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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없는 예수 교회
한완상 지음 / 김영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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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문제). 철수가 부모님 심부름으로 콩나물을 사러 가게로 가고 있었는데, 길가의 버스정류장에서 길을 잃어 버리신듯 안절부절하시는 할머니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바른 행동일까요? 


(1) 부모님의 심부름이 급하므로 그냥 지나간다. 
(2) 할머니께 무엇이 필요하신지 물어보고 길을 알려드린다. 
(3) 콩나물 살 돈을 할머니에게 주고 집으로 돌아간다. 
(4) 남의 일이니 관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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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여러 다른 이유로 여러 다른 답을 달수도 있겠지만, 학교에서 도덕시간에 받는 테스트라면 (2)번으로 답을 다는 것이 점수를 받는 길일 것이다. 도덕 시험점수가 100점이라도 나오면, 사람들은 자기가 도덕적으로 100점인 사람인것 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현대를 살아가는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치 이런류의 사람과도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자신들이 교회의 신조와 교리를 받아들이고 믿었으므로, 할 것 다했다고 생각하고 구원받았다고 안도하며 산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거기까지가 그들이 생각하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현대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개독교’라는 말이 나도는 작금의 시대에 더욱 중대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시급한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책의 저자인 한완상씨는 이러한 현상을 아주 무서운 말로 꼬집었고, 그것이 바로 책의 제목이 되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47,47절)” 라는 구절이 있다. 이미 구약시대때부터 교회당안에 하나님이 없을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말씀이다. 저자는 이렇게 교회의 모습이 빈강냉이처럼 된 이유를 첫번째로 기독교의 왜곡된 역사에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다. 지난 세월 기독교가 제도화되면서 왜곡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화 작업이 진척되어 일정한 교리와 교조의 틀이 굳어지면서 예수의 참뜻을 따르기가 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야 할 예수의 말씀은 증발되고, 대신 교리는 더욱 체계화되고 강조되었고, 따라서 기독교의 신앙은 갈릴리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실천적 결단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교리의 절대수용을 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로교회에서 예배시간이 되면 생각없이 외우는 사도신경은 이러한 교리화 작업을 충실히 이행해온 교회 모습의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이 구원사와 구속사의 시각에서만 해석되고 강조되는 것은, 잘못하면 ‘은총(은혜)만으로’라는 게으른 신앙생활, 윤리없는 한국교회와 개신교신자를 양산할수 있다고 하면서,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만을 소중하게 강조하는 사도바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한다. 예수없는 교회가 되어가는 한국기독교의 책임은 신앙인들 각자에게도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신앙적인 치매가 걸려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억력상실이나 치매에 걸리면 남을 알아보지 못한다. 남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자기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사람관계를 파괴시키고, 자아의 정체성을 파괴시키는 무서운 질병임에 틀림이 없다. 분명한 자기정체성은 성숙한 인간의 조건이고 사람이 사람다운 존엄을 갖게 하는데, 종교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의 참 뜻을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은 마치 신앙적 치매에 빠져 버린 것과 똑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역사와 성경속에서 보여주신 사랑과 정의의 체험을 잊지 말고 자신의 상황에서 실천하는 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이지만, 그 뜻은 사라져버리고, 교회는 이 세상에서의 현실적 삶과 죽어서 천국을 보장해주고 는 방편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양산되어 온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신앙적 치매에 걸린 신앙인들의 적나라한 모습인 것이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신랄한 비판에 귀를 기울여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위로서의 구원이냐, 은혜로서의 구원이냐의 싸움을 걸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초점이 ‘예수의 마음’에 가 있는냐 없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의 하루하루의 삶의 초점이 어디에 맞추어져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단지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의 수용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뼈속 깊이 체감한다면 지금이라도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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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 오늘 여기서 그 분을 위해, 증보판
