은 모니터가 있으니, 나는 두개의 좋은 모니터를 두고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I-3. 유유상종
내가 보스에게 불만을 품고, 두개의 오피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쓰지 않은 것마저 사람들에게 허용하지 못하는 것을 욕심일 것이라고 적나라하게 지칭했을 때, 어렴풋하게 그것은 보스만의 문제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한개는 별로 쓰지도 않으면서 두개의 좋은 모니터를 양쪽으로 챙기고 있는 나의 모습은 바로 내가 생각하는 보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분명히 욕심일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바로 내 오피스의 옆자리에 앉아서 몇 달간 일해오고 있는 한 동료는 오래되고 작은 모니터를 매일 8시간씩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나의 행동은 욕심으로 부터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음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들을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는 있다. 내 옆에서 작은 모니터를 일하는 그 동료 직원은 작은 모니터의 불편을 전혀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는 좀 더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위해 좋은 컴퓨터 환경이 필요한 것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작은 모니터를 업그레이드해줄 생각을 하지 않는 보스의 책임이지 나의 욕심은 아닐 것이다. 이런 식의 다양한 이유들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피스 방에 관한 보스의 결정도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의 '정당'하다는 것은 궁여지책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나의 양심은 또 알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욕심이었다. 많은 인원과 제한된 자원사이에서의 내가 선취할 수 있는 것은 선취하고 싶은 나의 욕심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숨겨진 이런 욕심을 어쩌면 남의 욕심을 통해 거울처럼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일 뿐이다.

II.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기
II-1. 두개의 믿음-(좀 더 깊게 생각하기)
사람들은 '진보 (발전)' 에 대해 대부분 긍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기술의 발전으로 삶은 예전보다 윤택해지고 세상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무지의 장막을 넘어서 그 끝이 어딘지 모르게 넓어져만 가고 있다. 더 좋은 물건, 더 좋은 의약품, 더 좋은 이론을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의 진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에 대한 진보는 이것과 별개이다. 인간이 자신의 도덕성, 자신의 부패성까지도 뛰어넘어 더 나은 자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 진보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현대사상은 개인의 존엄성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존엄성을 강조하다보니 부패성을 가진 인간의 조건에 관해서는 전부 잊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인간은 자기스스로 나아질 수 없는 존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창피하지만 이것이 내가 매일 경험하는 것 (위의 "파트 I .내 이야기" 참조) 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으로부터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믿음도 있다. 예를 들어 베이컨, 민주주의의 선구자 루소,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인간 본성의 바탕에는 이데올로기든지 경제적인 것이든지 모든 외부에서 불어 닥치는 폭풍우를 이길 수 있는 힘과 합리성과 선함이 깔려 있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공리주의자들은 집단적 이기성에서 덕이 나올 수 있었다고 믿었다. 계몽주의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혁신의 꿈을 꾸게 했으며 인류의 역사를 통해 초월적인 것으로부터 구속받는 사람들에게 세상과 삶을 이해하는 관점을 재구성하게 해 주었다. 과거에 절대적으로 지속되는 것으로 생각된 규범들과 가치들은 그 근거가 되었던 신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현대사상의 주변으로 밀려났다. 진리라는 개념은 더 이상 외부적으로부터의 근거가 아니라 오직 재화 생산의 효율성과 자기의 직관 및 주관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이 되었다. 이 모든 사상의 흐름은 근대 역사를 거쳐 매우 급변 적이었고 어디로 귀결되고 있다기보다는 도리어 해체되고 있는 시점이라고 느껴진다. 궁극적관심사가 신이 주관했던 역사로부터 인간이 만들어 가는 역사로 대체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이런 현대사상의 변동의 결정요인은 사람들이 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II-2. 하나의 선택?
사람은 저마다 이해하는 통로(관점)가 있다. 인간본성에 대해서, 역사에 관해, 삶의 의미에 관해, 인생의 궁극적 목표에 관해서 이해하는 방식이 있다. 현대사회는 우리의 손으로 통제가 불가능한 너무 많은 정보, 책임, 변화, 선택, 상황의 큰 파도 속을 살아가는 경험을 하게 한다. 현대성이 만든 도시화가 만들어 낸 공적인 환경은 그 안에 비인격적인 구조로 형성된 사고방식 그리고 인간관계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사회의 재편성이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구분해 서로 다른 가치가 지배하는 두 개의 영역을 만들고 있다. 하나의 세계는 개인적인 가치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 세계는 자본주의 구조 가운데 감당하고 있는 역할과 기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계 안에서 개인이 지니는 중요성은 그들의 됨됨이나 그들이 가지는 가치들과 신앙이 아니라 각 개인이 행하는 효율성이다. 현대의 공공생활은 정당성과 삶과 방향을 오로지 사회가 요구하는 효율성에서만 찾게 만들고, 그나마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가치와 신념마저 자신만의 사적인 공간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붙잡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내적인 경험과 인식인데, 기꺼이 자신의 내적 경험이나 인식을 참된 실재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런 인식마저 없다면 참된 실재는 세상에 없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 이런 현상은 진리란 것은 사적이고 사유화된 진리일 수밖에 없을 거라는 가치의 상대화 (다원주의)를 우리 마음속에 심어 주었다. 그러나 진리는 개인적인 통찰도 아니고, 개인의 직관도 아니다. 그 진리는 삐뚤어진 인간본성의 자아 안에서 추구되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져야 하는 것이며 역사를 통해 확인되는 객관적이고 공적인 근거야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계시가 들어난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관점으로의 회복을 나는 선택한다. 내가 이쪽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현대사상에 대한 나의 불신앙이다. 두개의 믿음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단순한 흑백논리처럼 비하될 문제는 아니다. 이미 자기도 모르게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자신의 믿음이 어느 쪽의 믿음인지 되살펴 보게 되는 것 뿐이다.

III. 마무리하기
책의 공감되는 부분적 이야기들을 나의 경험과 함께 써 보았다.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핵심 내용은 간결하지만 저자가 다루려고 했던 내용은 많다. 특히 복음주의의 교회가 어떻게 현대사상으로 인해 변해가고 있는가에 대해 중점을 많이 두었다. 교회마저 세속주의에 빠졌다는 것이다. 세속주의는 더 이상 어떤 초월적인 질서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는 전망과 가치를 말한다. 세속화는 이와 같은 가치를 만들어 내고 공인해 주는 현대화과정을 말한다. 현대의 공공생활은 정당성과 삶의 의미를 오로지 그 자신에게 찾게 만들고, 그런 영향은 교회의 구성원들조차 참된 신학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모두 직감적이고 주관적이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풍조로 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중요한 전통을 잃어가고 있으며 무사안일에 빠진 교회 안에서 먼저 회복이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저자가 지적했던 방향으로의 회복이, 신앙인들마저 이미 물질만능사회에 길들여져 있는 이 시대에,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왜냐하면 그 희망은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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