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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의 삶은 이지하지 않다
채도운 지음 / 삶의직조 / 2025년 10월
평점 :
*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진의 삶은 이지하지 않다/채도운
(청춘의 기대, 마흔의 도마, 노년의 반지/ 외면한 선택들이 만나 서로를 등 떠민다.)

출판사의 책 소개와 제목에 이끌려 선택한 책이, 가끔 실망을 시켜 난감할 때가 있다. 취향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에도 민망한…… 그럴 땐 오히려 넘쳐나는 정보나 인쇄물이 원망스럽기도하다. 그런 면에서 이번 선택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을 꽤 읽는 편이라, 어떨 땐 책 제목만으로는 읽은 책인지 읽지 않은 책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읽은 책은 기록하려고 애쓰는 편인데, 그것도 쉽지는 않다. 채도운 작가 이름만 얼핏 들었을 뿐, 책을 읽은 기억은 없다. 그래서 더욱 신선했다.

짧은 세 편의 단편을 모은 이 책《이진의 삶은 이지하지 않다》는 〈드림래더〉, 〈도마 위의 생〉, 그리고 표제작 〈이진의 삶은 이지하지 않다〉로 구성되어 있다. 세 편 모두 큰 울림으로 다가왔는데, 회갑이 지난 나에게는 그 중 표제작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소설 안에 소설(액자소설)이 들어 있어서, 주인공 이진과 소설 속의 미아의 삶을 비교해가며 읽었다. 아니 어쩌면 나의 삶을 돌아보며, 그들의 삶과 함께 비교하며 읽었다고 하는 게 오히려 정확할 수도 있겠다.
출산으로 늘어진 뱃가죽, 건조해서 하얗게 드러난 다리, 거뭇거뭇한 무릎과 어느새 자라난 겨드랑이털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낯설지 않은 익숙하기 그지없는 몸이었다. 남편과 아이도 미아라고 여기는 자연스러운 몸이었다. 미아는 깨달았다.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상태가 실은 미아에게는 굉장히 낯선 상태라고 말이다. (83쪽)
이때부터 미아는 일상의 규칙을 깨뜨리며 변화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액자소설 속 주인공 미아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이해가 되면서도 너무 급작스럽기도 하다.
김이진 님께,
어쩌면 당신도 한때 미아였을수도.
어쩌면 당신이 미래에 미아가 될지도.
어쩌면 이미 수많은 미아를 만나고 지나쳐 왔을 수도.
드러내지 못하고, 알려지지 못하고, 기록되지 못한 미아를 위해. -하이안(88쪽)
반면 이진은 어느 날 비슷한 연배의 자신과는 너무 다른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은, 작가 하이안의 삶을 목격하고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녀의 손에서 반짝이는 은반지에 집착한다. 그녀는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보 같은 짓이라고 속으로 뇌이면서도, 이진에게 공감이 간다. 비록 외견상 고상해 보이지는 않지만, 이진의 삶도 충분히 반짝이는데, 아무도 그걸 알려고 하지 않고 이진 자신조차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 시들어 간다.

여기에 수록된 단편소설은 잔잔하게 읽히며 내용 또한 요란스럽지 않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언뜻 행복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깊은 절망에 빠져들기도 한다. 짧지만 강렬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세상은 많이 달라졌고, 심지어 여성 상위시대인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기만 할까?
이어 장면이 바뀌고 하이안이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마이크를 쥔 그녀의 손에서는 가느다란 금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116쪽)
하이안에게는 그저 장신구일 뿐인 반지 하나를 위해, 이진은 많은 것을 보상으로 내 놓아야 했는데…….
아들이 셋인 나는 아파도 입원하지 않으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아, 스스로 끼니를 해결하거나 굶어야 한다. 결국, 아플 수도 없다는 얘기다. 지금은 전업주부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소득이 있을 때도 나의 일은 절대 줄어들지 않았다. 외롭고 힘든 순간 책을 읽으며 애써 다독여왔다. 절망하고 또 절망하는 순간 미아와 이진이 될 것 같다. 아니 이미 우리 마음속에는 미아와 이진이 들어 있다. 다만 반항조차도 하지 못하고 숨을 막고 살고 있을 뿐이다.
부족한 걸 알면서도 책을 낼 수밖에 없었던 건,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른 중반의 나이, 제 주변에는 아직도 취업을 못 하거나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이 많습니다. ‘취업과 결혼이 인생에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들 하지만, 그들 모두 취업과 결혼을 바라지만 포기할 뿐입니다. 임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일 년 단위의 계약서에 사인합니다. 친구들을 볼 때마다 청년의 소진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생각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착하고 또 근면 성실한지 알기 때문에 마음은 무겁습니다. (139쪽_작가의 말 중에서)
꿈 사다리는 청년에게 꿈을 꾸지 못하게 하고, 도마 위에서는 자연스레 폭력이 재생된다. 피땀 흘려 살아온 생은 추하게 일그러지며 노년을 멍들게 한다. 그렇다면 반짝반짝 빛나는 삶은 과연 누구의 몫이라는 걸까?
이 책 속에는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삶 속에 젖어 들어, 절대 바래지 않는 가부장제가 아직도 고스란히 숨 쉬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여러 가지가 다 그렇겠지만 유독 이 책은 아마도 살아온 이력이나 연령대에 따라서, 아주 다른 느낌으로 다가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제 영화 “8번 출구”를 봤다. 이 책과 겹쳐져서 머리가 조금 복잡해지기도 했다. 나는 지금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을까? 이제 출구를 찾기보다는 안주하고 싶은 욕망이 나를 헷갈리게 한다. 그래도 이 책의 작가는 미아가 되지 말고 출구를 찾아 살아내라고 하겠지……? 드러내지 못하고, 알려지지 못하고, 기록되지 못한 이 땅의 미아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작고 가볍지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이 책을 슬며시 추천한다. 채도운 작가의 다른 책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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