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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2010년 1월 김승재
과 학의 발전이 가져오는 변화의 영향력은 양쪽으로 날카로운 날이 선 칼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적인 발견으로 말미암아서 문화와 인간의 삶에 큰 혜택을 주었고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에게 심각한 가치 체계의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사실 과학적인 발견 그 자체는 중립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따르느냐에 따라 그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쉬운 예로,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종의기원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그 이론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생명에 대한 인류가 지녀왔던 전통적인 가치관에 큰 도전을 주었고 ‘신'이 없어도 인간이 혼자 있을 수 있다는 믿음에 발판이 되어주었다. 전통의 와해는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과학의 발달로 병에 드는 것이 귀신의 장난이 아닌 것을 알았고, 과학적 인식의 발달로 태어난 신분으로 한평생사회에서 노예로 살 필요도 없어졌고, 여성의 지위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학발달이 항상 전통을 진보시켜주지는 않는 것 같다.

얼 마 전 미국의 연방대법원에서 청소년범죄에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하는 너무 중한 처벌을 방지하는 헌법의 수정조항에 대한청문회가 열렸다. 플로리다에서 조설리번(Joe Sullivan)이라는 13살 된 소년이 그의 친구와 72세의 어떤 할머니의 집을 털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그 노인의 집을 찾아가 그 할머니를 성폭행 했다. 이 범죄로 조설리번은 가석방의 여지가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앞으로의 인생이 창창한 13세 된 소년에게 가석방의 여지가 없는 종신형은 너무 심한처벌 아닌가 하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청소년들의 범행에 대한 판결은 그 나이를 참작하여 정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러한 참작의 영역에 이제는 과학적(?)인 발견들이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의 발전된 신체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영상장비나 인류가 쌓아온 과학기술의 노하우로 인해 뇌의 신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져왔고 많은 연구결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신경 행동 과학 (neurological and behavior science)분야의 어떤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청소년들의 뇌는 성인들의 뇌에 비해 덜 발달해서 충동적일수 밖에 없고 결정을 내릴 때 본성적 (by nature) 위험을 앉는 결정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과학적? 연구 결과들의 자료가‘청소년범죄에 대한 형량 적합성’에 대한 주장으로 뒷받침 되어 대법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꼭 청소년의 범죄에 대한 판결에만 이런 식의 뇌구조적 접근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최근에, 한 이탈리아 판사는 어떤 성인 범죄자의 유전자가 폭력적인 성향의유전자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형량을 감소한 판례가 있었다. 범죄자의 형량을 결정할 때 그들의 유전자나 뇌의 구조 상태를 관찰하여 고려해야 한다는 개념은 유전자나 뇌를 관찰할 수 있는 기술과 지식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과학적발전이인류에게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신비한 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문제가 될수 있다. 인간이 자기 행동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하는지에 대한 원론적인 문제가 대두될 것이며, 인간에게 과연 고유하고 독립적인 정신세계가 있는 것인지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유전자게임은 형량을 감소하는 대신 형량을 늘이는 쪽으로도 사용될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법원의 형량 결정은 유전자나 뇌신경의 의과학접근과는 무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인류가 뇌나 유전자의 신비를 캐내면 캐낼수록 이러한 원초적인 문제의 답에 어떠한 결론을 내릴지는 상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과학의 발전과 지식의 축적으로 인해 이제 더 이상 관찰적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영역들만 과학으로 다루지어지지 않고 이제는 주관적이라고 여겨졌던 영역들마저도 과학으로 재 해석 되는 경향이 있다. 위에서 말한 인간의 행동 (의사 결정)에 관한 영역이 바로 그렇다.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의 생각이나 의사결정은 주관적 (독립적)이며 고유한 영역이라고 여겨왔다. 육체는 억압을 받고 한계를 받더라도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정신의 절대적 자유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 되어 주었고 한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본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기계와 기술을 이용하여 그 사람의 유전자를 해독하고 뇌의 활동패턴을 연구할 것이며, 사람의 생각이나 의사결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구조에 의존적이라는 가능성을 과학적 연구결과를 통해 말하려고 할 것이다.그리고 그렇게 주장하고 싶어하는 과학적 발견들은 다윈이 주장했던 이론만큼이나 인류역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이론 아래에서, 인간의 본질이나 존엄성에 대한 가치와 전통이 예리한 칼날로 파헤쳐지고 재정의 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런 앞으로의 변화들에 대해 내가 노파심을 가지는 이유는 현대의 정신적 사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현대사회 안에서는 사람들은 큰 상실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동안 우리 행동이나 가치를 지탱해 주던 전통이 빠른 속도로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데, 전통은 인간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밀접한 연관이 되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고유한 정신과자신의 특수한 행동마저 자신의 세포 속에 있는 유전자와 자신의 뇌속의 활동패턴분석을 통해 예측 가능하다고 떠드는 시대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삶의 의미가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내적인 공허, 자신 안의 허무가 늘 따라다니는 것을 느낀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사람들은 돈의 욕구 또는 권력욕으로 그 좌절을 대신 보상받으려고 한다. '나’라는 고유한 존엄성조차도 한낱 뇌 속의 신경세포들의 집합체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과학이 가져다준 신개념이라기보다는 암울한 사실인 것처럼 느껴진다. 고귀한 인간의 생명이 한낱 단백질덩어리에서 시작되었다는 인식은 인간을 무지 속에서 해방시켜주었다기보다는 삶의 허무의 혼돈 속으로 우리를 가두어 버린 것 같다. 이러한 현대사조는 ‘절대적인 의미’를 더 이상보장해 줄 수 없는 사회 속에 우리를 가두었고, 그 안에서는 당연히 각 개인이 지니는 절대적인 가치도 찾을 수 없다. 이런 사회에서는 단지 기능성과 유용성으로 사람의 가치를 정의하므로 사회적으로 명예를 얻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요즘사회의 특징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차이를 애매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나이가 들어서, 불치의 병에 걸려서,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해서 사회적으로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사람들을 집단 살해했던 히틀러집단의 행동의 정당성에 대해 별로 대응할 명분을 없게 만들어 주었고, 대의와 명분을 위해 목숨과 가진 것을 바꾸었던 사람들의 희생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고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사회가 되어 간다.