제럴드 L. 싯처 지음, 윤종석 옮김 / 성서유니온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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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The will of God as a way of life) 제럴드 싯처 - 성서유니온선교회 어떤 사람이 가족들과 어머니를 미니밴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느 늦은 저녁, 갑자기 음주 운전자가 중앙선을 뛰어넘어 미내밴을 들이 받았다. 이 사고로 차를 운전하고 있었던 사람의 어머니, 아내, 그리고 막내 딸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운전자와 그의 다른 두자녀는 상실의 세상에 남겨지게 되고 말았다. 이 책을 쓴 작가가 바로 이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였던 제럴드 싯처 (Gerald L. Sittser) 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주제로 책을 냈을 때, 엄청난 삶의 고난과 상실의 무게감을 가진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내 인생에 점철된 하나님의 뜻이 궁금한것보다 더 궁금해서, 손이 가는 책이 되었던 것 같다. 신앙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혼돈되는 것이 이것이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하셨던 길인가…?’ 하는 물음이다. 수년 전 워싱턴DC에 있는 아우슈비츠박물관에 가본 적이 있었다. 한 유대인 아버지가 독일군에게 어디론가 끌려가면서 자식들에게 남긴 메모을 기억한다. 생사를 오가는 절대절명의 급박한 순간에도 신에 대한 믿음을 놓치 않는 혼필의 짧은 편지였다. 과연 어두컴컴한 기차안에서 자기에게 닥친 믿지못할 것 같은 현실에 ‘신의 뜻’을 어떻게 믿고 이해할 수 있었을까… 상상해 볼수록 마음이 숙연해 진다. 싯처의 책을 읽어보아도, 우리가 갈급해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궁금함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시원하게 답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정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중요한 생각들이 무엇이어야 할지 알게 될수는 있다. 인생의 중대한 결정앞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자주 잊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신뢰할만한 (faithful) 분이라는 것이다.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선택에 결과에 상관없이 그분의 의지로 내 인생에 상관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순간순간의 선택을 맞게 결정하게 하도록 하는 사다리타기 같은 의지라기보다는, 어떠한 상황이든 ‘바로 그곳에서 나를 상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이쪽이냐 저쪽이냐 하는 선택에 기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에 계속 관계되어지는 하나님의 ‘의지 (will)’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리석은 실수로 혼돈의 삶을 살 때에도 나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내 삶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인생을 살아도 하나님의 신뢰하심만 믿는다면, 내 인생이 무작위 주사위의 숫자처럼 아무렇게나 던져져도 괜찮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자신의 인생을 괜찮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실력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음을 먹고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도 여전히 나에게 큰 문제로 여겨지는 인생의 수많은 선택의 기로는, 하나님께서도 큰 문제로 여기시면서 나를 상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인처럼 살아주기를 바라시지만, 반드시 어떤 길로 가기를 정해 놓으셨다는 것은 아니다. 나의 시행착오로 걷는 인생의 길마저 함께 동행하고 나를 계속 회복시켜나가는 그 시간에 바로 하나님의 뜻(의지)이 있다는 것이다. 삶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산다는 것은 매사에 사지선다의 문제에서 정답을 맞추는 것처럼 옳은 선택을 해 나가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관식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과 더 비슷한 것 같다. 나의 일상에 그분이 원하는 방식의 삶을 생각하고 그렇게 반응하면서 살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 방향에 있기보다는 그 삶의 내용에 하나님의 뜻이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를 선택에서 자유케 한다. 