나 는 ‘과학의 양면성’에 대해 경각심을 호소하긴 했지만, 이 시대가 정말 이렇게 암울한 환경에 처한 것은 ‘과학’ 자체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과학’이란 단어만 들어가면 별로 의심하지도 않고 믿고 따라가는 사회적 경향과 인식이 진실의 왜곡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핵심점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과학적 결과들이라도 그것을 이용하여 어떤 식의 주장을 만들어 낼 것 인가는 또 다른 믿음과 인식체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의 정신의 자유가 우리 자신의 뇌가 만들어진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뇌의 로직(logic)안에 갇혀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세계의 존엄성에 절대성을 줄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은 철저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주변 환경과 유전자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면 인간의 자유는 어떤 것인가? 인간으로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 선을 그어야 할 것인가? 어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에 아무런 정신적 자유도 없단 말인가? 우리가 믿는 이론, 즉 인간은 여러 조건과 환경적인 요인 ?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성격으로 이루어진- 이 만들어낸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 인간은 이런 여러요소들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매우 무겁고 심각한 질문들이다.

지 금은 작고했지만, 신경정신과의사로서 정신분석학분야에 프로이트만큼이나 중요한 정신요법을 창시한 빅터프랭클 (Viktor E. Frankl) 이란 의사가 있었다. 그의 특이한 경력이라면 나치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3년 넘는 보낸 체험을 하고 운좋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인간의 극한점의 체험을 바탕으로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그들은 수용소에서도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을 해야 했는데, 그 결정이란 자신의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가겠다고 위협하는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다고 주장한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배고픔이라는 절박한 압박이 커짐에 따라 각 개인의차이가 모호해지지 않고 도리어 그 반대로 그 차이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돼지와 성자의 두부류로 나뉘어졌으며,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였다고 기술한다.

우 리에게 닥치고 질문해야 할 심각한 질문들에 대해 빅터프랭클은 그의 체험을 통해 이미 확실한 답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그리고 그의 인간에 대한 주장과 믿음은 사막에서 찾은 생수처럼 반갑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에서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거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해도 좋고, 과학을 남용하는 미숙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자책해도 좋다. 그러나 당신이나 나는 우리 자신의 존엄성에 대해, 우리 자신의 정신과 영혼?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는지 자문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 답을 알고 지켜내야만 바르게 살 수 있는 시대는 곧 올 것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가치와 의미, 우리가 선택한 사랑과 책임, 우리가 꿈꿨던 미래의 세계가 '실존적 허무주의'의 쉽게 자폭해 버리지 않는 희망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