그러나, 여전히 실수하지 않을 삶, 가장 좋은 길이 뭔지, 이것이 맞는 길인지 계속 묻고 싶어 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이전에 왜 ‘하나님의 뜻’을 갈구하는지 그 의도가 무엇인지 자기에게 곰곰히 물어봐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바른 선택과 결정을 위해서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른 선택이라는 것은 나를 어디로 인도할 것인지를 물어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는 선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실패와 성공이 어떤 것인지 물어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이란 낱말을 재껴놓더라도, 최소의 생존수단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가는 인생길에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묻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삶의 안정성(security)은 적어도 획득해 놓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때론 그것마저 ‘믿음’아래 놓아 두어야 할 시기가 생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믿음’과도 큰 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내 인생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라는 믿음을 놓치않을때 하나님의 뜻은 비로소 나의 인생을 점철하는 살아있는 힘과 의지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결정을 했을 때라도, 그길에 동참하고 고칠수있게 되는 뜻이 되어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리조나에서 보스톤으로 이주해 왔던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때가 종종 있다.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졌고, 일도 나아진 것은 없어 보인다. 더욱더 내삶이 초점없이 내 통제에서 벗어나 나아가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럴 때에도 '네가 나의 신실함을 여전히 믿을 수 있는가?..' 라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물어보시는 것 같다. 그리고 선택을 통해 새로운 삶을 새로운 곳에서 경험하게 되면서 나의 죄와 죄성들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잘못한 것들, 내가 교만했던 것들, 내 욕심으로 놓치못했던 부분들)을 떠오르게 하신다. 그러면 진심으로 후회하고 용서를 구하게 된다. 이런 나의 ‘나의 통제를 벗어나 쉽게 부셔질 것 같은 삶’도 바로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 아래에 있다는 것임을 겸허히 믿게 된다. 그리고, 그래서 ‘희망’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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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공식 한국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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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Ancient Futures-Learning from Ladakh)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Helena Norberg-Hodge), 중앙북스(주) 한장 한장 책을 넘길 때마다 마음이 동화되는 그래서 함께 즐거워하고 안타까와할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다. 한글 번역도 아주 잘 되어있다. ‘오염’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희 자연적인 오염을 떠올린다. 실제로 공기, 물, 생태계의 회손은 여느때보다 심각하기 이를때 없어 우리의 먹을거리, 건강, 기후를 위협하고 있다. 헬레나의 책을 읽으면 ‘오염’이라는 것은 단지 이런 자연의 훼손뿐만이 아니라, 훨씬 심각하고 근본적인 ‘오염’에 현대인의 삶이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진보’ 라는 거창한 개념 아래 역동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획일적인 글로벌 경제화세력’이다. 아마도 일반인들은 현대시대의 글로벌 경제화가 왜 우리의 삶과 문화를 오염시켜 왔는지는 언뜻 느끼지 못할 지도 모른다. 저자인 헬레나도 16년동안 히말라야산맥에 위치한 작은 공동체도시인 ‘라다크’와 서구를 오가며 얻은 그녀의 특수한 경험때문에 획일적인 글로벌경제화가 얼마나 자연과 더불어 인간의 삶과 정신을 오염시켜왔는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라다크는 티베트를 포함한 히말라야 인근의 다른 지역들처럼 지난 수세기동안 외부의 영향에서 독립되어 독자적인 삶의 방식을 지켜온 곳이다. 고산지대의 혹독한 기후와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라다크사람들은 자급자족의 경제구조를 이루면서 수세기동안 조화로운 생활을 해왔다. 조화라 함은 한 인간이 자연과 그리도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속에서 한쪽으로 힘이 치우쳐있지 않고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옴을 뜻한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다량생산의 편협된 산업화의 영향력으로 인해 라다크에서 유지된 자급형 지역경제를 글로벌 경제체제로 통합이 되어갔다. 그러면서, 라다크의 사회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들의 농경사회의 붕괴와 문화적 열등의식, 그리고 가족제도의 분열등등의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농부들은 더이상 다양한 작물을 자기땅에 심을수가 없게 되었다. 파종후 작물들의 씨조차 농부들이 함부로 저장할 수가 없다. 생산성이 되고 돈을 벌을 수 있는 작물만 선별하여 매년 심도록 권고되면서 부터 땅은 혹사를 당한다. 전에는 자기들이 살던 땅에 심어서 먹을 수 있었던 다양한 작물들을 먹으려면 이제는 돈을 내고 어디서로부턴가 사와야 한다. 그러면 또 돈이 필요하게 되니, 생산성 좋은 작물만 심게 되는 악순환이 시작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급자족의 경제기반구조는 글로벌화로 인해 무너져 버렸다. 운송산업의 발달과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과학의 발달은 글로벌경제화에 가속을 가지게 하였다. 생산성을 높여 지역으로 분배하자는 중앙집권적인 개발취지는 모든 사람들이 배부르게,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것 처럼 믿게 했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본질적 삶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획일적인 글로벌 경제화’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 개발과정의 영향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고, 자연과 문화의 다양성이 파괴된다는 점에 있다. 그 파괴의 현상들을 헬레나는 라다크에서 목격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곤 ‘풍요’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없어도 되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꼭 있어야 할게 없으면 삶은 불행하다. 그것이 글로벌 경제화가 이룩한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집에는 아이폰, 평면TV, 게임기, 인터넷, 큰냉장고, 오븐이 있지만 집의 문만 열고 나가면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는 없다. 그리고 직장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보면, 나와 이어진 땅과의 연대감도 잊어버리고 산다. 어딘가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은 계속 생산이 되어, 슈퍼에 그것들은 잔뜩 쌓여 있는데, 내가 돈을 벌 곳을 찾지 못하는 순간, 내 생의 자급자족의 고리는 쉽게 끊어져 버리고 말아 먹을 수가 없게 된다. 대중매체를 타고 전파되는 획일적인 문화는 상대적인 빈곤과 열등감을 준다. 헬레나는 회복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한다. 진보라는 개념을 수정하라고 한다. 진보는 물질적인 풍요, 최대의 생산성, 최상의 과학발달에 발맞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본질에 발을 맞추어 개발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다양성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것과 자급자족의 지역경제화 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부속품이라고 느껴지는 순간 무기력해진다. 글로벌경제화는 필연적으로 상위몇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부속품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선 대지위에서 자기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이 삶의 주인공으로 느끼고 살수 있는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은 자연과 사람들과 맺는 연대감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삶의 다양성과 자급자족지역경제구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우리인간이 지난 역사를 통해 지녀왔던 가치 속에서 재 회복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오래된 미래’이다. 우리 미래사회의 가치는 이미 과거에 발견되어져 있었지만, 편협한 진보의 개념과 추진은 그 가치를 살리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의 자녀들이 살 미래는, 과학과 기술발달이 가져다 주는 혜택이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를 회복시켜주는, 참 진보의 세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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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폐지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9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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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느껴지는 ‘양심 (혹은 객관적 가치)’이란 것이 과연 태고적부터 인간의 생명과 함께 심기워져 있는 그 무엇이었을까? 아니면 인간들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사회와 인류의 존속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져서 교육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심기워진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꼭 ‘양심’ 이란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어쩌면 결국 인류기원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을 법하다. 왜냐하면, 인류가 먼지로부터 초자연적인 그 무엇의 (신) 개입 없이 발생했다면 양심, 도덕률, 도, 선하다고 느끼는 가치들, 등등 은 정말로 역사와 문화를 통해 인간들이 만들고 수정해 왔던 규율및 기본명제에 속할 것이며, 정말로 이것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가치들''이며, 어쩌면 앞으로의 인류들은 이런 것들에 구속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가치들''을 재창조하고 수정하고, 다스리는 입장으로, 이것이 혼란을 줄지라도,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인류창조에 지적설계자의 의도가 있었다면, 인간들이 느끼는 ‘가치’들은 인류역사와 시대를 통해 주관적이 였던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였을 (도출된 결론이 아니라 자명한 공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인류역사를 통해 지나온 가치의 본 의도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며, 앞으로도 인류에 생명이 붙어있는 한은, 사람들이 이런 가치를 지키던 지키지 않던간에, 이런 가치들은 인간들의 머리속에서 영원히 기억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답을 해 본다는 것은, 어쩌면 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간접적 변증학에 속해지는 문제일 수도 있겠다. 양심, 도, 선한 외적 가치관 들은 분명히 인류와 함께 존재해 왔고 그렇기에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줄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심각하게 들기 시작하면, 한번쯤은 신의 창조의 의도를 생각해 볼수도 있고, 나아가 신의 존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기서 결론을 이끌어 내려는 것은 아니고, 유신론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의 입장으로서, ‘가치의 기원’에 대한 몇가지 힌트정도만을 정리해 보았다. ''가치의 기원’이 교육이나 인위적으로 창조되어져 왔다고 생각하게끔 하는 오해들: 1. 쉽게 오해하는 부분은 우리의 부모나 학교에서 선생님들에게 어떠한 도덕률을 배웠다고 해서 양심 (도덕률) 이 단지 인간들의 관습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양심이 인간들의 마음속에 심기워져 있다고 가정하더라고, 부모나 선생님들에게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 듣고 배울 수 있는 것이다. 2. 양심 (도덕률)이 존재하는가와 그것을 사람들이 지키는지 혹은 지키지 않는가 와는 별다른 문제이다. 3. 인간들의 관습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법규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다. 그러나, 도덕 (일반적 선의에 관한 법) 에 관한 개념은 시대에따라 장소에 따라 –우리가 생각할수 있는 차이보다- 차이가 그다지 많지 않다. 고대 유대교, 고대 이집트, 고대 인도, 고대 힌두교, 고대 그리스, 로마, 아메리카 인디언,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고대 한국, 성경 에서 발견되는 일반적 선의에 관한 법은 그 의도가 다르지 않다. 4. 어떤 사람은 도덕률이 시대나 장소에 따라 차이가 크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도덕률자체의 차이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믿음의 차이가 다름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몇백년 전에는 마녀라고 하는 사람을 죽이곤 했다. 그러나, 현재는 마녀같은 것을 믿지 않기때문에 마녀라고 해서 죽이는 법은 없다. 죄가 없었던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도덕의 차이처럼 보이지만, 그당시에는 마녀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이웃들에게 재앙을 가져온다고 생각했기때문에 죽여야한다고 생각했다. 현재도 무고한 살인을 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엄중한 벌(사형)을 하는 것에대해서는 마찬가지인 것을 보면, 이런 일들은 사실에 대한 일이지, 도덕률이 시대에 따라 다르기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다. 5. 만일 혹시 도덕에 시대나 장소, 혹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이나 시대의 도덕률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시대의 도덕률보다 나을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도덕률의 진보가 있어왔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도덕에 대해 어느것에 비해 낫다 혹은 못하다 라는 개념이 없다면, 우리의 문명화된 도덕과 미개인들의 도덕, 혹은 크리스챤들의 도덕과 나찌들의 도덕 사이에 어느것이 낫다고 생각할 만한 여지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집단들의 도덕률이 더 낫다고 생각이 되어진다면, 바로 당신은 어떠한 잣대 (real morality) 가 이미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6. 어떤 사람들은 도덕률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머리속에 박힌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도덕률이 깨지면 결국엔 사회의 안전 유지가 어렵고 결국 자신에게 해가 되기때문이라고 한다 (공동체의 유익성). 그러나, 더 올바르다고 하는 가치는 자신에게 해나 불편을 감수하는 쪽으로만 가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결국 해가 되기때문에 뭔가를 준수한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개인적인 죽음이나 불편함을 무릅쓰는 사람들의 마음과 실천을, 그 사람들의 개인적 충동 이외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7. 어떤 사람들은 가치의 기원을 본능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이런 본능이 있다’ 라는 심리학적인 사실로부터 ‘나는 마땅히 이 본능에 순종해야 한다’ 라는 실천적 원칙을 도출해낼 수는 없다. 본능은 다양하며, 어떠한 본능이 우선해야 한다는 법칙의 근거는 본능자체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무엇에 호소하지 않고서는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론 세계에서 자명한 공리를 받아들이듯이 이러한 ‘가치들’ 이 행동의 세계에서 지켜질 일종의 공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떠한 실천적 원리로 가질 수가 없어 보인다. 이런 실천적 원리들은 무슨 명제나 규율로 부터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 아니라, 바로 전제들이기 때문이다. 즉 만일 우리가 가치라는 것을 갖고자 한다면 양심, 도, 선의의 법칙들의 궁극적인 평범한 진리들을 절대적 타당성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본다면, 양심, 도덕률, 혹 올바른가치를 향해 움직이는 실천적 원리는 어떠한 이유나 명분으로부터 대두 된 것이 아니라 이미 태고적부터 사람들의 인식이 시작하면서 이미 그 안에 존재해 왔을 가능성을 짐작해 보는 것도 타당해 보인다. 만일, 혹시, 정말 이것이 맞다면 양심은 내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단지 생물학적인 유전으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전해 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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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미네르바의 올빼미 4
잉에 아이허 숄 지음, 유미영 옮김, 정종훈 그림 / 푸른나무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누군가 교회에다 가져다 놓은 헌책들 사이에서 볼만한 것이 없나 살피다가 얇고 오래된 책을 꺼내 집었는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이란 제목이 선뜻 마음에 와 닿았다. 2차 세계대전시절 나치의 극악무도한 잔행에 대하여 소수의 젊은 독일 대학생들은 무폭력적인 저항을 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실화적 글이었다. 자신의 두 동생 ‘한스’와 ‘죠피’의 어린시절과 가정생활 학창생활, 어떻게해서 나치정권에 대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지, 그리고 이십대의 젊은 나이로 어떻게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는지를 상고하며 써 내려간 작가의 (잉게 숄) 글이다. 짐짓 무거운 글의 내용과 함께 상당한 문필력으로 글은 마치 그 동생의 이야기들이 바로 내 형제의 이야기이고 바로 나의 이야기인 것 처럼 느끼게 해 준다. 잉게 숄은 자신의 동생들이 참여했던 뮌헨 학생운동 (나치저항운동) 을 아름다운 인간의 행동이었다 라고 일반화시키는 것에 대해 그릇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동생들의 행동은 구체적이었고, 구체적인 목적이 있었고,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들의 저항운동이 그들의 힘으로는 나치정권을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가슴속으로 부터 말하고 싶고 말해야 했을 것은, 그들은 그들의 가족들과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고독하게 일을 하며, 말하는 용기를 내어 주었다. 그러한 최소한의 일에 모든 희생을 각오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며, 그들이 단순한 일에 자신을 바치고, 가장 단순한 일을 자신들의 최고의 의무로 생각했다는 점에 그들의 위대성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잉게숄은 독백한다. 아마도 전쟁이 없었고 나치정권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우리는 한스나 죠피 같은 청년들의 이야기들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들은 그들이 공부했듯이 의대들 졸업해서 열심히 환자들을 돌보며,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며, 가정을 꾸리고 살아왔을 소시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상상일뿐, 파시즘이 존재하는 역사속에 그들의 그들의 젊음을 맞이했으며, 죽어나가는 유대인들과 쓸모없다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장애인들을 보면서 그들의 고귀한 영혼은 꿈틀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가, 자기의 영혼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댓가로 목숨을 지불하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을 느낄때면, 그 일들은 분명히 아주 무거운 부담으로 느껴졌을 것이며 무서워 떨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 특수한 역사적 상황속에서, 순결한 청년들에게 다가온, 개인적 사명감은, 잉게숄의 말대로, 그 상황에 국한된 아주 구체적이었고 목적이 분명한 개인적인 출발이었다. 대중이 이끌어가는 역사적 이데올로기의 이념도 아니었고, 정권이 이끌어가는 비젼의 제시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스와 죠피라는 한 개인이, 자신이 느끼는 자신에게 구체적인 사명감이었고 자신들의 삶의 의미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도 어쩌면 한스와 죠피와 다를 것을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 우리가 맞딱드린 현재의 역사와 세계는 우리에게는 매우 특별하며 구체적인 시대일 것이고, 우리의 순결한 영혼은, 언제 어디서든 우리가 마땅히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 가야 할 일들을 말해 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이루어가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육체를 고단하게 하고 자신의 존재를 무겁게 누르는 부담감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고, 어쩌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위태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삶의 가장 위대한 가치라고만은 말할 수 없는 전제에서, 우리는 그러한 부담을 꿋꿋이 안고 지내야 할 것이다. 나는 우리 인간이 가진 삶의 본질은 역사의 상황과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 않고 항상 같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극한의 생존위기속에서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그 옛날 그들, 한스와 죠피에게 있었다면, 현재의 우리에게도 무언가를 위해 끝까지 몸부림치며 지키고 이루어야 할 일은, 그것이 한스와 죠피처럼 꼭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아니더라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은 꼭 굉장한 목표나 광신적인 열광, 커다란 이념, 혹은 옳은 일을 위해 봉사한다는 박애의 의무감은 아닐 것이다. 한스와 죠피는 사람들 모두가 다같이 인간적이 세계에서 살기를 바랬고, 그들은 자신들의 단순한 열망에 자신들을 바쳤고, 이것을 자신들의 최고 의무로 생각했다. 과연 우리가 가지는 가장 단순한 최고의 의무는 무엇일까? 자만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누구로부터 위대하다고 칭찬받을 필요도 없지만, 자신이 고단하게 이루어가야 할 구체적이고 단순한 일은 무엇인가? 자기의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일상속에서 조그마한 일부터 시작하고 그것을 최고의 의무로 여기며 희생을 각오하며 끝까지 붙들고 살아나가는 하루하루가 우리에게는 가장 위대한 일일 것이며, 이러한 생각이 바로 인간을 가장 인간되게 그리고 인간을 가장 공평하게 여기는 출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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